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 안에 귀속된 창작과 예술의 공간
지난 2020년 9월 23일 전통공연창작마루를 찾았다. 동대문전철역 9번 출구를 나와 불과 몇 발자국 앞 정면에 보이는 동대문종합시장의 N동 엘리베이터를 타면 곧장 9층 입구에 이른다. 이처럼 가까운 곳에 근래에 보기 드문 문화공간이 마련됐으니,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2개 층과 옥상까지 넓은 공간을 모두 둘러보았다. 이곳은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만든 시설로, 공식 명칭은 '전통공연창작마루'이다. 문화계의 획기적인 업적이지만,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개관식을 생략한 채 조용한 출범을 하게 됐다.
이 공간의 의미를 몇 가지 가늠해볼 수 있다. 우선 대규모의 전통공연예술 창작거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이제부터 재단의 설립 취지에 따라 창작 진흥에 필요한 여러 지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국내에 문화기관이 많지만, 근래 이렇게 알맞은 공간과 시설을 갖춘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음으로 전통공연창작마루가 지닌 현대성이다. 종합시장 건물 안에 문화시설을 만든 것을 두고 시비가 따를 수도 있으나, 삶의 터전 안에 머물며 사랑받는 문화 공간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싶다.
먼저 일본 가나자와시에 위치한 '시민예술촌'은 과거 방적공장을 개조한 문화공간이다. 시내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어 접근성이 뛰어나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이곳의 관계자는 나에게 "변두리 우범지역을 젊고, 밝고,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특별한 목적으로 마련한 음악전문 공간"이라고 소개했고, 실제로도 젊은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야마가타현민홀'이다. 지난 3월 야마가타 역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 개관했지만, 이전까지는 백화점 맨 위층에 있었다. 이곳에 방문했을 당시 "장 보러 오는 고객들이 주로 공연의 관람객이 되고, 주차 이외의 여러 가지 서비스를 동시에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각종 예술단체의 집합소로, 재밌는 공연들이 줄을 잇고 있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대문시장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생긴 것은 시비의 대상이 아니라 창작도시의 한 대표모델로서 중앙정부 그리고 서울의 자랑거리로 여겨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융합적인 문화의 공유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장(field)이 창출된 점에서 그러하다.
#광무대의 옛터
전통공연창작마루는 광무대의 옛터에 새 둥지를 틀었다. 동대문 안에서 바라보이는 동대문종합상가는 지난날 동대문전철역 광장기지였고, 그 기지 내에 극장 광무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연이지 필연인지, 역사적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1907년 5월 21일, 「만세보(萬歲報)」에는 광무대가 개설된다는 소식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아국에 유래하난 제반 연희등절(等節)을 일신 개량하기 위하야 영남에서 상래(上來)한 창가 여서아(女誓兒) 연화(蓮花 13세)와 계화(桂花 11세)랄 고용하야 각항(各項) 타령을 연습케 하난데, (중략) 명창으로 칭도하는 김창환 송만갑 양인을 교사로 정하야, (중략) 위선 춘향가부터 개량하야 일주일 후에" 공연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28일 밤 8시에 연화는 향단역, 계화는 춘향역을 맡아 화답창(대화창, 분창)으로 공연했는데, 이 공연이 광무대 창극의 시작이었다.
1898년에 친미파였던 이채연과 이윤용이 고종에게 전기와 전차의 필요성을 설득해 정부의 허가를 받아 '한성전기회사'를 세웠다. 자본이 없었으므로 미국인 콜브란(Collbran)과 보스트윅(Bostwick)과의 도급계약으로 설립할 수 있었다. 먼저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발전소가 건립됐고, 1899년 5월부터 동대문을 기점으로 남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철이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차가 빠르기는 하지만 무섭다는 이유로, 또는 돈이 든다는 이유로 승차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빈 수입담뱃갑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영화 관람을 허용했다. 전차가 안전하고 편리하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한 일종의 판촉행위였지만, 영화 상영과 수입 담배 판매로 수입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영화관은 날로 인기를 얻게 됐는데, 일층 관중과의 친밀한 유대를 더하기 위해 영화관을 개조해 만든 것이 바로 광무대였다. '광무'라는 이름은 고종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전통 광대들을 위한 무대가 없었던 시기였기에 광무대는 당대의 명인과 명창, 유명 광대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였고, 이 무대를 통해 전통공연의 무대 편입이 이뤄졌다.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이 ❬춘향전❭을 창극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을 '판소리 개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관립 실내극장인 협률사가 문을 닫은 뒤, 사설극장인 광무대가 생기자 곧 뒤를 이어 원각사, 연흥사, 장안사 같은 사설극장들이 문을 열었다.
광무대는 극장 경영의 일인자였던 박승필(1875~1932)이 임대해 운영했다. 그는 1912년부터 단성사를 운영하며 신파 단체를 지원했고, 영화 ❬의리적 구투❭(1919), ❬장화홍련전❭(1928)을 제작했으며, 나운규 및 이경손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등 예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이다. 식민지 시대에 들어선 직후 1913년 5월, 광무대는 결국 폐관됐고, 한성전기회사는 그해 9월에 일본 측이 운영하는 일한와전(瓦電)으로 넘어갔다. 광무대는 한 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을지로 황금유원(遊園)연기관을 임대해 공연 활동을 계속하다가 1930년 5월에 한 소년의 실화로 연기관은 불타고 단체는 해산되고 말았다.
#광무대 정신으로 거듭나는 전통공연창작마루
전통공연창작마루는 미래를 향한 창작거점으로서 새로운 실험과 창작적 시도에 앞장서야 한다. 이를 위해 '광무대 정신'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광무대는 전통예술을 창조하고 선보이는 선진적인 문화공간이었다. 특정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전통문화 정체성의 재발견 및 재창조라는 예술 정신으로 일관했다. 일본의 조선문화에 대한 조직적 탄압이 한창이던 시기에 오직 광무대가 조국의 전통을 어렵게 고수해 온 사실을 우리는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일본식의 '개량'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창작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바로 이러한 태도와 실천이 광무대 정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문화의 계승을 후진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후진적인 사고이다. 모든 창조는 지나온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가 서양문화를 수용하는 것은 역시 서양의 전통을 배우는 한 과정일 뿐이다. 끝없이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시대에 전통예술 또한 창작의 사명이 날로 막중해지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예술인들이 세계의 문화를 열심히 탐색하고, 창조적인 예술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다방면의 전문성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충고해 두고 싶다.
글 서연호(고려대학교 명예교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천리대학 및 동북대학 외국인교수.
『한국연극사』(근대편, 현대편, 일본어판), 『한국의 전통연희와 동아시아』(일본어판), 『일본의 지역문화 경영』 등 다수의 책을 집필했다.
출처 [월간 공진단] 풍류재담 :: 전통공연창작마루, 광무대의 옛터에서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