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람세스 6세의 묘의 전체적 모습 (kv9)

람세스 6세의 묘실 천장화 낮과 밤의 서(The books of the day and night)
고대 이집트 13. 신왕국 황금제국의 몰락. 람세스 4세에서 람세스 11세까지(마지막회)
참으로 오랜 만에 펜을 들었다. 거의 한달 가량 감감무소식이어서 일까? 독자들이 그러더라. 그새 열정이 식은 거냐고? 내 대답은, “아니올씨다”. 본래 나란 인간은 대단한 편식쟁이인지라 새로운 분야에 흥미를 쉽게 붙이지도 않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해 그 분야에 반해버리면 그때부터는 정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죽도록 사랑해서 그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요새는 꿈마저도 이집트 꿈을 꾼다. 나의 의식과 무의식은 이집트의 숙주가 된 지 오래다. 고대 이집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매력에 도취된다. 마치 밝혀지지 않은, 그래서 신비로운 고대의 마법에 홀린 기분이랄까?!
책이란 좋은 거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을 수 있다. 나는 고대 이집트에 있었다. 때로는 진지한 탐험가처럼, 때로는 한가로운 관광객처럼 때로는 방랑벽을 주체 못하는 나그네처럼. 그렇게 고대 이집트 곳곳을 누볐다.
이정도면 그간의 기나긴 잠적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되었으리라 본다. 자, 그러면 고대 이집트 신왕국 마무리를 지어 보기로.^^
람세스 3세 사후, 약 80년간 “람세스”라 자칭하는 8명의 파라오가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이러한 잦은 왕위 교체는 왕권을 크게 실추시켰고, 강력한 왕권의 부재는 외교정책의 부재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집트는 국내외적으로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요컨대, 람세스 4세에서부터 람세스 11세까지, 이 시기는 선대의 영광과는 너무나 다른, 무늬만 람세스 시대였던 것이다.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테베는 독립의 조짐을 보이는데, 테베가 어느 날 갑자기 중앙 정부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시나브로” 일어났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테베가 고유의 독립성 독자성을 갖도록 물꼬를 터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강력한 전제군주 람세스 2세였다.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 잠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람세스 2세의 아버지 세티 1세는(19왕조 2대) 지중해와 서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려는 심산으로 수도를 테베(현재 룩소르)에서 나일강 삼각주 피람세스로 옮길 계획을 세웠고, 이어 보위에 오른 람세스 2세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현실화 했다. 이렇게 되자 테베는 새 도읍지인 피람세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테베의 지방 정부는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테베의 실세, 즉 아문 신관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중앙 권력이 약화되면서 외국과의 교역도 급격히 줄었고 이집트의 경제는 점차 악화되었다. 전술 했듯이, 데이르엘 메디나에 기거하는 국가 공무원들은 제때 생필품과 보수를 지급받지 못하자 파업을 벌였고, 그들 중 몇몇은 메디네트 하브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장제전의 커다란 담장 아래 집을 짓고 농성을 이어나갔다. 이 시기는 횡령, 부정부패, 폭력 등 왕조의 멸망기에 예상 가능한 모든 범죄들이 횡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리비아 족과 사막의 도적떼들이 다시금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하루하루 황폐해졌다.
“우리는 구리 곡괭이로 굴을 파서 왕의 무덤으로 들어갔다. 무덤 뒤쪽에는 왕의 미라가 누워있었다. 우리는 외관을 뜯어냈다. 그러자 호사스런 자태로 누워있는 왕의 미라가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에는 황금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고 목에는 금으로 만든 많은 장신구들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황금으로 덮여 있었다. 미라의 관도 안팎이 모두 금이었고 온갖 값비싼 보물이 박혀 있었다. 우리는 금을 파내고 부적과 보석을 갖고 나왔다. 우리는 금을 똑같이 나눠 가졌으며 배를 타고 테베로 돌아왔다.”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중인 애벗 파피루스 일부 발췌-
왕조 말엽 최악의 범죄는 아마도 왕들의 계곡과 왕비들의 계곡에서 자행되던 도굴이리라.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백성들부터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까지, 그 당시 테베 시민들 거의 대부분이 도굴에 연루되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사회 풍조가 만연해지자, 한때 파라오의 영생을 돕던 데이르엘 메디나의 인부들 역시 도굴에 적극 가담하게 되는데, 이들이야말로 도굴 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된다. 정확한 무덤의 위치, 분묘 안 공간 배치와 부장품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도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눈감아 줄 공범이 필요했고, 따라서 탐관오리 섭외는 필수적이었다.
클래식한 도굴 수법은 뒤에서부터 파 들어가는 것이었다. 입구의 봉인이 멀쩡해야 의심을 받지 않을 테니까. 그러면 훔친 물건이 완벽히 처분될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운이 좋다면 그들의 범죄가 영원히 은폐 될 수 있을 터였다.
도굴꾼들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래서 경비가 비교적 소홀한 17왕조의 무덤부터 공략했다. 이후 도둑질이 손에 익자, 차츰 대범해진 그들은 매장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의 안식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처음 얼마간은 그들의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 들키지 않게 부장품을 팔아 양질의 식사를 했을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누려보는 행복이었으리라. 그러나 얼마 후 양식이 떨어지자 가장은 굶주리는 식솔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다시금 목숨을 건 모험을 자행했을 것인데, 이번에는 독자들의 예상대로 현장에서 붙잡혔을 것이다.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무죄로 풀려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데, 십중팔구 재판관 중 여럿이 그 사건의 공모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죄로 판결 받을 경우, 그 즉시 사형이었다. 파라오의 무덤을 범했다는 것은 곧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살아있는 파라오는 호루스의 화신이었고, 죽은 왕은 오시리스 그 자체였다.)
이렇듯 왕권의 약화로 인해 왕들의 계곡 치안이 약해지고 도굴이 들끓자, 테베의 아문 신관들은 왕의 미라만큼은 보호하고자 원래의 무덤에서 미라를 꺼내 은밀한 장소로 옮긴다. 이 은닉처는 두 곳인데, 앞서 이미 서술했지만, 이번 기회에 한 번 더 복습해 보자. 먼저 데이르엘 바하리의 은닉처부터. 이곳에는 17왕조 최후의 왕 세케넨라타우 2세, 18왕조 초대 아흐모세, 아멘호테프 1세, 투트모시스 1세, 2세, 3세, 19왕조 세티 1세, 람세스 2세, 그리고 20왕조 람세스 3세 등 수많은 미라가 모셔졌다. (1881년, 2대 이집트 고고청 장관 가스통 마스페로 & 조수 에밀 브룩슈가 발굴)
또 하나의 은신처는 왕들의 계곡 35호분(KV35)에 있는 아멘호테프 2세의 묘인데, 발견 당시 이곳에는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 외에도, 투트모시스 4세, 아멘호테프 3세, 19왕조 메렌프타하, 세티 2세, 시프타하, 20왕조 초대 세크나크트, 람세스 4세, 5세, 6세가 잠들어 있었다. (1898년 당시 이집트 고고청 장관을 지낸 빅토르 로레가 발굴)
사실 이 모든 재매장 사건은 20왕조 몰락 이후 제3 중간기 초에 일어나므로 이번 편에 굳이 집어넣지 않아도 되지만, 혹시 독자들 중에 그토록 도굴이 만연했는데도 어떻게 신왕국 시대 파라오의 미라를 볼 수 있는지, 어떻게 그들의 시신이 무사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거 같아서 고민하다가 서술하게 되었다. 어쨌든 미라 은닉 사건은 20왕조 멸망 이후에 일어난다는 것!
BC 1070년경 람세스 11세가 살아있는 데도 테베의 대신관 헤리홀은 스스로 왕으로 자처하며 상이집트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런데도 람세스 11세는 반란군을 제압하기는커녕 성명 한 줄 조차 내지 못했다. 왕이라는 게 이 모양이었다. 일찍이 고왕국 시절(3왕조~6왕조) 파라오는 왕인 동시에 신이었다. 중왕국 시대(11왕조~12왕조)를 거쳐 신왕국에 이르면서 신권은 아문 신관들에게 넘어갔지만 왕권은 여전히 그 위에 존재했다. 그러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결국 이집트는 상 하 이집트로 분열되었다. 이로써 신왕국 500년사는(BC 1550년~BC 1070년)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이집트는 분열과 항쟁의 시대, 제 3 중간기를 맞게 된다.
고대 이집트 신왕국 끝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