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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보조자료
2016-2차 답사자료 (03. 23)
사성암
처음으로 눈에 들어 온 법당은 바위를 쪼아 그 돌로 축대를 쌓아 절벽에 절묘하게 세워놓았는데 그 모양이 절벽과 한 몸을 이룬 탑의 모양이다. 사바세계 위로 봉긋이 솟은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아 정상에 석탑을 세운 모습이 자연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사찰임을 느낄 수 있다. 절벽 옆으로 계단을 만들어 법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신도들의 기원이 담긴 기와로 단장이 되어 있어 계단 하나하나가 발원의 계단 같다. 그 계단을 올라가 법당입구에 서서 아래를 보니 오금이 저려온다. 뒤로 물러나 법당 안을 들여다보면 다른 법당과 달리 벽에 벽화가 보인다. 원효스님이 선정에 들어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약사여래불’이라는 벽화인데 사성암의 불가사의한 전설이. 약 25미터의 기암절벽에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찻잔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 22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축양식은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의 모습과 흡사하다.도선국사가 수도를 했다고 하는 도선굴은 한사람이 걸을 수 있는 통로를 걸어가 허리를 굽혀 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굴 안의 엄숙하면서도 고요함에 그리고 산꼭대기 바위와 바위사이에 오묘한 굴이 있음에 과연 정말로 "이런 곳에서 수행하면 정말 득도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생각이 절로 난다. 도선굴에서 나와 아래세상을 바라보니 고요히 흐르는 섬진강과 구례와 곡성평야가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그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강산뿐이다 사성암은 SBS 드라마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이가 불공을 드린 촬영장소로 널리 알려져 많은 참배 불자들과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사성암은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모습을 오롯이 볼 수 있으며, 물줄기 너머로 가을 들녘과 지리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사성암이 위치한 오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산 마루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 틈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승려 도선(道詵)이 일찍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 또한《봉성지(鳳城誌)》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하였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망풍대·신선대 등 12비경으로 절경이 뛰어나다.
구례사성암마애여래입상
산동면 산수유 축제
求禮雲鳥樓
연곡사 鷰谷寺
소재지 ;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華嚴寺)의 말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는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찰이었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왜병에 의하여 전소된 뒤 태능(太能, 1562∼1649)이 중창하였다. 1745년(영조 21)에는 연곡사가 밤나무로 만드는 왕실의 신주목(神主木)을 봉납하는 곳으로 선정되었다.
1907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당시 광양만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정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연곡사로 집결시켰다. 이때 그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에 의하여 고광순과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고, 절은 왜병들에 의하여 방화를 당하였다.
그 뒤 1942년에 다시 중건을 하였으나 6·25전쟁 때 피아골 전투로 다시 폐사가 된 뒤로 사찰분규와 교통사정 때문에 재흥을 보지 못하다가 1965년에는 소규모의 대웅전이 요사채를 겸하여 세워졌고, 1981년에 1억3000만 원의 예산을 들여 새 대웅전을 준공하였다. 이어서 1983년에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94년에 요사를 증축하였다. 199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고, 1996년에는 종각과 수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절에는 국보 제53호인 동 승탑 (東僧塔), 국보 제54호인 북 승탑 (北僧塔), 보물 제151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玄覺禪師塔碑), 보물 제153호인 동 승탑비 (東僧塔碑), 보물 제154호인 소요대사탑 (逍遙大師塔) 등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고려 초기에 만든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승탑으로 추정되는 동 승탑은 일제강점기 때 동경대학으로 옮겨가기 위하여 수개월 동안 연구하였지만, 산길로는 운반이 불가능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은 현재 대웅전 남쪽의 길옆에 있는데, 옛날 이 탑이 위치한 곳까지 건물이 있었다고 보면 그때의 절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67년 해체, 보수할 때에 하층기단부에서 높이 23.5㎝, 어깨너비 4.5㎝의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었는데,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또한, 소요대사탑의 문비(門扉)에는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절이 임진왜란 후 소요대사에 의하여 중건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연곡사동승탑 求禮鷰谷寺東僧塔
연곡사 동쪽 기슭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승탑이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팔각당 승탑으로 파손이나 결실된 부분이 없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탑 전체에 걸쳐 새겨진 부조상과 팔각당 건축의 표현은 정교하고 섬세하여 통일신라시대 석조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역사적 변천]
이 탑의 전면에 탑주(塔主)의 것으로 보이는 탑비(보물 제153호)가 남아 있으나 비신이 남아 있지 않고 이수의 제액에 명문이 없어 탑주를 추정할 수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도선국사(827∼898)의 탑이라고 하나 이를 입증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이 탑은 북 승탑과 함께 2001년 표면의 보존처리가 실시되었고 이때 순서가 뒤바뀐 상륜부재를 현재와 같이 바로잡았다.
[내용]
탑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각부의 결실이 없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2단의 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사각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운룡문과 팔각의 하대석을 두었는데, 하대석 측면에는 8면 모두 사좌를 1구씩 새겼다. 하대석 윗면으로는 3단의 각형괴임을 두어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 모두 안상을 새기고 내부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8구의 신장을 새겼는데, 팔부신중(八部神衆)으로 보고 있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았다. 상대석은 상하 2중의 연꽃을 총 16엽으로 하고 연꽃잎에는 다시 꽃무늬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상대석 위로는 비교적 높은 탑신 괴임을 두었다. 탑신괴임은 모서리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가릉빈가 1구씩을 새겨 넣었다. 괴임의 상단으로는 낮게 3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정면에 문비와 옆으로 사천왕상, 나머지 면은 향로를 새겼다. 옥개석 하단은 위로 앙곡을 주어 둥글게하고 처마 밑은 겹처마로, 상단은 기와골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는데, 막새기와 및 사래기와 등을 모각하여 사실성을 더하였다. 상륜부는 꽃 모양의 앙화위로 보륜, 그리고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핀 봉황이 조각된 보개 및 화염보주로 이루어졌다.
[특징]
기본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팔각당형 승탑의 구조에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중대석에 팔부신중을 새긴점, 탑신괴임에 동자주형태의 기둥을 세워 목조건축 양식을 나타낸 점, 탑신부에 향로를 새긴 점 등은 이 탑만의 특징이다. 또한 상륜부 보개에 4마리의 봉황을 배치하여 극락정토의 상징을 나타낸 것은 다른 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의의와 평가]
이 승탑은 탑주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으나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844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868년)으로 완성된 통일신라 팔각원당형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수작이다. 또한 사천왕, 향로, 목조건축의 요소 등이 정교하게 표현되었고 기단과 탑신의 비례도 적당하여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사, 건축사, 공예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연곡사동승탑비 鷰谷寺東僧塔碑
[내용]
보물 제153호. 높이 120㎝. 동부도 앞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비는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귀부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어 마치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귀부의 등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좌의 네 측면에 구름무늬가 고부조(高浮彫)로 장식되었으며, 그 윗면 주위로는 복판(覆瓣)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좌의 측면에 고부조로 구름무늬를 새기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있는 귀두(龜頭)는 떨어져 나간 것을 다시 붙여놓은 것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용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성이 결여되어 신라시대의 귀부에 비하여 기량이 떨어진다. 거북의 등 문양 또한 신라시대와는 다르게 6각의 갑문(甲文)이 아니고 파상곡선(波狀曲線)으로 이루어진 새의 날개깃 모양[조익형(鳥羽形)무늬]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부 위에 얹혀져 있는 삼산형(三山形)의 이수 역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수와는 달리 운룡(雲龍)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고부조의 구름무늬만으로 조식되어 있으며, 그 정상에는 화염보주(火炎寶珠)의 형태를 조각해 놓았다.
이와 같이 규모면에서는 보다 작고 아담해지고, 양식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이 부도비는 신라시대와는 다른 고려시대의 새로운 양식으로서 주목된다.
구례연곡사북승탑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승탑.
[개설]
국보 제54호. 연곡사 북쪽 산 중턱에 위치한 고려초기의 승탑이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전형적인 팔각당 승탑으로 상륜부의 일부가 파손 복원되었으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세부표현이 정교하다. 양식으로 보아 같은 경내에 있는 동 승탑을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변천]
북 승탑은 탑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이 남아 있지 않아 누구의 탑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경내에 고려 초에 건립된 현각선사의 탑비(보물 제152호, 979년)가 남아 있어 그의 탑일 가능성이 높다. 2001년 3월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후 복원되었다. 이때 전면(全面)에 부착되어있던 이끼를 제거하였고 결실된 부재의 보충과 뒤바뀐 상륜부재를 바로잡았다. 동 승탑과 양식적 유사성이 있으나 세부표현에 있어 뒤떨어져 고려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내용]
탑은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상륜의 일부가 결실되었다가 수리 때 추가되었다. 기단부는 지대석과 2단의 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사각의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운룡문과 팔각의 하대석을 두었다. 하대석은 16엽의 연화문을 복련으로 새기고 여덟 연꽃의 모서리에만 귀꽃무늬를 두었다. 하대석 위에 2단의 받침을 두고 중대를 받쳤는데, 중대석 하단에도 2단의 각형받침을 두어 총 4단의 받침으로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은 낮은 편으로 각 면 모두 안상을 새기고 내부에는 무기를 들고 있는 8구의 신장을 새겼는데, 팔부신중(八部神衆)으로 보인다. 상대석은 3단의 받침대 위에 놓았다. 상대석은 상하 2중의 연꽃을 총 16엽으로 연꽃 잎에는 다시 꽃무늬로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상대석 위로는 비교적 높은 탑신 괴임을 두었다. 탑신괴임은 모서리마다 중간에 둥근 마디가 있는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가릉빈가 1구씩을 새겨 넣었다. 괴임의 상단으로는 낮게 3단의 괴임을 두어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문비, 사천왕상, 향로를 새겼다. 옥개석 하단 위로는 앙곡을 주어 둥글게하고 내부에는 비천을 새겨놓았다. 지붕의 처마는 겹처마로, 상단은 기와골이 정교하게 표현되었는데, 막새기와 및 사래기와 등을 모각하여 사실성을 더하였다. 상륜부는 꽃 모양의 앙화 위로 보륜, 그리고 사방으로 날개를 활짝 핀 봉황이 조각된 보개 및 보주로 이루어 졌는데 봉황의 머리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 가운데 보륜 1매는 2001년 보수 당시 새로 만들어 추가했다.
[특징]
이 승탑은 같은 경내에 위치한 동 승탑과 양식적으로 유사하면서도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점은 기본형과 각 부분에 새겨진 부조상들의 주제가 같다. 반면 하대석의 표현이나 옥개석 하단의 앙곡에 비천상을 새겨 넣은 점은 이 탑의 특징이다. 그러나 부조상의 조각수법과 하층 하대석에 나타나는 구름문양이 생동감을 잃은 점 등은 동 승탑을 모방하여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승탑은 개창조(開創祖)의 탑을 가장 크고 화려하게 만든 후 이를 모방하여 만드는 경향이 있다. 연곡사에 남아 있는 동 승탑과 북 승탑은 이 같은 승탑의 건립환경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다. 또한 연곡사의 승탑은 주변지역과의 양식공유가 보여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친 호남지역 승탑의 양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연곡사 소요대사탑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내동리) 연곡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승탑.
[내용]
높이 3.6m. 보물 제154호. 평면 팔각원당(八角圓堂)의 기본형으로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윗면에는 낮은 몰딩 (moulding)이 있어 하대석(下臺石)을 받고 있다. 8각으로 된 하대석도 높은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나 상단에는 원에 가까운 곡선을 그린 조각이 있다.
윗면은 중앙에 몰딩이 있고, 그 주위로 홈이 패어 있다. 중대석은 편구형(扁球形)인데 그 상·하에 단판연화(單瓣蓮華)가 대칭으로 돋을새김된 특이한 양식이다. 상대석은 8각으로 단판 8엽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었고, 아랫면에는 2단의 각형받침이 있으며 윗면에는 높은 호형(弧形)의 굄이 있다.
탑신석(塔身石)도 8각으로 1면에는 문비형(門扉形)을 새겼고 다른 면에는 별개의 돌을 끼운 듯이 보일 정도로 아주 강한 돋을새김의 신장상(神將像)을 1구씩 배치하였는데 조각수법은 세련되지 못하다.
옥개석(屋蓋石) 역시 8각인데 추녀끝은 얇아졌으나 아주 넓은 편이다. 옥개석 아랫면에는 높직한 받침을 중심으로 서까래가 모각되었고 윗면의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다. 각 면의 합각(合角)에는 8줄의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이 뚜렷하며 추녀에 이르러 큼직한 귀꽃이 솟아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한 편으로 정상면에는 8엽의 앙련으로 된 앙화(仰花)가 있고 그 위에 편구형의 복발(覆鉢)이 있는데 횡대(橫帶) 위에 꽃무늬가 조각되었다. 다시 그 위에 높직한 보개와 보주가 차례로 놓여 있다.
이 승탑에는 탑신석 1면에 ‘逍遙大師之塔(소요대사지탑)’, ‘順治六年庚寅(순치6년경인)’이라는 2줄의 오목새김명문이 있다. 소요대사는 순치 5년(1649)에 입멸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해에 이 승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승탑과 탑비를 별도로 세우지 않고 승탑의 탑신석이나 다른 부재에 글자를 새기는 예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승탑도 그 예의 하나이다.
鷰谷寺玄覺禪師塔碑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연곡사에 있는 고려 초기의 탑비.
[내용]
보물 제152호. 귀부 높이 112㎝, 이수 높이 75㎝. 고려 전기의 승려 현각선사(玄覺禪師)를 기리기 위해 979년(경종 4)에 건립되었다.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이 남아 있다. 조각 수법은 당대의 탑비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데, 몸체에 비해 큰 귀두(龜頭)나 비좌(碑座) 4면에 새긴 안상(眼象)과 귀꽃이 특색이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는 ‘玄覺王師碑銘(현각왕사비명)’이라는 전액(篆額)이 음각되어 있다.
기록이나 옛 탁본에 의하면 비문은 학사(學士) 왕융(王融)이 지었고, 동정주국(同政柱國) 장신원(張信元)이 썼다고 전한다. 글씨는 2㎝ 정도의 해서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바탕으로 하면서 자형을 바르게 하여, 고박한 형태미(形態美)를 나타내고 있다.
鷰谷寺三層石塔
건립시기/연도 통일신라|9세기
[정의]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연곡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개설]
보물 제151호. 연곡사 일주문을 지나 왼쪽에 위치해 있다. 화강암을 이용해 만든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이나 기단부가 2중이 아닌 3중 기단을 지니고 있다. 탑신부는 삼층을 유지하고 있으며 상하층 탱주가 1:1인 소형탑으로 9세기 후반 양식을 보여준다.
[역사적 변천]
연곡사는 화엄사의 말사로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하였으나 구한말 의병의 본거지로 병화를 입었고 한국전쟁 때 폐사되었다가 이후 복원되었다. 탑은 일주문을 지나 법당이 위치한 석축 하단부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일반적인 배치에서 벗어나 있다. 석탑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문헌 등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석탑은 3층 옥개석이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을 1967년 1월 해체수리 후 복원되었다. 이때 상층기단 자연판석 위에서 높이 23.5㎝ 가량의 동조여래불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내용]
석탑은 전형적인 이중기단 석탑양식에 하나의 기단을 추가하여 전체적으로 3중의 기단부를 지니고 있다.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면석은 귀틀석과 판석을 이용한 8매로 구성되었다. 갑석은 총 6매로 상면에 각출된 괴임이 없다. 중층기단은 저석과 면석이 1돌로, 동서면에 2매씩, 남북면에 1매씩 ‘H’자형으로 결구되었다. 모서리에는 모두 우주가 있고 중앙에는 1주의 탱주를 새겼다. 갑석은 3매로 하면에는 부연이 없고 상단 중앙에 호각형의 2단 받침을 각출하여 상층면석을 받치고 있는데, 호형받침에 비해 각형받침은 매우 낮다. 상층기단의 면석은 남북면 좌우에 우주가 있는 면석을 놓고 동서면 중앙에 1주의 탱주를 지닌 면석을 넣은 판석으로 결구되었다. 갑석은 1매로 하단에 각형 부연이 있고 상단에는 각형 2단 받침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다. 갑석은 단부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주었고 모서리에 합각선이 뚜렷하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씩 총 6매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은 모두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으며 문비 조각 등의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모두 하단에 4단의 층급받침을 주었으며 상단에는 낮게 1단의 각형받침을 두어 위층 탑신을 받고 있다. 옥개석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에서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전각부의 모서리 좌우에 1개씩의 풍경공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고 현재 반구형의 부재가 올라가 있으나 원래 상륜 부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특징]
이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 하나의 기단이 추가된 매우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시대의 하강에 따라 신라석탑에서 가장 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기단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석탑은 별도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높이거나 탑구를 두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탑과 같이 별도의 기단부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같은 독특한 기단의 구성을 신라시대 조탑경(造塔經)으로 쓰인 『무구정경(無垢淨經)』의 영향으로 보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이 석탑은 전체적인 크기나 가느다란 비례 감각에 있어 9세기 후반 신라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별도의 기단을 추가하여 3중기단을 형성한 것은 소형화를 추구하는 신라하대 석탑의 경향을 엿볼 수 있으며 나아가 당시 조탑경과 탑의 외관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적 제106호]석주관 칠의사 묘
위치: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717-1
개요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석주관 칠의사묘는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때 석주관(石柱關)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 출신 의사(義士) 7명과 당시 구례현감의 무덤이다. 석주관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전라도 방어사 곽영(郭嶸)이 남원에 진을 베풀고 11월에 이곳에 성을 쌓고,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1597년 8월초 왜군이 석주관으로 쳐들어오자 구례현감 이원춘은 소수 병력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남원성으로 퇴각하여 그곳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때 구례 출신 왕득인이 의병을 거느리고 지키다가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 후 왜군이 구례로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자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과 이 지방 출신 선비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들은 화엄사 승병 153명과 함께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왕의성을 제외한 5의사와 대부분의 의병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곳에서 싸운 의병장들을 석주관칠의사라하여 성터 옆에 사당을 세웠으며,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7명 의사의 충절을 기려 각각 관직을 내렸다.
월전리 입석
위치:
전남 구례군 문척면 월전리
개요
지정일 : 84년2월29일 선돌(입석)은 고인돌(지석묘)과 같이 큰돌〔巨石〕문화의 일종으로 태양숭배 사상과 같은 원시 신앙과 관련있는 유적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는 수호신, 액막이 등 종교적인 기능이외에 마을의 경계표시나 이정표 등의 역할을 해 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월전리 선돌은 높이 2.5m의 대형으로 인근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어 이와 연관성을 짐작해 볼 수 있으며 삼국시대에 국경의 표시였다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역사시대에 세워진 것들과는 규모나 형태면에서 차이가 있다.
정보제공
구산리 입석
위치:
전남 구례군 토지면 구산리
개요
지정일 : 84년2월29일 선돌(입석)은 고인돌(지석묘)과 같이 큰돌〔巨石〕문화의 일종으로 태양숭배사상과 같은 원시신아과 관련있는 유적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는 수호신, 액막이, 농사의 풍요기원 등 종교적인 기능 이외에 마을의 경계표시나 이정표 등의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산리 선돌은 지리산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내린 평지성 구릉위에 있는데 바로 옆에 고인돌이 있어 묘표석의 역할을 하고 있던 것으로 보여진다. 크기는 높이 2.4m, 둘레 2.6m로 현재 전하는 선돌 가운데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다.
봉서리지석묘군
위치: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서리
개요
지석묘는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전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며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으로 전남지방에 2만여기가 밀집분포되어 있다. 이 곳 봉서리 지석묘는 밭 주변에 12기가 있는데 규모가 가장 큰 지석묘를 중심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배치되어 강 흐름과 방향이 일치한다. 이 곳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 지석묘 상석에 1.73m가량의 거북이가 음각된점이다. 거북 암각화 지석묘는 육각형의 거북이 등 무늬가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거북이 바위"라 고 부른다. 이 거북이의 모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짐작되며 지석묘의 거석신앙과 후대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신앙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으로 지석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