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텍과 마야 그리고 콘돌이 넘나들던 잉카의 영봉을 찾아서(4) /전 성훈
[ 중남미 유일한 포르투갈어 국가, 브라질 ]
남미는 A(아르헨티나), B(브라질), C(칠레)가 주도권 경쟁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남미의 맹주는 막강한 자원 부강의 나라 브라질이다. 남미에서 미국에게 'NO'라고 말한 유일한 나라다. 9.11 테러 사건이후 미국은 입국심사를 강화하였다. 일부 예외가 있지만 전 세계 모든 국가 사람들이 미국에 입국할 때는 열손가락 지문을 채취 당하였다. 브라질이 이에 대하여 항의하자 미국은 무시하였다. 그러자 당시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브라질식으로 보복하였다. 미국적기의 승무원과 미국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브라질 입국에 제약을 가하여 입국심사 시간을 무한정 길게 끌었다. 비행기 조종사가 이런 조치에 항의하는 뜻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이자 브라질 국가를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구속하였다. 결국 미국무장관이 브라질에 와서 협상 끝에 조종사가 풀려났고 브라질산 물품에 대한 미국의 관세를 낮추었다. 미국이 브라질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브라질이 반미 전선으로 돌아서면 남미의 맹주인 브라질의 영향으로 남미 전체가 반미로 돌아설 위험성이 있어서 미국이 어쩔 수 없이 브라질의 요구 사항을 들어 준 것이었다. 이런 브라질의 행동을 보고 아르헨티나가 따라 하다가 수년 동안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를 당하였다. 결국 아르헨티나 경제에 심대한 악영향을 초래하였다.
12월 1일(목), < 리오의 명물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 그리스도상 >
페루 리마에서 야간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루 공항에 도착하였다. 리오 국제선 공항에서 전용버스를 타고 국내선 공항 근처로 한 시간 정도 이동하였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어 국내선 공항 매점에서 간단히 빵을 사먹었다. 카페에서 기다리는 동안 주위를 살펴보니 흑인 청년이 ‘구두 통’을 어깨에 둘러매고 구두를 닦으라고 한다. 이곳에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스페인과 협약 하에 브라질을 차지한 포르투갈은 이곳에서 황금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척 실망했다. 이 땅이 무궁한 자원 보고일 줄은 그 당시 과학 기술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카니발로 유명한 리오, 포르투갈 정복자들이 강이라고 생각한 리오 만(BAY)에 들어온 시기가 1월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포르투갈어로는 ‘티오데자네이루’라고 불렀다. 영어식 발음으로는 리오데자네이루이다. 리오는 강, 자네이루는 1월이므로 1월의 강이라는 의미다.
브라질은 빈부 격차가 심하고 학벌에 의한 차별도 심하다. 브라질 감옥은 대졸 출신의 부유한 사람들과 고졸이하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분하여 대우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일은 대졸 출신 부유층이 죄를 지어 감옥에 가면 주말에 부인이나 애인이 면회 신청을 하고 합방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인 사회다. 대졸 출신은 형기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면 유용한 일을 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고졸출신 이하는 그렇지 못하다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가 정착하고 있는 사회다. 그래서 60년대 초반 남미지역 해방신학의 발생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빈부 격차와 사회 계층간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인종 차별은 거의 없다.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결혼 그리고 그들의 2세와 백인, 흑인 또는 원주민과의 결혼이 용인되었던 사회다. 원활한 노동력 확보라는 필요성이 피부 색깔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는 사회가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사회 모습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현실을 받아드리는 유연한 사고방식에는 머리가 숙여지기도 한다.
리오의 첫 방문지는 예수 그리스도상이다. 코르코바도(CORCOVRDO, 곱사등이처럼 솟아오른 곳)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상.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이다. 왕정을 무너뜨린 공화정 정부에서는 국민적 통일성을 확보하려는 구심점으로 교회 당국과 협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상 건립을 결정하였고 가톨릭교회에서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펼쳤다.
예수 그리스도 상은 오늘날 리오의 상징이자 새로운 세계 7대 불가사이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다. 날씨가 매우 변덕스러워서 예수 그리스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다. 우리 일행이 찾았을 때는 구름이 낀 상태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상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거의 바닥에 누운 듯 한 자세로 스마트폰에 예수 그리스도상 전체를 잘 담았다. 내 솜씨도 쓸 만하다.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리오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려고 케이블카를 타고 슈가로프산에 올랐다. 리오는 산과 바다(대서양)와 호수 그리고 도시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멋지고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리오 시내로 들어가 성세바스챤 대성당을 관람하였다. 예수님 십자고상 왼쪽에는 성모님이 오른쪽에는 사도요한의 모습이 새겨진 특이한 십자고상을 보았다. 성탄절을 앞두고 거대한 구유가 설치되어 있다.
올 여름 브라질 올림픽에서 비치발리볼 경기가 열렸던 ‘코파카바나’ 해변 근처의 식당에서 브라질 전통 음식을 먹었다. 종업원이 커다란 창 모양의 도구위에 부위별 고기를 찍어서 손님이 원하는 만큼 고기를 잘라주었다. 동양의 나그네인 내 입맛에는 그다지 잘 맞지 않았다.
12월 2일(금), < 리오만 해상 투어 및 이과수로 이동 >
브라질 동남부, 대서양 연안의 ‘리오데자네이루’주에 위치한 과나바라만 해상 투어로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리오항의 외관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는 코스였다. 왜 리오가 세계 3대 미항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남미의 절경 아니 지구상의 폭포 중에서 신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인 이과수폭포, 그 이과수폭포를 관람을 위해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이과수로 이동하였다. 공항 출국장 검사대에서 복불복 검사에 걸렸다. 여자 세관원이 옆자리로 가라고 손짓을 하니 남자 세관원이 특별 검사를 하였다. 하얀 비닐장갑을 낀 젊은 남자 세관원은 내가 신발을 벗자 검사대 X-RAY에 투시를 하고 복장도 세밀히 훑었다. 다행이 옷 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다녔기에 이상이 없었다. 세관 검사에서 이런 일은 늘 있는 것이라 속수무책 말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과수( FOZ IGUASU)에 도착하여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만나 교포가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삼겹살을 넣은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소주 몇 잔 마셨다.
12월 3일(토), < 이과수폭포의 장관 >
이과수폭포는 1500년대 말 스페인 선교사가 원주민들의 말을 듣고 탐험하면서 발견하였다. 그 선교사는 본국인 스페인 국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 하였으나 당시 스페인 국왕은 금광이 아니라는 이유로 폭포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 그 까닭에 폭포는 300년 동안 밀림 속에 파묻힌 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900년대 초기 미국인에 의하여 재발견되었고 193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과수폭포는 현재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나 원래 이과수폭포 전 지역이 파라과이 영토였다. 브라질 관할지역의 이과수폭포에서는 ‘악마의 목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악마의 목구멍’은 아르헨티나 관할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과수폭포 입구에는 유네스코 세계자연 유산으로 등재된 표시가 있다. 입장권을 산 다음 드넓은 자연 공원에 전용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폭포 소리를 따라서 폭포가 보이는 곳으로 내려갔다. 수많은 관광객이 장엄한 경치에 매료되어 소리를 지르거나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한 동안 사진을 찍고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폭포의 장관을 정신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길이 없다. 오후에는 이과수폭포 보트투어에 나섰다. 오픈카를 타고 정글을 지나 강줄기로 이동하였다. 매스컴에서 또는 여행기를 통하여 환상적으로 보였던 이과수폭포 보트투어. 폭포 물벼락 때문에 속옷까지 완전히 젖어 귀중품을 가이드에게 보관하고 간단한 옷과 비옷을 걸치고 구명조끼를 입었다. 보트가 스피드를 내면서 달리기 시작하자 타고 있던 우리 일행은 괴성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보트 전방에 앉아있던 나는 신나게 손을 흔들고 팔을 내저었다. 보트 운전 조수는 열심히 수중카메라로 우리들 모습을 찍었다. 보트 운전 조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들었다. 내 모습이 멋있다는 의미였다.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폭포 중 어느 지점에 이르자 보트는 폭포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그 순간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그 물줄기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도저히 그대로 보트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넘어지면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무방비로 얻어맞을 수 밖이 달리 길이 없었다. 그러나 기분은 더 없이 좋았다. 옷이 다 젖었어도 모두가 소리를 지르거나 얼굴을 다리 속으로 푹 파묻고 있었다. 보트에서 내리자 여러 사람들이 내가 제일 멋있는 포즈를 취했다고 하여 저녁 식사 때 와인 한 턱 냈고 보트 운전기사가 촬영한 DVD를 구입하였다.
< 국가지도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 이과수폭포를 빼앗긴 파라과이 >
이과수폭포 관람을 마치고 다리 하나를 건너 파라과이로 이동하였다. 브라질과 파라과이는 강을 사이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1860년 초까지 남미에서는 파라과이가 가장 부강하였다. 당시 파라과이 대통령은 인접국가로 영토를 확장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인접한 우루과이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루과이는 브라질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브라질도 눈의 가시 같은 파라과이를 쳐부수기 위해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와 3국이 협력하여 파라과이와 7년간 전쟁을 하였다.
7년 전쟁 와중에 파라과이 대통령은 부정 축재를 하면서 결국 3:1의 전쟁에서 패하였다. 승리한 세 나라는 보상금으로 이과수폭포 주변 영토를 빼앗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나누어가졌다. 게다가 파라과이의 재건을 억제하고자 남자의 씨를 말리는 정책을 펴서 남자 어린아이까지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이 때문에 파라과이는 심각한 남녀성비 불균형을 가져왔다. 지금도 파라과이에서는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가 누구이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세를 떨친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가장 유연한 이민정책을 펼치면서 인구증가에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 탓에 파라과이는 남미 불법이민자의 창구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적당한 비용을 지불하여 합법적인 이민자로 둔갑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한다. 파라과이 면세구역인 사우다드 엘 에스테 지역을 구경하여 면세품 등산용 가방을 하나 구입하였다. 파라과이 땅을 잠시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다시 브라질로 귀환하였다. 국경을 통과 할 때는 비행기처럼 요란하게 검색을 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전용버스에 앉자 기다리고 가이드가 여권만 회수하여 입출국수속을 마쳤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남미 각국의 전통 복장을 한 남녀 무희들의 춤과 노래를 보고 들으며 즐거운 저녁 한 때를 보냈다. (2016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