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와 박정희의 ‘70년 전쟁’
2015년 8월 17일 월요일 10시 18분
2015년 8월 17일 월요일 10시 18분
-친일파가 독립군을 이길 수는 없다
2015년 8월 15일은 광복 70돌이 되는 날이었고, 17일은 민주·민족·통일운동가 장준하가 타살당한 지 40주기가 되는 날이다. 박근혜 정권은 나라 안을 태극기로 뒤덮고 광복절 연휴에 하루를 더하는 ‘선심공세’를 펼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칭송하는 대대적 ‘애국 캠페인’을 벌였다. 친미사대주의자이자 포악한 독재자였던 이승만, ‘대일본제국’의 침략전쟁에 장교로 참여했고 18년 동안 파쇼통치와 ‘사법살인’으로 주권자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박정희가 각기 ‘국부’ ‘민족중흥의 영웅’으로 새삼스럽게 다시 떠오른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투쟁을 주도한 백범 김구와 박정희의 반민족적 행태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운 장준하를 기리는 ‘광복 70돌 잔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8월 17일 오전 11시 경기도 파주시 ‘장준하공원’에서 그의 40주기를 추모하는 조촐한 행사가 열릴 뿐이다. 전말이 뒤바뀐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쇼’를 보면서 ‘장준하와 박정희의 70년 전쟁’이라는 시각으로 현대사를 조명할 필요를 새삼스럽게 절감한다.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군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거쳐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고 숭실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38년에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1941년 봄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 철학과(예과)에 입학한 장준하는 그해 10월 일제가 실질적 강제징집제도인 ‘학도지원병제’를 공포하자 11월 하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자원입대 후 탈영’을 결심한 그는 1944년 1월 결혼한 뒤 일본군에 입대했다. 중국 강소성 서주의 부대에 배치된 장준하는 그해 7월 7일 세 명의 학도병과 함께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한 뒤 무려 7개월에 걸친 대장정 끝에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 출생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경북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교사)로 부임해 1940년 2월까지 근무했다. 그는 훈도로 재직 중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했으나 일차 탈락하고, 1939년 3월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라는 혈서를 쓰고 그해 10월 4년제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942년 10월 ‘성적 우수자’로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해서 1944년 4월 졸업한 뒤 견습사관으로 소만(蘇滿) 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는 나중에 만주군에 편입되어 중위 계급까지 승진했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20대 시절은 ‘민족주의’와 ‘친일’이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1945년 8·15 광복 뒤인 11월 23일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을 따라 조국에 돌아온 장준하는 ‘해방공간’에서 김구의 비서로 성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기회주의적 처신과 배신을 되풀이했다.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정희(일본명 다카키 마사오)는 베이징으로 가서 ‘과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 조선인들을 중심으로 편성된 광복군 제3지대 평진대대의 제2중대장’을 맡았다. ‘천황폐하에게 충성하던 장교’가 광복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 3개월 단기과정을 마치고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로 임관된 박정희에게는 1948년 11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박정희’ 항목에는 그 사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48년 11월 11일 군내 남로당 프락치를 적발하는 ‘숙군사업’을 담당하던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 정보국 요원인 김창룡 대위(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에 의해 남로당 군내 프락치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좌익 혐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무기징역·전 급료 몰수’ 선고를 받았다.
1953년 3월 10일 장준하는 서울 종로 2가 한청빌딩에 작은 사무실을 얻고 <사상계>를 창간했다. 그 월간지는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기획으로 지식인들과 젊은 세대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지성인이 되려면 사상계를 읽어라”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가 실린 <사상계> 1958년 8월호가 출간된 지 나흘 뒤에 경찰은 함석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승만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1960년 4월 혁명이 시민과 학생의 승리로 끝나자 <사상계>가 혁명의 원동력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였다는 치명적 결함을 안은 채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근무하다 1950년 7월 소령으로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맡으면서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는 1953년 준장으로 진급한 뒤 1954년 6월 제2군단 포병사령관, 1958년 3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해 제1군 참모장, 1959년 2월부터 11월까지 제6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0년 4월 혁명 뒤 제1군관구 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지내다가 12월 제2군 부사령관에 전보되었다. 박정희가 이렇게 순조롭게 진급하면서 요직을 맡게 된 배경에는 백선엽을 비롯한 ‘만주 인맥’이 있었다. ‘한 번 친일파는 영원한 친일파’임을 입증하는 산 증거이기도 하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본격적 전쟁은 1960년대 초반에 시작된다. 장준하는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킨 뒤 이른바 ‘혁명공약’을 밥 먹듯이 어기는 것을 보고 그를 통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상계>는 박정희의 ‘군정 연장’에 대한 반대투쟁을 선도하는가 하면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는’ 그의 위선과 기만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관권과 금권을 총동원한 부정선거로 야당후보 윤보선을 근소한 차이로 물리치고 ‘제3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뼛속까지 친일주의자’인 박정희는 야당과 재야민주화세력,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굴욕적 한일회담’을 밀고 나갔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통해 그런 움직임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1964년 3월부터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1966년 9월 삼성재벌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폭로된 뒤 장준하는 10월 15일 야당이 주최한 대구 집회에서 “박정희란 사람은 우리나라의 밀수 왕초”라고 발언했다가 ‘국가원수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다. 박정희가 1968년 12월부터 ‘친위대’를 통해 3선개헌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 장준하는 반대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을 통해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헌정쿠데타를 저지른 뒤 한 해 남짓 재야운동권은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암흑의 시대에 기성세대로서 가장 먼저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나선 사람이 바로 장준하였다. 그는 1973년 12월 하순 계훈제, 백기완 등과 함께 ‘개헌청원국민운동본부’ 창립 취지문을 작성하고 ‘헌법 개정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 운동이 무서운 기세로 퍼져 40만 명 이상이 실질적인 ‘유신헌법 반대’에 서명하자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고 장준하와 백기완을 구속했다. 두 사람은 2월 1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각각 징역 15년과 12년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이미 세 번이나 투옥된 바 있는 장준하는 안양교도소에서 협심증과 간경화증이 악화되어, 수감생활을 계속하다가는 생명을 잃을 위기에 빠졌다. 장준하의 ‘옥사’가 민중혁명에 불을 지를는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음이 분명한 박정희는 1974년 12월 하순 그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그러나 장준하는 병상에서도 박정희를 상대로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1975년 1월 8일 ‘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자유와 생존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소위 ‘유신체제’를 폐지하여야 하고, 그 근본규범인 현행헌법을 완전히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여 민주헌정 질서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장준하는 박정희 정권이 1975년 4월 9일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법살인’을 저지른 뒤 중대한 결심을 했다. 고상만의 증언에 따르면, 장준하는 7월 29일 동교동으로 김대중을 찾아가 밀담을 하면서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확언했다. 그것이 어떤 ‘거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장준하가 박정희를 어떤 방식으로든 제거할 결의를 다졌음은 분명하다. 그로부터 19일 뒤인 8월 17일 한낮에 장준하는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에서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바로 그 이튿날 박정희는 보안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 무엇인가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장준하와 박정희의 ‘70년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박정희는 장준하가 암살당한 뒤 4년 남짓 더 살다가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그러나 장준하가 그렇게도 열망하던 민주체제는 전두환·노태우 일파의 군사반란 때문에 세워지지 못했다. 2013년 2월에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장준하가 목숨을 걸고 무너뜨리려던 ‘유신체제’를 세습한 뒤 나라와 겨레를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장준하는 허망한 패배자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박정희는 ‘죽임의 정치’로 한국사회에서 정의와 평화, 사랑과 관용이라는 가치를 무너뜨렸고, 지금 그 딸이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 장준하는 ‘살림의 정치’로 나라를 민주화하고 갈라진 겨레의 통일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이상과 정책을 실현하려다가 ‘순국’했다. 그의 거룩한 죽음은 박정희의 비참한 죽음과는 달리 지금도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친일파가 독립군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민중은 명백히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