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8월, 히로시마마루(宏島丸)에서 계약기간을 마치고 일본 도오쿄오(東京)항에 입항하여 양하 등 모든 일을 스무스하게 잘 마치고, 본사 오가와(小川) 상무(常務)에게 술과 밥 대접도 받았다. 당시로 봐서 대(大) 해운회사 상무가 일선 선장, 그것도 자국인이 아닌 한국인 선장에게 식사를 접대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럴 만했다. 선령(船齡) 20년이나 된 낡은 배를 아무 사고없이 1년 6개월간 운항했고, 용선자로부터 밀린 용선료를 받는데 일조(一助) 했을 뿐아니라 그들의 사정에 의해 선박을 매선(賣船)를 하는 과정에서도 매수자에게 성실하게 설명한 덕분에 순조롭게 성사(成事)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공식 업무가 끝난 다음, 선박을 매입(買入)한 회사의 요청에 따라 도오쿄오(東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미즈(清水)항에서 인계가 끝나면 부산으로 귀국하기로 되어 있어 아무 부담 없이 그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아주 홀가분한 항해만 남았다. 매입한 선사(船社)는 그곳에서 전면 개조하여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려 했다.
출항 직전에 본사에서 급히 전갈이 왔다. 항해 도중 도쿄오만(東京灣)을 지날 때 본선에서 영화촬영이 있을 예정이니 협조 부탁한다는 내용이었지만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아마도 자기 회사 일도 아니고 운송에 관한 것도 아니니 ‘선장이 알아서 하라…’는 뜻인 듯 했다.
경위(經緯)는 어떻게 되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당시 일본에서도 이름난 ㈜다이에이에이조(大映映像)이라는 영화사에서 촬영을 한다고 무더기로 올라왔다. 책임자 두어 명을 만났다.
촬영은 해야 하는데 마땅한 선박을 찾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 히로시마마루(宏島丸)가 항해 중 여유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 급히 선주(船主)회사와 상의하고 영화사, 세관, 해상보안청 등 관계기관들이 타협하여 허가를 얻었으니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명함도 여러 장을 주고받고 했지만, 일본 유수의 영화사 직원이나 감독이 지나치는 외국선박의 선장이야 별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촬영은 해야 할 형편이니 마지 못해 대한다는 눈치였다. 그거야 나도 마찬가지, 제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는 일본의 영화사 감독이거나 책임자라고 해도 내 업무상으로는 귀찮기만 한 존재이니 내 알 바 아닌것이었다.
하지만 인연이 닿았으니 어쩔 수 없다.
“어찌하면 돼요?”
“이 영화감독이 얘기하는 데로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됩니다.” 했다.
아마도 영화감독은 따로 있고 그는 행정적인 책임자인 듯했다. 말이야 쉽지만 육상의 자동차와는 달리 길이가 100여미터나 되는 크고 육중한 선박이 바다 위에서 움직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다 나에게는 자선(自船)뿐만이 아니라 운항중인 다른 많은 타선(他船)들의 안전이라는 중대한 책임이 있다.
좁은 항만(港灣) 내에서 선박들의 왕래 속에서 무턱대고 이리 돌리고 저리 가고 할 수가 없다. 일단 내 입장과 사정들을 얘기한 다음,
“그럼 그렇게들 알고 합시다.” 하고 시작했다.
사실 운항중인 선박을 영화촬영에 이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기 본래의 임무를 재쳐두고 남의 영화촬영에 임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선박회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선박의 통항이 많은 도오쿄오만(東京灣)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360도 회전하고 항해하고 급후진(急後進)하는 등은 분명히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한 척이 따라오며 앞 · 뒤에서 항해 중인 여러 선박에게 위험을 미리 알리는 등 운항상의 안전을 도와주기까지 하게 되었다.
하늘에는 “大映映像”란 큼직한 글자가 선명한 헬리콥터가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선회하며 무전으로 연락을 한다.
뒤따르는 해상보안청 순시선에서 이 부근이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지나다니는 선박들이 비교적 적고 여유가 있는 해상(海上)이었다.
배우(俳優)는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둘 밖에 없는데 따르는 사람이 어찌 그리많은지…. 배보다 뱃사공이 많다는 생각이었다. 배우들의 옷과 머리를 수시로 다듬고 맵시를 잡아 주는 사람, 선교에서 내려다 보며 지시하는 감독과 무전기 한 대씩을 들고 배우들 보다 더 바쁘게 설치는 축들, 무거운 무비카메라를 어께에 짊어지고 팥죽 같은 땀을 흘리는 서너 명의 카메란맨들 각양각색이다.
도쿄오만과 행선시 시미즈항
“메가폰 들고 설치는 저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이요?” 했더니 조감독(助監督)들이랬다.
“뭘 찍소?” 했더니 영화 스토리 중 「경찰에 쫓기던 범죄자가 선박으로 도망쳤는데 이를 쫓아 나선 형사를 그의 애인이 다시 뒤따라 오는데, 형사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는 경비정으로 뒤따라오는 애인을 보자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간다」는 내용으로 다른 것은 셋트장에서 할 수 있어도 선박의 선회, 배에서 뛰어 내리는 장면 등은 실제로 배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부득이 촬영할 여건이 되는 선박을 찾아 여러 차례 해운국과 연락했으나 마땅한 선박이 없어 촬영이 지연되어 왔는데, 마침 운 좋게, 다소 선박은 낡았지만 내 히로시마마루를 잡게 되었다고 만족한 표정이었다. 밀렸던 큰일 하나를 마무리하게 됐다는 듯한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할 일이 없는 우리 선원들은 모처럼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으니 신기한 듯 바라보기만 했다. 사실 영화촬영 현장을 직접 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외국에서….
나도 처음이었다. 당직이 아닌 항해사(航海士)가 선교에 올라와 넌지시 “선장님, 배우들과 사진이래도 두어 판 찍었으면 좋겠는데요….” 했다. 선원들에게는 좋은 귀국 선물이 되겠다 싶어, 영화감독에게 전 선원들과 함께 사진 한판 찍자고 했더니 “소오데스네에!(글쎄요!)”를 서너번 반복하기만 했다. 될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렸다.
구경하던 선원들이 얼씨구나 하고 어떤 녀석은 얼른 내려가 멋진 옷으로 갈아입고 평소 보지 못한 모자까지 둘러쓰고 나와 기다렸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망이었다. 내 자신부터 그놈의 ‘소오데스네에!(글쎄요)’ 하는 말의 올바른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사람들의 ‘소오데스네에!(글쎄요)’하는 말은 거절의 의미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예부터 상업으로 유명했던 일본 오오사카(大阪) 상인들에게 물건값을 좀 깎자고 하면 ‘된다’ ‘안 된다’ 소린 결코 하지 않고 ‘소오데스네에’ 만 되풀이한다고 했다.
그럴줄 진작 알았더라면 억지로라고 우겨서 한 장쯤 남길걸…. 그러지 못한 것은 지금도 좀 아쉽다.
작은 보트부터 거대형 유조선이나 화물선들의 통항이 많은 동경만에서 쉽게 배를 선회하고 속력을 늦추고 후진할 수가 없다. 여간 신경이 쓰인 일이 아니다. 거기다 감독이란 녀석은 마치 선단장(船團長)이나 된 듯이 뒤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니, 저야 필름 돌아가는데 맞추면 되지만 나는 주위의 사정을 살피고 위험을 피해야 하니 그게 쉬운 일인가. 한 번 잘못되면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 하곤 했으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무사히 마치고 나니 마음은 홀가분했다. 안전을 지켜주려 따라온 해상보안청 순시선 함장(艦長)이 수고했다는 인사를 보냈다. 그도 실은 신경이 몹시 쓰였을 것이 분명하다. 역시 일본인 다운 일이었다.
팀이 배를 떠나면서 책임자란 자가 “센쬬상, 고꾸로사마데시다, 아리가도고자이마스(선장님, 수고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봉투 하나를 내민다. 열어보지도 않은 체 일등항해사에게 건냈더니, 잠시 후 “선장님 20,000엥 밖에 안 되는데요.” 한다. “뭐라꼬?”
책임자를 다시 불러 세웠다.
“당신 우리 선원들이 보트나 사다리 등등 힘들게 거들어 주는 것 봤잖소. 나야 선교에서 오더만 했지만…. 헌데 이게 뭐요? 정말 이것뿐이요?” 했다
“예산이 없어서…”, 어쩌구저쩌구 하며 손바닥을 비비고 허리를 굽힌다. 에이 째째한 넘들! 역시 일본인 다운 처신이었다.
하기야 처음부터 나와 계약이나 거래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일본에서 영화나 TV로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서운한 일이었다.
첫댓글 겁도 없는 사나이. 동경만 해협에서 거대한 배를 360도 돌돌고 후진하며 영화 촬영을 하다니?
간 큰 짓도 했네. 그러나 지금 추억으로 남은 재산이라 좋네요.
우리 늑점이 알아줘야 해 ㅎㅎㅎ
말이사 그렇지 실은 속은 덜덜덜, 입술은 바짝바짝, 찔끔거리는 그것(?)을 참느라고 애를 섰지요.
세상사 어디 쉬운것이 있나요. 더구나 바다 가운데서... . 뛰어내려 봐야 거기가 거긴데.
닥치는 데로 맞붙어야지요. ㅎㅎㅎ. 감사하요. 부산넘
실화라서 더욱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늑점이님의 히로시마마루가 주연 급.ㅎㅎ
히로시마마루랑 대면하고 싶당.
오자. 탈자 없이 요로코롬 글을 잘 올렸는지 그게 더 신기하군요.
日誌니까 전부가 실화요. 거짓말 뻬고는 .... .
가끔은 오탈자도 있어 주인장의 잔소리도 들어야 되는데.... , 미안함다. ㅎㅎㅎ. 부산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흥미진진한 실화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흔히 쓰는 “소오데스네에" 와 "강강에마스" 같은 애매하면서 거절하는 수법은 외국인 특히
감정이 앞서는 한국인들에게는 감지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