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님이 인용한 "조인성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반론을 고평석님의 글을 빌려쓰겠습니다. 글에 앞서 우선 몇 마디 개인적인 의견을 적겠습니다.
그 시대에 직접 살아서 그 사건의 전말을 전부 목격했다면 모를까, 남의 손에 의해 기록된 글을 100%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필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100% 믿지 못하며, 사기를 전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단고기, 규원사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역사서에는 사실과 역사서를 서술한 사람의 사관 그리고 여기에 어느정도의 가필이 섞여있다고 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역사의 본모습이지만 지금 눈앞에 과거가 있지 않기에 우리는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역사서에서 과거의 진면목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우리역사에 관한 모든 유물과 역사서를 통독하고 파악한 상태에서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각자 알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유하면서 협력한다면 우리역사의 진면목은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우리에게 달려오리라 생각합니다.
조인성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습니다.
"..그렇다면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 된다. [규원사화]가 1928년에 나온 김광의 [대동사강]에 최초로 이용되고 있음을 보며,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의 곳곳에서 환웅과 단군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 있으므로, 그 저자는 단군신앙을 가진 근대 민족주의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만약 1910년 이전에 발행된 규원사화가 있다면 조교수의 논리는 희박해지리라 봅니다. 하물며 원본 규원사화가 있다면....
참고로 조인성교수의 글이 게재된 책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1988년) 71p- 88p] 이며, 동잡지는 이병도교수의 1회 제자인 이기백교수가 책임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인용 시작합니다.........
규원사화 북애노인 친필본
고평석 -스님이면서 홍익사상, 고대사연구가이다.
머리말 북애노인(북애로인)저 규원사화(규원사화)를 조작된 위서(위서)라고 주장하는 기본학계에서는 실증사학을 기본으로 하여주기 바란다. 실증사학의 단절된 역사논리는 쓸모 없는 휴지조각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단정한다. 1989년 10월 20일 10시 정각, 경상남도 마산시 경남대학교(전화연락:(0551)45-5000) 조인성 교수님 연구실에 전화를 걸어서 규원사화에 대해서 5분간 문의하였다. 문의내용은 지금도 규원사화를 위서(위서)로 보고 계십니까? 라고 여쭈었더니 규원사화가 위서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없으며 규원사화가 1920년 후반에 민족종교 내지 구국충정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위서(위서)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필자는 다시 문의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중분 629(고2105-1) 책자는 본신 적이 있습니까? 문의하자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말은 들은 순간 필자의 마음이 괴로웠다. 이럴 수 있느냐 하는 안타까운 심정과 서글픔 뿐이었다. 있는 자료도 확인 아니하고 속단하면서 몇 년 동안이나 규원사화 위서론(위서론)을 폈던가. 국사(국사)가 이처럼 엉터리 식으로 진행되어도 되는 것인지, 의혹과 분노 속에서 이해하는 것도 한계점에 이르러, 필자 자신 스스로 결심하고 다짐하였다. 붓을 들어 알려야겠다. 국민 전체가 알 수 있도록 하자. 국민 모두가 알게 하여 사대주의, 식민사관 뿌리를 뽑아 발붙이고 의지할 곳이 없게 하자, 굳게 다짐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머리글을 장식하노.
북애노인(북애로인) 규원사화(규원사화) 친필 원본
1. 소장 장소 : 국립중앙도서관
2. 도서열람번호 : 귀 629(고2105-1) 1책
3. 제작년도:1675년 조선조 숙종1년 3월 상순
4. 크기 :24.7*16.6cm
* 내용
1) 단군 47대 임금 기록
2) 당시 시대의 시국정세
3) 사대사관 타파 간절히 갈망
4) 불타는 충정 구국 애국정
5) 만주 옛 조국땅 회복 간절히 희망
6) 사료 수집을 위해 많은 고생
7) 민족주체사상 회복 운동
5.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1675년 을묘)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함.
6. 구입날짜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사이
7. 등록일자:1946년 5월 25일
8. 구입장소 및 가격 100원에 책방에서 구입(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별도 특별관리목록 대장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1989년 11월 11일)
9. 귀629(고2105-1) 1책을 북애노인 저자가 직접 쓴 친필로 필자는 단정한다. 이에 대해 반론들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규원사화(규원사화) 중요 줄거리 내용
1. 단군(단군) 47대 1195년 임검(임검)님의 재위(재위)년수와 치적 기록
2.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유학자들을 통박
3.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유리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4. 임진왜란[1592년(선조25)~1598(선조31)] 병자호란[1636(인조14)~1637(인조15)]을 겪은 어려웠던 당시 사회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만주 옛 고토(고토)를 찾으려고 북별 출병계획에 민중 모두가 하나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규원사화 역사서를 실증사학으로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였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북애노인(북애로인) 규원사화(규원사화)필사본 현황
1.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열람번호 :2121.3 1책 * 필사년대 미상
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도서열람번호:2105.1 1책
3.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권상노(권상노) 소장본을 필사
4.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방종현(방종현)소장본을 등사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 이선근(이선근)소장본을 등사
번역주해된 규원사화(규원사화)
1. 신학균(신학균) 단기 4301(1968)10월 3일에 번역 주해 발행. 21년전[4322년(1989년 10월3일)]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을 원본으로 . 발행처:대동문화사(대동문화사)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열람번호:2105-81-0.2
. 신학균 선생님의 본적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 117번지 1967년 4월부터 1973년 4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과장 역임.
신학균 선생님의 규원사화 역자서문(역자서문)에서 북애자가 규원사화를 지으면서 피나는 노력이 역력히 엿보이고 있다고 하였으며, 규원사화 저자의 교훈을 거울삼아 국사 광복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단기고사(단기고사)와 함께 규원사화는 우리의 상고사를 재정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고증하고 있다.
2. 고동영(고동영) 1986년 5.20일 번역 발행 . 발행처:도서출판 자유문고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열람번호:911-021 북728 2
규원사화(규원사화)에 대해 위서(위서)라고 논리를 펴는 학자
1. 조인성(조인성: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논문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2. 이병도(이병도):현재 고인. 1986년 12월 '이병도 박사의 9순기념 한국사논총',[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3. 송찬식(송찬식):국민대학교 교수. [월간중앙](1977년 9월호)에 [위서변]이란 논문 기고
규원사화(규원사화)를 위서(위서)라고 주장하는 공통된 의견 내용
1. 성서에 나오는 천주라는 용어가 효종.숙종시대에 없었다.
2. 1920~1930년대에 단군 교도들에 의해 제작 편집되었다고 뜻을 같이하고 있다.
* 규원사화(규원사화)를 위서(위서)라고 하는 논리에 답하는 글 *
답변자:고평석(홍익인간사상. 고대사연구가)1. 천주라는 문자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과 같이 들어온 서양신부들에 의해 선조[1586(인조1637)] 당시 이미 천주(천주)라는 용어는 선비학자들 사이에는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규원사화에 기록된 용어가 지금 것과 비슷한 것이 몇 가지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고어를 참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가 잘못 제기되고 있다.
음이라는 것은 변해 전해진 것도 있도 지금이나 옛이나 고유명사로 그대로 원형을 위하는 것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예) 경주, 쌍놈, 종, 상감, 산 등등 * 고어(고어)사전 참고 바람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고2105-1)도서가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전문위원의 심의과정으로 숙종2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 이상 1920~1930년도에 제작 발행되었다는 논리는 다양한 자료를 폭넓게 참고하지 않은 결과라 단정하며 연대미상의 필사본만 접하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고2105-1)본을 직접 접해 보지 못한 결과로 단정한다.
3. 1675년에 지은 규원사화(규원사화)을 위서(위서)라는 선입감을 전제하고 대강 검토하다 보니 규원사화에 담긴 금쪽같은 옛 문헌을 한 부분도 확인 못하고 있다. 때놈(중국인) 사마천(사마천)이 지은 규원사화가 있었더라면 아무 군소리 아니하고 문제 제기도 없었을 거라고 단정한다.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 스스로가 사대주의, 식민사관, 왜놈사관임을 자청하여 고증하여 주고있다. 이에 대한 실증학적 근거를 제시하겠다.
규원사화 서문(서문) 저자의 말 가운데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을지문덕) 장군의 사당을 세운다고 하였다. 장군은 수나라 군사 백여 만을 무찌른 고구려 대신(대신)이다...운운하고 있다. 만에 하나 후래에 어느 누구에 의해 조작된 위서(위서)라 한다면 평양에 을지문덕 사당을 세운다는 기록은 "숙종실록(숙종실록)" 6권(숙종3년 정사11년 을유)에 기록된 내용을 무슨 재주로 1920년이 지나서 조작하면서 서문에 기록할 수 있었느냐가 의문시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어느 때에 공개되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들 하다. 왕들도 보지 못한 실록을 무슨 재주로 일반 서민이 찾아내어 숙종시대에 맞추어 놓느냐 하는 문제이다.
8.15광복 이전에 조선왕조실록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아니하였으며 국사편찬위원 및 고서전문연구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같이 하고 있다. 1920~1930년도 에는 조선왕조실록은 전문연구가 몇 사람이외는 어느 누구도 볼 수 없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맞추려고 계획하였으면 맞추기 쉬운 문헌을 골라 철저히 쉽게 맞출 일이지, 한마디로 돌머리들이다. 왜놈들이 조작해 놓은 왜놈 조선사에 의해 민족사가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왜곡의 근원이 분명한 지금 왜놈들이 조작해 놓은 왜놈 조선사를 비판한 글은 한 글자도 보지 못했다.
민족사를 망치는 일은 한 두 가지에 끝나지 않고 있다. 그대들의 마음 다시 한번 살피노라, 왜놈들 손자인가, 때놈들 아들인가. 사마천 사기를 번역주해하면서 공자세가조에 기록된 안씨 여인과 야합 불륜에 의해 낳은 자식이 공자라는 사실을 번역주해한 학자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국조이신 단제 천자님께서 셋째 여인 첩의 불륜야합자식이었다면 지금쯤 국조님(시조할아버지) 이름도 사용 못하게 온갖 잡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맺는말
국사 광복 및 국정교과서 개편과정에 있어서 자료가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분들께 알려드린다.
(1) 국립중앙도서관
(2)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3) 정신문화원 도서관
(4)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5) 고려대학교 도서관
(6)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
전국 각 대학 도서관 자료만 착실히 조사하면 자료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민족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서 자료가 절대 부족하다고 느끼신 분께서는 도서관을 찾아주기 바란다. 규원사화 고증부터 하여주기 바란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직접 찾아가서 귀629(고2105-1) 1책자를 확인하고 1946년 5월 25일 등록일자가 찍혀있는 2쪽을 확인하면서 규원사화 고서가 과연 얼마나 오래된 고서인가 스스로 감정하고 고증하면 되는 것이다. 조작이 되었더라도 300년 전에 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필자는 단정하며 확신하면서 끝을 맺노라. (이하 P195-P206 까지는 규원사화 원문 복사 게재됨)
*[한배달] 6호 1989년 겨울호, 사단법인 한배달(02-738-6198),P190-194에서 전제 인용끝입니다........
물론 저도 고평석님이 주장하는 규원사화의 원본을 직접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집에 100년이 넘은 책이 몇 권 있기 때문에 고서를 찾아본 사람은 책의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평석님이 주장하는 책은 고평석개인이 감정한 것이 아니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책이니 쓰인 연대의 근거가 확실하다고 봅니다.
이상욱님의 글 중에서 ".. 만약 그 지명이 장춘이라 불리기 이전에 상춘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면 조인성님께서 절대 그러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그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연구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라고 한 대목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없는지 궁금하군요.
단기 4326년 8월 22일 송원길
하창조 (cjha )
[한단고기] 진본 한단고기! (2) 12/14 02:50 407 line
#508 송원길 (MARO )
[반론#2]김형석님께. 문화의 고증 08/22 02:42 50 line
<문화(文化)>에 대한 고증 이상욱님은 "[문화(文化)]라닸C贖&L氷기초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조인성교수의 글을 인용하여 규원사화가 위서라고 했습니다. 규원사화가 위서라고 주장한 박관용교수(역사비평 90년 2월호)는 웅비(웅비)라는 말이 최근에 쓰여진 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제가 올린 글(#1)에서 고서심의위원회에숭止 조선조 숙종 1년(1675년-규원사화가 쓰여진 시기)에 제작된 규원사화를 확인한 이상 문화, 웅비, 해동역사... 또한 송찬식교수(국민대)의 위서변 등등에 대한 반론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에 대한 반론을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이상욱님의 글에서 많이 나웩 [문화]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까 합니다.
[닢浚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 이상시저, 고려원,1990년 판, p255-266. 에서-----------------<인용시작>-----------------------------------...중략..그런데 동양에 있어서 [文化]라는 어원은 원래 [聖人之治 天下也, 先文德而 後武力, 凡武之興爲 不服也, 文化不改然後 加誅]라는 [說苑 , BC 77-BC6, 漢 劉向著]의 <指武篇>의 구절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 뜻은 [형벌이나 위력(무력)에 의하지 아니하고 문치를 통하여 인지를 깨닫게 하여 교화시킨다]는 즉 文治敎化 또는 文德敎化의 준말로 널리 사용하여 왔다. 그러다 조인성의 주장처럼 20세기 초에 이르러 서양에서 이 용어가 정치, 경제, 예술 등 신생용어와 함께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Kulture 혹은 Culture 즉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인류의 이상을 실현에 나아가는 정신활동]의 뜻으로 전용되어 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규원사화][단군기]에 기록된 이 [文化]라른 용어는 Kulture 혹은 Culture라는 근대적인 의미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東洋에서 재래부터 사용하여 오던 [文治敎化]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만약 한자와 언문을 병용하였더라면 이러한 폐단이 없어지고 초야에 묻힌 우부라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어 문화의 계발이 더욱 빨랐을 것이다. - 今若以諺書 倂用則 必無是弊而草野 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라는 규원사화의 원문에 비추어 보거나 저술 당시의 사정을 놓고 볼 때에도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단군이라는 용어를 만약 한문으로 쓰지 않고 국문(그 당시 언문)도 같이 사용하였더라면 어리석은 필부도 단군이 박달임금의 뜻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아서 세상이 더 빨리 계발되었을 것] 이라는 의도로 기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것이 원문의 뜻과 이치에도 합치되기 때문이다.
만약, 설원이나 文選 같은 책에 <문화>라는 단어가 실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 졌을까요? 과연 규원사화에서 쓴 <문화>라는 단어가 일본사람보다 먼저 썼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가 반드시 중국사람이 쓴 후에야 연대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겠읍니까? 우리나라 고서의 내용 중에는 외국사람보다 먼저 멋진 단어(?)를 쓸 수도 있을텐데요.....
#509 송원길 (MARO )
[반론#3]김형석님께. 천남생묘지에 대해.. 08/22 14:43 90 line
이상욱님은 다음과 같은 조인성교수의 글을 들어 한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했읍니다.
--- 인용 시작 ---
"... 중략...연개소문은 개금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연씨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 이다. 아버지는 태조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고 하며 증조는 광이라고 한다. 모두 막리지였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이것은 [조대기]로 부터 인용된 것이다. 하지만 [태백일사]에 인용된 조대기는 다음에 보게 될 바와 같이 근대에서 조작된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조부의 이름이 자유와 태조라는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묘지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서 알려졌다.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된다. ... 이하 생략..."
--- 인용 끝 ---
다음은 비슷한 내용에 관한 이도학교수의 글입니다. (민족지성 1986년 11월) --- 인용 시작 ---
... 중략 ...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장수왕의 연호를 건흥이라 기록한 대목이 보인다. 이 [건흥]이라는 연호는 1915년 충북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불상의 광배명에 [건흥5년 병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중략...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이 된 다 따라서 동병진년 불상광배와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의 년호다.
]라는 새로은 지견을 추가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태백일사](한단고기)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이름을 대조 할아버지는 子游라 하고 증조할아버지는 [광]이라며 연개소문의 가계를 조대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조부 및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남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泉男生墓誌에는 泉男生의 증조부의 이름을 子游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상의 진가가 드러나 게 되었다(민족지성 p208)
--- 인용 끝 ---
똑같은 사건이나 사실을 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의 지식과 사상 또는 종교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자신의 생활철학이나 생존권에 관련이 있다면 그에 대한 해석 역시 심각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천남생묘지에 대해 조인성 교수는 위서의 증거라고 단정했고, 이도학교수는 태백일사(한단고기)의 진가를 높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로 이 차이에 [우리역사]에 대한 논란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단순한 [학자의 의견]이기 때문에 의견 자체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관한 문제는 음악이나 미술같은 예술과는 달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분들의 경각심이 요구 된다고 생각합니다.
김형석님은 #480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습니다.
"한분이 한단고기의 위서성을 주장하자 많은 분들("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국수주의자들")이 그 분을 식민사관에 찌든 문외한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김형석님이 말한 "국수주의자"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2차 대전때의 독일인이나 일본인 혹은 지금 독일의 네오-나치즘을 표방하는 사람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까?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반문화적이고 반인류적인 행동으로 사회에 (또는 주변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왜 조선왕조 때 중국과 굴욕적인 외교를 했으며, 왜 일본에 의해 나라가 빼앗기고 국가의 운명이 단절될 뻔한 절대 절명의 위기와 치욕을 당했읍니까? 일제 시대의 <조선사 편수회 사업개요>를 본 사람은 여러가지 생각이 있을 줄로 압니다. <조선사편수회>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1922년 조선총독 부에서 발행한 교육시책을 설명한 글을 실겠습니다.
--- 인용시작 --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 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게 하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 인용끝 ----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가능한 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합니다. 필자역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조선사편수회에 관한 글을 보면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학문적으로 일본이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타민족의 역사를 기술하는 행위(일본의 조선사 편수회에서 책을 조선사를 만든 행위)"에 대한 비평이나 비판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 만든 조선사35권의 내용과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와 비교한 논문 역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단기 4326년 8월 22일 송원길
#510 송원길 (MARO )
[반론#4] 임승국교수의 <반론인용> 08/22 15:15 77 line
이상욱님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운운하시는 재야사학자들이 엄밀한 문헌비판의 수준으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분석하여 그것이 고대에 만들어졌음을 고증하신 분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우리의 얼이 어떻고 우리의 혼이 어떻고 하신 글을 쓰셨을 뿐이다. 나는 고대 문헌 자체를 엄밀히 비판할 능력은 없지만 그런 문헌을 분석한 글을 보면 그 문헌을 분석한 분이 어떠한 연구로 그런 글을 쓰셨는지를 분별할수 있는 눈은 조금있다. [한단고기](정신세계사본,-임승국저 필자주)은 이것 역시 엄밀한 역사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글이 아님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 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임승국 교수를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전에 KBS 제1라디오 에서 밤 11시 30분부터 25분간 씩 수십회를 방송한 육성은 들어 보았습니다. 제 집에는 그 당시 녹음했던 Tape가 어느정도 있습니다. 필자가 임승국교수의 강연을 듣고나서 느낀점과 이상욱님의 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과 함께 이상욱님이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임승국 교수의 저서에 대한 평을 실어 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은 임승국 교수의 글입니다. (월간 [자유] 1990년 11월). 이글은 1990년 2월 [역사비평] 2월호에 쓰인 <[환단고기.규원사화에 위작많다]에 반박한다.>는 글의 일부 입니다. 전부를 인용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시간관계상 일부만 인용하여 죄송합니다.
--- 인용시작 ---
... 중략 ....
이른바 물귀신 박광용(교수. 필자주)은 들으라! 이도학 교수의 말처럼 [태백일사의 진가가 들어나게 되었다]는 이 고백이 어째서 거꾸로 [한단고기를 1923년 泉男生묘지의 발견이후의 저술이라고 단정하였다.]고 이 교수를 물고늘어지는가? 그렇다면 이교수의 말처럼 [건흥 5년 병진]이라는 불상의 광배명이 발견된 1915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이도학교수의 글을 악날하게 역으로 물귀신 마냥 물고 늘어질 참인가? ....중략....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 주제에 [한단고기][규원사화]가 어떻다고 회자거릴 자격이 있느냐? 박교수는 이글에서 1940년 전후시기에 이유립에 의해서 저술되었고 1940년대 후반에 한단고기는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사뭇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묻노니 박교수는 이유립옹을 만나 본적이나 있는가? 만약 이옹(이유립)이 작고하지 않고 살아 계셨다면 박교수의 글을 읽고 어지 나오셨을까. 생각해 보면 관운장의 전사통지를 받은 의제 장비의 진노를 연상케하여 저절로 홍소를 금할길 없다. 그리고 위의 단정처럼 1940년대 이후의 저술 운운]하는 넋두리는 이옹(이유립)을 가까이 지내봐서 잘아는 사람이면 아무도 한단고기가 그의 장난에 의해서 생겨난 작품이라고 망언을 농하진 않을 것인데 박광용교수가 이따위 글을 쓴 것을 보니 이옹을 만나 본적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다. 학자에겐 풍기는 학풍이란 것이 있고 문사에겐 내어 뿜는 문채라는 것이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세익스피어의 글과 볼테를의 문체가 다르듯이 같은 상고사학자라도 신채호의 글과 위당 정인보의 글이 다르다. 이유립옹이 [한단고기]를 위작할만한 학인이었다면 아마도 그의 학문은 지금쯤 더욱 빛을 발했으리라. 이유립옹이 쓴 글은 한문으로 된 것은 물론 국한문병용의 서찬도 일반이 잘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었다. 따라서 고대사학의 기관지 구실을 해 온 본 자유지에 다른 학자의 글은 자주 실렸으나 옹의 글은 거의 실리지 않앗던 게 현실이엇다. 그런데 한단고기의 저술이라니 이는 그의 학풍을 아는 사람이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중략...
Matteo Ricci의 에서 비롯된 [삼위일체]를 본따서 한단고기 규원사화의 저자가 [삼위일체]를 만들었다고 한 박교수는 ...중략... [삼신일체론]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서 비롯된다고 사뭇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고 사기봉선서(약 BC100년전에 저술된 책. 필자주)나 한서 율력지에 나오는 글을 박교수는 사학교수라면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 삼일이란 말도 대종교의 경전에 삼일신고가 있고, 여기서 [삼일]은 천신, 지신, 태신을 말한다고 하는 사기봉선서의 기록에 의당 주목해야 학자다운 연상작용이 아닌가.
古者天子 三年 一用太牢詞 禪三 一 天一 地一 太一 (史記封禪書-BC100년 전에 지은 책 필자주)---- 인용 끝 ---
단기 4326년 8월 22일 송원길
하창조 (cjha )
[한단고기] 진본 한단고기! (3) 12/14 02:52 427 line
#511 송원길 (MARO )
[반론#5]이병도박사의 글을 싣기 전에 08/22 20:09 82 line
이번 반론에 들어있는 내용은 이상욱님의 글에 대한 반론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반론에 인용될 자료의 저자에 관한 글이니 양해 바랍니다.
--------------------------------------------------------------------- "<한단고기>, <규원사화>의 위서론"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잠시 접을까 합니다. 반박할 사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위서론에 대한 비판보다 우리역사의 참모습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한단고기>, <규원사화>를 100%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한단 고기>의 사료가치는 무척이나 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단고기>에 관한 위서론에 대한 총분량이 그다지 많지도 그 깊이 또한 깊지도 않다는 것과 다른 문헌을 조사하면서 한단고기의 진가를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옛날에 금송아지가 있었다."는 사실보다도 "어떤마음, 어떤 자세에 금송아지가 있었으며 어떤 정신이 있었을 때 금송아지를 잃었는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각설하고...김형식, 이상욱님도 잘 아시는 이병도(李丙燾)박사에 관한 이야기를 몇 마디 할까 합니다. (매국노 이완용의 아들 돌림자가 병(丙)이라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지 않겠습니다. - 현재 정부에서 친일파 재검토 작업중(이 중에 이병도 박사가 포함되어 있음)에 있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하자면 매우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병도박사는 1925년 :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1928년 : 조선사편수회 촉탁 1930년 : 청구학회 창립회원(위원) 1945년 : 서울대교수 1954년 : 서울대 대학원장 1955년 : 외무부 외교 연구위장 1960년 : 문교부장관, 학술원 회장 1966년 : 성대교수 1981년 : 국정자문위원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일제시대부터 수많은 논문을 내고, 1952년 국사대관, 1976년 한국고대사연구 등의 저술활동을 한 이른바 [실증사학]의 태두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의 줄기를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입니다.
이병도박사와 관련된 기사를 몇 가지 보면 -서울평론 제 78호(1975년 5월)에 실린글- "특히 경도대의 이케우치 박사는 나(이병도)를 위하여 일부러 자기의 저술한 책자, 논문등을 보내주곤 해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읍니다. 또 교또(경도)대 교수로 있으면서 경성제국대학에서 오래 있었던 금서룡(今西龍-이마나찌)박사와도 퍽 친하게 지냈지요..."
-학원 1984년 10월호에 실린글
"... 뭐 주제넘게 나설 일은 아닙니다. 내(이병도) 제자인 이기백, 한우근, 김철준 등이 잘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내 학설을 좇기도 하고 안좇기도 하는게 내 개인 생각에서는 내 학설을 안좇는 데에는 좀 미흡한 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들의 연구가 심각하게 깊이 파고들면 결국 내소리인데...."
참고로 일본의 금서룡은 1920년대 [단군고]라는 책에서 삼국유사의 환국(桓國)을 환인(桓因)으로 조작하면서까지 이른바 [단군신화]를 만들고 박사학위를 받았읍니다. 또한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책임자로서 일했습니다. 또한 이기백교수는 이상욱님이 인용한 조인성교수의 글이 실린 [한국사시민강좌]라는 책의 책임편집자입니다.
제가 역사를 배울 때(저는 80학번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임둔, 진번, 현도..라고 줄줄줄 외었습니다. 제가 배운 교과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이병도 박사가 저술한 [한국고대사연구]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중고등학생이 배우는 역사책에는 한사군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를 설명하자면 또 길어지니까 생략하겠습니다. 이 예에서도 국사교육과 관련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왜 한국사에 관해 연구를 하고 또 해야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병도 박사는 1976년 <한국고대사연구>라는 책에서 <단군설화>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금서룡은 <단군고>라는 책에서 <단군신화>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설화>와 <신화>의 차이가 그다지 크다고 느끼지는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관한 약간의 보충설명은 제가 올린글 <역사집략이라는 책에 단군-부루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병도 박사가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게제한 글을 다음번 반론에 실겠습니다.
단기 4326년 8월 22일 송원길
#512 송원길 (MARO )
[반론#6] 이병도 박사의 단군론 08/22 20:12 51 line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1986년 10월 9일 목요일 조선일보 5면>에 실린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른바 <실증사학>의 태두인 이병도박사가 게제한 것입니다. 왜 이병도 박사가 <단군설화>에서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國祖>로 주장을 달리 했는지 서로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인용시작----- 檀君은 신화아닌 우리 國祖
이병도(부제: 1.역대왕조의 檀君제사 일제때 끊겼다. 2.삼국사기 이전 古記등 기록 믿어야)
대체 天이란 말은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 중에서 天을 君長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君長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檀君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 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檀君왕검이 아사 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檀君의 아버지 桓雄이 [홍인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桓雄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神檀樹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하고 그를 桓雄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 우사, 운사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등 무릇 인간 3백6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해 보면 桓雄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君長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百事를 주관하는 수호신적인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있다.
<서낭당은 천왕당>이 수호신의 住處는 곧 神檀樹로 이것은 지금 민속중에 생생이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것이니 仙王堂(서낭당)은 즉 天王堂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神檀樹 그것이고 그밑의 돌무더기가 神檀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神檀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였던 것이다....중략....
김부식(삼국사기의 저자-필자주)이 古記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 중략.. 여기서 보면 古記에는 檀君記事가 기재되어 있을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640년대 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있다. 또 김부식이 ...중략...이라고 한 것은 역시 古記이거나 檀君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중략...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古記의 檀君記載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 중략... 古記가 檀君記事를 실제했다고 볼 수가 있다.
일연(삼국유사의 저자-필자주)이 마치 근거도 없는 古記를 들멱여서 檀君記事를 지어냈다고는 볼수가 없다... 이하생략..
----인용 끝 ---
단기 4326년 8월 22일 대전에서. 송원길
#513 송원길 (MARO )
[반론#7-끝] 반론을 마치면서... 08/22 20:13 56 line
- 반론을 마치면서
이상욱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서의 성경은 바로 [삼국사기]이며 [삼국유사]입니다." "무슨 천왕 무슨 환인 천제를 믿고 계시는 분들은 그저 논리고 뭐고 그저 싫은 것이다. 자신의 종교(이정도면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
등등 일부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했으며, 한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종교적인 서적으로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태고의 역사에서 종교적인 면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이상욱님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역사서의 성경..."의 뜻이 무엇인가요? 혹시 역사서 중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뜻은 아닙니까? 만약에 이런 뜻으로 쓰였다면(아니라면 용서하십시요) 다시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A라는 종교에서는 [길이]를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B라는 종교에서 [무게]를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둘사이에 어떠한 논쟁도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와 [종교]를 혼동하게 되면 서로의 주장만 나서게 될 뿐이지 결론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역사]를 [종교]로 매도하여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할 [역사]를 [일부국수주의자(?)]만 미처있는 [종교행사]로 평가절하 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전편에서 인용한 조선총독부의 교육시책-[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하라.....]과 결과를 같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와 같은 직장인은 개인적인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록 역사에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수많은 역사서를 [정독]하기는 어렵습니다. 젊은 학생들도 저와 같은 직장인보다야 시간이 있겠지만 나름대로의 일에 열중하다보면 역사서에 접할 수있는 시간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욱님도 나름대로 역사서에 대한 연구가 깊으신것 같은데, 역사서를 검토할 기회가 자신보다 적었던 사람에게 마치 모든 것을 아는듯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제가 가진 정보의 양이나 이상욱님이 가진 정보의 양이나 어느 정도 제한 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3000만원이 넘는 사고전서를 가지고 계시진 않을 것이고, 설사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보겠읍니까?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수십만권의 책이 있다하는데 정서가 아닌 초서로 쓴 글을 어떻게 다 보겠읍니까?
제 글을 인정하신다면 앞으로 글을 게제하실 때에는 (논쟁에 관해서는 특히) 반론과 반론에 대한 의견을 찾으신 후 게제하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없을것 같지만 자료는 현재에도 그렇게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고있는 바에 의하면, [한국사 시민강좌]에 게제 되었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반론정도는, 인쇄된 글은 물론이고, 남이 번역한 글이 아닌 <원전>을 가지고 반박할 수 있는 사람만 해도 어느 정도 됩니다.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에 대한 반론보다도 우리역사의 참모습을 찾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시급하기 때문에, 이상욱님에 대한 반론은 저같이 별로 아는 것 없는 사람이나 한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더 시간이 허락한다면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보다 훨씬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누 고 싶지만 이정도에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단기 4326년 8월 22일 오후 8시 송원길
#515 송원길 (MARO )
놀라운(?) 심당전서의 참고문헌.. 08/28 15:42 36 line
심당전서(心堂全書)는 임진년(서기 1952년) 심당(心堂) 이고선님이 저술한 책이 며 그 영인본이 198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전체 546쪽의 문장전체가 한문으로 되어 있고, 한인(桓因)에서 순종(純宗)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참고문헌은 무려 423종으로 대단히 많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단군 또는 그 이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책을 몇가지만 추려서 적어 봅니다.
< 심당전서의 참고문헌 중에서.....>
- 단군고(檀君考)
- 단군교훈8리(檀君敎訓八理)
- 단군론(檀君論)
- 단군세기(檀君世紀)
- 단기고사(檀奇古史)
- 단전요의(檀典要義)
- 단제대고(檀帝大誥)
- 단조사방(檀祖事放)
- 진단유기(辰檀留記)
- 한은사(桓殷史)
- 한단고기(桓檀古記)
- 신지비사역전(神誌秘詞譯傳)
심당전서의 인용문헌 중 하나인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언제 것인지 확인할 수 없 습니다. 연대상으로 볼 때 진본 픔d쉼慈袖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고려사(高麗史)에 그 서문이 전해지고, 이조때에도 그 기 록의 일부를 WJ ) 茱墟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태백일사(한단고기)를 보면 신지비사는 6대 단군 달문(BC2083-BC2048)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저술한 것이라 했읍니다. 심당전서의 인용문헌 중 하나인 신지비사역전(神誌秘詞譯傳)은 신지비사(神誌秘詞)를 번역한 책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기 4326년 8월 28일 송원길
하창조 (cjha )
[한단고기] 진본 한단고기! (끝) 12/14 02:54 337 line
#513 송원길 (MARO )
[반론#7-끝] 반론을 마치면서... 08/22 20:13 56 line
- 반론을 마치면서
이상욱님은 "우리 민족의 역사서의 성경은 바로 [삼국사기]이며 [삼국유사]입니다." "무슨 천왕 무슨 환인 천제를 믿고 계시는 분들은 그저 논리고 뭐고 그저 싫은 것 이다. 자신의 종교(이정도면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를 믿지 않으면 그것은 무 조건 잘못된 것이다....."
등등 일부종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했으며, 한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종교적인 서적으로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태고의 역사에서 종교적인 면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이상욱님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역사서의 성경..."의 뜻이 무 엇인가요? 혹시 역사서 중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삼국유사]라는 뜻은 아닙니 까? 만약에 이런 뜻으로 쓰였다면(아니라면 용서하십시요) 다시는 그런용어를 사용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A라는 종교에서는 [길이]를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B라는 종교에서 [무게]를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면 둘사이에 어떠한 논쟁도 의미가 없어 지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와 [종교]를 혼동하게 되면 서로의 주장만 나서게 될 뿐이지 결론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역사]를 [종교]로 매도하여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할 [역사]를 [일부국수주의자(?)]만 미처있는 [종교행사]로 평가절하 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전편에서 인용한 조선총독부의 교육시 책-[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하라.....]과 결과를 같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와 같은 직장인은 개인적인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록 역 사에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수많은 역사서를 [정독]하기는 어렵습니다. 젊은 학생 들도 저와 같은 직장인보다야 시간이 있겠지만 나름대로의 일에 열중하다보면 역사 서에 접할 수있는 시간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욱님도 나름대로 역사서에 대한 연구가 깊으신것 같은데, 역사서를 검토할 기 회가 자신보다 적었던 사람에게 마치 모든 것을 아는듯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봅니다. 제가 가진 정보의 양이나 이상욱님이 가진 정보의 양이나 어느 정도 제한 되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3000만원이 넘는 사고전서를 가지고 계시진 않을 것이고, 설사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많은 책을 어떻 게 다 보겠읍니까? 국립중앙도서관에도 수십만권의 책이 있다하는데 정서가 아닌 초서로 쓴 글을 어떻게 다 보겠읍니까?
제 글을 인정하신다면 앞으로 글을 게제하실 때에는 (논쟁에 관해서는 특히) 반 론과 반론에 대한 의견을 찾으신 후 게제하실 것을 부탁들입니다. 없을 것 같지만 자료는 현재에도 그렇게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 면, [한국사 시민강좌]에 게제 되었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반론정도는 ,인쇄된 글은 물론이고, 남이 번역한 글이 아닌 <원전>을 가지고 반박할 수 있는 사람만 해도 어느 정도 됩니다.
<규원사화>와 <한단고기>에 대한 반론보다도 우리역사의 참모습을 찾는 것이 훨 씬 중요하고 시급하기 때문에, 이상욱님에 대한 반론은 저같이 별로 아는 것 없는 사람이나 한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좀더 시간이 허락한다면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보다 훨씬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누 고 싶지만 이정도에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단기 4326년 8월 22일 오후 8시 송원길
#515 송원길 (MARO )
놀라운(?) 심당전서의 참고문헌.. 08/28 15:42 36 line
심당전서(心堂全書)는 임진년(서기 1952년) 심당(心堂) 이고선님이 저술한 책이 며 그 영인본이 198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전체 546쪽의 문장전체가 한문으로 되 어 있고, 한인(桓因) 에서 순종(純宗)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참고문헌은 무려 423종으로 대단히 많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단군 또는 그 이전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책을 몇가지만 추려서 적어 봅니다.
심당전서의 인용문헌 중 하나인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언제 것인지 확인할 수 없 습니다. 연대상으로 볼 때 진본 한단고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신지비사(神誌秘詞)는 고려사(高麗史)에 그 서문이 전해지고, 이조때에도 그 기 록의 일부를 기술한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태백일사(한단고기)를 보면 신지비사는 6대 단군 달문(BC2083-BC2048) 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저술한 것이라 했읍니 다. 심당전서의 인용문헌 중 하나인 신지비사역전(神誌秘詞譯傳)은 신지비사(神誌 秘詞)를 번역한 책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들 보셨겠지만, 한국일보 1993년 10월 3일자 23면에 "단군은 실제인물..."이라는 제목으로 유적발굴 기사가 나왔습니다. 개략적인 내용은 "북한에서 발굴된 소위 <단군묘>에서 지금부터 5011년전의, 단군부부로 추정되는, 남녀 뼈 86개가 출토되었고, 또 같은 무덤에서 청동판에 금도금한 세움장식과 돌림대가 함께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5011년이라는 연대측정에는 '전자 常磁性共鳴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상식으로 5011년이라는 숫자가 믿어지지 않아서 관계자에게 문의를 했더니 "현재 확인 할 수는 없지만 1000년 정도의 오차는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정확한 연대는 언젠가 확인되겠지만) 이말이 사실이라면 대략 5000+/-1000 즉 지금부터 4000년~6000년 전의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4000년~6000년 전의 청동기 유물에 관련하여 몇가지 서적을 인용하여 봅니다.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을 보면 14세 자오지 환웅인 치우천왕(蚩尤天王)이 BC2707년 부터 재위했다고 말합니다. 이기록을 우선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치우천왕은 지금부터 약 4700년 전의 사람이 됩니다. 또 한단고기 <태백일사/신시본기>를 보면 치우천왕에 대한 소상한 기록이 나옵니다. 蚩尤天王承神市之餘烈...葛盧山之金 大制 도개 矛戟 大弓 호矢 즉 신시시대의 餘烈을 이어받은 치우천왕은 갈로산의 金으로 활 창 화살 등 여러가지 무기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돌과 활 밖에 무기가 없었던 중국인 헌원*(軒원)이 감히 천자가되려는 생각으로 공격해와 73회를 싸워 치우천왕이 모두 이겼다고 했습니다. *헌원은 중국인이 그들의 시조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黃帝라고도 합니다.
3.<용어하도云> 黃帝攝政 有蚩尤兄弟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弓 威振天下.. 黃帝..乃仰天而歎 [황제(헌원)이 섭정할 때 치우는 형제가 81명 있었으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하고, 구리머리에 쇠이마(銅頭鐵額)를 하였으며 모래를 먹고 칼, 창, 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만들어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 황제(헌원)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했다.]
*한나라 때 만든 설문해자에 夷의 발음을 반절로 표기하여 以脂라했습니다. 以자의 초성'자'과 脂자의 중성, 종성이 '가'이기 때문에 以와 脂를 현재 우리의 발음으로 읽어도 夷자의 발음과 같으니, 여기에 관해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2.天子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稱天子 ---<獨斷><天子는 靴d 사용하는 말이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늬.執로 하기때문에 天子라 한다>
3.金 변에 夷 = 鐵 자의 古字 (쇠철자의 옛글자를 金 변에 夷 라 했습니다.)(상용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적습니다. - 커다란 자전엔 보통 나올겁니다.)
---<5.정리>-------------------------------------------------------이상 간단하게 살펴본 기록에서 <史記>를 보면
"盧山의 金으로 무기를 만들었다.",
"모래를 먹었다 - 제련하는 모습(?)",
"짐승몸에 사람말 - 갑옷(?)",
"구리머리 쇠이마(銅頭鐵額) - 투구(?)"
에서 치우천왕 때에 이미 금속을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쇠철(鐵)자의 옛글자(古字)가 "金변에 夷"라는 것도 혹시 "鐵은 夷가 사용한 금속"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억측입니까?
어쨌든, <1.북한에서 발굴한 유적>
<2.한단고기의 치우천왕에 대한 기록>
<3.사기의 기록>
<4.기타기록>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서로 무리 없이 조화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 물론, 북한에서 발굴한 유적이 치우천왕의 무덤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부터 약 4000-6000년 전의 청동기"와 <한단고기> 등 사서의 기록과 그다지 큰 모순이 없다는 것입니다.
별다른 근거없이 과거의 기록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록을 모두 부정한다면 우리는 역사서에서 아무것도얻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특정한 사건이 있었다."는 가정을 하고, "특정한 사건"과 당시의 기록을 포함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서와의 관계 또 객관적 증거(예를 들면 유물)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고 그 결론에서 무언가를 얻는 것도 역사를 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