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군 때문에 천주교는 물이 들어오고 개신교는 물이 빠졌다. 그러나 천주교에 물이 들어 오게 만드는 현상은 시장의 일시적 혼란일 뿐이다. 본래 천주교의 주류는 보수적인데 탄핵국면을 맞아 평소에는 찬밥 신세인 한 줌도 안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활동 때문에 정의로운 상표로 보이는 것이다. 좋은 예로 정의구현 사제단의 얼굴격인 함세웅 신부가 미국에 가면 성당 근처에는 발도 못붙이고 진보적 단체가 주최하는 곳에서만 빌표를 할 수 있다.
반면에 개신교는 평소 하던대로 해서 동네북이 된 것이다. 이번 처럼 역사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개신교가 맞는 돌팔매질은 상처가 되어 머지 않은 어느 날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신학대학원의 채플에서 설교를 할 일이 있었을 때 나를 잘 아는 총장이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 애들이 굉장히 보수적이에요.' 라고 했다. 그래서 쓸데 있는 소리만 하려고 애를 썼다. 즉 은혜로운 소리만 하려고 한 것이다.
개신교 안에서 헌법 정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과 ‘은혜’이다. 따라서 “덕이 안되는” 혹은 “은혜롭지 않은” 일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항에 해당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민감한 문제에 대하여 ‘덕’ 혹은 ‘은혜”라는 말을 방패로 내세워 숨는다. 이성과 상식이 실종되고 비겁과 비굴함이 '은혜'로 포장된다. 따라서 현실에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거나 애둘러서 가는 것이 고착화 되었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세상 말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인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빈민운동의 경험에서 배운 바가 있다. 내가 그들을 더 잘 살게 해줄 수는 없지만 깨어나서 더 똑똑해질 수 있게 도울 수는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요만큼 좋아진 것은 사람들이 똑똑해진 탓이다. 마그나 카르타, 프랑스 대혁명. 인권 선언, 유엔 인권 헌장 등등 모두 하나님이 한 것 아니고 사람들이 피 흘려 이룬 것들이다.
그러나 오히려 기성 종교는 중요한 고비마다 변화를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었다. 2,000년 교회사를 통하여 기독교가 그 사회의 다수가 되었을 때 긍정적 역할을 한 적이 있었던가?
예수가 말한 비유들, 밀가루 반죽 안에 있는 누룩, 국 속에 있는 소금, 이리 가운데 양 등등의 특징을 보자! 이 비유들은 이 세상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소수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번 사태에서 종교의 평가 기준은 단연코 ‘화장실’이었다. 물론 화장실을 개방 하고 싶어도 프랜차이즈인 가톨릭에 비해서 완전 자영업인 개신교들은 개방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다. 아무리 영업 성격이 그렇더라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똥 오줌을 눌 수 있도록 편리를 제공하는 하나님을 선택할 것이다.
시위대를 항하여 화장실 문을 걸어잠갔던 8년 전의 사랑의 교회, 이번의 여의도 잡복음교회 등등.
예수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화장실을 향하는 거룩한 행렬을 안내하는 한남동 대통령 공관근처 꼰벨뚜알 수도원의 수사의 모습에서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