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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변태니까
나는 고 김기영 감독이 타계하기 전 수년 동안 그분과 안부를 주고받으며 나름대로 절친하게 지냈다. 그분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가 기억난다. 1997년 겨울 12월에 나는 김기영 감독의 회고전을 기획해서 당시 일하고 있던 잡지사에 기사화 할 계획을 세웠다.
회고전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를 만난 나는 나름대로 노 거장을 대면한다는 존경심으로 긴장해 있었지만 김기영 감독의 서재 분위기에 얼이 빠지고 말았다. 그의 서재에는 어디서 뜯어냈는지 모를 나체 여성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벽 한 면에 걸려 있었다. 사방이 책들로 가득 채워진 서재와 그 대형 브로마이드가 꾸미는 분위기는 엽기적이었다. 상대의 반응은 아랑곳없이 김기영 감독은 환기도 되지 않는 서재에서 연신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당신의 사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지금도 매일 일하거든. 명절 때도 나는 일해. 설 때도 아침에 자식들 세배만 받고 바로 시나리오를 쓴다. 지금도 영화화할 시나리오가 서른권은 넘어. 젊은 사람들은 분발해야 돼.”
자신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처럼 ‘~다’로 끝나는 문어체를 종종 구사하는 김기영 감독은 대화를 나누다가도 뭔가 당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걸 말할 때는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스필버그는 유태인이다. 유태인들은 머리가 좋지. 세계는 유태인들의 장삿속에 놀아나고 있는 거다. 스필버그의 영화는 조심해야 해. 유태인들은 머리가 좋지만 철저하게 장삿속으로만 영화를 만들거든.<쉰들러 리스트> 따위의 영화는 다 그럴듯한 사기야. 자네도 알아두게. 거기에 걸려들면 안돼.”
이런 얘기를 할 때면 그는 ‘자네만 알고 있게’라는 투의 말로 시작하곤 했다.
“내가 오우삼의<브로큰 애로우>를 봤는데 별것 아니다. 그게 왜 장사가 잘 되는지 아나? 자네만 알고 있게. 거기서 아무리 악당들이 총을 쏴도 주인공은 죽지 않아. 바로 그거야. 젊은 아이들이 게임하는 걸 보면 그 영화와 똑같다. 아무리 총을 쏴도 죽지를 않아. 그 영화는 게임을 모방했기 때문에 성공한 거야.”
김기영 감독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어떤 주제가 나와도 막힘이 없을 만큼 박학다식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상대를 홀리는 언변이 있었다. 실은, 언변만큼이나 그의 솔직한 태도도 상대를 압도했다. 평생 그가 가장 자주 만들었던 영화는 <하녀>류의 영화로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이야기였다. <하녀><충녀><화녀><화녀82><육식동물>등의 영화가 다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가정부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중산층 남자의 이야기. 왜 그렇게 비슷한 이야기를 만드시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단순명쾌했다.
“장사가 잘 되니까. 극장 배급업자들은 그 영화만 만들면 손님 든다. 이렇게 생각했거든. 그래서 때만 되면 만들어 달라고 돈 보따리 싸들고 나한테 오는 거야. 그럼 나는 또 만든다. 똑같은 영화라고 하겠지만 실은 많이 다르다. 배우, 화면 다 달라.”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남자들은 다 똑같애. 여자 생각만 한다. 나도 바람 피우고 싶지만 잡혀갈까봐 못 하는 거야. 당신도 그렇지?”
김기영 감독과 함꼐 작업했던 정일성 촬영감독의 말에 따르면 김기영 감독의 초라영 현장에는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기이한 상황이 곧잘 연출됐다. 1970년대 초에 <화녀>를 찍을 때 김기영 감독은 영화속 설정에 따라 쥐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성냥불로 태우는 연기를 여배우에게 시켰다. 그때 수백마리의 쥐들이 뜨거움을 견디다 못해 구덩이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쥐들은 세트로 지어진 집의 벽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쥐들이 짹짹거리며 불붙은 몸으로 온 사방에 불덩이를 옮기는 그 상황에서 정일성 감독은 카메라를 돌렸다. 필름에 담긴 그 장면은 보는 사람의 얼을 빼놓을 만한 것이었지만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검열에서 잘렸다.
1976년에 제작된 <이어도>는 이청준 소설이 원작이지만 원작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김기영 감독은 도입부의 상황만을 소설에서 끌어오고 전혀 다른 내용으로 나머지를 채웠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도 충격적인 장면이 담겨 있다. 죽은 남자의 씨를 받기 위해 무당의 입회하에 남자의 성기에 대롱을 꽂고 그 위에 여자가 올라선다. 김기영은 사람이 죽어도 일주일간 정액은 살아 있다는 속설에 따라 그 장면을 찍었다고 말했지만, 그 설정의 과학적 타당성의 여부를 떠나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입회했던 70년대의 살벌했던 검열 풍조에서 이 장면을 보던 검열위원들의 표정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김기영 감독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물었더니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아. 별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다시 영화를 보니 정말 잘 만들었다. 벌써 공해 문제도 얘기했던데.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기영 감독은 해방 이후 남한이 배출한 드문 천재였다. 그의 삶을 둘러싼 온갖 일화들이 그의 천재성을 증거하고 있었다. 서울대 치대 시절 연극반 활동 시절에 연출자로서 이미 명성을 얻은 그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해서 스타니슬라프스키 연극 이론을 공부할 결심을 했다. 평양에 가서 이미 그쪽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권모 선생의 조언을 얻으려고 했던 김기영은 그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평양에 체류하면서 몇 편의 연극을 연출 했다. 꽤 평판이 좋게 났는데도 여전히 자신을 만나자는 얘기가 없자 그는 직접 권선생을 찾아갔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예술을 하려면 돈과 운이 필요하다. 난 당신의 운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모스크바 유학을 권할 수 없다.” 실망한 김기영은 삼팔선을 건너 돌아왔고 그 직후 남한과 북한은 따로 정부를 수립했다.
김기영 감독을 만나면 이런 식의 일화들이 쉴 사이 없이 흘러 나왔다. 나는 옛날 얘기를 든는 어린아이처럼 김기영 감독의 얘기 보따리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사모님에게서 하루 2만원의 용돈을 받았던 그는 소문난 구두쇠라는 평판과 달리 내게 밥도 곧잘 샀다. 동숭동의 어느 일식 우동집에서 나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곳 국물 맛은 진짜야. 제대로 국물 맛을 낸다. 동경 유학 시절에는....’하며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식이었다. 어른께는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그는 어린아이 같았다. 모든 대화의 8할이 자기 자랑이었지만 남들 흉을 보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생각했다. 얘기의 화제가 주변에 미치면 그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집요한 자기중심적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버릇은 여전히 그를 한국 영화의 중심에 자리하게 한다.
당시 잡지사에서 기획했던 회고전은 1월부터 2월까지 매일 첫 회에만 상영을 하는 행사로 치러졌고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했을 때 만원사례를 이룬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누구도 대학로의 예술영화 극장에까지 찾아와 조조상영 영화를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김기영은 그 이유를 자신의 대표작 <하녀>를 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녀>는 지금 다시 극장에 걸어도 터진다. 명보 극장 사장이 내 친구의 아들인데 언제든지 상영해준다고 약속했어. 지금 그 타이밍을 보고 있다. 극장에 손님들이 와서 돈이 모이면 다음 영화를 찍을 거야” 라고 그는 호언장담 했다. 그 회고전에서 어떻게 해서든 <하녀>를 틀려고 했던 내 계획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조심스럽게 권했지만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형. 내가 다른 부탁은 들어줄 수 있지만 이것만은 곤란해. 이건 내 종자돈이나 마찬가지거든”
<하녀>에 대한 김기영 감독의 자부심과 고집은 대단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일본 도쿄에서 김기영 감독과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일부 묶어 상영하는 회고전 행사가 마련됐을 EO도 김기영 감독은 <하녀>프린트만은 직접 들고 가겠다고 고집해 주변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쓴 심술궂게 생긴 노인이 필름이 든 깡통을 들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공항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인 소동을 훗날 김수용 감독에게 전해 들으면서 나는 역시 그분다운 에피소드라고 생각했다.
김기영 감독은 필사적으로 새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1960년대에 신상옥,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과 더불어 한국 영화계를 이끌었던 감독이었고 70년대에도 소위 문예영화로 불리던 장르에서 꾸준히 작업했던 그는 80년대 이후 영화계에서 반 은퇴 상태에 있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의 수준은 고르지 않지만 어떤 것을 봐도 김기영적인 색깔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렇더라도 그의 영화는 너무 일찍 마모되고 소비됐다. 통신 문화가 활발하게 작되던 시절, 일부 영화광들에게 컬트로 추앙받았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는 태작이었지만 해석 자체를 거부하는 기괴하고 독특한 취향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직접 물었을 때 그는 이 영화를 거의 기억하지 못했고 말하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이 영화가 나왔던 1978년은 한국 영화가 최악의 불호아을 겪던 암흑기였다. 영화를 유신정권의 홍보 수단으로 여기는 정부의 감시 속에 엄격한 검열을 거쳐 한국 영화는 만들어졌고 대개는 외화수입 쿼터를 따내기 위한 선전영화나 의무제작 편수를 때우기 위해 날림 제작된 영화로 채워졌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도 기획에서 완성까지 한달이 걸린 날림 영화였다. ‘의지의 승리’ ‘미녀의 환생’‘살인나비’라는 세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는 죽은 줄 알았던 인간이 해골이 돼서도 나는 죽지 않는다고 외치고 고려시대의 여인이 환생하기도 하는 등, 죽음에 대한 강박감을 기상천외한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풀어낸다.
이 아방가르드한 스타일의 실험은 곧 아무도 영화를 보지 않고 필름이 창고로 직행할지도 모른다는 체념에서 비롯된 결과다. 김기영 감독은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에 대해 말하던 중 “나는 예술을 하려고 한 게 아니다. 나는 내 취미대로 영화를 갖고 놀았다”고 농담으로 되받았다. 김기영 감독은 좌충우돌하는 세계관과 비뚤어진 염세주의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영화세계를 만들었지만 한국의 영화 환경이 그런 그의 취향을 살려줄 만큼 관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바보사냥>과 같은 그의 후기작은 기획에서 극장에 걸리기까지 불과 23일이 걸린 초 날림 영화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데도 영화는 볼 만했다는 것이다.
성공작이든 실패작이든 김기영의 영화는 실망시키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하녀> 시리즈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대다수 영화에는 늘 김기영의 색채가 배어 있다. 아주 젊었을 때의 장미희씨와 하명중 씨가 나오는 <느미>도 그런 영화였다. 예쁘지만 벙어리인 여자 느미를 두고 늙은 남자와 젊은 남자가 벌이는 쟁탈전과 인생 유전을 그린 이 영화에는 온통 귀기로 가득하다.
여주인공 느미는 자신을 알게 되면 불행해지는 남자와의 인연을 포기하고 영화 말미에 오로지 어린 아기의 남은 인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후 사랑하는 남자 하명중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하명중이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이것은 착각이다. 착각이야!” 산동네의 허름한 길을 달려 내려가던 그는 갑자기 나타난 트럭에 치여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급사한다. 그의 죽은 모습 위로 자막이 깔린다. “그를 죽인 것은 여자인가 기계문명인가. 아니다. 인간이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사신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게 뭐야,라고 할 때쯤 화면에는 ‘끝’이라는 자막이 뜬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행동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영화의 매력이다. 일종의 미친 사랑의 연대기에 관한 영화인 <느미>역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습적인 앵글과 줄거리 대사는 한 토막도 없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등장인물들은 대다수가 적의를 품은 것처럼 행동하고 그들의 주변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심지어 천사처럼 착한 여자로 보이는 느미조차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상대의 어깨를 물어뜯는 일을 무심하게 한다. 좀 심하게 말해서 등장인물들은 말할 줄 아는 동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오히려 순결하게 보인다. 아무런 꾸밈없이 나오는 대로 툭툭 내뱉는 독특한 김기영 감독의 특유의 대사 화법 때문이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곧잘 ‘~다’로 끝나는 대사로 말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 하명중이 벙어리 여자와 산다는 소문을 들은 그의 회사 직원들은 그를 경멸하며 따돌린다. 그게 말이 되는 상황인지 아닌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이어지는 술집 장면에서 하명중의 회사 동료가 이렇게 지껄인다. “우리 회사 직원들은 전부 일류대 출신이다. 아내도 다 일류대 출신이다. 예쁜 여자들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너, 너는 일류대를 나와 일류대 출신 아내 대신 예쁜 아내를 얻었다. 그건 네 인생을 파멸시킬 것이다.” 그때 야한 옷차림을 한 술집 여급이 동료 옆에 선다. 동료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예쁜 여자라면 술집에 얼마든지 있다” 그의 영화에선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파괴해도 되는 줄 알아? 그건 안될 말이다. 안될 말이야!” 라고 부르짖는 등장인물의 관념적인 말이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보다 보면 배시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김기영 감독이 70년대에 만든 <이어도><흙><육체의 약속>등의 영화는 70년대가 한국 영화의 암흑기였다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든다. 오늘날에도 그 영화들은 다시 만들어지기 힘든 독특한 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만희의 <만추>를 리메이크 했으되 원작의 로멘티시즘을 철저하게 파괴한 <육체의 약속>의 그 불길한 욕정의 세계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좀체 잔영이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매끈해진 영화를 보고 있지만 아무래도 영화를 만든 사람 자체가 걸작인 작품을 목격하는 일은 점점 더 희귀해진다. <느미>를 보고 나면 저절로 영화속 자막을 입으로 따라하게 된다. “인간이 삶의 목표를 잃어버렸을 EO 사신은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김기영은 블랙유머의 귀재였다.
한국 영화의 외형이 커지고 심의도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환경에서 그는 다시 한번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 잡지사에서 기획한 회고전은 실패했지만 그 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은 대성황이었다. 젊은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 열광하고 가는 곳마다 사인요청을 받으면서 그는 고무돼 있었다.
부산에서 만났을 때 그는 “김형, 이젠 진짜고 영화 만든다. 새 영화를 만들어도 손님이 들 것 같아. 그 땐 정말 평 잘 써줘야 해”라고 선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 그가 만들 영화가 무엇이닞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는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내게 슬쩍 새 영화의 시놉시스를 흘려주었다. 내용을 알고 난 나는 기가 막혔다. 또다시 여자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얘기였던 것이다. 배경이 병원으로 바뀌고 시골에서 올라온 신참 간호사와 통정한 의사가 그 때문에 자신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 감독님, 그건 <하녀>와 너무 유사한...”이라고 얘기를 꺼냈다가 대번에 타박을 받았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사람이. 이건 정말 다른 영화가 될 거라니까.”
돌이켜보면 아마도 김기영 감독은 좋은 여건에서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얘기를 제대로 찍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가혹한 검열 상황에서 찍었던 자신의 대표작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마음대로 찍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흥행과 권력이 이중 견제 속에서 자신은 ‘영화를 갖고 놀았다’고 했지만 미심쩍었던 부분을 마음껏 펼쳐보이고 싶은 욕망이 그에게는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김기영 감독은 세상으로부터 다시 조명을 받는 순간에 세상을 떠났다. 베를린 영화제로부터 초청을 받은 그는 출발을 하루 앞두고 낡은 한옥 저택에 난 화재로 사망했다. 애초에 당신 혼자만 초청받았던 것을 부인과 함께 가는 일정을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출발이 며칠 미뤄졌고 공교롭게도 그 지연이 죽음의 원인이 됐다. 그가 오랬동안 살았던 혜화동 저택은 전 주인이 사고사를 당했던 사연을 지닌 집이었다. 흉가라는 소문에 입주를 꺼렸던 그 집에 김기영은 그런 집이라면 나에게 더 맞는다고 태연하게 입주했다고 그와 평생 동료였던 김수용 감독은 전했다.
느닷없는 그의 죽음은 한동안 내 마음을 쓰리게 했다. 그는 내가 만났던 감독들 중에 보기 드문 정신적 기인이자 거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변태’라고 불렀다. 부산국제영화제 때 젊은 관객들과 대화하면서 특정 장면의 의미를 묻는 관객들의 질문에 그는 곧잘 한마디로 답변했다.“나는 변태거든”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상상력으로 가득 찬 그는 사방이 꽉 막혀 있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면서도 자심의 냄새를 영화에 불어넣었다. 그런 감독을 좀 더 오래 모시고 더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없었던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의 신작을 영원히 볼 수 없게 된 것이 무엇보다 아쉽다.
[김영진_ 평론가매혈기 발췌. 145-15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