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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합니다.(히10:23-25)
2011,9/11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히10:23-25절 말씀으로“그 날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합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 선포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이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벌써 추석입니다. 빠른 추석이라 그런지 추석 기분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추석인데 안전하고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앞뒤, 옆에 계신 분들과 함께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히브리서는 바울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해 주후 60년대 후반에 기록한 말씀으로 당시 모진 핍박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신앙을 지켜나가는 유대인 크리스챤들에게 기독교가 유대교보다 월등하며 복음이 율법의 본체이기 때문에 고난과 핍박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말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소망을 굳게 잡아야합니다.(23절)
둘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모이기를 힘써야합니다.(25절)
셋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사랑과 선을 행해야합니다.(24절)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삶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아마도 천국생활을 준비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시민권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천국으로 떠나갈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시민권자들은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분은 천국에 소망을 두고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서 사랑과 선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이런 삶을 살아드려서 큰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따라가면서 성령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소망을 굳게 잡아야합니다.(23절)
본문2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아멘
사도바울이 사역했던 당시에 유대인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동족들로부터 배교자로 낙인이 찍혀 핍박을 받고 있었고, 또 로마에서도 박해를 받으며 안과 밖으로 큰 환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견디다 못한 일부 교우들의 믿음이 흔들렸고,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천국의 소망을 굳게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망을 붙잡는 것이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필수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핍박과 환란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단단히 붙잡으라했을까요?
소망은 어떤 고난과 유혹에서도 우리 믿음을 지켜주는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무엇입니까? 소망이란 미래에 나에게 실현될 천국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물론 돈도 많이 벌어 풍족하고, 자녀들도 잘되고, 부부간에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가정을 꿈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계신 그 아름다운 천국에서 에덴동산의 축복을 회복하고 영원토록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서 누리게 될 천국에 대하여 계21:4절 말씀은“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계시록 21, 22장은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는데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곳인지 모릅니다.
이런 천국이 머지않은 장래에 내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소망이 없다면 이 땅에서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가 있으며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면서도 기뻐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천국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굶주린 사자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갔던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침몰하는 타이타닉 선상에서 찬양을 연주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도 순교를 각오하고 세계오지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바로 천국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았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군중들의 협박에 굴복하여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했던 데마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세상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믿어지지 않고 세상에 미련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생각부터 다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많다고 교만하지 않고 없다고 위축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당당하며 떳떳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돌아가는 날 버선발로 동구 밖까지 뛰어나와 반겨줄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걱정할 것은 사업이 힘들고 장사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을 잃거나 경제적 어려움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인간관계가 깨졌을 때도 아닙니다. 건강을 잃거나 자녀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천국에 소망을 두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끌려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광풍을 만나 선원들이 살려고 배에 있던 짐과 배의 기구를 다 버리며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날 동안 해와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 큰 풍랑은 그치지 않고 이제 살아날 소망까지 사라졌습니다.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이 절망의 상황 앞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단 한 사람 사도바울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나의 섬기는 하나님이 어젯밤에 나와 함께 한 여러분 모두가 안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굳게 믿습니다.”(행27:25)
여러분!!! 벼랑 끝에 몰린 절망의 순간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말씀을 믿고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으로 예수쟁이들을 잡으러가던 사울이 180도로 변했던 이유는 그가 주님을 만나 삼층천을 경험하고 나서 천국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내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리라고 굳게 믿고 소망을 가져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천국이 예비되어 있는데 우리가 이 땅의 고난과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이 고단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 건강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가정의 문제, 정신적인 문제 등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소망을 굳세게 붙드는 사람에게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다가와 주시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가운데 풍성하게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모이기를 힘써야합니다.(25절)
본문2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아멘
주의 날이 가까워지면 모이기를 폐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현상은 두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신앙을 지켜나는데 있어서 핍박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좋아져 인권의식이 발달하다보니 일부 나라를 제외하고 신체에 직접적 핍박을 가하는 경우는 없지만 기독교 초기에는 이 현상이 극심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도들과 로마인들의 핍박이 얼마나 심했던지 교회 나오기가 무섭고 모이기가 두려워 예배를 포기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현상이 생겨났습니다.
오늘 우리주님은 지금 이 부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세가 되면 어떤 이유든지 사람들이 모이기를 폐하고 예배공동체가 점점 무너지게 될 것을 예언하셨는데 지금 우리들의 모습, 한국교회, 나아가 세계교회의 모습을 볼 때 이 예언의 성취를 보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납니다.
마24:9절 말씀에“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핍박과 환란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모이기를 힘쓰며 예배공동체를 지켜나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로마 아피아가도를 접어들어 한적한 시골로 가면 카타콤이라는 공동묘지기 있습니다. 핍박자들의 눈을 피해 예배드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찾아 들어온 곳이 바로 이 카타콤입니다. 저들은 이곳에 굴을 파고 어둡고 습한 동굴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그 고통과 고난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갖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던 믿음의 백성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까지 복음의 능력이 온 땅을 덮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이기를 폐하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서 모이기를 폐하는 것입니다.
경건한 삶, 구별된 삶을 살기에는 세상의 화려함과 유혹이 너무도 강합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핍박과 세상의 유혹이 있어도 모이기를 힘쓰며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을 가지고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중 하나가 모이기를 힘쓰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예배하며 신앙의 행위를 합니다.
행2:46-47절 말씀에“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기독교가 태동하던 초기에 사람들은 교회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날마다 교회에 모여서 예배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고 구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좋은 소문이 나고 예수 믿겠다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이것이 모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서 서로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할 때 핍박도 고난도 이길 수 있고 또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모여 예배하며 신앙을 나누면 원수마귀도 절대로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백성은 절대 잘못되지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말세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이들의 습관을 쫒지 말고 교회 모이기를 힘써서 종말에 재림신앙을 돈독히 만들어 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셋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사랑과 선을 행해야합니다.(24절)
본문2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아멘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는 시작과 끝이 항상 같아야합니다.
그래서 주님도 너희가 가졌던 처음 사랑을 잃지 말라하셨고, 처음에 깨어 있었던 것처럼 마지막까지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도 지금 가는 길이 옳은 길인지 중간 중간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초대교회모습과 비교해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것을 알면 마지막 종말의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하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행2:42절 이하에 말씀을 요약하면 바로 사랑과 선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1939년 캐나다에서 그리스도형제단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로날드사이더가 쓴‘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책에서 당시 초대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매우 겸손했으며 친절하게 행동한다. 그들에게 거짓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그들은 과부를 무시하지 않으며 고아를 서럽게 하지 않는다.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에게 관대하게 나누어 준다. 그들은 나그네를 보면 집으로 맞아들여서 마치 친형제인 것처럼 환대한다. 그들은 육신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으며 하나님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릅니다. 가난한 자 중 하나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누군가 봤다면, 그들은 힘닿는 대로 그 사람의 장례를 치러 준다. 또 누군가가 그들의 섬기는 메시아의 이름 때문에 감옥에 갇히거나 억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두가 나서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운다. 또 그 사람을 구출하는 것이 가능하면 그를 구출한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빈핍한 사람이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한 경우에 그들은 2-3일을 금식을 해서 빈핍한 사람에게 필요한 음식을 마련해 준다.”
어떻습니까?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왜냐면 종말에는 사랑이 식어간다고 해서 그런지(마24:12) 지금 사람들은 사랑과 선보다는 탐욕과 이해타산에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바로 이런 사랑과 선이 있었기 때문에 저들이 크리스챤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고 복음이 급속히 전파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은 부단히도 사랑과 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 또는 행함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행2:44-45절 말씀에“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안에서 서로를 형제로 대하며 대가 없이, 조건 없이 온갖 정성과 도움을 베풀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성도의 원형이자 교회의 본질입니다.
지금 본문에서 사랑과 선을 베풀라고 하는 것은 주님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원형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과 똑같이 하지 말고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함으로 그날을 바라보는 삶을 살라하십니다.
그만큼 주의 날이 가까이 왔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하려면 형편도 되고 시간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시 초대교회는 목숨을 위협받는 환란과 핍박가운데 있었고, 따라서 저들의 경제적인 조건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가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여 이웃과 교회공동체를 돌아보며 사랑과 선을 삶으로 실천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에서 빌립보교인들의 헌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아멘 (고후8:2)
많은 환란과 시련이 오히려 저들에게 기쁨이 되었고 극한 가난이 오히려 헌금을 더 많이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었을까요? 이것의 비밀은 저들이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고, 또 교회에 모여서 서로 약해지는 믿음을 예배와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해서 위로와 격려와 새 힘을 공급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를 사랑하고 선을 베풀 수 있는 것은 형편과 조건이 아니라 바로 그날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도 그날을 바라보는 재림신앙을 굳게 잡고 날마다 교회에 모여서 사랑과 선을 베푸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그날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말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소망을 굳게 잡아야합니다.(23절)
둘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모이기를 힘써야합니다.(25절)
셋째로, (그날을 바라보는 사람은)사랑과 선을 행해야합니다.(24절)
사랑하는 여러분!!!
힘을 냅시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에게 힘주시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이 붙드시면 가능합니다.
소망을 갖고 주님과 동행하시어 큰 상급 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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