잉카의 부활을 예견한 남미 순롓길
시인 김선희
하늘에 인사드리러 간다는 마음으로 스무시간의 비행을 거쳐 멕시코의 과달루페 성모발현성지에
도착했다. 20일간의 방랑의 남미 순례길은 ‘어머니의 땅’을 밟으면서 시작되었다. 시간과 돈 그밖에
연줄처럼 걸려있는 모든 관계를 훌훌 털어버리고 20일간을 오직 하느님과 자연과 내가 공존하는
순례를 하려고 계획했고 페루에 많이 머무르려는 일정이었으므로 잃어버린 도시 ‘잉카의 부활’ 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마음속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미중에서도 페루는 태평양 해안의 건조한 평야에서 안데스산맥, 아마존분지의 열대우림까지 다
양한 기후를 가지고 인간개발지수가 높은 개발도상국가로 빈곤율이 36프로에 육박하고 있는 국가다.
에스파니어를 주로 쓰지만 토착어를 쓰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어 번성했던 잉카제국의 후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 고산지대 3812미터에 있는 티티카카호수에 발을 담그다
제일 먼저 글로 남기고 싶은 곳, 가고 싶지만 가기가 쉽지 않다는 높은 고산지대에 있는
“티티카카호수”는 가기 전날부터 4300m의 고산지대를 통과하는 곳이라 산소통을 입에
대어야 갈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작년에 그곳에 갔다가 17명이나 쓰러졌다는 고산병의
위험성을 지도신부님은 겁주듯이 계속 주지시켰다.
그래도 ‘가보고 싶다. 가야만 해.’ 하며 주문을 외웠다.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별처럼 달처럼 멀리 떠나와 가려고 마음먹은 이상 대열에 용기 있게 합류했다.
통과하자 취직시험에 합격한 듯 기뻤다. 이날의 일기장 제목은 “여행하다 죽으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
이튿날 새벽 2시 비장한 각오로 40명중에서 뽑힌 20명의 순례객은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에 있는 수도원호텔에서 출발했다. 계절이 겨울(6-9월)이라 코카 잎사귀를 우린
차를 마호병에 넣어가지고 가면서 연신 마시며 발이 얼어붙는 추위를 버티었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버스는 느릿느릿 몇 시간 어둠속을 달렸다. 칠흑같은 어둠은
언제 걷힐 것인가, 과연 살아서 돌아올 것인지 서로가 말은 안했지만 불안한 모습들이었다.
6시간정도 지나자 호수를 지척에 두고 있음을 감지한 것인지 지도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순간 부~웅웅 뜨는 몸, 사탕봉지가 부풀어 터질듯 한 빵빵함 속에서
고산지대에 왔음을 실감했다. 젊은 날 인도에 가면서 들렀던 티벳이 기억났다.
그때의 불안과 호기심과 분위기가 흡사했다. 용변을 보기위해 간 변소가 있는
뒷마당에는 새벽이라 수탉과 암탉이 꼬꼬댁 거려 우리나라 시골을 연상했다.
아침으로 우유와 바로 구워서 준 공갈빵을 먹었는데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금방 짠듯한 우유와 빵을 먹으며 이국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잉카시대 원주민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코카잎이 들어가 코카콜라라고 한다고 얘기하며 콜라를
많이 마시는 것도 고산지대의 특성이라고 했다. 어지럼증이 해소되는 고산병에
콜라가 도움이 된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잉카제국의 풍광과 환경에 젖어 있을 때 새벽 일찍인데도 어린 사내아이가
동전을 내밀며 몇 개의 빵을 사간다. 몸이 아픈 엄마를 위해서 나왔단다.
나도 모르게 빵을 몇 개 내미니 순정한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는 ‘그라시아~스‘를 연발한다.
사람 사는 냄새....를 티티카카호수를 가기위한 길목에서 간직하다,
9시간 넘게 느리게 달려온 버스가 드디어 티티카카호수에 도착했다.
안데스 산맥에서 흘러나온 물로 이루어진 이 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사이에 있었고
운송이용로 로 가능한 호수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해발 3,812m에 있으며 수량도
남아메리카 전체에서 으뜸이다. 41개 여러 섬에는 많은 잉카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케추아어족, 아이마라어족, 우르족 등 원주민계의 사람들이 해안도시에서 일을 하고.
여자들은 뜨개질이나 수를 놓아 관광 상품으로 팔고 있다.
"티티카카"호수가 유명한 것은 우로스(인공섬)에 사는 사람들 때문이란다. 우
로스는 44개정도 의 떠다니는 인공섬으로 호수주변 얕은 곳에 서식하는 "토토라" 라는
갈대로 집을 지어 산다. 페루의 유명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는 이 집들의 원래 목적은
방어용으로 집집마다 망루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중요한 페루의 관광상품이다.
"토토라"라는 갈대로 집을 지은 유래를 설명하는 제일 어른이신 할아버지는 복장이
영락없는 인디언 추장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많은 자녀, 부인의 가족관계를 설명했고
자녀들은 설명하는 동안도 수를 놓거나 공예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며 설명이
끝나자 상품으로도 팔았다. 잉카제국을 연상하는 몇 가지 물건을 사면서 잉카의
부활을 예견하고 잠깐 우리나라 민속촌을 생각했다. 가기가 정말 어렵다는
4300m 고산지대를 지나 위치하고있는 "티티카카호수를 볼 수 있었다는
자신감은 남미를 순례하는 동안 힘이 되었고
잉카제국의 부활을 찾아보는 행운도 거머쥐었다.
페루의 “잃어버린 도시 마추픽추 가는 길”
페루의 고대 잉카제국의 도시유적 마추픽추를 보기위해 수도인 쿠스코로 떠나는 길,
괜스레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핑 돈다. 신세계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로부터 112km 떨어진 우르밤바 계곡에 위치해 있었다.
'마추픽추' 라는 말은 '늙은 봉우리' 라는 뜻으로 해발 약 2437m에 위치한 고산도시에 있어서
산 아래서는 어디에 있는지도 볼 수 없다고 하여 “잃어버린 도시”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마추픽추 가는 길은 리마국제공항에서 쿠스코행 국내선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또 기차를 탔다.
페루의 신비라는 잉카제국의 과거를 보는 것은 가는 길이 너무도 험란했다. 고산지대인데다가
절벽을 깎아지른 곳에 집이 붙어있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절경이었지만 내 어깨가 뻐근했다.
쿠스코에서 하룻밤을 묵기위해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다시 버스로 달려 기차역까지 도착,
기차를 타니 비로소 마추픽추를 보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이 동네의 특이한 점은 아주 시골인데도
유럽문화에 배인 듯 화장실은 1달러에 6명이 용변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수난 속에
마추픽추가 보이는 동네 쿠스코에 도착하니 우리나라 '이태원'과 비슷한 분위기의 가게들이 즐비하다.
먹고 마시는 가게다. 사람들의 모습은 히스패닉이 많아 백인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우선 체격이 아담하고 피부가 희지 않다. 음식점의 주인들은 이태리사람이나
스페인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페루는 물이 부족한 국가라 호텔이지만 샤워하기도 쉽지 않다.
사막지대가 많고 비가 안 오는 고산지대이니 감수해야만 하는 또 다른 사실을 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이런저런 고초를 겪고 이른 아침 올라간 마추픽추는 말 그대로 신비였다. 또한 모든건물들이
잉카인들의 놀라운 기술력을 보여주었는데 태양의 신전은 거대한 자연석을 거의 손대지 않고
그대로 지었으며, 산위에서부터 산 아래로 물이 고이지 않도록 정교하게 수로를 만든 것 등등,
또 감자를 썪지않게 자연산바람을 이용한 자연냉장고등 감자는 밟아서 수분을 없앤다는데
밤 같은 맛을 준다.
쿠스코에서는 자부심이 가득한 히스패닉들을 곳곳에서 보았다. 할머니들은 아직도
길게 머리를 따고 다니고 남자들은 인디언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잉카의 부활을 예감하는 광경이다.
남미의 심장이라는 별 같은 파라과이
남미순례에서 가장 생각 못했던 부분이 '파라과이' 라는 나라이다. 파라과이는 예수회의 선교지로
지금도 대통령보다 대주교가 더 존경받는 나라이다. 막연하게 조그만 나라정도로 생각했던 곳인데 ,
첫 관문 아순시온 공항에 도착한 이후 어~~ 이건 아닌데... 할 정도로 날 사로잡는 풍광으로
기억되는 남미의 내륙국가이다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많이 띄어 비로소 내가 남미에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게 한 곳이다
파라과이는 남미의 심장이라는 스스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남미에서 가장 좋은 옥토를
가졌으며 붉은 흙에 야자수들이 큰 키를 뽐냈다. 각종 과일이 풍성하여 망고, 파파야,
바나나가 지천이다. 아르헨티나 '이과수폭포'를 가기 위한 통과의례 수준이었지만
인상 깊은 것은 남미의 어느 나라보다 진했다. 공항 휴게실에서 마신 금방 갈아
만든 망고쥬스 맛은 파라과이의 기분 좋은 옥토와 더불어 남미순례를 인상 깊게 만들었다.
우리교민들이 1천여명 정도가 쾌적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가죽제품이 발달되어
나도 가죽 배낭을 사는 횡재를 누렸다. 가죽 연필꽂이 (장인이 만든)까지 ...말이다.
기분좋은 남미순례여서 그런지 20일동안 쾌활한 몸으로 여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