晋州姜氏 姜門의歷史.
고구려의 고수전쟁 598년 임유관 전투의 영웅이신 以式 시조님의 기개로써 고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구한 기세의 고구려 정신의 성씨다.
고구려의 강성대국을 이루고, 비굴하지않게 호방한 국민정신세계를 엿볼수 있는 정기, 거대국이었든 수나라를 상대로 굴하지 않고 당당히 승리한 정신의 발로이다.
400여년후의 고려초 인헌공=邯讚(948~1031), 은열공= 民瞻(963~1021), 숭조님들 은 구국정신으로 이어진 집안의 姜門이다.
1974년에 창립된 진주강씨 중앙총회.
시조님을 같이 모시는 단일본의 자랑스러운 긍지로 분파에 연연하지 않고 숭조, 돈목을 기치하에 위대하신 선조님의 위업을 현창하고 일족간의 화목하여 옴을 타성씨들의 부러움속에 자랑스러웠는데(15대,8분의 회장님), 16대회장인 박사공의 현송님의 취임 후부터 특권의식가지고 불협화음을 일으켜 종사를 전횡하는 현 집행진의 불손함에 섬찍함을 느낌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유구한 강문의 사적을 무시하고 선조님들의 서열을 무작위로 가나다순으로 기록한다는 발상에 경악금할수없게한다.
종사의 순리를 거역하고 상식을 져버리는 행태.=“은열공파 대종회가 종사는 협조는하지 않고, 비토하고 편 가르기로 중앙회와 강문을 욕보인다”고 하는 현 집행진의 오만불손함은 종문의 명예와 화합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역사는 말하는 것.=고려초기의 기강속의 정통의 국가의 기록의 역사의 인물들의 선조님들을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박사공(1274년)파는 국가의 기강이 무너진 문란한 세파 기록, 자신의 목숨도 유지키 어려운 혼란의 세파의 역사, 당시의 기록조차도 없이, 권근의 양촌집에 기록된 인물이신 박사 啓庸님을 중시조로 모셔지는 분파됨이 아닌가?
1,110년에 등관하신 諱 洪=척준경과 그의 사위 이지원(李資謙子)한테 1120년? 경, 멸문지화 당하고 대봉산파괴 됨은 그곳에 강문의 본거지의 역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권력자에 의하여 대봉산을 비봉산으로 전락시킴,의 아픔의 역사이었다.
그리고 후에 휘손된 상처가 아우러지고 대봉산에 봉자리를 만들어주고, 다시 재정립하여 시조님과 은열사의 구지사적에 나타남은 은열공께서 창건자이시기에 이루워 놓은 업적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닐까?
박사공파에서는 자기들만이 정통이라는 듯이 왜곡하려는 의도적으로, 숭조님들을 폄하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박사공= 啓庸숭조는 1274년=충렬왕때 일본원정군으로 활약의 기록이,양촌 권근(1352~1409)의 저서 양촌집에 기록된 역사에 의하여 만들어진 족보가 아닌가?
고려의 정통의 역사기록의 숭조님들이 폄하되어 져서는 않된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는 속담.
박사공 계용님보다 250년 이전의 분들의 숭조들이시며, 근400여 년후의 정사도 아닌 양촌집에 나타난 기록인데 그 숭조가 정통이라고 주장이 가당할까?.
1691~1698년(신미보)에 진주강문의 족보가 처음 탄생되고,1727년 정미보가 학사공 10대손 백각공=강현, 숭조님이 만드실 때, 우리 강문은단일 본으로 2계파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세월이 지나면 분파 되는 것은 당연지사. 박사공파에서 諱자분들을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자기들 만의 정통성으로 치부하는 그러한 작태는 행해져서는 안된다.
현 강문의 중앙 종회를 자기들의 권력으로 만들기 위함의 위험한 발상에서 수치스러운 작태다.
진주강문이라고 함은 은열공께서 봉산사에 以式시조님의 사당이 모셔졌기 때문에 진주강씨라고, 불리게 된것이라고 보인다.
박사공파 숭조님도 중시조님들파인 인헌공이나, 은열공의 후예분일 것임.
고려의 혼탁한 무인정권과 외침으로 무엇하나 정통의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모르는 역사보완도 필요하지만 허구적인 가감은 없어야 한다.
諱 姜진 875년에 신라말에 등관기록에 진양후를 봉작을받음 으로 진주강문이라고 한다고 박사공파에서는 말들을 하지만, 휘강진때에 시조님의 사당이 진주봉산사에 모셔졌다면 인헌공파에서 금천강씨라고 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은열공께서 진주봉산사에 시조님의 사당이 모셔졌기에 은열공구지사적이 봉산사에 남아있고 전래되어 진주강씨라고 본이된것일 것이다.
1972년 발행한 임자보 이전의 족보에는 봉산사 內 은열공 구지사적의 표기가 없는데 갑자기1972년에 발간한 은열공파 대동보 산도에 “은열공구지를 표기한 것은 오류라고 결론지었다”는 진주강문의 현행집행부의 억지.=종보353호.
그예전의 족보들에
1918년=무오 진주강씨 세보(27책), 1936년=병자(은열공, 어사공합본) 진주구기도, 1972년=임자, 은열공파 대동보 12권의 기록에= 현 봉산사 위치에 은열사 사당도가 그려져 있고, 현은열사 위치에 옥봉유허(옥봉구지)라고 명기 되어 있다.
중앙종회장과 집행자들의 은열공파를 폄하하는 발표된 것은, 현행 집행진들이 박사공 중심축으로 편성되어 편 가르기 하는 작태로 이뤄진 일로써, 300여년 전분들을 제치고, 박사공 계용을 상위로 조작될 수는 없다.
박사공파에서 상위 숭조님들의 성명을 사전식의 가나다순으로 표기되는 몰상식적인 것은 폄하목적 외에는 없을 것이며, 박사공파에서 행하고 있는 작태는 강문의 위계질서를 무너트리며, 동문문종에 재를 뿌리는 것이다.
즉각 추태를 버리고 화합으로 문중으로 이끌어야 된다.
진주강씨 대종회는 숭조, 돈목하고 문중화합이 정도가 되어야 한다.
권력을 잡기위한 파벌조성으로 다른 계 파가 폄하는 되는 일이 있을수도 있어서도 안된다. 잘못을 지적하는 문중의 사건은 사실조명이 우선이고, 진실이 정도이다.
"은열공파는 종사에는 협조는 않고 비토하며 편가르기를 하며, 문중을욕보인다"고 하며, 은열공파 종회를 폄하하는, 현 집행부의 오만과 독선으로 근본의 뿌리를 뒤흔든다면 더 이상 같이 갈일이 없지 않은가?
정통의 역사에 뚜렸한 인헌공과 은열공이 폄하되고, 400여년 후의 문사인 개인의 기록인 양촌집의 인물이 우선시 된다는 것은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어느 강문이든 폄하되어서도 안된다.
인헌공파를 축출하고, 은열공파를 폄하하여 혼탁으로 몰아가는 행위는 무엇인가?
종회장은, 중용의 정도로 이끌고 가야한다.
그러한 몰염치한 문중과 같이 해야 할 가치가 있겠는가?
말도 않되는 추태를 보이고 있으며 당신들이 얻어지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진주강씨 은열공파”를 흠집 내기를 즉각 중지하라.
그러한 집행부는 다시금 헤아려 보아야 된다.
왕눈벌. 010-3403-3936, daum blog.net/beeking 다음카페/naturebee
2010. 4. 은열공 27세손, 煥 昌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