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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
–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출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ㆍ홍성광, 을유문화사, 2023 개정증보판
제1장 기본분류
인간의 운명이 차이 나는 것은 세 가지 기본규정에 기인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을 이루는 것,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격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의 함양이 포함된다.
2. 인간이 지닌 것, 즉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재산과 소유물을 의미한다.
3.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 이러한 표현은 알다시피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 즉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견해를 말하는 그것은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뉜다. (19)
인간에게 있고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언제나 그의 의식 속에 있고 이 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분명 의식 자체의 성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대부분의 경우 의식 속에 나타난 형상보다 이러한 성질이 더욱 중요하다. (21)
우리의 행복과 향유에는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보다 비할 데 없이 중요하다. (22)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에서 우리를 이루는 것, 즉 인격이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중요하다. 인격은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격은 다른 두 가지 범주의 자산과 달리 운명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우리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른 두 가지 범주가 단순히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과 달리 인격의 가치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23)
인간을 이루는 것이 인간이 지닌 것보다 우리의 행복에 훨씬 기여한다. (25)
그러므로 원래 자체적으로 지닌 것이 인간의 행복에 가장 중요하다. (25)
제2장 인간을 이루는 것에 대하여
인간을 이루는 것, 따라서 인간이 원래 지닌 것이 언제나 중요하다. (27)
인간의 내면적 모습과 인간이 원래 지닌 것, 요컨대 인격과 그것의 가치가 행복과 안녕의 유일한 직접적 요인이다. 다른 모든 것은 간접적인 것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것의 작용은 무효로 돌릴 수 있지만 인격의 작용은 결코 그럴 수 없다. (…) 그러므로 고상한 성격과 뛰어난 두뇌, 낙천적 기질과 명랑한 마음, 튼튼하고 아주 건강한 신체와 같은 주관적인 자산, 즉 “건강한 신체에 깃드는 건강한 정신”이 우리의 행복에서 으뜸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인 자산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앞에서 든 자산을 키우고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자산 중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이러한 좋은 특성은 즉각 보답을 주기 때문이다. 즐거워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바로 그 이유다. 이러한 특성만큼 다른 모든 자산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7~28)
그런데 명랑함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은 부富가 아니라 건강이다. (29)
우리의 행복은 명랑한 기분에 크게 좌우되고, 명랑한 기분은 건강 상태에 크게 좌우된다. (…)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도 하고 불행하게 하기도 하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이고 실제적 모습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견해다. (…) 대체로 우리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건강해야 모든 것이 향유의 원천이 된다. 반면에 건강하지 못하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외부의 자산을 즐길 수 없다. (…) 그러므로 생업이나 승진을 위해서든, 학식이나 명예를 위해서든, 무슨 일을 위해서든 건강을 희생하는 것이 가장 어리석다. 성적 쾌락이나 찰나적인 향락을 위해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건강이 있고 난 뒤에 다른 모든 것이 있다. 이처럼 건강이 우리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명랑함에 크게 기여하지만, 명랑함이 건강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완벽하게 건강한데도 우울하거나 슬픈 기분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29~30)
얼핏 살펴보아도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는 고통과 무료함임을 알 수 있다.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진폭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3)
내면의 공허가 바로 무료함의 근원이다. 이 공허는 무언가를 통해 정신과 기분을 움직이려고 늘 외적인 자극을 갈망한다. (…) 이런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게 우리를 가장 확실히 지켜 주는 것은 내면의 풍요, 즉 정신의 풍요다. 정신이 풍요로워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찰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33)
평범한 사람들은 단지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활용한다. (35)
내면의 부가 충분해서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외부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거나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 결국 인간은 누구든 혼자다. 그러므로 지금 혼자 있는 자가 누구인가가 중효한 문제다. (37)
운명은 잔혹하고 인간은 가련하다. 이러한 세상에서 원래 지닌 것이 풍부한 자는 눈 내리고 얼음이 언 12월 밤에 밝고 따뜻하며 흥겨운 방에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과 같다. (38)
인간 행복의 주된 원천은 자신의 내부에서 발원한다는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매우 올바른 지적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제1권 7장, 제7권 13, 14장)에서 모든 향유란 어떤 행동을, 즉 어떤 힘의 사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런 행동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의 행복은 자신의 두드러진 능력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행사하는 데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스토바이오스도 소요학파의 윤리학에 관해 서술하면서(『윤리학 선집』 제2권 7장) 그대로 사용했다. (39)
제3장 인간이 지닌 것에 대하여
소유물에 관한 우리의 합리적인 소망의 한계 설정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문제다. 소유물에 관한 각자의 만족은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상대적인 양, 즉 그의 요구와 그의 소유물 간의 관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 부는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명성도 이와 마찬가지다. (50)
현재 지닌 재산은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재난이나 사고에 대비한 방호벽으로 보아야지, 세상의 즐거움을 얻게 해주는 허가증이나 그럴 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52)
제4장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대하여
자신의 행복을 (…) 자신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에서 찾아야 하는 자는 빈약한 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 우리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며, 건강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수단, 즉 아무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살아가는 것이다. 명예, 영화, 지위, 명성은 그것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긴 하지만, 방금 말한 본질적인 자산과 비교할 수 없으며, 그것을 대체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본질적인 자산을 위해 그런 것들을 아무런 미련 없이 희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 현실적으로 자신의 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지 타인의 견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는 것이 행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58~59)
타인으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증명해 줄 뿐이다. 타인의 견해에 너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망상이다. (59)
어떤 종류의 것이든 인간을 훈련하는 기술에서는 명예심을 왕성하게 하고 북돋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 삼는 인간 자신의 행복과 관련해서 본다면 (…) 오히려 타인의 견해에 너무 지나친 가치를 부여하지 않도록 충고한다. (60)
우리의 행복은 마음의 안정과 만족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서는 명예욕이라는 동기를 합리적인 한도로 억제해서 (…) 낮추는 것이 (…) 필요하다. (…) 인간이 공통으로 지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의 머릿속에 든 대부분의 견해는 그릇되고 불합리하며, 이치에 어긋나고 터무니없는 것이므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없음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또한 대부분의 상황과 경우에서 타인의 견해가 우리에게 별로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은 대체로 비호의적임을 알아야 한다. (…) 결국 명예라는 것도 엄밀히 말해서 간접적인 가치만 지닐 뿐 직접적인 가치는 없음을 알 필요가 있다. (62)
자긍심은 어떤 점에서 자신이 압도적인 가치를 지녔다는 것에 관한 확고한 확신임에 반해, 허영심은 이러한 확신을 타인의 마음속에서 일으키려는 소망이다. (64)
자긍심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자신이 압도적인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내적 확신만이 실제로 자긍심을 품게 해준다. (…) 자긍심은 확신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모든 인식과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긍심의 가장 고약한 적은, 말하자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른 사람의 갈채를 받으려고 애쓰는 허영심이다. (…) 자긍심의 전제 조건은 이미 자기 자신을 아주 확고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63~65)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값싼 종류의 자긍심은 민족적 자긍심이다. 민족적 자긍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런 사실로 자랑할 만한 개인적 특성이 부족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의미 있는 개인적 장점을 지닌 사람은 언제나 자국민의 결점을 보고 있으므로 오히려 자신의 민족이 지닌 결점을 가장 또렷하게 인식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무엇 하나 자랑할 만한 게 없는 가련한 멍청이는 자기가 속한 민족을 자랑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붙드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힘을 회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국민 특유의 온갖 결점과 어리석음을 필사적으로 옹호하려고 한다. (65)
민족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개성이다.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 민족성에 비해 개성은 천배 이상 고려할 가치가 있다. (66)
이 장에서 논하는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것, 즉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명예, 지위, 명성으로 나눌 수 있다. (66)
지위란 인습적인 가치, 즉 엄밀히 말하면 허구적인 가치다. 지위의 작용은 허구적인 존경으로, 모든 것이 대중에게 보이기 위한 희극이다. 훈장은 대중의 여론에 영합한 어음과 같다. (66)
명예에 관한 논의는 지위에 관한 논의보다 훨씬 어렵고 번거롭다. (…) 나는 “명예란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의 가치에 대한 타인의 견해고, 주관적으로 보면 이러한 견해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이다.”라고 말하겠다. 이렇게 보면 명예는 그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순전히 도덕적인 작용은 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매우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한다. (67)
인간이 타인과 맺을 수 있는 다양한 관계에서, 타인이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즉 그를 좋게 평할 수 있는지에 따라 몇 가지 종류의 명예가 생겨난다. 이러한 관계는 주로 나의 것과 너의 것이라는 관계, 그런 다음에는 자청해서 책임을 떠맡는 일의 관계, 마지막으로는 성적 관계다. 이 세 가지는 시민적 명예, 직무상의 명예, 성생활의 명예와 상응한다. (68)
이 가운데 가장 범위가 넓은 것은 시민적 명예다. 시민적 명예는 우리가 모든 사람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불공정하고 불법적인 수단을 결코 쓰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을 본질로 하고 있다. 시민적 명예란 모든 평화로운 교제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다. (…) 중상이나 잘못된 외관과 같은 착오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번 실추된 명예는 회복할 길이 없다. 따라서 중상과 비방, 명예 훼손을 단속하는 법이 있다. (…) 시민적 명예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실로 중대한 사항이므로 누구나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신의와 신뢰를 깨는 자는 무슨 일을 하든, 누구든 영원히 신의와 신뢰를 잃는다. 이것들을 잃은 대가는 반드시 나타난다. (68~69)
명예는 어떤 의미에서는 소극적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적극적 성격을 지닌 명성과 대비된다. (…) 명예란 이것의 주체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님을 말해준다. 반면에 명성은 그 장본인이 예외적인 인물임을 말해준다. 명성은 일단 획득해야 하는 반면, 명예는 단지 잃지 않기만 하면 된다. 명성이 없다는 것은 무명無名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소극적 성질을 띠는 반면, 명예가 없다는 것은 치욕이므로 적극적 성질을 띤다. (…) 명예는 단지 그것의 주체에게서 출발하고, 그 사람의 행동에 기인하는 것이지 타인의 행도이나 그가 당하는 일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명예는 우리에게 종속된 것에 속한다. (…) 명예에 가해지는 외부의 공격은 단지 증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그에 어울리게 중상자를 공개하고 가면을 벗겨 중상 행위를 반박하는 것이다. (69)
명예의 가치는 간접적인 것에 불과하다. (70)
직무상 명예란 어떤 직무를 맡은 사람이 그것에 필요한 모든 자질을 실제로 갖추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도 직무상의 책임을 확실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타인의 견해다. (…) 일반적으로 신분은 명예의 특별한 정도를 규정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예의 정도는 신분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의 판단 능력에 따라 다소 수정될 여지는 있다. 그러나 특별한 책임을 지니고 수행하는 사람이 주로 소극적인 성질에 바탕을 두는 명예를 지니는 일반 시민에 비해 더 많은 명예를 인정받는 것은 사실이다. (70~71)
성적인 명예는 그 성질상 여성의 명예와 남성의 명예로 나뉘는데, 양쪽에서의 잘 이해된 협동 정신이다. (71~72)
그런데 성적 명예는 다른 모든 가치 이상으로 단순히 상대적 가치를 지닐 뿐이다. 아니, 그 가치는 단순히 인습적 가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73)
기사적인 명예의 원칙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명예의 원칙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심지어 이 둘은 부분적으로 서로 상반된다. 예컨대 지금까지 논의해 온 명예의 소유자는 명예를 지키는 남자임에 반해, 기사적인 명예를 지닌 자는 체면을 중시하는 남자다. (76)
타인과의 평화로운 교제를 중시하는 시민적인 명예는 우리가 타인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에 완전한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상대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는 반면, 기사적인 명예는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절대적으로 옹호할 생각이기 때문에 우리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인식을 상대에게 심어주려는 데 있다. (87)
민족적 명예란 시민적인 명예의 체면 문제를 기사적인 명예의 체면 문제와 결합한 것이다. (99)
명성과 명예는 쌍둥이다. (…) 명성은 불후의 것이고 명예는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최고 등급의 명성, 즉 참되고 진정한 명성에 한하는 이야기다. 여러 종류의 덧없는 명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예는 같은 사정에 있는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특성이 있는 반면, 명성은 누구에게나 요구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 명예는 우리에 관한 소문이 전달되는 범위에 한정되는 반면, 명성은 우리에 관한 소문이 전달되는 범위를 넘어 명성 자체가 도달되는 범위까지 멀리 퍼진다. 명예는 누구나 요구할 권리가 있으나, 명성은 예외적인 인물만 요구할 권리가 있다. 매우 뛰어난 업적이 있어야만 명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업적은 행위이거나 작품이다. (99)
탁월한 공적을 쌓은 사람은 모두 공적이 없는 사람들을 희생한 대가로 명성을 얻는 것이다. (104)
그러므로 명예는 대체로 공정한 심판자가 있어서 어떤 질투에도 명예가 손상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명예는 누구에게나 신용 대부로 미리 주어져 있다. 그런 반면 명성은 질투 같은 건 개의치 않고 쟁취해야 한다. (…) 명예는 우리가 모두와 공유할 수 있고 공유하려고 하지만, 명성은 그것을 얻는 사람이 생겨날수록 입지가 좁아져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나아가서 작품으로 명성을 얻는 어려움은 그러한 작품을 읽는 독자의 수와 반비례한다. (105)
따라서 명성을 얻기는 어렵되 유지하기는 쉽다. (…) 명예는 누구나, 심지어 신용으로도 얻을 수 있다. 누구나 신용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이 어려운 문제다. 한 번이라도 비열한 행위를 하면 명예를 잃어버려 다시는 회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명성은 결코 잃어버릴 일이 없다. 일단 명성을 얻은 행위나 작품은 영원히 확고부동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명성이 더해지지 않더라도 명성은 행위를 한 사람이나 창작자에게 그대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명성이 실제로 점차 사라져, 본인 생전에 소멸한다면 그것은 가짜다. 즉 순간적인 과대평가로 생겨난 분에 넘치는 명성이었다. 헤겔이 얻은 명성이 바로 그런 분에 넘치는 명성이었다. (106)
명성이란 본래 어떤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과 비교한 데서 생긴다. 명성이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며, 그 때문에 상대적 가치만 가진다. (…)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얻을 만하게 해 주는 것이 값진 것이다. (106)
명성이란 부차적인 것, 즉 공적의 단순한 메아리, 모상模像, 그림자, 징후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08)
참으로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명성이 아니라 명성을 얻게 해주는 요소, 즉 공적 그 자체에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공적이 생기게 해주는 신조와 능력에 있는 것이다. (108)
행복은 사상 그 자체에 담겨 있다. 먼 미래의 더없이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이 사상을 숙고하는 일에 몰두하며 즐거움을 누린다. 그러므로 사후 명성의 가치는 그 사상의 공적에 있다. (109)
제5장 훈화와 격언
1. 일반적인 것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제7권 12장)에서 곁들여 말한 “분별 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라는 명제를 모든 삶의 지혜의 최고 원칙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쾌락 대신 즐거움이라는 단어를 쓸 수도 있다. (115)
그렇다. 삶의 노고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노년에는 위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장 행복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정신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그다지 큰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지, 대단히 큰 기쁨이나 엄청난 쾌락을 맛본 사람이 아니다. (116)
최고의 기쁨이나 향락으로 인생의 행복을 재려고 하는 자는 잘못된 잣대를 잡은 것이다. 향락이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향락이 행복하게 한다는 생각은 질투심이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품는 망상이다. 반면에 고통은 적극적으로 느껴진다. 그 때문에 고통이 없다는 것은 삶의 행복을 재는 잣대다. 무료함이 없어 고통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사실상 지상의 행복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환영幻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치르면서, 즉 고통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향락을 맛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소극적인 것, 즉 환영과 같은 것을 맛보는 대가로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도외시하는 셈이다. 이와 반대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향락을 희생한다면 이득을 얻는 것이다. (116)
따라서 행복과 영화, 향락을 얻으려고 애쓰다가는 커다란 불행을 자초하기 때문에 향락과 재산, 지위와 명예 등에 대한 요구를 적당한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상책이다. 매우 불행해지기는 쉽지만 매우 행복해지기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므로 위의 방법을 쓰는 것이 현명하고 권장할 만하다. (120)
대부분의 경우 화려한 것은 무대 장식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겉모습에 불과하고, 사물의 본질이 결여되어 있다. (…) 기쁨이 실제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초대받지 않고 알리지도 않은 채 자발적으로 으스대지도 않고, 조용히 살금살금 다가온다. 기쁨은 종종 전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계기로, 극히 일상적인 상황에서, 즉 결코 빛나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은 기회에 나타난다. 기쁨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금처럼 우연의 변덕에 따라 아무런 규칙도 법칙도 없이 대체로 대단히 미세한 알갱이로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큰 덩어리로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21)
어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대충 알아보려면 그가 어떤 일에 즐거워하는지가 아니라 어떤 일에 슬퍼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그 자체로 볼 때 사소한 일에 슬퍼할수록 더욱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야 사소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122~123)
우리는 삶에 많은 요구를 하면서 삶의 행복을 넓은 토대 위에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 토대 위에 세운 행복은 자칫하면 무너지기 쉬우며, 재난이 일어날 기회가 훨씬 많아서 이러한 재난이 꼭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건물은 토대가 넓을수록 견고한 것과 달리 우리의 행복이라는 건물은 이런 점에서 반대다. 따라서 자신이 지닌 온갖 종류의 수단과 균형을 맞추어 요구 수준을 되도록 낮추는 것이 큰 불행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123)
2. 우리 자신에 관한 우리의 태도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이다. 현실은 현실적으로 충만한 시간이고, 우리의 생활은 오로지 현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현재를 항시 명랑한 기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직접적인 불쾌감이나 고통이 없는 그런대로 견딜 만한 자유로운 시간은 일부러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좋다. 다시 말해 과거에 품은 희망이 실패로 돌아갔다거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짜증 난 얼굴로 현재를 우울하게 보내서는 안 된다. 지난 일에 대한 불만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재의 좋은 시간을 내팽개치거나 경솔하게 망쳐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걱정은 물론 후회하는 일에조차 일정한 시간만 할애하는 것이 좋다. (127)
미래의 재앙 중 우리를 정말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올 것이 확실하고, 오는 시기 역시 확실한 재앙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재앙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128)
우리의 시야, 활동 범위, 접촉 범위가 좁을수록 우리는 행복해지고, 그런 것이 넓을수록 고통이나 불안을 느끼는 빈도가 잦아진다. (129)
정신적인 면까지 포함해서 모든 범위를 한정해야 우리의 행복에 도움이 된다. (…) 한가하게 쉬는 것은 위험하다. 이에 반해 외적인 제한은 인간의 행복에 크게 도움이 되며 필수 불가결하다. (…) 따라서 무료함을 야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러 관계를 될 수 있는 한 극도로 단순화하고, 심지어 생활 방식을 극히 단조롭게 해야 행복해진다. (130)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우리의 의식이 무엇으로 차 있으며 무엇에 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130)
“행복이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의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131)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자유롭기 때문이다. (132)
하지만 인간은 원래 자기 자신과만 완전히 융화할 수 있다. 친구와도 애인과도 완전히 융화할 수는 없다. 개성이나 기분이 달라 사소한 것일지라도 언제나 불협화음을 초래한다. 그 때문에 마음의 진정하고 심원한 평화이자 완전한 내면의 평정, 즉 건강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이 지상의 재화는 고독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철저한 은둔 상태에서만 지속적인 기분으로 가질 수 있다. 이때 자신의 자아가 크고 풍요롭다면 이 가련한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상태를 누릴 수 있다. (…) 고독이 행복과 마음 평정의 원천이므로 젊은이는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을 주된 연구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134)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이 전부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34)
어떤 사람의 사교성은 그의 지적인 가치에 대체로 반비례한다. 그리고 “그는 매우 비사교적이다”라는 말은 “그는 위대한 특성을 지닌 사람이다”와 거의 같은 말이다. (137)
다시 말해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고독으로 이중의 이점을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함께한다는 이점이고, 둘째는 타인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이점이다. 모든 교제에는 많은 강제와 고충, 위험이 따름을 감안할 때 두 번째 이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 사교성은 우리가 대체로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하므로 위험하면서도 해로운 경향을 가진 것 중 하나다. 비사교적인 사람이란 그런 사교성을 지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사교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다. (137)
마음의 평정이라는 행복을 얻기 위해 견유학파 사람들은 모든 소유물을 단념했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사교를 단념하는 사람은 가장 현명한 수단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 일찍 고독과 친해지고 점차 고독을 좋아하게 되는 사람은 금광을 얻은 자와 마찬가지다. (137~138)
그러므로 결국 잠드는 것은 매일의 죽음이고, 매일 깨어나는 것은 새로운 출생이다. (150)
3.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아무도 자신을 넘어서 볼 수 없다. (…) 모든 가치 평가는 평가자의 인식 범위로 평가받는 자의 가치를 따져서 생겨난 산물이다. (163)
클럽의 규정을 뻔뻔스럽게 어기는 자는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은 한 나라의 법도 어길 것이다. (169)
용서하고 잊어버리는 행위는 자신이 한 값진 경험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격이다. (169)
대내외적으로 인위적인 기구와 권력 수단을 지닌 국가란 인간의 끝없는 불의에 제한을 가하려는 예방 수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체 역사를 살펴볼 때 모든 왕은 지위가 굳건해지고 나라가 약간이라도 번영하면, 이러한 번영을 이용해 도적 떼와 같은 군대를 몰고 이웃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던가? 거의 모든 전쟁이 실은 약탈 행위가 아니었는가? (170~171)
규칙을 이해하는 일은 이성에 의해 단번에 가능하지만 실행하는 법을 익히는 일은 연습에 의해 점차 가능해진다. (171)
친구들은 서로를 솔직하다고 하지만, 솔직한 것은 실은 적이다. 따라서 적의 비난은 입에 쓴 약이므로 자기 인식에 이용하면 좋을 것이다. (175)
남이 자기에게 다가오도록 하려면 많은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열등함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177)
예의란 도덕과 지성 면에서 빈약한 서로의 성질을 보고고 못 본 체해, 그것을 들추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다. 노출되는 경우가 적어 서로가 이익이 된다. (178)
예의는 현명함이고, 따라서 무례는 어리석음이다. 쓸데없이 경솔하게 적을 만드는 것은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미친 짓이다. (178~179)
모욕의 본질은 언제나 무시의 표시다. (179)
자신의 분별력을 드러낼 때는 말보다 침묵이 더 낫다. 침묵은 현명함의 문제고, 말은 허영심의 문제다. (…) 우리의 생각과 말 사이에 틈을 크게 벌려 두는 것이 현명하다. (181)
사람들은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는 그토록 둔감하고 무관심하면서도 개인의 사사로운 일에 대해서는 너무나 집착한다. (182)
4.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운명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관하여
우리는 어떤 계획을 세우지만 이 계획은 체스에서는 상대방이, 인생에서는 운명이 어떤 수를 쓸 것인가에 따라 제약받는다. (185)
다행히도 오래 살아야만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문제를 판단할 능력이 생긴다. (186)
결과를 예견해 시간을 앞질러 취하는 일은 이론적으로만 해야지 실제로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시간이 경과해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을 시간이 되기 전에 요구해 시간을 앞질러서는 안 된다. (188)
평범한 두뇌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숙고하고 평가할 때 언제나 이미 일어났다고 하는 일에 대해서만 염려하는 반면, 영리한 두뇌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는 일까지 숙고한다. (189)
처세에 완벽한 사람이 있다면 결코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급히 서두르지도 않는 사람일 것이다. (193)
어느 정도의 두려움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 겁이란 단순히 두려움의 지나침이다. (194)
제6장 나이의 차이에 대하여
청년기에는 재난을 참는 법을 터득하는 반면 노년기에는 그것을 피하는 법을 터득한다. (199 각주100)
청년기에는 자주 인간 세계에서 버림받은 느낌을 받는 반면, 노년기에는 인간 세계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는다. 전자의 불쾌한 느낌은 인간 세계를 잘 모르는 데 기인하고, 후자의 유쾌한 느낌은 인간 세계를 잘 아는 데 기인한다. (199)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인생 경험으로, 청년이나 소년과 다르게 세상을 보아 무엇보다도 공평함을 얻을 수 있다. 성숙한 인간은 무엇보다 사물을 매우 단순하게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 경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청년기에 만들어진 환영이나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200)
어릴 때는 인생행로에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나 인물은 요란하게 등장할 걸로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그런 일이나 인물 모두 아주 조용히, 뒷문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슬쩍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0)
청년기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무한히 긴 미래이고, 노년기 입장에서 보면 매우 짧은 과거다. 그래서 인생이란 처음에는 사물이 오페라글라스의 대물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접안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인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늙어 봐야, 다시 말해 오래 살아 봐야 한다. 시간 자체도 청년기에는 훨씬 더디게 흘러간다. 그 때문에 우리 인생의 첫 4분의 1은 가장 행복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가장 긴 시기이기도 하므로, 어느 시기보다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래서 추억 이야기를 할 때는 누구나 그다음 두 시기를 합친 것보다 이 첫 4분의 1 시기에 대해 할 얘기가 더 많을 것이다. (201~202)
오래 살수록 중요하게 생각되거나, 나중에도 반추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의미있게 생각되는 사건이 더 적어진다. 반추해야만 일들이 기억에 단단히 새겨질 수 있다. 일들은 지나가 버리면 곧 망각된다. (202)
먼 고향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간혹 있는데, 그것은 좀더 젊고 활기찼던 그곳에서 보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경우에는 시간이 공간이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그곳으로 여행해 보면 우리는 속았음을 깨닫는다. (203)
어린 시절에는 모든 대상과 일이 신기하므로 그런 것 하나하나가 기억에 새겨진다. 그 때문에 하루가 무한히 길게 느껴진다. (206)
심오한 진리는 보고 알아차릴 뿐 계산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즉 진리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직접적인 인식으로 순간적인 인상에 의해 야기된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이 생기려면 인상이 강렬하고 생생하며 깊어야만 한다. (…) 청년기에는 관찰이, 노년기에는 사고가 지배한다. 그 때문에 청년기에는 문학에 빠지고, 노년기에는 철학에 빠져든다. (207)
나이가 들어가는 자만이 인생의 전모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경과를, 그리고 청년과 달리 입구 쪽에서뿐만 아니라 출구 쪽에서도 굽어보아 무엇보다 인생의 무상함을 완전히 인식하므로 그것에 대한 완전하고도 적당한 표상을 얻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는 망상에 항상 사로잡혀 있다. (208)
우리 인생의 첫 40년은 본문을 제공하고, 그다음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의 성격을 지닌다. 이 주석은 본문에 들어 있는 도덕과 온갖 미묘한 맛 말고도 본문의 참된 의미와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법을 가르친다. (209)
노년기에는 물론 고독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고독에 무료함이 반드시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이고 사교적인 향유만 알았던 사람, 정신을 풍부하게 하지 않고 능력을 키우지 않았던 사람만 무료해질 뿐이다. (212)
노년기에 빈곤은 커다란 불행이다. 궁핍에서 벗어나고 건강이 유지되면 노년기는 인생에서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노인의 주된 욕구는 편안함과 안정이다. 그 때문에 노년이 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돈을 사랑한다. (…) 노인이 되어서도 연구욕이 있고, 음악이나 연극을 즐기고,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그래도 남아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212)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힘이 자꾸 떨어지는 것은 물론 슬픈 일이지만 그런 현상은 필연적인 동시에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죽음의 준비 작업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음이 너무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고령에 이르러 얻는 가장 큰 이득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병에 의하지도 않고 경련을 수반하지도 않으며 아무런 느낌도 없는 매우 안락한 죽음 말이다.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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