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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 전래의 길
◎ “한글성경 전래의 길“
목차
1. 한국기독교
역사
2. 한글성경
전래역사
3. “한반도 기독교 전래”와 존로스 목사의 “한글성경
전래의 역사”
1) 구원의 여명 - 준비된 그릇 한국
2) 역사적 부르심과 성경번역
3) 자생적 교회와 선교사들
4. 존로스 목사와 메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
전도(1873년)
1) 고려문 (주체적 복음 수용과 전파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한국교회의
근원지)
2) 고려문전도
3) 존로스목사의 고려문 방문로
4) 고려문에 있던 로스선교사를 찾아서 한국 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의 아버지
5. 한반도초기의 교회 및
공동체
1)백홍준과 의주교회(1883년)
2)서상륜과 솔내교회(1885년)
3) 김청송과 집안현의 이양자교회
4) 해방전 의주지역의 교회들
5) 국내 첫 개신교, 中 요녕성 영구(잉커우교회)서
탄생
6. 한글 누가복음서와 예수 성교전서,
문광서원(동관교회)
7. 예수성교전서
출간(1887년)
8. 인물 설명
1)존.로스(John Ross,중국명 :나약수(羅約翰) 목사
2) 기독교 개척자 서상륜 - 福音書 이고 지고 만주서
서울까지
3)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교역자 백홍준 - '조선의 사도바울'
백使徒
4) 의주 압록강 쪽복음 이성하(李成夏)
5) 존로스 목사의 한글교사 이응찬
9. 방문지
간략소개
1)심양시(沈陽市)
2) 심양/ 문광서원(동관교회)
3) 본계수동(本溪水洞)
4)봉황성/ 고려문(변문진)
5) 단동/ 의주의 관문 우적도와
압록강,호산장성
6) 집안/ 고구려의 융성한 도읍지와 최초의 한인교회 “이양자
교회”
7) 환인/고구려의 첫도읍지-
졸본산성(卒本山城)-오녀산성(五女山城)
9.
주요일정
1) 한글성경전래의
길(심양문광서원,고려문,단동호산일보과,압록강,본계수동) 4일
2) 한글성경전래의
길(심양문광서원,고려문,단동호산일보과,압록강,환인,본계수동) 5일
3) 한글성경전래의
길(심양문광서원,본계수동,환인,집안,단동호산일보과,고려문,북릉) 6일
1. 한국기독교
역사
1627. 네덜란드 벨트브레(Jan T. Weltvree) 일본으로
교역차 항해중 제주 앞바다에 표류
1653. 하멜(Hendrik Hamel) 일본으로가던중 제주에표류
36명 제주감영에 압송
1816. 맥스윌과 홀 군함을 이끌고 군산부근정박, 조대복에게
한문성경 전함.
1832. 7. 귀츨라프(네덜란드선교회), 충청도 고대에서 전도문서와
성경을 전함.
1874.10. 존로스선교사 첫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상인 백홍준
부친에게 한문신약전서를 전함
1866. 9. 2 토마스선교사 대동강에서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
순교함
1880. 백홍준, 기독교서적 휴대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882.10. 6 서상륜, 영국성서공회의 한국최초의 권서로 한국으로
파송받음
1883.10. 존로스선교사 요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 출간
1884. 9.20 의료선교사 알렌(H.N. Allen)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1884.11. 존로스선교사, 윕스터와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 12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줌
1885. 1.21
스크랜톤(Dr.W.B.Scranton)선교사(의사) 한국을 향해 뉴욕을 출발
1885. 4. 5 미국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선교사
아펜젤러 한국 인천에 입국함
1885. 4. 5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창립
1885. 4.10 알렌에 의해 광혜원 설립(국립병원으로 설립,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함)
1885.10.11 알렌 선교사 집에서 외국인 12명이 한국 최초의
성찬식 거행
1886. 5.31 이화여학교 설립.(서울 정동에서 미감리회 여선교사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설립)
1886. 6. 8 배재학당 개교함
1886. 7. 노춘경, 국내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례를 받음
1887. 1.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언더우드선교사에게 세례받음
1887. 9.27 새문안교회, 로스와 한국인 신자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설립
1888. 4.28 금교령 법령.(천주교에 전교를 금지한다는 법령)
1889. 토론토대학 YMCA파송한 게일, 독립선교사
팬윅(Malcom. C. Fenwick) 내한
1889. 10.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서 데이비스(j. h.
dAVIES)목사 부부와 메리(Mary) 파송
1890. 4. 데이비스 전도하며 부산으로 가던중 과로와 천연두,
폐렴으로 한국땅에서 순교
1895. 7. 3 한국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
1897. 5. 예수병원 설립.남장로회 한국 여선교사인 의사 잉골드에
의해서 설립 개원됨.
1897. 5. 2 고양읍교회 설립. 미국 남감리회 초대선교사
리드박사가 설립의 동기임.
1898. 9. 캐나다장로교회 그리어슨(R. G. Grierson),
푸트, 맥레선교사 파송
1900. 9. 9 정동제일교회에서 <신약젼서>
출판기념예배 드림
1901. 5.14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김창식, 김기범)
1902. 6. 아펜젤러, 목포의 번역자회의 참석차 여행중
선박충돌사고로 순교함
1903.10.28 기독교청년회 창설(상류 지식층 지도자들과 청년
전도목적)
1906. 현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창립총회(대화회), 교단명을
대한기독교회로 정함
1907. 5.30 김상준 정빈 양씨가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설립하다.
1907. 6. 감리교 협성신학교 개교
1907. 9.17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창설, 선교사 33명모임
(한국최초의 목사 7명을 장립)
1908. 3. 1 한국인 목사 길선주 주례로 최초의 세례식 거행
1908.10. 8 구세군 한국본영 창설
1909. 7. 1 구세공보 창간. 처음에는 구세신문이라는 제호로
발간되었다.
1910. 2.15 구세군사관학교 개교(한국에 개전된지 17개월만에
사관학교 개교)
1911. 3.13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 설립하다.
1911. 9. 대구 남문교회에서 열린 제5회 조선노회에서 7개노회
조직 결의
1911.12. 4 경기충청노회 성립.경성부 새문안교회에서
성립되었음.
1912. 2. 1 한국교회 주일학교 위원회 설립
1912. 9. 1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1914. 1.19 한국 최초의 유치원 이화유치원 개원
1915.12. 7 기독신보 발행. 일제치하 교회신문 1937년까지
속간됨.
1916. 9. 2 경북노회 분립. 제12회 경상노회에서 경북,
경남노회를 분립할 것을 허락받음.
1919. 2.26 한국기독교 연합공의회 조직
1919. 3. 1 삼일독립운동이 전국전국으로 전개됨
1919. 3. 1 금주동맹회 절제운동.1930년 YMCA를 중심으로
절제운동이 일어남.
1919. 4.15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 사건 발생
1922.11.20 기독교양재여숙 창립(경성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사회교육기관)
1922.11.25 기성 교단기관지 "활천" 창간호 발행
1923. 8.18 한국 YWCA연합회 결성
1924. 9.13 경기노회 충청노회와 분립
1925.10. 1 한국 최초의 신학박사 남궁혁, 평양신학교 부임
1926.11.14 서울에서 토마스목사 순교 60주년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설립
1926. 2.18 기독교연구회(한국YMCA) 창립(서울교회 중진들이
민족운동 목적)
1928. 7.24 청년 면려회 제3회 하계대회 및
정기총회(연세대학교)
1929. 2.27 성결교회 제1회 연회가 소집되고 교회법을
제정하다.
1931. 9.11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봉헌(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추진)
1931. 5.29 기독교증험론 발행(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발행함)
1931. 6.14 한국에서 최초의 여자목사 안수(기감 여선교사들)
1933. 1.20 기독교세계 창간(기독교감리회의 교회기관지)
1934. 6.14 한국감리교선교 선교50주년기념식(배재학교)
1935.12.22 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립(최태용목사 중심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
1936. 5.25 천주교에서 신사참배 성명서 발표
1936. 7.19 기독교보 발행(주간으로 1936.1.14 창간된
<종교시보>를 개제하여 발행함)
1937. 4. 1 그리스도교 한국선교회 설립(내한한 존 체이스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
1938. 2. 8 주기철목사 평양감옥에 구금됨
1938. 2.12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8. 9.10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함
1938.10. YWCA를 해산시키고 일본기독교청년회에 종속시킴
1938. 8.16 기독신문 발행(1942년 4월 23일까지 발행된
개신교 각교파의 연합신문)
1939.11.15 기독교문답 발행(이동욱지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발행)
1941.12.31 기독교대한감리회청년연합회 창립
1942. 4.29 기독교신문발행(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합동기관지)
1943. 9. 일제 주일밤예배, 삼일기도회 금지령
1944. 4.21 주기철목사 순교
1946. 4. 기독교조선성결교회 제1회 총회
1945. 8.15 일제하에서 해방됨
1945. 9. 1 출옥성도들 교회재건운동 시작, 북한장로교회 재건
1946. 1.17 기독공보 발행(기독교공보의 후신으로 1951년
부산 피난시절 복간됨).
1947. 5. 1 기독교신문 발행(초교파 주간신문 순복음을 주장)
1948. 4.20 기독교박물관설립(한국기독교박물관은 김양선목사가
교회사자료를 수집 개관)
1948. 5.31 대한민국 국회 첫 개회를 기도로 시작함
1948. 6 서울에서 장로회신학교 개교
1951. 1. 9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창립(6.25사변 중에
조직된 국내기독교 연합기관)
1951. 9.1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개교
1952.12.15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목사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집회
1953. 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창립총회
1953. 5. 한국선명회 창립과 함께 구호사업 개시
1953. 7.28 기독교문화사 설립(기독교 출판기관. 김성준목사)
1953.11.13 기독교어린이문화관 창립(초교파 어린이 문화사업 및
출판 사업기관)
1954.12.15 기독교방송(CBS)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으로 방송
개시
1956. 9.15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발행
1956.12.23 극동방송 개국(복음주의 연맹선교회에 의해 개국)
1956. 3.15 기독교문화 발행(기독교 계간잡지)
1957.11. 1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창립
1958. 5.10 한국예수교오순절교회 창립
1958. 9. 1 국방부 군종과 발족
1958. 4.19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설립(그리스도교회무악기 선교사
체셔를 중심)
1959. 9.24 제44회 장로회총회에서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리됨
1960. 5. 20 기도 발행(세계문서선교회의 한국지부인
한국가정문서선교회의 기관지)
1961. 9. 1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광주시 대신동 이사무엘선교사와
Sarah Barrry선교사 설립
1962. 8.31 기독교근로전도회, 한국 설립(불우한 근로자와 불우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함)
1963. 4.28 금주의 설교 발행(기독교명설교집편찬회에서 편집.
발행)
1963. 4.23 기독교구국연합전도회 창립(기독교연합기구)
1963. 6. 3 기독교오순절협동교회연합회 창립(국내 오순절교단으로
박덕종목사에 의해 창립됨)
1964. 1.21 기독교인권옹호상담소 창립
1965. 1. 4 기독신보 발행(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교단
기관지)
1966. 3. 1 기독교사회윤리위원회 창립(부산기독복음병원 원장
장기려 박사를 중심으로 설립)
1967. 개편찬송가 간행
1968. 2.24 예수교 한국독립교회 연합회 총회 창립
1969. 1.10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창립(기독교단체.기독의료인,기독실업인,교역자 주축)
1972. 5.29 군복음화후원회 설립(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영락교회에서 설립)
1975. 8.31 기독교선교에 관한 서울선언 창립
1978. 2.16 기독교서점협의회, 전국 창립(한국기독교서점
연합기구)
1979. 9.15 기성 교단창립 70주년 기념회관인 "성결회관"
준공
1981. 1.29 100주년 기념사업회 규약확정 20개 교단과
연합기관 참가
1981. 4. 9 한국찬송가공회 창립. 한국 개신교 통일찬송가
사업을 위한 교파연합기관.
1983.10. 한국찬송가공회에서 개신교가 함께 사용하는 558곡의
찬송가 발행
1984. 8.15 한국 개신교 백주년 선교대회(여의도 광장에서 예배
드림)
1984. 8.31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개관
1986.12.10 한국컴퓨터선교회(KCM) 창립
1987. 9.28 제77차 침례교 연차 총회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
해외선교회 발족
1988. 9. 9 제1회 한국디아스포라 세계대회(서울영락교회)
1988.12.10 국민일보 창간(1일 16면 발행)
1989. 4.28.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설립(원로목사 10여명의
제창으로 창설됨)
1989.10. 8 제1차 의료선교대회(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회) 개최
1991.11.5-8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2. 2. 4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창립
1992. 8.15 92세계성령화대성회 여의도광장에서 개최
1995. 5.15-17 제2차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개최
1995. 5.17-25 95세계선교대회(GCOWE'95)
기독교21세기운동본부 주최로 서울에서 열림
1996. 8. 5-10 선교한국 '96(한양대학교)
1998.8.3-8 '98(부천 실내체육관)
1997. 5.30 기성 교단창립 90주년기념대회 중앙교회에서
개최하다.
1987. 8.10-13 제1회 기독교사대회를 개최(기독교사단체연합
강원대에서)
1998.12.15 기독교방송 표준 FM 개국(주파수 98.1MHz,
출력 10KW), 21일 대전방송 개국
1999. 5. 5 침례교선교 110주년 축하집회(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1999.10.12 기독교대책위원회 단군상건립 중단요구
1999.11.30 대한성서공회 무역의 날 '수출의
탑'수상(105개언어로 전세계 성경의 20%공급)
1999.12.23-25 영적 각성과 세계선교를 위한 '한국교회비전
큰잔치'(성탄절 기념행사로 열림)
2000. 8.14-18 2000년 세계선교대회 (KWMA주최
서울에서 개최)
2. 한글성경 전래역사
(서상륜) ('예수셩교젼셔' (1887))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
1872.8.23. 존로스목사,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중국 선교사로
상해에 도착한후 요녕성 영구에 도착.
1874.10. 존로스목사, 첫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상인인 백홍준의
부친을 만나 한문 신약전서와 '正道戒命'을 전함.
1875. 존로스목사, 매킨타이어와 만나 동역자로 일하게 됨.
1876.4. 존로스목사, 두 번째 고려문 여행에서 이응찬을 만나
한글을 배우기 시작함.
1877. 존로스목사와 이응찬, 한글 성경 번역을 시작함.
1878. 존로스목사, 이응찬과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다시
서상륜을 만나 누가복음을 번역함.
1879.1~3. 매킨타이어,서상륜,백홍준 등과 마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일부)를 번역함.
1879.4. 매킨타이어, 이응찬 등과 로마서에서 신약성경 끝까지
번역함. 백홍준, 이응찬 등 4명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고 한국인으로는 첫 세례교인이 됨.
1880. 백홍준, 기독교 서적 휴대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1880.10. 존로스목사,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한글성경위원회에
참석하여 누가복음, 요한복음 출간비용 지원을 허락 받음.
1881.10. 존로스목사, '심양 문광서원'을 창설하고 최초의 한글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출간함.
1882. 존로스목사와 한국인 번역자들, 심양 문광서원에서 최초의
한글 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3월에 '예수셩교요안복음젼서'를 5월에 출간함.
1882.3. 김청송, 만주 서간도의 한인촌에 복음 전파함.
1882.4. 서상륜, 존로스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882.9. 영국성서공회, 만주에서 로스와 이응찬 등에 의해 번역된
복음서 인쇄비용을 조달해 줌으로써 한국에 대한 성서사업을 시작함.
1882.10.6. 서상륜, 영국성서공회의 한국 최초의 권서로
한국으로 파송 받음.
1883.10. 존로스목사, '예수셩교셩셔요안복음',
'예수셩교누가복음뎨쟈' 출간함.
1884.3. 존로스목사, '예수셩교셩셔맛복음'과
'예수셩교셩셔말코복음' 출간함.
1884.11. 존로스목사, 웹스터와 서간도 한인촌을 방문하여 12월
한국인 75명에게 세례를 베품.
1885.10.11.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
거행됨.
존로스목사 , '예수셩교셩셔요안복음이비쇼셔신'
출간하고,
'예수셩교셩셔맛복음' 개정본 발행함.
서상륜, 존로스목사를 방문하여 한국에 70명 이상의 세례 청원자가
있고 서울 서쪽에 설교당이 개설되었음을 보고함.
1887.2. 존로스목사와 한국인 번역자들,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를 심양에서 출간함.
1892.9. 존로스목사, 심양에서 '예수셩교셩셔맛복음'을 발행함.
3. “한반도 기독교 전래”와 존로스 목사의 “한글성경
전래의 역사”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한글 성경 번역》
(다음은 한글개역성경의 번역에 대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응찬은 존 로스를 도우면서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이응찬은 1875년 고려문에 가서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 의주 청년 세 사람을 포섭(包攝)하는 데 성공했다. 이응찬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한국 젊은이들을 확보한 존
로스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해서 먼저 선행되어져야 할 것이 성경 번역이라고 보고 그때부터 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이다.
“로스는 ‘말씀’만이 기독교의 핵심이요 전도의 중심이라 보았다. 즉
성경 번역, 한글성서 간행에 전력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복음주의자로, 선교사로서는 가장 적절하고도 고귀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들 네 명의
의주 청년들은 선교사, 세관관리, 병원장 등 그곳 외국인들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이응찬과 함께 로스의 성경 번역 사업을 지원했다. 이들이 한
일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위해 한문 성경을 수차례 정독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동안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수를 믿기에 이르렀다. 그로부터 4년 후 1879년에 네 사람 모두가 맥킨타이어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1880년 10월 연합장로교 미셔너리 레코드(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존 로스(John Ross)는 이렇게 보고했다:
“또한 맥킨타이어는 조선인 학자 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이야말로 내가 분명 확신하는 바는 장차 거두어들일 풍성한 수확의 첫 열매들이다. 아직은 조선이 서방세계와는 전혀 단절된 나라이긴 하지만
머잖아 고립된 상태가 풀어질 것이며 천성적으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보다 덜 사악하고 종교적 경향이 농후한 민족이므로 그들이 기독교에 일단 접촉하게
되기만 하면 놀라운 속도로 기독교가 퍼져 나가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나는 6년 전 국경에 가서 한국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중국과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엔 자금의 여유도 없어 내게 조선어를 가르칠 선생조차 초빙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후로 사태는 많이 변해 작년 4명의 조선인에게 세례를 줄 정도까지 되었다. 이들은 모든 학식 있는 자들이며 그 외에 11명이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7, 8일 걸리는 여행길을 마다 않고 우리 선교본부까지 와서 조선인을 위한 성서 및 기독교서적 출판 일을
돕겠다고 기꺼이 나설 인물들이 우리가 원하는 만큼 상당수 확보되어 있는 형편이다.”
선교본부를 흥분시킬 만큼 복음의 전파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전되었다.
서상륜(徐相崙)이 1879년 만주 우장에서 로스에 의해, 4년 후 1883년에는 김청송(金靑松)이 그 뒤를 이어 세례를 받아 이제 세례를 받은
젊은이는 모두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이미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880년 존
로스의 동료 선교사 맥킨타이어는 한국인의 신앙공동체 형성에 대해 이렇게 보고했다:
“최근에 한국인들을 위한 저녁 집회를 조직했다. 그 모임은 우리
번역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관하는데 자기네들 방에서 최소한 8명이 모이고 있다. 나도 늘 참석하지만 듣기만 한다. 나는 한국어를 단지 번역
수단으로만 이용해서 문자로만 알았지 번역인들과 대화할 땐 중국어를 썼다. 그러나 이처럼 소외되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어떤 어려움이
있든 적어도 한국어로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결심이다. [지금은] 이 일에 제외되어 있지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집회를 내
자신이 인도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난 10월까지 열두 달 동안 교육받은 한국인들은 30명이 넘는다.”
한국인의 신앙공동체가 적어도 1879년 이전부터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가
이미 복음 전래부터 실행에 옮겨졌음을 보여 주며, 한국인들이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를 실질적으로 지원하여 한국선교의 비전을 더욱
불태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빼놓을 수 없는 공헌은 역시 성경 번역에 있다. 로스는 이들을 데리고 성경 번역을 착수했다. 이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로스 역 성경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초창기의 성경 번역 과정은 한국인 번역자들이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읽고 나서 그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선교사는 그것을 다시 헬라 원문과 대조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헬라 원문에 가깝게 다듬는 방식이었다.
1878년까지 존 로스와 이응찬, 김진기, 백홍준 공역으로 누가복음 초역이 완료되어 이것을 다시 맥킨타이어가 이들 한인 번역자들과 함께 원문에
가깝게 재수정을 가했다. 성경 번역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879년 5월 로스가 안식년을 떠날 때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로마서 원고를 지니고
갈 수 있었다.
1879년 존 로스 선교사는 안식년으로 본국에 머무는 동안 서방세계에
한국에 관한 문화․종교․지리․풍습 등을 소개한 한국관련서적 한국의 역사, 고대와 근대(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라는 책을 출판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한국인 선교 및 한글 성경 번역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새로 번역될 한글 성경의 출판에 필요한 비용을 보조받을 약속을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1880년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3천 권에 대한 인쇄비와 두 선교사의 번역 비용, 그리고 한국인
번역자들의 급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881년 로스는 안식년을 마치고 만주 우장으로 돌아와 맥킨타이어가 수정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또다시 검토하여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1881년에 봉천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중국인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된 첫 개신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그 해 10월에 인쇄했고, 이어 성경 인쇄에 들어가 1882년 3월에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젹을 처음 인쇄하고, 그리고 5월에
예수셩교요안복음을 발행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중국인 식자공으로는 한글 성경전서를
완간(完刊)할 수 없어 한국인 식자공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서간도 한인촌(韓人村) 출신 김청송이었다. 비록 “그는 너무 둔하고 느려서
무슨 일이나 네 번 이상 가르쳐 주어야 비로소 깨달아 알았고 손이 너무 떠서 두 인쇄공이 3,000장을 인쇄하는 동안에 겨우 4페이지밖에 조판을
하지 못할” 만큼 천성적으로 느렸지만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또한 치밀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 치밀함 때문에 인쇄되어 나오는 복음서를
자세히 읽게 되었고, 그 결과 마침내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으로 성경 번역 과정에 참여한 이들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께서
다시 성경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말씀을 통해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성경 번역과 인쇄에 얽힌 이야기는 이뿐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최종 원고가 완성되어 인쇄에 들어가려고 할 즈음
동지사(冬至使)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돌아가는 길에 봉천교회에 들렸다. 이때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그 원고의 교정을 부탁해 그가 원고를 서울로
가지고 가서 교정을 완료한 후에 다른 동지사 편에 그것을 돌려보냈다. 이 사실은 1890년 로스가 이때를 회고하면서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이미
동지사 일행에 의해 “번역원고가 한국의 수도에서 교정되었다”고 밝히면서 알려졌다. 이 사실은 곧 동지사 일행에 알려졌고, 이 일을 계기로 많은
동지사 일행들이 봉천교회에 들러서 한글 성서의 출판 상황을 견학하게 되었다. 존 로스에 의하면, 이름을 알 수 없지만 그 중의 한 사람은 말과
행동이 매우 민첩하여 한글성서 간행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87년에 완간된
<예수셩교젼셔>
심지어 누가복음이 출판되기 전 번역 원고가 해외 서울의 수도에서
수정되었으며, 이는 너무 많은 흥미를 자아내 한국의 왕이 중국의 황제에게 바칠 조공을 나르는 동지사에 딸려 이따금씩 중국에 오는 한 수행원(an
occasional underling)이 이곳의 성경 번역 사업을 보기 위해 들렀다. 이들의 방문은 점차 더욱 잦아졌고, 그 젊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은 느리기 한이 없었던 그 식자공[김청송]과는 정확히 정반대 모델(exact antipodes of the compositor)이었다. 그는
손놀림이 민첩했고, 눈치가 빨랐으며, 말과 사고와 행동이 영특했다. 그는 식자공으로 종사했으며,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더 잘 적응하리라고 여겨지는 한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 몇 백 권의 복음서와 훨씬 더 많은 전도지를 가지고 그는 봉천에서 정
동쪽으로 약 4백 마일 떨어진 자신의 마을로 갔다. 그는 그 여행에 2주일이 걸렸고, 반년 만에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책들을 팔았으며,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들을 읽었고, 그 중에 몇 사람은 내가[로스] 그들에게 세례를 주러 오기를 원했다고 했다.
처음에 로스는 와서 세례를 달라는 말을 반신반의해 주목하지는
않았으나 그는 더 많은 책을 공급받고 다른 마을로 가 반년 후 돌아와서는 정확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이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과
사람들을 통해 성경 번역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출판 후에도 성경 보급은 놀랍게 진행되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 저자들로 하여금 오류
없이 기록하게 하신 성령께서 한글 성경의 번역과 보급에도 개입하시고 인도하셨음을 발견한다.
1882년의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젼셔 요안복음의 출판은
한국성경 번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최초의 한글 성경이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뛰어난 번역자들과 수차례의 재교정을 통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원문에 충실하면서 순한글로 인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값진 결실이었다. 로스는 끝까지 원고를 다듬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 원고가 완성된 뒤 1881년 영어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이 출판되자 로스는 여기에 맞춰 다시
한 구절 한 구절 대조하면서 원고를 손질한 다음 1882년 3월 24일에 첫 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젹을 출판한 것이다. 이어 1883년에
재교정된 예수셩교 누가복음뎨자젹과 뎨자젹[사도행전] 합본,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뎨자젹 3,000권과 재교정된 예수셩교 요안복음
5,000권이, 1884년에 예수셩교 말코복음[마가복음]과 예수셩교맛복음[마태복음]이, 1885년에는 로마인서, 코린돗젼후셔와 가라탸서,
이비소서가 출판되었고,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 즉, 신약 전권이 완간(完刊)되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 번역을 위해서 공식적인 모임을
시작한 것이 1887년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존 로스의 신약성경이 완간(完刊)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앞선 일이었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저본(底本)으로 사용한 성경은 중국어 성경
문리, 헬라어 성경, KJV, ERV 등 네 종류의 성경이었다. 당시 번역이 진행된 곳이 만주 우장이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문 성경이 출판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한문 성경을 주된 저본으로 사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은 독창적인 번역이라기보다는
중국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라고 할 만큼 중국어 성경을 모체로 번역한 성경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었다. 그러나 존 로스가
1882년에 본국에 보낸 보고서와 1881년 맥킨타이어의 보고서를 종합할 때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중국어 성경 외에 헬라어 성경과 앞서
언급한 두 권의 영어 성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81년 4월, 맥킨타이어는 성경 번역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마태복음 번역이 방금 끝났다. 내 손에는 헬라어 성경이 있다. 내
아내는 의심스럽다고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원고를 수정했다. ……우리가 전에 했던 성경 번역은 오로지 중국어 성경에서 한 것이지만 지금 한 것은
헬라어 성경에서 직접 한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헬라어 성경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인 조력자들이
한문 성경을 가지고 한글로 번역하면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헬라어 성경 및 영어 성경과 대조하여 수정하고 헬라어 성경사전 및 주석을 참고하여 어휘의
통일을 기한 후 수정된 원고를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여 읽어 가면서 마지막 수정 작업을 진행해 나아갔다. 한문 성경을 초본으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번역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성경과 대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번역과정은 1882년 7월, 로스가 보낸
보고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제[성경 번역]와 관련해서 내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방법을 소개하겠다. 과거 고향의 행정관서에서 서기로 있다가 아편 때문에 해고당한 조선인 학자 한 사람이 최신 중국어 문리(文理) 성경을 가지고
번역하고 있다. 나는 그가 번역한 것을 헬라어 성경과 영어 개역 성경을 가지고 자자구구(字字句句) 대조한다. 이 일을 돕는 또 한 사람 조선인
학자가 있는데, 그는 이미 수년 전부터 번역인으로 우리와 함께 일한 사람이다. 중국어를 알 만큼 알았고 번역인으로서 그 번역 실무에 능숙하게
되기는 하였으면서도 수칭(數稱) 개념이라든지 존칭(尊稱) 개념, 또는 도치법 같은 것들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때론 절이 바뀔 때가
있고, 의미가 뒤바뀐 것도 있으며, 때론 행(行) 전체가 삭제되어야 될 것도 있었다. 이런 식이 되어 처음 번역된 원고는 마치 마마를 앓은 사람
얼굴처럼 되었다. 이렇게 수정된 원고를 다시 깨끗이 정서했다. 그 다음 어휘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헬라어 성구사전을 가지고 헬라어를 번역함에
가장 적당한 조선어가 무엇인지를 결정해 나갔다. 그러나 축자적(逐字的) 번역(literal rendering) 보다는 의미와 조선식 관용어구를
채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조선어에서는 바늘에 귀(耳)는 있어도 눈(目)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예이다. 이 같은 과정이 끝나면 번역 원고를
또 한 번 수정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처음보다 더 신중하게 헬라어 성경과 대조하며 읽어 나간다. 이 일을 함에 있어 앨포드(Alford) 편
헬라어 성경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반면 영어개역성경은 대단히 큰 도움을 주었고 메이어(Meyer)의 주석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로스와 맥킨타이어 역 한글 성경은 첫 작업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상당한 수작(秀作)이었다. 비록 로스 역이 평안도 사투리가 많아 서울 지역에서 사용하는 데는 불편이 많았지만, 고유명사를 헬라어 원문대로
표기한 것이나 또한 당시 이응찬이나 백홍준이 모두 의주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몰락 양반 가문이어서 한학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한학이 훨씬
더 쉽고 지배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성경 번역을 하는 데 한글과 한문을 혼용하지도 않고 아예 순한글로 번역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성경 번역에 기여한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권서인(勸書人)이 되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만든 성서를 보급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는 처음부터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게 진행되었다.
1) 구원의 여명 - 준비된 그릇
한국
한국교회는 첫 출발부터 기적적인 하나님의 사역에서 시작되었다.
선교사의 사역이 한국 땅에서 시작되기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한국 사람들에 의하여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1872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로스(J. Ross)목사가 만주
관문인 영구(영구)에 도착해서 만주 선교를 시작하였고 1년 후에는 매제가 되는 매킨타이어(J. McIntyre) 선교사가 합류했다. 존로스
목사는 1874년, 1876년 두 차례 봉황성(지금의 요녕성봉성) 아래 고려문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그곳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을 처음
만났다.
당시 고려문은 봉황성 아래 있는 작은 마을로 청국과 조선국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이었다. 그곳에서 의주 출신의 청년 4명과의 만남을 통하여 기적적인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곧 복음을 받아 들여 존로스 목사의 성경번역 작업을 돕게 되었으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였다.
2) 역사적 부르심과
성경번역
한국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적 부름은 존로스 목사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1872년 8월 말에 중국을 선교하기 위해 지푸(연태)에 도착한 존로스 목사는 만주의 개항장 영구(營口)로 갔다. 그는 1년간
어학 연수를 받으면서중국어와 만주어, 그리고 사서삼경(四書三經) 공부에 진력한 결과 다음 해인 1873년 5월에는 중국어로 설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존로스 목사는 1874년 10월 9일 영구를 출발하여 첫 번째 고려문
여행을 하였다. 존로스 목사는 한국 상인들을 만나한문성서를 팔며 전도하려고 하였으나 한국 상인들은 복음의 진리보다는 영국산 면세품인 '양복'에만
관심이 있었다. 실망하여 여관에 있는 존로스 목사에게 한국의 상인이 한 사람 찾아왔고 존로스 목사는 그에게서 한국정세와 한국인의 발음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존로스 목사는 그에게 한문 신약성서와 《훈 진언》(訓兒眞言 Peep of Day)를 건네주고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존로스 목사에게 신약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한국 상인은 그것을
자신의 아들과 친구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으며, 그들은 후에 한국개신교의 최초의 수세자들이 된다. 그 상인 바로 백홍준의
부친이었다.
존로스 목사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은 1876년 3월의 강화도 조약에
의한 한국 문호 개방 소식에 자극을 받고 4월말 이루어졌다. 이 여행에서 존로스 목사는 어학교사를 얻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의주의 상인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다. 존로스 목사는 이미 한국어 성경번역을 계획하고 있었고, 곧 봉천으로 돌아와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응찬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인 1877년에는 한국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Corean Primer》를 상해에서 발간할 수 있었다. 이 때로부터
존로스 목사는 한글성서 번역을 시작하였는데 이응찬과 한두 명의 도움으로 1878년 봄까지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하였다.
3) 자생적 교회와
선교사들
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초기 한국교회의 부흥은 한국신자들에
의해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1832년의 귀츨라프(Karl Guetzlaff)의
내한과 1865-66년의 토마스(Robert J. Thomas)의 선교와 죽음에 이어, 1870년대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선교사의 만주지역 진출에 힘입어서 시작된다. 비교적 초기에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란드 선교사들은 존로스
목사(John Ross 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馬勤泰) 등이었다. 이들은 만주 선교를 개척하는 한편 대원군 때에 강화된
쇄국정책으로 선교의 문이 거의 닫혀있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교사들은 당시 여러 가지 목적으로 만주에 온 한국인들을 만나
말과 글을 배우고 역사와 문화를 익히며 그들에게 기독교 진리를 전하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 결과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이들 개신교 선교사로부터 세례받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신약성경의 한글번역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3천부씩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그 이후 기독교는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한반도에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 간행된 복음서들은 앞서 거명된 수세자들에 의해 한국인들에게
반포되었다. 성경 간행 때에 식자공으로 활동했던 김청송(金靑松)은, 당시 압록강을 건너와 만주지역에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전도하여 한꺼번에
75명과 25명이 존로스 목사 등의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하였다. 이들 수세자들은 뒷날 중국인들의 핍박을 받아 압록강 남쪽으로 옮겨왔는데,
1885년부터 한국에 들어왔던 선교사들이 북한지역을 여행하여 이들을 접촉하면서부터 선교의 문이 넓어지게 되었다. 한편, 번역된 복음서들을 들고
한반도로 들어갔던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도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특히, 1883년 초에
서울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상륜은 존로스 목사로부터 받은 성경과 전도책자들을 가지고 비밀리에 복음전도활동을 전개한 결과 1885년 초에는
70여명의 세례 청원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서상륜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300여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선교사가 내한하기 전에 열심있는 전도인들에 의해 결신자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내한한 그
해부터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광린 교수는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즐거운 수확을
거두기 위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지적하였고, 언더우드 역시 그 무렵은 씨를 널리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였다.
1885년 3월 8일자로 존로스 목사가 영국성서공회(BFBS)에
보낸 서한의 일절은 이렇다.
"그(서상륜을 가리킴)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여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의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 이상의 세례 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서한이 미국계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보다 약 1개월 앞서 작성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수용된 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이들 복음에
자발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은 그 뒤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만주에서 세례교인이
생겨났고, 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은 개종자들이 생겨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세례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를 두고 언더우드는 "우리는
씨를 뿌리러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결실을 얻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고 하였다.
교회의 역사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선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먼저 진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교회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시작됐다.
4. 존로스 목사와 메킨타이어 목사의 고려문
전도(1873년)
1) 고려문 (주체적 복음 수용과 전파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한국교회의
근원지)
고려문이란 봉황성 바로 밑의 작은 촌 거리로서 '루카'라고도 하고
책문(柵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청태조가 중원을 통일한 후 조선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책을 두른 후 설치한 6문중 하나이며, 조선의 사신이나 상인들의 내왕은 오직 고려문으로 제한함으로써 조․청 양국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고려문은 옛날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조선 사신들과 상인들이 반드시
들려야 했던 국경 관문이었다. 그리고 양국 세관이 나와 교역을관리하는 합법적인자유 무역시장이었다. 그래서 고려문은 두나라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고려문 마을 입구. 의주 출신 상인들이 이길로
들어갔다.
2) 고려문전도
토마스 목사의 순교이후의 큰 사건을 로스와 매킨타이어 두 목사의
고려문 전도라 한다. 여기에는 먼저 고려문 전도의 의의와 존로스 목사에 앞선 윌리암슨의 만주방문을 고려해 두어야 할 것이다. 고려문은 책문이라고
하며 조선의 북쪽 국경도시인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약 120리 지점에 있던 국제 교역지였다. 중국과 일본은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여 카톨릭과
뒤이어 프로테스탄트의 전교가 자유로웠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늦도록 쇄국정책에 갇혀 복음전래는 물론 일반 통상의 길도 막혀 있었다. 이와같은
쇄국정책은 병인양요이후 대원군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므로 뜻이 있는 청년들은 국외로 도피해 나갔고, 그들의 집합처가 고려문이었다. 고렴누에는
춘추로 교역시장이 개최되어 많은 중국인과 조선인 그리고, 서양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므로 "고려문전도"란 단순히 고려문 시장전도만 가리키지
않는다. 이곳에 모여왔던 지역들, 즉 우장과 봉천등지를 포함한 초기의 국외전도를 가리키고, 한국교회 설립의 전초기지가 된
것이다.
윌리암슨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만주지방의 주재원으로 토마스목사의
한국방문에 협조한 분이었다. 그는 1866년 4월에 만주의 한국상인들을 만나 전도하였고, 4월 19일에는 귀국도상의 동지사를 만났으며, 그들
중의 두세명은 카톨릭 신자임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한다. 아마 이 동지사가 토마스목사와 만났고, 후일 그를 사형시킨 평양감사 박규수가 아니었든가
본다. 윌리암슨이 고려문을 방문한 직접적인 목적은 토마스목사의 정확한 안부를 알기 위함이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그의 보고서에서
대영제국의 무력으로 한국의 쇄국정책을 파쇄하고, 국교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로스목사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의 자유일치교회의
목사들로써 1872년 이래 만주의 우장과 봉천지대에 주재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두 스코틀랜드 선교사가 만주를 찾아 한국전도를 계획한
것은 영국인으로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목사의 선교를 계승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과연 토마스목사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아
토마스-윌리암슨-로스, 매킨타이어를 이은 영국계 선교사들로 한국교회의 주초가 된 것이다. 실로 로스*매킨타이어는 두가지 의미에서 한국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첫째는 국외선교를 통해 국내선교의 터전을 닦은 것이요, 둘째는 최초의 한국성서의 번역작업을 달성한 것이었다. 1873년
로스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전도하다가 압록강 상류지방인 임강에 이르러 한국인이 약 3천호가 모여 사는 군을 만났다. 그곳은 고구려의 고도였던
것이다. 존로스목사는 이곳에서 조선인들에게 전도하며 조선입국의 가능성과 안내인을 구했으나 아무도 응하질 않아 국내 쇄국정책의 철저함을 피부로
느꼈다. 그는 다시 고려문에 이르러 더 많은 한국인을 만나 그의 한국전도의 비젼을 새롭게 하였다. 다음해인 1874년, 존로스목사는 중국인
서기를 동반하고 다시 고려문을 방문했다. 그러나 한국내의 쇄국정책과 금교령이 너무 준엄하여 고려문의 한국인들은 서양인 선교사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존로스목사는 숙소에 머물고, 중국인 서기를 통해 한국인을 숙소로 데려오도록 했으나 그것도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오랜 시도 끝에 중국인
서기를 따라 온 네 의주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이 곧 한국인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된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였다. 네 청년은 상사를
핑계하여 고려문으로 왔으나 내심인즉 서양인을 만나보며, 서양 문화를 배우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로스목사와 네 청년들 사이에는 청년들은
한국말과 역사를 가르쳐 주고, 존로스 목사는 후한 월급과 서양과학을 가르쳐 줄 약정이성립되어 그들과 같이 선교본부가 있던 우장으로 갔다. 최초로
한국청년 네 사람을 얻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기쁨은 컸다. 네 청년은 약속대로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고 스스로 서양의 과학문명을 배우면서
지냈으나 신앙문제에서는 아주 완강했다. 이래서 그들이 우장으로 간지 만 2년이 지나, 1876년 드디어 그들의 마음이 열려 매킨타이어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들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는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된 것이다.
1884년 알렌의사가 입국하기 보다 8년이나 앞선 때였다.
성경 인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존로스 목사는 첫 수세자들을
파송했다.1882년 김청송이 서간도지역에 파송된 데 이어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인 자격으로 서울지역에 파송됐다.김청송은 중국
집안(輯安)을 중심으로 활동해 수십 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존 로스 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4년 말 수세자 1백명,남자 세례 요청자들이
6백여 명에 이르렀다.집안의 가정교회들은 1885년 중국인 지주에 의한 한인마을 해산 사건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의 압록강 인근 산간으로 돌아와
가정교회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서상륜은 한반도의 중심 서울로 향했다.서상륜은 서울로 오면서 3개월
동안 의주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도했다.
1883년 초 서울에 도착한 서상륜은 서울 남대문 안쪽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해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서상륜은 중국의 존로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서울에 와서 13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로스 목사의 입국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다.결국 이들은 1885년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3) 존로스목사의 고려문
방문로
4) 고려문에 있던 로스선교사를 찾아서 한국 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의 아버지
“백홍준 아버지의 이야기”
어느 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고려문(高麗門,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
양국사이의 합법적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물건을 사러 갔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보았다. 키는 크고, 피부는 하얗고, 코는
오똑하고, 머리색깔은 노란색이고, 눈은 푸르딩딩한, 한마디로 이상하게 생겼었다. '아!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서양사람인가 보다.'하고
생각했다. 청나라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많이 보았는지 전혀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난 처음 본지라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나에게 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이야기를 했다. 영국에서 온 로스라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야소교(耶蘇敎) 선교사라고
했다. 야소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리였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지만,야소니, 성령이니 하는 게 뭔지 몰랐다. 대신 그의 봇짐에 있던 옷감에
눈이 갔다.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영국에서 만든 옷감이라고 했다. 양목(영국산 면제품)이라는 옷감. 그것만 조금 샀다. 의주에서 그 옷감은
커다란 인기였다. 무명보다 훨씬 나은 옷감이었다. 다음에 고려문에 갔을 때는 로스라는 사람을 찾아 다녔다. 그가 여관에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관을 찾아갔다. 그리고 양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양목은 더 이상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또다시 그야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야소가 나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정말 허무맹랑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난 괴로워했다. 야소가 과연 누구길래,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는 것인가?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저질렀던 죄가 얼마나 많은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고 나서 난 그 로스라는 서양인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밤새 했던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그리고 도움이 될거라며 訓兒眞言(훈아진언, 한문 신약전서, peep of Day)라는
책을 주었다. 나는 그 책을 집에 가져 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아들(백홍준)에게도 읽게 했다.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해(1876), 로스가 다시 고려문으로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달음에 가서 만나고 싶었지만 날로 늘어나는 일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에 訓兒眞言을 읽었던 마을청년 두명이 그를
찾아가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이 사람이 우리 민족의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아들(백홍준)이 도를 배우러 로스에게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난 기꺼이 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서너달 후, 홍준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았다. 난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로스가 추진했던 성경번역사업을
돕던 이응찬도 세례를 받았다.
5. 한반도초기의 교회 및
공동체
1) 백홍준과 의주교회(1883년)
성경번역을 완성한 존로스 목사는 이 성경을 최초의 한국인 신자들에게
주어 각자 고향으로가서 전도하게 하였다.
한국인의 국민성은 가족과 나라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런 마음을
가진 한국의 청년들이 예수를 믿고 성경을 번역하면서 조국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솟아올랐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 중 제일 먼저 이성하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많은 성서와 전도문서를 지니고 중국 봉천에서 의주를 향하여 목숨을 건 순례의 길을 떠났다. 당시에는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나라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잡히게 되면 처형당하였다. 그는 국경에 경계가 너무 심하여 중국인 객주집에 짐을 맡기고 도강하여 구전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돌아와 보니 성서와 전도 문서가 다 없어져 버렸다. 객주집 주인이 짐을 열어 금서가 있는 것을 보고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일부는
불태우고 일부는 강에 버렸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로스목사는 "성경 씻은 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좋은
비료가 됨으로써 장차 한국 교회가 크게 발전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믿음에서 우러난 예언자적 외침이었던 것이다.
1883년에 백홍준이 다시 성경을 지고 국내반입을 시도했다. 그는
국경까지 가서 성경책을 분리하여 조이를 만들고, 다시 그 조이를 말아 끈을 만들어, 고지를 사서 그 끈으로 묶어 겨우 입국에 성공했다. 의주에
도착한 그는 그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고향과 이웃마을에 전파했고, 약 반년 후에는 10여명의 신자를 얻어 백홍준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의주교회요, 한국교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식교회는 아니었고, 기도소 정도였다.
후에 백홍준은 국경을 드나들며 복음을 전했는데 1892년 국법을
무시하고 외국인과 내통하며 이단 사설로 현혹한다 하여 체포되었다. 백홍준은 변절을 강요당했으나 끝내 거절하여 배교하지 않고 옥살이하다 2년 뒤
옥사함으로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후에 그의 사위 김관근이 조사직을 맡았는데 그때부터 주일날 세 차례의예배와 수요일
기도회를 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통이 되었던 것이다.
2) 서상륜과 솔내교회(1885년)
역시 의주청년인 서상륜은 약재상을 하면서 우장을 찾았고, 거기서
장질부사에 걸렸으나 매킨타이어목사의 정성스런간호로 완쾌되었다. 여기서 감화를 받은 서상륜은 다른 한국인 85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고, 최초의
성경출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이미 거론한바 있다. 그후 서상륜은 고향전도에 나서 고려문에서 체포되었으나 기적적으로 놓였고, 고향의주에 돌아와
포교하여 10여명의 친지들도 믿게되었다. 그러나 관가의 탐색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서상륜은 동생 서경조와 함께 삼촌이 살고 있던 황해도 솔내로
이사했다. 서상륜 형제는 송천에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얼마 안가서 58호 중 50호가 믿게되고, 1885년에는 순전히 저들의 힘으로 초가 8간의
한국 최초의 교회당을 건축였다. 이 교회야 말로 "한국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라 불리우는 한국의 최초의 교회이다.
그후 언더우드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 이곳에 와서
세례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한국 카톨릭교회가 동지사를 통해 중국에서 배워온 교인들로 자립한 교회였던 것처럼 한국 프로테스탄트교회 역시 만주에서
배워온 교인들이 자립해 이룩된 것이
란 참으로 세계선교사상 희귀한 일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후 서상륜은 수도 서울전도에 뜻을 두어 로스성경을 반입하여 전도한 결과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입국하기까지에는 서울지방에 약 70명의 교인이 이미
존재했다고 한다.
3) 김청송과 집안현의 이양자교회
이곳 출신 김청송이 영신환(靈神丸)이란 약을 팔러 다니다가 존로스
선교사를 만나 심양의 성경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하던 중 교인이 되었다. 1882년 3월 매서인이 된 그는 자기가 인쇄한 한글 쪽복음과 전도지를
들고 이양자를 비롯하여 집안 일대 28개 골짜기 마을을 돌며 전도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수 백명 개종자들이 생겨났고 1884년 12월
존로스목사는 이곳 4개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 중에는 임오군란(1882년) 때 정치적 이유로 이곳 이양자 골짜기까지 피신해 온
군인 출신 6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 집안을 중심으로 압록강 서쪽서간도 일대에 한인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었고 거기서부터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집안 이양자교회는 만주에 설립된 최초 한인교회라 할 수
있다.
이는 장로교회 역사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년)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1898년) 중국 남만주 집안현(楫安縣) 이양자(裡楊子)교회가
성립하다. 선시(先時)
에 이성삼(李聖三) 임득현(林得賢) 등이 동지(同地)에
우거(寓居)하야 열심 전도함으로 수십인이 상계신주(相繼信主)하야 교회를 수성(遂成)하니라.
1898년은 예배당 건물을 마련한 시점으로 보인다. 이미 1882년
김청송이 이 곳에 와서 전도하여 이성삼․임득현 등이 믿고 개인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898년에 이르러 독자적인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였다는
말이다. 이양자 교회는 의화단 사건(1900년) 때 중국인들의 방화로 예배당을 잃고 교인들이 흩어져 위기에 처했으나 그 소식을 들은 평안도 선천
선교사 휘트모어와 안승원이 교인들의 헌금을 들고 찾아가 위로하며 예배당 재건을 도왔다. 이로써 폐쇄 위기의 교회는 다시 문을 열었고 계속해서
전도인과 선교사를 집안과 남만주 일대에 파송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교회의 만주 선교 기원이 되었다.
현재는 집안에서 남쪽으로 압록강 줄기를 따라 유림 가는 길로 달리다
태평을 지나 이양자 촌에 도착한다. 100호 정도 되는 작지 않은 마을이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거기서 오른쪽 샛길로 해서 다시 10리 쯤
가니 작은 마을이 나온다.
▲ 집안 조선족교회.
현지의 전도사가 처음 이 마을에 왔던 이야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997년 9월 집안교회에 부임하자마자 이양자교회에 관심을 갖고 그
흔적을 찾아 나섰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작정 이양자를 찾아가서 노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이 곳 안마을까지
들어왔더니 85세 된 한족 노인이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교당골에 옛날 조선족들이 살았다는 말을 하더군요. 교당골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어요. 안마을에서 다시 10분 쯤 달리니 차는 더이상 들어갈 수 없고 길은 골짜기 따라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제일 왼쪽이
교당골로 가는 길이다. 여름에 오더라도 길 안내가 없으면 찾아가기 어려운 산길이다. 과연 임오군란 때 망명객들이 가족을 이끌고
들어왔음직한 곳이었다. 30분 쯤 갔을 때 그 바위를 만났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수차례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찾았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에 한나절 이상 고생을 한 후 결국 포기하고 내려갈 생각에 여기 개울가에 앉아 얼굴을 씻고 나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 순간 건너편 바위에 이상한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울가 나무 덤불 사이에 2미터는 족히 될 큰 바위가 있었다.
바위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었는지 사람이 그랬는지 반 정도 떨어져
나갔고 그 떨어져 나간 안쪽 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선명했다.耶蘇敎 初立 1898 됴선人1898년 조선인 최초 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기록과 일치하였다.
그걸 보는 순간 감동이 솟구쳐 올라왔다. 비록 한인촌이나 예배당
건물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지만 눈 속에 자태를 숨긴 바위서 이 골짜기를 오가며 성경을 팔았던 김청송의 숨결과 그의 안내를 받으며 세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 곳을 찾았던 존로스 선교사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향을 떠나 이 곳 산골짜기까지 피난 와서 마을을 이룬 후 예수
믿고 예배당을 세우면서 그 사실을 마을 입구 바위에 새겨 훗날 이 곳을 찾을 후손들에게 헛걸음을하지 않도록 배려한 평안도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에
고개가 숙여졌다.
4)해방전 의주지역의 교회들
5) 국내 첫 개신교, 中 요녕성 영구(잉커우교회)서
탄생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인이 탄생한 교회가 중국 랴오닝(遼寧)성
잉커우(營口)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첫 개신교인은 1879년 6월 중국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존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의주 상인 백홍준이며 이어 이응찬, 서상륜,최성균, 김청송 등이 세례를 받았다.
존로스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은 이 건물에서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 심양(瀋陽)에서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6. 한글 누가복음서와 예수 성교전서,
문광서원(동관교회)
초기 성경번역자들이 성경(쪽복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래하여 세워진
의주지역 교회들
7. 예수성교전서 출간(1887년)
네 청년이 개종하자 존로스목사는 그들과 협력하여 그들에게 들은 것을
토대로 한국의 역사와 풍속에 관한 책들과 전도문서를 내고, 또 일찍이 성서번역에 착수하였다. 또 1878년에는 역시 의주청년인 서상륜이 우장으로
들어와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이래서 1879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되고, 1880년에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이 번역되었다. 1880년에는 스코틀랜드성서공홰와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어 성경의 출판비를 전담하기로 되어
출간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서상륜은 주로 목활자를 만들었고, 이 목활자를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 주재 스콧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릴리목사를
통해 4000자의 연활자를 만들어 봉천으로 보내왔다. 또그간 서간도 한인촌사람 김청송이 믿게되어 식자공 일을 하였다. 그리하여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출간되었으니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성경이었다. 1884년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이 출간되고, 1885년에
"로마서""고린도 전후서","갈라디아서"및"에베소서"가 나왔고, 1887년에 신약성경이 완간되었다. 이것이 "예수성교전서"라 불리우고 최초의
한국어 성경이고, 또 "로스 역본"이라고 불리운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요, 또 축복이었다. 그후 이 성경은 만주와 한국내에 전해졌고, 성경을
통해 많은 새 신자를 얻게 된 것이다.
8. 인물 설명
1) 존.로스(John Ross,중국명 :나약수(羅約翰) 목사
존.로스(John Ross,중국명 :나약수(羅約翰)는
휴.로스(Hugh Ross)와 캐더린
서더런드(Catherine Sutherland)의 맏아들로서
1842년 8월 9일에 태어났다. 그때 로스가족은 크로마티 하구(Cromarty Firth)의 어귀에 있는 인버네스
(Inverness)의 북쪽 닉(Migg)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이
작은 농촌지역에서 존.로스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영향을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이 지역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대부분
갈릭어(Gaelic Lnanuage)를 사용하는 지역이었다. 존.로스는 갈릭어를 사용하면서 성장했고, 편(Fearn)교구의
힐턴(Hilton)마을에 있는 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영어를 처음 배웠다. 말할 나위없이 두 언어-영어,갈릭어-를 배운 경험으로 중국어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존로스 목사는 만주 개신교의 설립자로서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험과 인내성 및 외국 문물에 대해 정확한 식견
을 가진 자로서 19세기 가장 중요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큰 영향을 주었으나, 한편으로는, 우리가 흔히 그와 같이 활동성 있는 개성을
가지고 있는 데서볼 수 있는 성급함은 없었다. 그와 수 십년간 같이 일했던 제임스 웹스터(James Webster)목사가 말하기를 "무레한
군중들에 대한 그의 놀라운 인내와,끊임없는 예의와 재치를 보았다. 여러 주간 매일 같이 있었으나 아무리 어려운 경우를 당해도 그가 자제력을 잃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의 성격 중에서 어려운 상태를 직면했을 때 인내와 관용은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개재를 가진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만주와 한국의 개신교의 설립자 및 한국을
서양에 소개한 사람으로서 중요시된다. 1872년 늦은 가을 로스목사 부부는 영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그들은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기차로
북미대륙(캐나다)을 통과해서,뱅쿠버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 있는 동안 몇몇 선교사들을 방문하고 상해로 가서 8월 23일에 산동에
있는 지부에 도착했다.
1874년 10월 9일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
번째로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했다.
1876년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존로스목사는 동역자에게 성경을 번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한약장수였고 그는 압록강을 건널때 모든 물건을 잃어버렸다. 이 응찬은 존로스목사와 일주일 있은 뒤에 이후 존로스목사의 교사가 되었다.
존로스 목사는 조선인 이 응찬 밑에서 조선말을 배운후 신약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1878년 로스목사는 봉천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영구를 담임했다. 존로스목사의 주소는 봉천 북쪽의교외였고, 여름엔 쉬기 위해 영구로 갔다.
존로스 목사 는 고려문을 넘나 들며 장사를 하던 의주 청년들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청송등을 만나 뜻을 같이하여 함께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1881년 존로스목사는 '심양 문광셔원'을 창설하고 최초의 한글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을 출간하였으며 1882년 한국인 번역자들과 심양 문광서원에서 최초의 한글 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를 3월에,'예수셩교요안복음젼서'를 5월에 출간하였다.
1884년 '예수셩교셩셔맛복음'과 '예수셩교셩셔말코복음' 출간함으로
한글 성경번역을 완료하였다.
성경 인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존로스 목사는 첫 수세자들을
파송했다.1882년 김청송이 서간도지역에 파송된 데
이어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인 자격으로 서울지역에
파송됐다.
1887년 가을 로스 목사는 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조선에서 있은
조선인의 세례와 한국 교회의 첫 장로 임명을 보
았다.
존 로스목사는 만주지역의 많은 중국교회를 설립하고 복음을
전했으며(봉천/심양,개원,철령,안산,해성,영구,통화,환인
등) 한반도에 복음과 한글성경을 전하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기독교의
설립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이후 전생애의 대부분을 만주지역과 조선반도선교에 보냈으며 1915년
4월 28일에 런던의 기독교 문학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 Conference) 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공식적 행사로서는 최후의 것이었고, 같은 해 8월 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으로 갔다. 8월 11일 에딘버러의
뉴윙턴(Newington)묘지에 묻혔고, 그 위에 그의 사업을설명하는 비석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교인들이 존로스목사의 죽음을 듣고 봉천의
중앙교회 제단 뒤에 위패를 모셨다.
"…그 음성이나 모습이 여전히 계시는 듯해 경의를 표하노라. 하나님께
충성하고 성도들을 사랑
하기를 38년간 사방에 교회의 붐을 일으킨 관동의 한 분이시여.
교회당을 신설하고 설교하시니 그 덕행이 받들림을 받도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만고에 보존하기 위해 돌에 비문을 새기니 길이,길이 남아
있으리라." - 심양동관교회 추모비명
2) 기독교 개척자 서상륜 - 福音書 이고 지고 만주서 서울까지
한국기독교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성서번역가인
서상륜(徐相崙.사진)
은 1848년(헌종 14년) 7월 26일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의주 명문 양반가에서 서석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13세때 부모를 잃고 조부모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어려서부터 성격이 쾌활하고
풍류객의 기질을 지녔다. 1873년부터 서상륜은 홍삼과 몇가지 약재를 가지고 만주지역으로 행상을 다니기 시작했고,이 무렵 친구인
백홍준(白鴻俊)으로부터 처음 기독교교리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 뒤 1878년 그는 홍삼을 팔러 만주의 개항장인 영구(營口)에
갔다가 장
티푸스에 걸려 사경에 이르렀다. 이때 친구들의 주선으로 영국인
헌터
(Hunter, J.M.) 의사의 치료를 받게 된 서상륜은 병원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의 만주선교사인 매킨타이어(McIntyre, J.․馬勤泰)목사를 만났으며,그의 병문안과 배려로
완쾌되었다.
몇달후 서상륜은 매킨타이어 목사의 본격적인 전도를 받았으며, 같은
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로스(Ross,J.․羅約翰)목사도 소개받았다. 이때 그의 몇몇 친구들은 이미 로스목사를 도와 한문성서를 한글성서로
번역하는 사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서상륜도 그 작업에 참여하여 '누가복음'을 번역한 다음 세례받기를 요청하였으나, 로스목사는 그가 보다 확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때를 기약하였다.
1879년에 서상륜의 친구들인
백홍준(白鴻俊),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 등이 매킨타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이에 따라 한국기독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881년 5월 로스목사가 1년여의 안식년 휴가를 고국인 영국에서
보내고 다시 만주로 돌아오자 서상륜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 때도 서상륜은 존로스목사의 권고로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한편 번역된 성경을
인쇄하는 일에친구들과 함께 협력하였다. 특히 그는 나무활자를 파는 각인기술이 뛰어나 이를 친구들에게도 가르쳐 인쇄작업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서상륜이 성서번역과 출판에 참가한 기간은 불과 1년 미만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성서를 만들어내는 일 보다는 국내 반포에 더
열심이었다.
마침내 1882년 가을 쪽복음 형태로 된 '예수셩교 누구복음젼셔'와
'예수셩교요안내복음젼서'가 간행되었다. 인쇄기는
상해에서 사들였고, 한글활자는 한국인 조역자들이 만든 목활자를 일본에
보내 4만여자의 아연활자로 만들어 1881년 심양(瀋陽)에 설치했다. 출판소는 문광서원이었다. 이는 우리나라에 외국인선교사가 들어오기 3년전
일로서 한국교회 성립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한편 의주지방은 1879년부터 백홍준의 열렬한 전도활동으로 인해
기독교신앙에 대한 열망이 생기면서 '성경'에 대한 요구가 차츰 늘어났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자 국내로 수입되는
폐지(廢紙)속에 미제본 된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입하기도 했으나 이것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에따라 그해 10월 서상륜이 영국성서공회 소속 최초의
한국인 권서(勸書)로 임명되어 평북지역으로 파송되었다.
이듬해인 1883년 서상륜은 당시에는 금서로 규정된 성서를 가지고
입국을 시도하다 의주의 봉황성(鳳凰城) 책문에서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는데, 다행히 의주부 집사이며 먼 친척이었던 김효순(金孝順)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이후 동만주일대에 산재한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서상륜은 1884년 존로스목사의 요청에 의해 다시 한번 국내 포교
임무를 맡았다. 이 때 그는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심양을 떠나 일주일 만에 고려문(高麗門)에 당도하였다. 당시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차이점이
인식되어 기독교에 대한 전도는 어느정도 묵인던 시기였다. 그래서 무사히 국내로 들어온 서상륜은 3개월간에 걸쳐 다량의 복음서를 반포하면서 본래
목적지인 서울로 향했다.
상경한 서상륜은 400여권의 복음서를 약 6개월간 반포하면서
서울에서도 열심히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그는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존로스목사에게 '서울로 와서 세례를 원하는 13명의 친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교회를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존로스목사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서울 방문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지자 대신 상하이와 제물포간의 기선 항로
를 이용하여,1884년 봄 이성하를 시켜 다량의 번역 출판된
쪽복음서,사도행전,소책자 등을 서상륜에게 보내 주었다.
그는 인천세관의 고문으로 있던 뮐렌도르프(Mollendorf)의
도움을 받아 화물을 찾아 전도에 사용했다.
한편 1883년에는 '옛후셩교젼셔 말코복음'이, 이듬해인
1884년에는 '예수셩교젼셔 마태복음'이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되었다. 이어 1887년에는 이른바 로스역 성서(Ross
Version)라는 최초의 한글신약성서 번역본이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재정원조를 얻어
간행되었다.
1885년 3월초 서상륜은 심양을 방문하여 존로스목사에게 국내에 있는
70여명의 세례청원자의 존재를 보고하고 다시 한번 그의 한국방문을 요청하였다. 이윽고 그해 말 그는 백홍준,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월급을 받는 한국교회 최초의 유급 교역자로서 조사(助師․지금의 전도사에 해당함)에 정식으로 임명받고 활동하였다. 이후 서상륜은
의주를 거쳐 동생 경조(景祚․본명은 相祐․훗날 1907년에 한국 최초의 7인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 됨)와 함께 당숙이 살던 황해도 장연현
대구면 솔내(松川) 마을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동생과 함께 전도활동에 주력하여 20여명의 교인들을 지도하며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개인 집을 돌면서 예배를 드렸으며 늦어도 1886년까지는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매주일 정기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서상륜은 1886년 말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가 소래를
방문하여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선교사의 지방여행이 아직 불가능했기 때문에 서상륜은 교인 가운데 동생 경조와
정공빈,최명오 3명을 서울까지 데리고 가서 선교사들을 찾아가 세례문답을 받게 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87년 1월 23일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그들이 세례를 받았으며,계속해서 소래출신 교인들이 세례를 받게하여 그해 9월 초에는 소래출신 세례교인만 11명에 이르렀다.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에 있던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14명의 세례교인으로 우리나라 장로회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전신)가 설립될 때에 그 가운데 13명이 이미 서상륜의
전도로 교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첫 조직교회는 그 구성원이 외국인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서상륜을 비롯한 한국인 전도인들의
목숨을 건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해 10월말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직접 소래에 와서 나머지 교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이 때 서경조의 석달된 아들 병호(丙浩)가 세례받아 우리나라 교회 최초의 기독교식 유아세례가 행해졌다.
그 뒤에도 서상륜은 1891년 평양,의주,회령,함흥,원산 등지를
여행하며 성서를 팔고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賣書人) 또는 권서인(勸書人)으로 활약했으며, 1893년 3월에는 평양의 개척선교사로 임명된
마펫(Moffett, S.A.),리(Lee, G.),스왈른(Swallen, W.L.) 등을 도와 평양에서 전도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전도여행때 길 안내자로 동행하기도 했고 때로는 단독으로 전도에 힘썼다. 특히 서상륜은 여행할 때 반드시 쪽복음서,해열제,감자씨 등을
보따리에 넣고 다녔다고 전한다.
무엇보다도 서상륜은 소래교회를 세움으로써 '한국개신교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이 소래(松川)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로 불리는 자생된 최초의 한국인 교회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독교회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확립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후 해외 선교사들이 한국에 파송되면 소래교회에 와서 풍속과 어학훈련을
받았다. 처음에는 서경조의 사랑방에서 시작하여 교인 수가 늘자 예배당을 지었으며,동네의 사당터에 8칸짜리 기와집을 지어 1895년 7월에는
언더우드 목사의 인도로 헌당식을 가졌다. 이로써 동네 58세대 가운데 50세대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서상륜은 말년에는 소래교회에 머물면서 신앙과 전도에 힘썼다. 그는
한국기독교 설립의 산파였으나,목사나 장로 등의 성직은 사양하고 오로지 한 사람의 평신도로서 복음의 씨를 이 땅에 뿌리는 일에만 전념한
전도자였다.
마침내 서상륜은 1926년 1월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그의 전도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총회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였고,그의 유해는 황해도 장연군 태탄리에
안치되었다.
이후 1936년 9월 열린 제 25회 장로회 총회에서 그의 개척적
선교사업의 공을 기리는 기념비 건립이 결정되어 1938년 8월 그의 묘지에 높이 5척5촌의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선구자적 선교사업을 기리게
되었다.
3)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교역자 백홍준 - '조선의 사도바울'
백使徒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인 백홍준(白鴻俊)은
1848년에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북산(北山)이다.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1874년 10월경 만주의 통화현(通化縣)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였다가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로스(Ross,
J.․羅約翰)목사를 만나 한국 정세와 발음법을 가르쳐주고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훈아진언'(訓兒眞言)이라는 소책자를 받아온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져 온 책자를 몇몇 친구들과 함께 2~3년간 공부한
다음
북산은 1879년 순전히 '교리를 배울' 목적으로 로스목사를 찾아
만주 우장(牛莊)으로 갔는데, 그때는 존로스목사가 안식년 휴가를 맞아 조국인 영국으로 귀국하고 없었다. 대신 같은 선교회 소속인
매킨타이어(MaIntyre, J.․馬勤泰) 목사가 그를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북산은 구도자로서 3,4개월을 지냈다. 마침내 그는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인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기독교 장로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이 네 사람은 한날 한시
한꺼번에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받았으며, 이름이 전하지 않는 첫 세례인이 배출된 직후에 북산이 두번째로 세례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다시 만주로 돌아 온 존로스목사가 주도하는
중국의 한문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에 서너달 동안 착수하였다. 이처럼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힘을 모아 나라 밖에서 한글로 성서를 번역했다는
일 자체가 바로 한국기독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즈음 1880년 의주에 있던 10여명의 구도자들의 요청에 따라
매킨타이어 목사가 북산을 시켜 성경과 소책자 한 상자를 보낸 일이 있었다. 그랬는데 그가 머무르던 국경지역의 여관에서 짐보따리를 수상히 여긴
주인의 신고로 관헌에 의해 압수되고 동봉한 편지가 발각되어 약 3개월간 투옥된다. 당시 나라에서 금하던 천주교신자가 아닌 까닭에 풀려 나오기는
했지만 이로인해 북산은 거의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만주의 영구(營口)로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가 "자신을 위해
돌아가신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이 즐겁다"고 고백하였다.
이러한 북산의 열렬한 신앙은 이듬해인 1881년 100여명의
한국인들이 매킨타이어 목사를 찾아와 그가 개설한 성경공부반에 참석해 일주일간 공부하고 돌아가는 일로 발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당량의 한문으로
된 성경이 국내에밀반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존로스목사가 몇몇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추진한 한글성서
번역사업이 결실을 맺어 1882년 최초의 한글성서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 요한복음젼셔'가 심양(瀋陽)의 문광서원에서
간행되었다.
당시 한글성서 번역을 도운 핵심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북산은
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가지고 만주 서간도(西間島)의 한인촌에 전도하여 75명의 신자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찾아가 팔거나 읽기를 권하면서
기독교신앙을 전파한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사람을 권서인(勸書人) 또는 매서인(賣書人)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용어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자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성서중심적'이고 '자발적 복음 수용'이라는
한국기독교의 특색을 나타내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북산과 같은 개척적인 전도인의 활약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만주지역과 한반도 북부지역 몇 곳에 기독교 신앙공동체가 설립될 수 있었다. 당시 그가 뿌린 복음의 씨는 계속적으로 열매를
맺어 훗날 평안도 일대가 상당기간 동안 한국기독교의 중심지가 되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리고 1883년 북산은 존로스목사에게 전도인으로 인정받았고
국내전도를 위해 성서를 가지고 잠입하여 의주, 삭주, 강계, 구성 등지에서 전도한 끝에 10여명의 신자를 얻었다.그는 주일마다 자기 집에서
이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써 비록 조직된 교회의 형태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국내 최초의 개신교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때 북산은
의주에서 교리문답반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적어도 1885년에는 18명의 신자가 모인 예배처소가 마련될 정도가 되었다.
북산이 전도활동에 힘쓰고 있을 때인 1883년과 1884년에는
'사도행전' '마가복음' '마태복음'이 한글로 간행되었으며, 1885년에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간행되었다.
이어 1887년에는 '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 전체가 한글로 번역되어 5,000부가 출간되었는데, 흔히 '로스번역본'(Ross
Version)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북산은 1년 미만의 기간 동안만 성서의 한글번역작업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므로 번역가라기보다는 전도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후 북산은 1885년 4월 5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H.G.․元杜尤) 목사가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개월 후에 서울로 가서 그가 개최한 신학반에서 공부하였다.
한편 그해 말 북산은 서상륜(徐相崙), 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월급을 받는 한국교회 최초
의 유급 교역자로서 조사(助師․지금의 전도사에 해당함)에 정식
임명되어, 평북일대의 교회를 개척하는 중임을 맡았다. 훗날 1891년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매년 봉급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왕성하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북산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있던 언더우드 목사가
자기 집 사랑방에 14명의 세례교인을 모아놓고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정동교회(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에도
참가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 상경할 때마다 언더우드 목사에게 의주로 직접 와서 그곳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북산의
청을 받아들인 언더우드 목사는 드디어 1889년 의주까지의 신혼여행을 구실로 여행 허락을 정부측으로부터 받아냈다. 언더우드 목사는 의주에
도착하여 세례 지원자 100여명 가운데 세례문답을 통해 33명을 선발하여 세례를 베풀기로 작정했으나, 당시 국법상 공개리에 자국 영토내에서
기독교식 의례를 베푸는 일이 어려워 배 한 척을 빌려 타고 압록강의 중국편 연안으로 건너가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 대부분이 북산에 의해 전도받은 사람들이며, 이중에는 그의 딸과
사위 김관근(金灌根), 김관근의 부친 김이련(金利鍊) 등이 포함되었다. 이 때가 1889년 4월 27일이었으며 이를 '한국의 요단강 세례'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이 일이 정부에 알려졌으며, 곧 이어
선교사들의 여행금지령이 내려지고 서울에 있던 정동교회 예배도 일시 폐쇄되었다. 이 무렵 북산이 여러 서양인들과 자주 내왕하는 것을 보면서 당시
관가에서는 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과 적개심을 품었다. 결국 당시 평안감사 민병석(閔炳奭)의 지시로 의주에서의 기독교인 수색작업이 진행되었고,
북산은 서양인과 내통한 죄로 의주에서 체포되어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다 겪으며 상당기간 동안 투옥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혹독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북산은 풀려나자마자 계속해서 중국의 심양까지
여러차례 왕래하면서 존로스목사와 자주
연락을 취했다. 이러한 북산의 정성에 감동하여 1890년에는
존로스목사가 의주에 와서 그의 집에 한 달이상 머무르면서 신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마펫(Moffett,S.A.․馬布三悅), 게일(Gale,
J.S.․奇一) 두 선교사가 전국 순회여행을 하면서 의주에 들렀던 일이 있었다. 이 때도 북산은 두 선교사를 몸소 안내하면서 의주와 강계
일대에서 전도활동에 전념했다.
이와같이 열성적 전도인이었던 북산은 입국한 선교사들의 서북지역
전도여행을 길잡이하고, 스스로도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 교리를 전할 동역자들을 길러내는 등 매우 정력적인 전도활동을
벌였다. 한국 최초의 기독교 전도사로 평가되는 북산은 당시 선교사들이 남긴 편지내용을 살펴볼 때 1893년 12월이나 1894년 1월경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선교사들은 온갖 환난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능동적인 신앙인과
전도인의 삶에 충실한 북산을 '백사도'(白使徒)라고 부를 정도였다. 한마디로 북산은 '사도 바울'에 비견할 만한 한국 기독교 개척기의 기초를
다졌던 중요한 인물이다.
4) 의주 압록강 쪽복음 이성하(李成夏)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세례교인, 최초의 한글판 성서인 《로스번역》
등의 협조자의 한 사람.
평안북도 의주 출생. 1874년(고종 11)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김진기(金鎭基)와 함께 중국 둥베이[東北]로 가서, 스코틀랜드의 일치자유교회 소속 선교사인 J.로스(한국명 羅約翰)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1876년 마침내 이들 4인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로스를 도와 최초의 성서 한글번역사업에 정열을 쏟았다. 그리하여 1882년에 《요한복음》 《누가복음》(쪽복음)을 찍어냈는데, 1881년에 세례를
받은 상인 서상륜(徐相崙)이 합세하여 1887년에는 《예수셩교전서》(신약전서)를 완역, 그 초판이 대영성서공회(大英聖書公會)에서 3,000부가
출간되었다.
그는 이후 《마태오의 복음서》 등 4복음서와 《사도행전》 등을 몰래
숨기고 귀국,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한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 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5) 존로스 목사의 한글교사 이응찬
이응찬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6년 가까이
<예수셩교젼서>의 번역에 매달려 절반 이상 번역과 수정을 한 후인 1883년 9월 콜레라로 소천하였다. 예전에 술과 아편을 즐기던
그가 성경 번역을 몰입하여, 그 복음을 동족에게 전해주려고 애쓰다가 이국 땅인 만주 봉천에서 순교하였다.
성경의 번역은 로스의 계획과 추진, 감독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에서는 이응찬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응찬은 1876년부터 존 로스목사의 어학(語學)선생으로 활동하다
수세(受洗)를 결심했다.
9. 방문지 간략소개
1) 심양시(沈陽市)
심양은 중국의 이름있는 역사문화도시이고 요녕성의 성소재지로서
동북3성의 물자, 상업유통 및 정치,경제,문화, 관광의 중심지이며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철도, 항공, 고속도로등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전시의 총면적은
12980㎢, 시 중심 면적은
3495㎢이다.
청나라때는 청나라의 수도로 봉천(奉天)이라고 불리었다. 심양은
조선시대 병자호란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불모로 잡혀와 있었고,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의 교두보이기도 했다. 현재 심양은 인구
750만명의 중공업 도시로 동북지역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이다. 심양엔 '조선족 타운'이 형성되어 있을 만큼 한국 무역상과 관광객으로
성시를 이루고 있다
2) 심양/ 문광서원(동관교회)
성경의 길의 순례의 첫째 관문은 바로 한국복음화에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 스코틀랜드 선 교사 존로스 목사
(J.ROSS 1841-1915)의 생애를 되짚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국내에 유포되기까지의 과정은
존로스 목사의 선교활동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양은 요녕성의 수도로 조선말부터 일제시대까지 우리 민족이 이주하여
정착했던 곳이다. 한국교회사적으로 1877년부터 로스 목사가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선생 등과 함께 번역한 한글성경을 발행한 문광서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881년 7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의 지원으로 문광서원을 세운 로스 목사는 그해 10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문서인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성 교요령을 출간하고 이듬해 첫 한글성경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와 예수셩교요한 복음 젼셔������를
발간했다.
이를 시작으로 사도행전(1883년), 마가복음과
마태복음(1884년), 에베소서(1885년)에 이어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예수셩교젼서(1887년)를 발행했다. 심양 동관교회는 바로 옛
문광서원이 있던 곳이다.
1889년 설립된 동관교회는 1900년 농민봉기로 교회가 전소된 후
1907년 영국과 청나라 사이 의 외교적 노력으로 4억 5천만원의 보상비를 받게 됐다. 존로스 목사는 이 많은 보상비를 동관교회 재건축뿐만
아니라 중국 전국에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 및 병원 등 복지시설을 세우는데 사용했다. 현재의 동관교회 본당은 당시의 재건축된 건물로 성도들이
늘어나자 1998년에는 교인들의 100% 헌금으로 1천5백평 대지를 구입하여 4층짜리 교회당을 증축했다. 현재는 등록교인 3만5천여명에 매주
1만명이 넘는 장년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으며 더 나아가 28개 교회를 개척 및 협력하며 돌보고 있다. 동관교회 오른편에는 존로스 목사가 한글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던 문광서원 건물이 남아 있다. 사택으로 추측되는 이 건물엔 '번역조선문성경구지'(飜譯朝鮮文聖經舊址)란 안내 표지가
붙어있었다. 건물 내부엔 존로스 목사의 사진과 방명록이 있으며 본당에는 존 로스의 목사를 기념하는 귀중한 비문이 있다. 존로스 목사가 1915년
75세의 나이로 본국에서 숨을 거두자 1916년 5월 동북삼성의 각 교회 장로들이 38년간 조국을 떠나 하나님의 종으로 만주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며 복음을 힘써 전한 아름다운 헌신의 발자국을 중국에 남긴 것을 기리며 후대에게 본보기로 삼겠다는 의미에서다.
1883년 로스 목사가 신학 인재 양성을 위해 세운 신학교가 지금은
중국 정부가 인정한 동북신학교로 발전되어 현재
많은 중국인과 조선족 목사들을 배출하면서 중국 복음화의 불을 지펴가고
있다.
3) 본계수동(本溪水洞, 번시수이똥)
본계수동은 본계시로부터 서쪽 35KM 떨어진 본계만족자치현에 위치한
동양에서 가장큰 지하강물로 이루어진 대형 석회암 종류석동굴이다. 4~5억년전에 형성되었으며 수동,한동,사수동의 3개 동굴체로 구성되어 있다.
굴안의 지하강물은 현재 3KM까지 개발되었으며 동력보트를 타고 유람하는데 왕복 50분이 걸리며 천자만태의 석주,석화,석순,석만등의 모습에
보는이의 탄성을 일으키게 한다. 동굴안의 상시온도가 13℃ 로서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포근하다.
현재 개발된 길이만 3㎞, 앞으로 2~3년 후 5㎞가 될 석회암 동굴
'본계수동' 관광지는 현재는 50분 관광코스지만 앞으로 5㎞가 완성되면 1시간 20분 관광코스로, 관광객이 배를 타고 동굴의 화려하고 웅장한
자연의 조각품을 관광하는 코스이다. 최고 수심이 7m인 이곳은 맑은 물이 특징으로 투명한 물 속에서 비쳐지는 조명과 석회암 동굴의 다양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조각품들이 어우러져 동굴투어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중국에서는 연인과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주로 찾고 있어, 관광객에
대한 서비스 마인드가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4) 봉황성/ 고려문(변문진)
봉성 고려문은 심양에서 2시간거리에 위치한 지역으로 옛날부터 중국으로
오가는 조선사신과 상인들이 반드시 들려야 했던 국경관문으로 양국의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던 곳이다. 1874년 존 로스 목사는 이곳에
처음방문하여 조선상인들을 만나 한문신약전서을 전해주게 된다. 또한 1876년 두번째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이응찬선생을 만나 성경번역에 필요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존로스 목사의 두차례 고려문 방문으로 인해 조선상인들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면서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하게
되고 한글성경 번역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다. 서상륜 선생도 고려문을 통해 한글성경을 반입하려다 조선관리들에게 적발되어 성경을
압수당하
고 구금당했던 일화가말해주듯, 이후 많은 조선인 구도자들이 고려문을
거쳐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았으며 한글성경을 갖고 다시 고려문을 통해 귀국하여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지금은 작은 장터만이 남아있는 고려문에는
고구려봉황성터의 흔적만이 남아 이제는변문이라 불리우고 있다.
5) 단동/ 의주의 관문 우적도와
압록강,호산장성
호산장성은 단동시 동쪽에서 약 12㎞ 떨어진 압록강변에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우적도와 의주군을 바라볼수 있다. 호산장성은 고구려시대 박작성으로 조사되었으며 명나라시대인 1469년에 개축되여 400여년의
사회변혁을 거치고 대자연의 비바람과 인위의 파괴로 하여 면모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되었다. 1990년부터 1993년에 이르기까지 문물과
고고학자들의 조사와 검증을 거치여 600여m의 성벽과 봉화대, 군사영방등 유적들을 발굴하였다. 그 이후에 두차례를 거쳐 장성의 수복공정을
진행하였다. 호산장성의 또 하나의 특수한 코스는 일보과(一步跨)이다. 호산장성 밑 압록강가에 우적도라는 북한섬이 있는데 압록강의
상류로부터 하류로 흐르는중 가장 가까운 한곳으로서 거리가 불과 몇m밖에 되지 않아 한 걸음에 넘을수 있을 정도이기에 어떤 때에는 직접 북한군인과
교류도 할 수 있다. 중국이 1990년 장성을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그 위용이 웅장하고 장대하며 새로운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음. 또한 장성정상에
오르면 북한 의주가 손에 닿을 듯 보이며 건너편에 멀리 관서팔경(關西八景)중 하나이자 한국 누각을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통군정(統軍亭)이 희미하게 보인다. 한 발짝만 건너 뛰어도 닿을 것만 같은 지척에 북녘땅이 있다.
(북한의 우적도(압록강 하중도의 하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호산만리장성 아래에는 폭이 3미터정도 밖에 안되는 개울이 북한과 중국의 경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 우적도 너머로 의주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의주출신 상인 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최성균, 김진기 선생 등이 매서인이 되어 한글성경을 몰래 숨겨 반입하여
의주사람들에 전했고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 성경과 복음이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서상륜 선생은 한국개신교 최초의 목사가 되어 1884년 의주에서
한국 최초 중교집회를 가졌으며 동생 서경조와함께 황해도 솔내에 국내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당을 세웠으며, 백홍준 선생은 만주와 평안도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그 후 마펫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 등의 안내자로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고문 끝에 옥중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기도 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철교로 연결된 국경도시로 옛
지명은 안동이며 북한과 교류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지역 중의 하나다. 최근 북한 신의주 특구와 용천역사고로 국내․외의 구호물자 등이 단동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곳으로 북한과 가장 근접해 북한선교를 위해 중요한 창구역할을 담당하게 될 곳이기도 하다. 현재
단동에는 85개의 교회에 6천~7천명의 성도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 신의주방면과 위화도지역을 둘러볼수 있으며
신의주쪽 강언덕에는 주민들이 나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6) 집안/ 고구려의 융성한 도읍지와 최초의 한인교회 “이양자
교회”
집안(集安)은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인해 국 내외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그 만큼 집안에는 고구려의 유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식의 무덤형태와는 구별된 특징을 보여주는 수많은 고분군을 비롯,
동방의 피라미드인장수왕릉,
광개토호태왕비,광대토호태왕릉, 한때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터등이 중국의 동 북공정(東北工程)이란 프로젝트 하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지금은 중국 정부의 철저한 관리에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자국의 동북지역이 전략적 가치가 증대됨에 따라 고구려․발해등
이 지역 의 우리 역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켜 한반도가 통일됐을 경우 우리민족의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권을 미리 차단하고 만약에 있을 영토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교묘한 정치적 술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도에서 고구려는 단지 자국 변방지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부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히 고구
려가 우리 민족이었고 그 문화 역시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고유한
유산 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글성경 전래의 길” 순례는 한국교회사 뿐만 아니라 크게는 우리의
민족사를 되짚어 보며 역사의식을 함양하는 귀한 여정임을 느끼게 된다.
집안에서 만주 최초의 한인교회가 설립된 계기는 이곳 출신 김청송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매약상으로 일하다가 1881년 로스 선교사를 만난 김청송 선생은 심양
문광서원에서 식자공으로 한글성경발간을 도왔으며 그 후 세례를 받고 매서인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와 자신이 인쇄한 한글성경을 들고 복음을 전파한다.
그 결과 수백명의 개종자들이 생겨나고 1884년 11월 로스 목사와 그의 동료 선교사 제임스 웹스터 목사가 그의 요청으로 이곳을 방문하여
75명의 성도들 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이렇듯 집안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서간도 일대에 한인신앙공동체가 형성되고 개인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898년독자적인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게 된 것이 최초의 한인교회이양자 교회의시작이다. 지금은 이양자 교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지만 집안 단결교회 조선족 장문철 목사에 의하면 교회 부임당시 이양자교회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가 이양자 촌에서 그 옛날 조선인들이 살았다는
교당골이란 곳의 골짜기를 수차례 오르내리다가 우연히 耶蘇敎 初立 1989 됴선人이란 문구가 새겨진 바위 하나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바로 1898년에 조선인 최초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었다. 지금은 중국인이 소유지로 되어있어 직접 볼수는 없었지만 최초의 한인교회가
세워져 만주지역과 국내의 복음화의 큰 불씨가 되었다는데 교회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임은 알수있다.
7) 환인/고구려의 첫도읍지로
졸본산성(卒本山城)-오녀산성(五女山城)
고구려 건국신화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에서 탈출하여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추격병을 물리치고 정착한 첫 도읍지라 한다. 깍아지른 절벽 위에 넓은 공터와 우물이 있어 천연의 요새이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최초로 쌓은 성이라는
것이 국내외 학자들의 주장으로 바로 고구려의 첫 수도,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는 곳이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에 간추려 보면 "추모왕이 엄리대수를
건너 첫 도읍을 세운 곳은 홀본(졸본)인데 홀본은 비류골에 있고, 서쪽 산 위에 성을 짓고 도읍하였다"는 내용이 있고, 광개토대왕비보다 수 백
년 늦게 쓰여진《삼국사기》동명성왕편에는 "졸본촌(卒本村) (《위서(魏書)》에는 홀승골성(紇升骨城)이라 했다) 에 다달아 바라보니 그 땅이
기름지고 경치도 좋았으며 산과 강이 험하고 견고하였다. 마침내 도성으로 정하였는데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가에 간단한 집을 짓고
살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비류수와 졸본이 지금의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견이 있지만 오녀산성이 홀승골성이라면 비류수는 혼강(渾江)이고
졸본은 환인, 그리고 수도 또는 홀승골성은 환인의 오녀산성이라는 것이 일반론이다. 한 때 오녀산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초기 도성설이
부정되기도 하였으나 1986년 도기, 철기, 동기, 자기, 옥기, 금, 은 등 풍부한 고구려 유물이 발굴되고, 주위의 수많은 무덤떼들이 발견됨에
따라 최근에는 고구려 초기 도성설이 일반화되어 있다. 오녀산성의 남․서․북벽은 100여 m 쯤 되는 어마어마한 절벽으로 성벽을 쌓지 않더라도
자연히 요새를 이루고 있어서 남동쪽 일부와 동쪽에만 성벽이 쌓여 있다. 오녀산의 서남쪽에는 넓은 환인분지가 있고 동남쪽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이 있다. 환인에서 고구려의 다음 수도인 국내성으로 가는데는 통화로 통하는 육로와 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가 있었으며, 집안에서 심양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인을 거쳐야 했으므로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수도 집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대에 위치하였다.
오녀산성에는 동문, 남문 그리고 서문의 세 개의 문이 있다. 산성의 동문터에서는 성벽이 서로 엇갈리면서 한 쪽 벽이 다른 쪽 벽을 모나게 감싸서
옹성을 이루었는데, 고구려 옹성( 원형 또는 방형으로 성문밖에 부설하여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든든히 지키기 위하여 만든 작은 성 )으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듯하다. 해발 821미터의 산꼭대기에는 남북 1000미터, 동서 300미터의 넓은 평지가 있는데 물이 나오는 샘과 물이 고여
있는 작은 못이 있다. 현지에서는 이 못을 천지(天池)라고 부르는데 이 못의 물은 마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샘이나 천지나 모두
사용하고 있지 않아 그 곳의 물을 마실 수 없다. 다만 동쪽 성벽의 북쪽 성안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이 있는데 이 곳의 물은 계속 흘러 내려
맑고 맛이 좋은 물로 마실 수 있다. 꼭대기 맨 남쪽 끝에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했다는 장대(또는 点將臺)가 있는데 여기서 내려다보면 멀리 혼강과
환인 시내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존 로스목사가 봉황성을 거쳐 환인과 통화,그리고 집안지역을
선교한곳으로 그 자취는 사라졌어도 민족복음화의 정기가 살아 숨쉬는곳이기도 하다.
출처 : 한글성경전래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