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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十三回 誅羋勝葉公定楚 滅夫差越王稱霸
제83회: 미승을 죽여 섭공이 초나라를 안정시키고, 부차를 멸하여 월왕이 패권을 잡다.
話說,衛莊公蒯瞶因府藏寶貨俱被出公輒取去,謀於渾良夫。良夫曰:「太了疾與亡君,皆君之子,君何不以擇嗣召之?亡君若歸,器可得也。」有小豎聞其語,私告於太子疾。疾使壯士數人,載豭從己,乘間劫莊公,使歃血立誓,勿召亡君,且必殺渾良夫。莊公曰:「勿召輒易耳。業與良夫有盟在前,免其三死,奈何?」太子疾曰:「請俟四罪,然後殺之。」莊公許諾。未幾,莊公新造虎幕,召諸大夫落成。渾良夫紫衣狐裘而至,袒裘,不釋劍而食。太子疾使力士牽良夫以退。良夫曰:「臣何罪?」
한편, 위장공(衛莊公) 괴외(蒯聵)는 위나라의 부고에 있던 보화를 출공(出公) 첩(輒)이 모두 가져가 버렸으므로 혼량부와 모의하여 되찾아오려고 했다. 혼량부가 말하기를, “태자 질(疾)과 도망친 출공은 모두 주군의 자식입니다.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도망친 출공을 후사로 택하여 부르지 않으십니까? 도망간 출공이 만약 돌아온다면 보물도 얻을 수 있습니다.” 했다. 어린 내시가 그 말을 듣고 몰래 태자 질에게 고했다. 태자 질이 장사 몇 명을 시켜 돼지를 수레에 싣고 자기를 따르게 하여, 틈을 타서 위장공을 위협하여 돼지의 피를 입에 발라, 도망간 출공을 부르지 않고, 또 반드시 혼양부를 죽이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위장공이 말하기를, “첩(輒)을 부르지 않는 일은 쉽지만, 지난날 이미 혼량부와 맹세하기를 죽을죄를 세 번을 지어도 용서하기로 했다. 그러니 어찌하나?” 하니, 태자 질이 말하기를, “네 번째 죄를 기다린 다음에 그를 죽이면 됩니다.” 했다. 위장공이 허락했다. 오래지 않아서 위장공이 새로 호랑이 가죽으로 장막을 세우고 여러 대부들을 낙성식에 불렀다. 혼량부가 자줏빛 옷과 여우 가죽옷을 입고 와서 가죽옷은 벗었으나 칼은 풀지 않고 식사를 했다. 태자 질이 장사를 시켜 혼량부를 자리에서 끌어내어 밖으로 나갔다. 혼양부가 말하기를, “내가 무슨 죄를 지었소?” 했다.
太子疾數之曰:「臣見君有常服,侍食必釋劍。爾紫衣,一罪也﹔狐裘,二罪也﹔不釋劍,三罪也。」良夫呼曰:「有盟免三死!」疾曰:「亡君以子拒父,大逆不孝,汝欲召之,非四罪乎?」良夫不能答,俯首受刑。他日,莊公夢厲鬼被髮北面而譟曰:「余為渾良夫,叫天無辜!」莊公覺,使卜大夫胥彌赦占之,曰:「不害也。」既辭出,謂人曰:「冤鬼為厲,身死國危,兆已見矣。」遂逃奔宋。蒯瞶立二年,晉怒其不朝,上卿趙鞅帥師伐衛。衛人逐莊公,莊公奔戎國,戎人殺之,并殺太子疾。國人立公子般師。
태자질이 그 죄를 세어 말하기를, “신하가 군주를 뵐 때는 항상 관복을 입어야 하고, 모시고 식사를 할 때는 반드시 칼을 풀어야 한다. 너는 자줏빛 옷을 입고 왔으니 그 죄가 하나이다. 여우 가죽옷을 입었으니 그 죄가 둘이다. 칼을 풀지 않았으니 그 죄가 셋이다.” 하니, 혼량부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주군께서 내가 죽을죄를 세 번 지어도 용서하기로 맹세하셨소.” 했다. 태자 질이 말하기를, “도망친 군주 첩(輒)이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항거하였으니 대역무도하고 불효한 자라. 네가 그를 불러들이려 했으니 죄가 넷이 아니냐?” 하니, 혼량부가 대답하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형벌을 받았다. 후일에 위장공의 꿈속에 악귀가 머리를 풀어 헤치고 북쪽을 향하여 시끄러운 소리로 말하기를, “나는 혼량부다. 하늘에 무고함을 부르짖겠다.” 했다. 위장공이 꿈에서 깨어나서 복대부(卜大夫) 서미사(胥彌赦)를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서미사가 말하기를, “그 꿈은 해롭지 않습니다.” 하며, 인사를 하고 물러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원통한 귀신이 악귀가 되었으니, 몸은 죽고 나라는 위태롭게 될 징조가 이미 나타난 것이다.” 했다. 마침내 그는 송나라로 달아났다. 괴외가 위나라 군주가 된 지 2년에 진(晉)나라가 조회를 오지 않았다고 화를 내어 상경 조앙(趙鞅)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정벌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위장공을 쫓아내니, 위장공이 융(戎)나라로 달아났으나 융나라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아울러 태자 질도 죽였다. 위나라 사람들이 공자 반사(般師)를 군주로 세웠다.
齊陳恒帥師救衛,執般師立公子起。衛大夫石圃逐起,復迎出公輒為君。輒既復國,逐石圃。諸大夫不睦於輒,逐輒奔越。國人立公子默,是為悼公。自是衛臣服於晉,國益微弱,依趙氏。此段話擱過不提。再說,白公勝自歸楚國,每念鄭人殺父之仇,思以報之。只為伍子胥是白公勝的恩人,子胥前已赦鄭,況鄭服事昭王,不敢失禮,故勝含忍不言。及昭王已薨,令尹子西,司馬子期,奉越女之子章即位,是為惠王。白公勝自以故太子之後,冀子西召己,同秉楚政。子西竟不召,又不加祿,心懷怏怏。及聞子胥已死,曰:「報鄭此其時矣!」
제나라의 진항(陳恒)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서, 반사를 사로잡고 공자 기(起)를 세웠다. 위나라 대부 석포(石圃)가 공자 기를 쫓아내고, 다시 출공 첩을 맞이하여 군주로 삼았다. 첩(輒)이 이미 환국하여 석포를 쫓아냈다. 여러 대부가 출공 첩과 사이가 나빠져서 출공 첩을 쫓아내니, 출공 첩은 월나라로 달아났다. 위나라 사람들이 공자 묵(黙)을 군주로 세우니, 이가 위도공(衛悼公)이다. 이때부터 위나라는 진(晉)나라에 신하로서 복종하였고, 국세는 더욱 쇠약해져서 진(晉)나라 조씨에게 의지하였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 한편, 백공(白公) 미승(羋勝)이 초나라로 돌아간 후에 매양 정나라 사람들이 자기 부친을 죽인 원수라는 것을 생각하고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마음뿐이었다. 다만 오자서가 백공의 은인인데, 옛날에 오자서는 이미 정나라를 용서하였으며, 더구나 정나라가 초소왕에게 복종하여 섬기고 있으니 감히 예의를 잃을 수가 없어서 미승은 속으로 참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소왕이 이미 죽고 영윤 자서(子西)와 사마 자기(子期)가 월녀의 소생 태자 장(章)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니, 이가 초혜왕(楚惠王)이다. 백공 미승은 자신이 옛날 태자 건의 아들이므로 자서가 자신을 불러서 초나라의 정사에 함께 참여시켜 줄 것을 바랐다. 자서는 끝내 부르지 않았고 봉록도 더해 주지 않아서 마음속으로 매우 섭섭해했다. 오자서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백공 미승이 말하기를, “이제야 정나라에 보복할 때다.”라고 했다.
使人請於子西曰:「鄭人肆毒於先太子,令尹所知也。父仇不報,無以為人,令尹倘哀先太子之無辜,發一旅以聲鄭罪,勝願為前驅,死無所恨!」子西辭曰:「新王方立,楚國未定,子姑待我。」白公勝乃託言備吳,使心腹家臣石乞,築城練兵,盛為戰具。復請於子西,願以私卒為先鋒,伐鄭。子西許之。尚未出師,晉趙鞅以兵伐鄭,鄭請救於楚。子西帥師救鄭,晉兵乃退,子西與鄭定盟班師。白公怒曰:「不伐鄭而救鄭,令尹欺我甚矣!當先殺令尹,然後伐鄭。」召其宗人白善於澧陽。善曰:「從子而亂其國,則不忠於君﹔背子而發其私,則不仁於族。」遂棄祿,築圃灌園終其身。楚人因名其圃曰:「白善將軍藥圃。」
그는 사람을 자서(子西)에게 보내 군사를 청하며 말하기를, “정나라 사람들이 나의 부친 태자에게 독수를 뻗쳐 죽인 일은 영윤도 아는 바입니다.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저는 사람도 되지 못합니다. 영윤께서 만약 태자의 무고함을 애통하게 생각하신다면 한 떼의 군마를 일으켜 정나라의 죄를 성토해 주신다면 이 승(勝)이 선봉이 되기를 원하니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했다. 자서가 거절하며 말하기를, “새로운 왕이 이제 막 즉위하여 초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그대는 잠시 기다려 주시오.” 하니, 백공 승이 오나라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핑계를 대고, 심복 가신인 석걸(石乞)을 시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하며 무기를 많이 만들었다. 다시 자서에게 청하여 사병(私兵)을 선봉으로 삼아 정나라를 치고 싶다고 하니, 자서가 허락했다. 아직 출병하지 않았는데, 진(晉)나라의 조앙이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자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러 가니, 진(晉)나라 군사들은 곧 물러갔다. 자서는 정나라와 동맹을 맺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백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정나라를 정벌하지 않고 오히려 정나라를 구원하니 영윤이 나를 심히 기만하는 것이다. 마땅히 영윤을 먼저 죽이고 그런 뒤에 정나라를 정벌하겠다.” 하고, 백공은 풍양(灃陽)에 사는 종족 백선(白善)을 불렀다. 백선이 말하기를, “그대를 따르면 나라를 어지럽혀서 임금에게 불충하게 되고, 그대 따르지 않고 내 생각대로 하면 종족에게 인자하지 못한 것이라.” 하고, 마침내 그 봉록을 버리고 채소밭과 동산을 가꾸며 일생을 마쳤다. 초나라 사람들이 그 밭을 이름하여 ‘백선 장군의 약초밭’이라고 불렀다.
白公聞白善不來,怒曰:「我無白善,遂不能殺令尹耶?」即召石乞議曰:「令尹與司馬各用五百人,足以當之否?」石乞曰:「未足也。市南有勇士熊宜僚者,若得此人,可當五百人之用。」白公乃同石乞造於市南,見熊宜僚。宜僚大驚曰:「王孫貴人,奈何屈身至此?」白公曰:「某有事,欲與子謀之。」遂告以殺子西之事。宜僚搖首曰:「令尹有功於國,而無仇於僚,僚不敢奉命。」白公怒,拔劍指其喉曰:「不從,先殺汝!」宜僚面不改色,從容對曰:「殺一宜僚,如去螻蟻,何以怒為?」白公乃投劍於地,嘆曰:「子真勇士,吾聊試子耳!」即以車載回,禮為上賓,飲食必共,出入必俱。宜僚感其恩,遂以身許白公。
백공은 백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백선이 없다고 해서 영윤을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고, 즉시 석걸을 불러 의논하기를, “영윤과 사마를 죽이는데 각각 500명을 써서 족히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니,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저자 남쪽에 용사 웅의료(熊宜僚)가 살고 있는데, 만약 이 사람을 얻는다면 가히 500명을 쓰는 것과 맞먹을 수 있습니다.” 했다. 백공이 즉시 석걸과 함께 저자 남쪽으로 가서 웅의료를 만났다. 웅의료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귀한 왕손께서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니, 백공이 말하기를, “나에게 일이 있어 그대와 함께 모의하고자 하네.” 하고, 자서를 죽이려는 일을 말했다. 웅의료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영윤은 나라에 공이 있는 분이고 저와 원수진 일이 없으니 제가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했다. 백공이 노하여 칼을 뽑아 웅의료의 목을 겨누며 말하기를,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먼저 너를 죽이겠다.” 하니, 웅의료는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조용히 대답하기를, “이 웅의료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마치 개미 한 마리를 죽이는 것과 같은데 어찌 그리 화를 내십니까?” 했다. 백공이 즉시 칼을 땅에 던지고 한탄하기를, “그대는 참다운 용사다! 내가 잠시 그대를 시험해 봤을 뿐이다!” 하고, 즉시 웅의료를 자기의 수레에 태우고 돌아와 상빈의 예를 갖추어 음식을 먹을 때나 출입할 때나 반드시 함께했다. 웅의료가 그 은혜에 감격하여, 마침내 백공에게 몸을 허락했다.
及吳王夫差會黃池時,楚國畏吳之強,戒飭邊人,使修儆備。白公勝託言吳兵將謀襲楚,乃反以兵襲吳邊境,頗有所掠。遂張大其功,只說:「大敗吳師,得其鎧仗兵器若干,欲親至楚庭獻捷,以張國威。」子西不知其計,許之。白公悉出自己甲兵,裝作鹵獲百餘乘,親率壯士千人,押解入朝獻功。惠王登殿受捷,子西子期侍立於旁。白公勝參見已畢,惠王見階下立著兩籌好漢,全身披掛,問:「是何人?」勝答曰:「此乃臣部下將士石乞熊宜僚,伐吳有功者。」遂以手招二人。二人舉步,方欲升階,子期喝曰:「吾王御殿,邊臣只許在下叩頭,不得升階!」
오왕 부차가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맹을 맺기에 이르자, 초나라는 오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변경의 관리들에게 경계를 내려 병장기를 손질하여 경비를 강화하도록 했다. 백공 승은 오나라 군사가 장차 초나라를 습격할 것이라고 핑계를 대고, 도리어 오나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자못 약탈한 바가 있었다. 마침내 그 공을 크게 과장하여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치고 갑옷과 무기를 약간 노획했습니다. 친히 초나라 조정에 가서 승리를 아뢰고 국위를 떨치고자 합니다.” 하니, 자서가 백공의 음모를 모르고 허락했다. 백공은 자기 휘하의 무장병을 모두 동원하여 수레 백여 대에 노획물을 가장하여 싣고, 친히 장사 천 명을 거느리고 그것을 호송하여 조정에 들어가 공을 아뢰고자 했다. 초혜왕이 궁전에 올라 백공에게서 승전보고를 받고 자서와 자기는 혜왕 곁에 모시고 섰다. 백공 승이 왕을 알현하는 의식을 끝내자, 혜왕이 계단 밑에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두 사람의 장수를 보고 묻기를, “저 장수들은 누구인가?” 하니, 백공 승이 대답하기를, “이들은 저의 부하 장수인 석걸과 웅의료입니다. 오나라를 칠 때 공을 세웠습니다.” 하고, 곧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불렀다. 두 사람이 걸어서 막 계단을 오르려는데 자기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왕께서 계시는 어전에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은 단지 머리를 조아리는 것만을 허락할 뿐 계단을 오를 수는 없다.” 했다.
石乞熊宜僚那肯聽從,大踏步登階。子期使侍衛阻之。熊宜僚用手一拉,侍衛東倒西歪,二人逕入殿中。石乞拔劍來砍子西,熊宜僚拔劍來砍子期。白公大喝:「眾人何不齊上!」壯士千人,齊執兵器,蜂擁而登。白公幫住惠王,不許轉動。石乞生縛子西,百官皆驚散。子期素有勇力,遂拔殿戟,與宜僚交戰。宜僚棄劍,前奪子期之戟。子期拾劍,以劈宜僚,中其左肩。宜僚亦刺中子期之腹。二人兀自相持不捨,攪做一團,死於殿庭。子西謂勝曰:「汝餬口吳邦,我念骨肉之親,召汝還國,封為公爵,何負於汝而反耶?」
석걸과 웅의료가 어찌 그 말을 따르겠는가,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자기가 호위무사를 시켜 막으라고 했다. 웅의료가 손을 들어서 한번 치니 호위무사들은 비틀거렸다. 그 사이에 두 사람은 어전 안으로 들어갔다. 석걸은 칼을 빼어 자서를 베러 가고 웅의료는 칼을 뽑아 자기를 베러 갔다. 백공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장사들은 어찌하여 일제히 올라오지 않느냐?” 하니, 장사 천 명이 일제히 무기를 집어 들고 벌떼같이 올라왔다. 백공이 혜왕을 붙들어 꼼짝도 못하게 했다. 석걸이 자서를 사로잡아 결박하자 백관들은 놀라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자기는 원래 힘이 있어서 즉시 전당에 있던 극을 뽑아 웅의료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웅의료가 칼을 버리고 앞으로 나가 자기의 극을 붙잡고 빼앗았다. 자기가 칼을 주어서 웅의료를 베니 왼쪽 어깨에 맞았다. 웅의료 역시 자기의 배를 찔렀다.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 붙들고는 놔주지 않고 뒤엉켜 궁전 뜰에서 죽었다. 자서가 백공 승에게 말하기를, “너는 오나라에서 겨우 먹고 살던 것을, 내가 골육의 정을 생각하여 너를 불러 귀국시켜 공작에 봉했는데 어찌하여 너의 분수를 저버리고 반역했느냐?” 했다.
勝曰:「鄭殺吾父,汝與鄭講和,汝即鄭也。吾為父報仇,豈顧私恩哉?」子西嘆曰:「悔不聽沈諸梁之言也!」白公勝手劍斬子西之頭,陳其屍於朝。石乞曰:「不弒王,事終不濟。」勝曰:「孺子者何罪?廢之可也。」乃拘惠王於高府,欲立王子啟為王。啟固辭,遂殺之。石乞又勸勝自立。勝曰:「縣公尚眾,當悉召之。」乃屯兵於太廟。大夫管修率家甲往攻白公,戰三日,修眾敗被殺。圉公陽乘間使人掘高府之牆為小穴,夜潛入,負惠王以出,匿於昭夫人之宮。
백공 승이 말하기를, “정나라는 내 아버지를 죽였는데, 너는 정나라와 화친했으니 네가 곧 정나라다. 내가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은혜를 돌아보겠느냐?” 하니, 자서가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심제량(沈諸梁)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했다. 백공 승이 칼을 뽑아 자서의 머리를 베고 그 시체를 조당에 늘어놓았다. 석걸이 말하기를, “왕을 죽이지 않았으니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니, 백공 승이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면 그만이다.” 했다. 백공 승이 즉시 혜왕을 고부(高府)에 감금해 두고, 왕자 계(啓)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왕자 계가 거절하므로 곧 계를 죽였다. 석걸이 또 백공 승에게 스스로 왕위에 오르라고 권했다. 백공 승이 말하기를, “현공(縣公)들이 아직 많이 있으니 마땅히 모두 불러들여야 한다.” 했다. 이에 태묘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대부 관수(管修)가 무장한 가병을 이끌고 백공을 공격하여, 3일간 싸웠으나 관수와 그 가병이 패하여 살해되었다. 어공(圉公) 양(陽)이 사이를 틈타 사람을 시켜 고부의 담장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밤중에 몰래 잠입하여 혜왕을 등에 업고 탈출하여 소왕의 부인이 사는 궁궐에 숨겨 두었다.
葉公沈諸梁聞變,悉起葉眾,星夜至楚。及郊,百姓遮道迎之。見葉公未曾甲冑,訝曰:「公胡不冑?國人望公之來,如赤子之望父母,萬一盜賊之矢,傷害於公,民何望焉?」葉公乃披掛戴冑而進。將近都城,又遇一群百姓,前來迎接,見葉公戴冑,又訝曰:「公胡冑?國人望公之來,如凶年之望穀米,若得見公之面,猶死而得生也,雖老稚,誰不為公致死力者!奈何掩蔽其面,使人懷疑,無所用力乎?」葉公乃解冑而進。葉公知民心附己,乃建大旆於車。箴尹固因白公之召,欲率私屬入城,既見大旗上「葉」字,遂從葉公守城。
섭공 심제량(沈諸梁)이 변란을 듣고 섭의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초나라 도읍에 이르렀다. 성밖에 이르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환영했다. 엽공이 아직 갑옷과 투구를 쓰지 않은 것을 백성이 보고 의아하여 말하기를, “공께서는 어찌하여 투구를 쓰지 않았습니까? 나라의 백성들은 공이 오기를 마치 부모를 찾는 갓난아이같이 바라는데 만일 역적들의 화살이 공을 해친다면 백성들은 무엇을 바라고 살겠습니까?” 했다. 섭공이 즉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진군했다. 도성 가까이 다가갔을 때 또 한 떼의 백성들이 앞으로 나와 영접하며 섭공이 투구를 쓴 것을 보고 또 의아해하며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투구를 쓰고 계십니까? 백성들은 공이 오기를 마치 흉년에 곡식을 기다리듯이 하는데, 만약 백성이 공의 얼굴을 보면 죽었다가 살아나듯이 할 것입니다. 비록 늙은이나 어린이라도 누군들 공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그 얼굴을 가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여 힘을 쓰려는 생각을 없애려 하십니까?” 했다. 섭공이 이에 투구를 벗고 앞으로 나아갔다. 엽공은 백성들의 마음이 자기에게 기울어졌음을 알고, 즉시 대패기(大旆旗)를 수레에 세웠다. 잠윤 고(箴尹固)는 백공 승의 부름을 받아 사병들을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큰 깃발에 섭(葉)이라는 글자를 보고 즉시 섭공의 따라 성을 지키러 갔다.
兵民望見葉公來到,大開城門,以納其眾。葉公率國人攻白公勝於太廟。石乞兵敗,扶勝登車,逃往龍山。欲適他國,未定。葉公引兵追至,勝自縊而死,石乞埋屍於山後。葉公兵至,生擒石乞,問:「白公何在?」對曰:「已自盡矣!」又問:「屍在何處?」石乞堅不肯言。葉公命取鼎鑊,揚火沸湯,置於乞前,謂曰:「再不言,當烹汝!」石乞自解其衣,笑曰:「事成貴為上卿,事不成則就烹,此乃理之當然也。吾豈肯賣死骨以自免乎?」遂跳入鑊中,須臾糜爛。勝屍竟不知所在。石乞雖所從不正,亦好漢也!葉公迎惠王復位。
군사와 백성들은 섭공이 도착한 것을 보고 성문을 활짝 열고 그 군사들을 맞아들였다. 섭공이 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태묘에 주둔하고 있던 백공 승을 공격했다. 석걸은 싸움에서 패하자 백공 승을 부축하여 수레에 태우고 용산(龍山)으로 달아났다. 다른 나라로 가려다가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섭공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니 백공 승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 석걸이 백공 승의 시신을 산 뒤에 묻었다. 섭공의 군사가 도착하여 석걸을 생포했다. 섭공이 묻기를, “백공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석걸이 대답하기를,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소.” 했다. 섭공이 또 묻기를,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석걸이 입을 굳게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섭공이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여 불을 지펴 물을 끓이라 하고, 석걸을 그 앞으로 데려가 말하기를, “다시 말하지 않으면 너를 삶아 죽이겠다.” 하니, 석걸이 스스로 옷을 벗고 웃으며 말하기를, “일을 이루어 귀하게 되면 상경이 되고, 일을 이루지 못하면 삶겨 죽는 것이니, 이것은 이치의 당연함이라. 내가 어찌 죽은 사람의 뼈를 팔아 스스로 죽음을 면하겠소?” 하고, 마침내 가마솥 안으로 뛰어들었다. 잠깐 사이에 석걸은 익어버렸다. 백공 승의 시체는 끝내 묻힌 곳을 알 수 없었다. 석걸이 비록 옳지 못한 일을 따랐지만 역시 기개가 있는 사나이였다. 섭공은 초혜왕을 맞이하여 복위시켰다.
時陳國乘楚亂,以兵侵楚。葉公請於惠王,帥師伐陳,滅之。以子西之子寧嗣為令尹,子期之子寬嗣為司馬,自己告老歸葉。自此楚國危而復安。(此周敬王四十二年事也。)是年,越王句踐探聽得吳王自越兵退後,荒於酒色,不理朝政,況連歲凶荒,民心愁怨,乃復悉起境內士卒,大舉伐吳。方出郊,於路上見一大鼃,目睜腹漲,似有怒氣,句踐肅然,憑軾而起。左右問曰:「君何敬?」句踐曰:「吾見怒鼃如欲鬥之士,是以敬之。」軍中皆曰:「吾王敬及怒鼃,吾等受數年教訓,豈反不如鼃乎?」於是交相勸勉,以必死為志。
그때 진(陳)나라가 초나라의 내란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침략했다. 섭공이 초혜왕에게 청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나라를 쳐서 멸망시켰다. 자서(子西)의 아들 영(寧)에게 영윤의 자리를 잇게 하고, 자기(子期)의 아들 관(貫)에게 사마의 자리를 잇게 했다. 섭공 자신은 늙었다며 섭(葉) 땅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초나라는 위태롭다가 다시 안정되었다. (이것은 주경왕(周敬王) 42년의 일이다.) 이 해에 월왕 구천이 염탐해 보니, 오왕 부차가 월나라 군사들이 물러난 후에 주색에 빠져 나라의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게다가 해마다 흉년이 들어 민심이 근심하고 원망함을 알았다. 이에 월왕 구천은 경내의 사졸을 모두 일으켜 대거 오나라를 정벌했다, 바야흐로 성 밖으로 나서는데, 길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배를 부풀려 마치 화가 난 것 같은 큰 개구리를 보고, 구천이 숙연하여 수레의 가로 지름대를 잡고 일어났다. 좌우의 사람들이 묻기를, “왕께서는 무엇을 공경하십니까?” 하니, 구천이 말하기를, “나는 저 화가 난 개구리의 모습이 싸우려는 병사처럼 보여서 그래서 그것을 공경한다.” 했다. 군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 성낸 개구리까지 공경하는데, 우리는 수년 동안 훈련을 받았으니 어찌 개구리만도 못하겠는가?” 했다. 이에 서로 격려하며 필사의 의지를 다짐했다.
國人各送其子弟於郊境之上,皆泣涕訣別,相語曰:「此行不滅吳,不復相見!」句踐復詔於軍曰:「父子俱在軍中者,父歸﹔兄弟俱在軍中者,兄歸﹔有父母無昆弟者,歸養﹔有疾病不能勝兵者,以告,給醫藥糜粥。」軍中感越王愛才之德,歡聲如雷。行及江口,斬有罪者,以申軍法,軍心肅然。吳王夫差聞越兵再至,亦悉起士卒,迎敵於江上。越兵屯於江南,吳兵屯於江北。越王將大軍分為左右二陣,范蠡率右軍,文種率左軍。君子之卒六千人,從越王為中陣。明日,將戰於江中。乃於黃昏左側,令左軍銜枚,遡江而上五里,以待吳兵,戒以夜半鳴鼓而進。
월나라의 백성들이 그들의 자제들을 교외에서 전송하며 모두 눈물을 흘리고 이별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번에 가서 오나라를 멸하지 못하면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 했다. 구천이 다시 군중에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부자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아버지가 돌아가라. 형제가 같이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라. 부모를 모실 형제가 없는 사람은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라. 몸에 질병이 있어 적군을 이길 수 없는 자는 고하라! 약도 주고 죽도 끓여 주겠다.” 했다. 군중에서 월왕의 인재를 아끼는 덕에 감격하여 환성이 우레와 같았다. 월나라 군사들이 행군하여 강어귀에 이르러 군중에서 죄를 지은 자들을 참수하여 군법을 엄하게 시행하니 군사들의 마음이 숙연해졌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오나라의 군사들을 모두 일으켜 강 위에서 적을 맞이했다. 월나라 군사들은 강남에 진을 치고, 오나라 군사들은 강북에 진을 쳤다. 월왕 구천은 대군을 좌우 두 진으로 나누어, 범려가 우군을 거느리고, 문종이 좌군을 거느리게 했다. 사대부 자제들의 근위군 6천 명은 월왕의 중군에 속하게 했다. 다음 날, 강 가운데서 전투를 하려고 했다. 이에 황혼이 되자 좌측의 좌군에게 함매를 물리고 강을 거슬러 5리를 올라가서 오나라 군사를 기다리다가 밤중이 되면 북을 울리며 진격하라고 경계했다.
復令右軍銜枚,踰江十里,只等左軍接戰,右軍上前夾攻,各用大鼓,務使鼓聲震聞遠近。吳兵至夜半,忽聞鼓聲震天,知是越軍來襲,倉皇舉火,尚未看得明白,遠遠的鼓聲又起,兩軍相應,合圍攏來。夫差大驚,急傳令分軍迎戰。不期越王潛引私卒六千,金鼓不鳴,於黑暗中,逕沖吳中軍。此時天色尚未明,但覺前後左右中央,盡是越軍,吳兵不能抵當,大敗而走。句踐率三軍緊緊追之,及於笠澤。復戰,吳師又敗。一連三戰三北,名將王子姑曹胥門巢等俱死。夫差連夜遁回,閉門自守。句踐從橫山進兵,即今越來溪是也。築一城於胥門之外,謂之越城,欲以困吳。越王圍吳多時,吳人大困。
다시 우군에도 영을 내려 함매를 물리고 강을 건너 10리 되는 곳에서 좌군이 접전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우군이 앞으로 나가 협공하여 각각 큰 북을 쳐서 북소리가 원근에 진동하게 하라고 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한밤중에 이르러 갑자기 하늘을 진동하는 북소리를 듣고 월나라 군사가 습격하는 줄 알고, 서둘러 횃불을 올렸으나 아직 분명히 밝히지 못했는데, 멀리서 북소리가 다시 일어나고 좌우 양군이 서로 호응하여 포위하여 왔다. 부차가 크게 놀라 급히 명령을 내려 군사들을 나누어 맞아 싸우게 했다. 뜻밖에 월왕이 몰래 근위군 6천 명을 이끌어 징과 북을 울리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바로 오나라 중군을 들이쳤다. 그때는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다만 전후좌우 중앙에 모두 월나라 군사들이라 오나라 군사들은 당해 내지 못하고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구천이 삼군을 거느리고 바싹 뒤쫓아서 입택(笠澤)에 이르렀다. 다시 싸웠으나 오나라 군사가 또 패했다. 이어서 세 번 싸워 세 번 패하고, 오나라의 명장 왕자 고조(姑曹)와 서문소(胥門巢) 등이 모두 죽었다. 부차가 밤새도록 도망쳐 돌아가서 성문을 닫고 지켰다. 구천이 횡산(橫山)에서 진격하니, 횡산은 지금의 월래계(越來溪)다. 서문(胥門) 밖에 성을 쌓아 월성(越城)이라 부르고 오나라를 지치게 하려고 했다. 월왕이 오나라를 오랫동안 포위하자 오나라 백성들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伯嚭託疾不出。夫差乃使王孫駱肉袒膝行而前,請成於越王,曰:「孤臣夫差,異日得罪於會稽,夫差不敢逆命,得與君王結成以歸。今君王舉兵而誅孤臣,孤臣意者,亦望君王如會稽之赦罪!」句踐不忍其言,意欲許之。范蠡曰:「君王早朝晏罷,謀之二十年,奈何垂成而棄之?」遂不准其行成。吳使往返七次,種蠡堅執不肯。遂鳴鼓攻城,吳人不能復戰。種蠡商議欲毀胥門而入。其夜望見吳南城上有伍子胥頭,巨若車輪,目若耀電,鬚髮四張,光射十里。越將士無不畏懼,暫且屯兵。
백비는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나오지 않아서, 부차가 이에 왕손락을 사자로 보내어, 웃통을 벗고 무릎걸음으로 월왕 앞으로 나아가 화의를 청하며 말하기를, “외로운 신하 부차는 옛날에 회계 땅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때 부차는 감히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군왕과 화의를 맺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군왕께서 군사를 내어 저를 죽이려고 하시니, 제가 뜻하는 바는 역시 군왕께서도 회계에서 죄를 용서받은 것과 같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니, 구천이 차마 그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화의를 허락하려고 했다. 범려가 말하기를, “군왕께서는 아침 일찍 조회를 열고 저녁 늦어서야 정사를 마치며 모의한 지 20년에, 어찌하여 일이 거의 이루어졌는데 버리려고 하십니까?” 했다. 마침내 화의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의 사자가 일곱 차례나 다녀갔지만, 문종과 범려는 마음을 굳게 먹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곧 북을 울리며 성을 공격하니, 오나라 군사들은 더 싸울 힘이 없었다. 문종과 범려가 상의하여 서문(胥門)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날 밤 오나라의 성 남문 위에 오자서의 머리를 바라보니, 마치 큰 수레바퀴 같은데 눈이 번개처럼 빛나고 수염과 머리칼이 사방으로 뻗어서 그 빛이 십 리를 비췄다. 월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잠시 진을 치고 머물렀다.
至夜半,暴風從南門而起,疾雨如注,雷轟電掣,飛石揚沙,疾於弓弩。越兵遭者,不死即傷,船索俱解,不能連屬。范蠡文種情急,乃肉袒冒雨,遙望南門,稽顙謝罪。良久,風息雨止,種蠡坐而假寐,以待天明。夢見子胥乘白馬素車而至,衣冠甚偉,儼如生時。開言曰:「吾前知越兵必至,故求置吾頭於東門,以觀汝之入吳。吳王置吾頭於南門,吾忠心未絕,不忍汝從吾頭下而入,故為風雨,以退汝軍。然越之有吳,此乃天定,吾安能止哉?汝如欲入,更從東門,我當為汝開道,貫城以通汝路。」
한밤중이 되자 남문 쪽에서 폭풍이 일어나고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 번개가 치며 돌멩이가 날고 모래바람이 일어나 활과 쇠뇌의 화살보다 빨랐다. 월나라 군사 중에 돌멩이에 맞은 사람들은 죽거나 다쳤고, 배의 밧줄이 모두 풀어져서 맬 수가 없었다. 범려와 문종이 마음이 급해 웃통을 벗고 비를 무릅쓰고 멀리 남문을 바라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한참 후에 비바람이 멈추었다. 문종과 범려가 앉은 채 얼핏 잠들어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꿈에 보니 오자서가 백마가 끄는 흰 전차를 타고 다가왔는데, 생시처럼 의관을 위엄 있게 차려입고 매우 늠름한 모습이었다. 오자서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내가 전에 월나라 군사가 틀림없이 쳐들어올 줄 알았다. 그래서 나의 머리를 동문에 걸어 놓으라고 하여 너희들이 오나라에 쳐들어오는 것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오왕이 내 머리를 남문에 걸어 두었다. 그러나 나의 충성심은 아직 변하지 않아 내 머리 밑으로 쳐들어오는 너희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너희 군사를 물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라 내가 어찌 그것을 멈출 수 있으리오? 너희들이 만약 입성하려 한다면 다시 동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면 내가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길을 열어 성안까지 길을 통하게 해주겠다.” 했다.
二人所夢皆同,乃告於越王,使士卒開渠,自南而東。將及蛇匠二門之間,忽然太湖水發,自胥門洶湧而來,波濤衝擊,竟將羅城蕩開一大穴,有鱄䱐無數,隨濤而入。范蠡曰:「此子胥為我開道也!」遂驅兵入城。其後因穴為門,名曰鱄䱐門,因水多葑草,又名葑門。其水名葑溪。此乃子胥顯靈古跡也。夫差聞越兵入城,伯嚭已降,遂同王孫駱及其三子,奔於陽山。晝馳夜走,腹餒口飢,目視昏眩,左右挼得生稻,剝之以進。吳王嚼之,伏地掬飲溝中之水,問左右曰:「所食者,何物也?」左右對曰:「生稻。」夫差曰:「此公孫聖所言,『不得火食走章皇』也。」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고 즉시 월왕에게 고한 후에 사졸들을 시켜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는 물길을 파게 했다. 장차 물길이 사문(蛇門 ; 南門)과 장문(匠門 ; 東門) 사이에 이르게 되자, 갑자기 태호의 물이 출렁이기 시작하더니, 서문(胥門 ; 西門)으로부터 세차게 밀려왔다. 파도가 부딪쳐서 마침내 나성(羅城 ; 안쪽의 성) 안에 큰 구멍을 하나 뚫어 놓았다. 그 구멍을 통하여 양자강 돌고래가 무수히 파도를 따라 들어갔다. 범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오자서가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군사들을 몰아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그 구멍이 문이 되었는데 이름을 전부문(鱄䱐門 ; 돌고래문)이라 했고, 또 물 위에 봉초(葑草)가 많이 나는 곳이라 해서 이름을 봉문(葑門)이라 하고, 그 물길을 봉계(葑溪)라 했다. 이것은 오자서의 혼령이 나타났다는 옛 자취다. 부차가 월나라 군사들이 입성했으며, 백비가 이미 항복했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왕손락과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양산(陽山)으로 달아났다. 밤낮으로 달려서 도망가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혼미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벼 이삭을 비벼서 껍질을 벗겨 드리니, 오왕 부차가 그것을 씹어 먹고 땅에 엎드려서 개울물을 움켜서 마셨다. 좌우의 사람에게 묻기를, “내가 먹은 것이 무엇이냐?” 하니, 좌우의 사람이 대답하기를, “생쌀입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이것은 공손성(公孫聖)이 ‘익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창황히 도망치리라!’라고 한 말과 같구나.” 했다.
王孫駱曰:「飽食而去!前有深谷,可以暫避。」夫差曰:「妖夢已准,死在旦夕,暫避何為?」乃止於陽山,謂王孫駱曰:「吾前戮公孫聖,投於此山之巔,不知尚有靈響否?」駱曰:「王試呼之。」夫差乃大呼曰:「公孫聖!」山中亦應曰:「公孫聖。」三呼而三應。夫差心中恐懼,乃遷於干隧。句踐率千人追至,圍之數重。夫差作書,繫於矢上,射入越軍。軍人拾取呈上,種蠡二人同啟,視其詞曰:「吾聞『狡兔死而良犬烹。』敵國如滅,謀臣必亡,大夫何不存吳一線,以自為餘地?」
왕손락이 말하기를, “배불리 먹었으니 가십시다. 앞에 깊은 골짜기가 있으니 잠깐 피할 수 있습니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요망한 꿈이 이미 맞았고 죽음이 아침저녁에 있는데 잠시 피하면 무엇 하느냐?” 했다. 이에 양산에서 멈추었다. 부차가 왕손락에게 말하기를, “내가 옛날에 공손성을 죽이고 이 산의 꼭대기에 버렸는데 아직도 그의 혼령이 반응할지 모르겠다.” 하니, 왕손락이 말하기를, “왕께서 시험 삼아 불러 보시지요.” 했다. 부차가 이에 큰소리로 외치기를, “공손성!” 하니, 산속에서 또한 응하기를, “공손성”이라고 했다. 세 번을 부르니 세 번을 응했다. 부차가 마음속으로 두려워서 즉시 간수(干隧)로 옮겼다. 월왕 구천은 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부차가 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를 향해 쏘았다. 월나라 군사가 그것을 주워 바치니, 문종과 범려 다 사람이 함께 뜯어서 그 글을 보니, 이르기를, “내가 듣기에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을 잘하는 개는 삶긴다.’라고 했습니다. 적국이 멸망하면 모의한 신하도 틀림없이 죽을 것이오. 대부들은 어찌하여 오나라의 한 가닥 명맥을 잇게 하여 스스로 노림수를 남기지 않으시오?” 했다.
文種亦作書繫矢而答之曰:「吳有大過者六:戮忠臣伍子胥,大過一也﹔以直言殺公孫聖,大過二也﹔太宰讒佞,而聽用之,大過三也﹔齊晉無罪,數伐其國,大過四也﹔吳越同壤而侵伐,大過五也﹔越親戕吳之前王,不知報仇,而縱敵貽患,大過六也。有此六大過,欲免於亡,得乎?昔天以越賜吳,吳不肯受。今天以吳賜越,越其敢違天之命!」夫差得書,讀至第六款大過,垂淚曰:「寡人不誅句踐,忘先王之仇,為不孝之子,此天之所以棄吳也!」王孫駱曰:「臣請再見越王而哀懇之。」夫差曰:「寡人不願復國,若許為附庸,世世事越,固所願矣。」
문종이 또한 글을 써서 화살에 매어 답장하기를, “오나라는 여섯 개의 큰 잘못이 있다. 첫째, 충신 오자서를 죽였다. 둘째, 직언을 올린 공손성을 죽였다. 셋째, 간사하고 아첨하는 태재 백비를 중용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넷째, 아무 죄도 없는 제(齊)나라와 진(陳)나라를 여러 번 정벌했다. 다섯째, 오나라와 월나라는 이웃 나라인데 침략했다. 여섯째, 월왕이 친히 오나라의 전왕을 죽였음에도 그 원수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놓아주어 화근을 키웠다. 이처럼 커다란 잘못을 여섯 가지나 행하고도 어찌 패망을 면하려 하는가? 옛날에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주었건만 오나라가 받지 않아서, 이제는 하늘이 오나라를 월나라에 내려 주었으니, 월나라가 어찌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겠는가?” 했다. 부차는 문종의 답장에서 큰 잘못 여섯 가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과인이 구천을 죽이지 않고 선왕의 원수를 갚을 생각을 망각했으니 불효한 자식이라! 그래서 하늘이 오나라를 버렸구나!” 했다. 왕손락이 말하기를, “신이 다시 월왕을 만나 애걸해 보겠습니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과인이 오나라를 다시 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만약 부용국(附庸國)을 허락한다면 대대로 월나라를 섬기겠다고 하시오.” 했다.
駱至越軍,種蠡拒之不得入。句踐望見吳使者泣涕而去,意頗憐之,使人謂吳王曰:「寡人念君昔日之情,請置君於甬東,給夫婦五百家,以終王之世。」夫差含淚而對曰:「君王幸赦吳,吳亦君之外府也。若覆社稷,廢宗廟,而以五百家為?臣,孤老矣,不能從編氓之列,孤有死耳!」越使者去,夫差猶未肯自裁。句踐謂種蠡曰:「二子何不執而誅之?」種蠡對曰:「人臣不敢加誅於君,願主公自命之!天誅當行,不可久稽。」句踐乃仗「步光」之劍,立於軍前,使人告吳王曰:「世無萬歲之君,總之一死,何必使吾師加刃於王耶?」
왕손락이 월나라 군영에 도착했으나 문종과 범려가 막고 들여보내지 않았다. 구천은 오나라의 사자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자못 불쌍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오왕 부차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옛날 정을 생각하여 용동(甬東)에 살게 하고 민호 500호를 주어 여생을 보내게 하겠소.” 하니, 부차가 눈물을 머금고 대답하기를, “군왕께서 다행히 오나라를 용서하더라도 오나라는 또한 군왕의 바깥 고을입니다. 만약 오나라의 사직을 뒤엎고 종묘를 폐한 후에 단지 5백 호의 민호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외롭고 늙어서 다른 나라에서 도망쳐 온 백성들의 대열에도 낄 수 없으니, 저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했다. 월나라 사자가 돌아갔지만, 부차는 오히려 자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구천이 문종과 범려에게 말하기를, “두 분은 어찌하여 부차를 잡아다 죽이지 않소?” 하니, 문종과 범려가 대답하기를, “신하가 감히 다른 나라 군주를 죽일 수는 없습니다. 원컨대 주공께서 스스로 명령하십시오. 하늘의 뜻으로 죽이는 것이니 오래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했다. 구천이 이에 보광검(步光劍)을 짚고서 군사들 앞에 서서 사람을 시켜 부차에게 말하기를, “세상에 만세를 사는 군주는 없으며 모두가 한 번은 꼭 죽는 법이다. 하필 우리 군사가 칼을 써야 하겠는가?” 했다.
夫差乃太息數聲,四顧而望,泣曰:「吾殺忠臣子胥公孫聖,今自殺晚矣!」謂左右曰:「使死者有知,無面目見子胥公孫聖於地下,必重羅三幅,以掩吾面!」言罷,拔佩劍自刎。王孫駱解衣以覆吳王之屍,即以組帶自縊於傍。句踐命以侯禮葬於陽山,使軍士每人負土一蔂,須臾,遂成大冢。流其三子於龍尾山,後人名其里為吳山里。詩人張羽有詩嘆曰:「荒臺獨上故城西,輦路淒涼草木悲。廢墓已無金虎臥,壞牆時有夜烏啼﹔採香徑斷來麋鹿,響屧廊空變黍離﹔欲弔伍員何處所?淡煙斜月不堪題!」
부차가 이에 몇 마디 크게 탄식하며 사방을 둘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충신 오자서와 공손성을 죽이고도 이제야 자살하는 것은 늦었구나!” 하고, 좌우에 말하기를, “만일 죽은 사람이 안다면 지하에서 오자서와 공손성을 볼 면목이 없으니 반드시 세 겹의 비단으로 내 얼굴을 가려다오!” 했다. 말을 마치자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서 죽었다. 왕손락이 옷을 벗어 오왕의 시신을 덮어 주고, 즉시 그 옆에서 허리띠로 목을 매어 죽었다. 구천이 명하여 제후의 예절로 양산에 장사지내게 했다. 군사마다 흙 한 삼태기를 져 오게 하여 잠깐 사이에 곧 큰 무덤을 만들었다. 부차의 세 아들은 용미산(龍尾山)에 귀양보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마을을 오산리(吳山里)라고 불렀다. 시인 장우(張羽)가 시를 지어 한탄하기를, “옛 성터의 서쪽의 무너진 대(臺)에 홀로 올라서니, 어가가 다녔던 길은 처량하여 초목도 슬프구나! 황폐한 무덤에는 쇠 호랑이 장식도 없고, 무너진 담장 위에서는 밤 까마귀가 우는구나. 향을 따던 물길 따라 놀던 사슴도 사라지고, 향섭랑의 폐허에는 기장만 무성하구나! 어디로 가서 오원을 조상하겠는가? 옅은 안개 지는 달에 붓을 놓노라.” 했다.
楊誠齋《蘇臺弔古》詩云:「插天四塔雲中出,隔水諸峰雪後新,道是遠瞻三百里,如何不見六千人?」胡曾先生詠史詩云:「吳王恃霸逞雄才,貪向姑蘇醉綠醅,不覺錢塘江上月,一宵西送越兵來。」元人薩都刺詩云:「閶門楊柳自春風,水殿幽花泣露紅,飛絮年年滿城郭,行人不見館娃宮。」唐人陸龜蒙詠西施云:「半夜娃宮作戰場,血腥猶雜宴時香﹔西施不及燒殘蠟,猶為君王泣數行。」 再說,越王入姑蘇城,據吳王之宮,百官稱賀。伯嚭亦在其列,恃其舊日周旋之恩,面有德色。
양성재(楊誠齋 ; 楊萬里)는 ‘소대에서 옛날을 조상함.(蘇臺弔古)’이라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하늘을 찌르는 네 개의 탑은 구름 속에 솟았고, 물 건너 봉우리들은 눈 온 뒤에 새롭구나! 이곳에 오르면 삼백 리를 볼 수 있다고 말했는데, 어찌하여 월나라의 육천 군사는 보지 못했을까?” 했다. 호증(胡曾) 선생의 영사시(詠史詩)에 이르기를, “오왕은 패권을 믿고 영웅적 재주를 휘둘러, 고소대의 술과 미녀를 탐하여 취해 지내더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당강 위의 떠 있던 달이, 하룻밤에 월나라 병사들을 서쪽으로 보냈도다.” 했다. 원나라 살도랄(薩都剌)의 시에 이르기를, “창문(閶門)의 버드나무에 절로 봄바람이 일고, 호수가 궁전 깊은 곳에 꽃들은 울어 이슬이 붉었네. 날리는 버들개지는 해마다 성곽에 가득한데, 나그네는 관왜궁을 찾아볼 수 없구나.” 했다. 당나라 시인 육구몽(陸龜蒙)은 서시(西施)를 노래하여 이르기를, “한밤중에 관왜궁은 싸움터로 변했으니, 연회석의 향기에 피비린내가 섞였다. 서시는 남은 촛불을 다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군왕을 위해 몇 줄기 눈물을 흘렸다.” 했다. 한편, 월왕 구천이 고소성에 입성하여 오왕 부차의 궁에 앉아서 백관들의 축하를 받았다. 백비도 역시 그 반열에 있었다. 옛날에 자기가 월왕을 위해 주선한 은혜를 믿고 얼굴에 자랑하는 기색을 띠고 있었다.
句踐謂曰:「子,吳太宰也,寡人敢相屈乎?汝君在陽山,何不從之?」伯嚭慚而退。句踐使力士執而殺之,滅其家,曰:「吾以報子胥之忠也!」句踐撫定吳民,乃以兵北渡江淮,與齊、晉、宋、魯諸侯,會於舒州,使人致貢於周。時周敬王已崩,太子名仁嗣位,是為元王。元王使人賜句踐袞冕、圭璧、彤弓、弧矢,命為東方之伯。句踐受命,諸侯悉遣人致賀。其時楚滅陳國,懼越兵威,亦遣使修聘。句踐割淮上之地以與楚,割泗水之東,地方百里以與魯,以吳所侵宋地歸宋。諸侯悅服,尊越為霸。
구천이 말하기를, “그대는 오나라의 태재인데, 과인에게 감히 허리를 굽히는가? 그대의 군주는 양산에 묻혀 있는데 어찌하여 따라가지 않았는가?” 하니, 백비가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구천이 장사를 시켜 백비를 잡아서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시켰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오자서의 충성에 보답한 것이라!” 했다. 구천이 오나라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어서 병사들을 이끌고 장강과 회수를 건너 제나라, 진(晉)나라, 송나라, 노나라 제후들과 서주(舒州)에서 회맹하고, 주왕실에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그때 주나라에서는 경왕이 이미 죽고 태자 명인(名仁)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원왕(周元王)이다. 주원왕이 사자를 보내 구천에게 곤룡포와 면류관 및 구슬과 둥근 옥,붉은 활과 나무 화살을 하사하며 동방의 방백(方伯)으로 삼았다. 구천이 명을 받자 제후들이 모두 사자를 보내어 축하했다. 그때 초나라는 진(陳)나라를 멸하고 월나라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역시 사절을 보내 친선관계를 맺었다. 구천이 회상(淮上)의 땅을 초나라에 떼어주고, 노나라에는 사수 동쪽의 땅 100리를 떼어주었다. 그는 오나라가 송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송나라에 돌려주었다. 제후들이 기쁘게 승복하여 월나라를 패자로 받들었다.
越王還吳國,遣人築賀臺於會稽,以蓋昔日被棲之恥。置酒吳宮文臺之上,與群臣為樂,命樂工作《伐吳》之曲,樂師引琴而鼓之。其詞曰:「吾王神武蓄兵威,欲誅無道當何時?大夫種蠡前致詞:吳殺忠臣伍子胥,今不伐吳又何須?良臣集謀迎天禧,一戰開疆千里餘。恢恢功業勒常彛,賞無所吝罰不違。君臣同樂酒盈巵。」臺上群臣大悅而笑,惟句踐面無喜色。范蠡私嘆曰:「越王不欲功歸臣下,疑忌之端已見矣!」次日,入辭越王曰:「臣聞『主辱臣死。』向者,大王辱於會稽,臣所以不死者,欲隱忍成越之功也。今吳已滅矣,大王倘免臣會稽之誅,願乞骸骨,老於江湖。」
월왕이 오나라에 돌아와서 사람을 보내 회계에 하대(賀臺)를 짓게 하여 옛날에 갇혀 지냈던 치욕을 덮고자 하였다. 오나라 궁궐의 문대(文臺)에 연회를 마련하여 여러 신하와 즐기면서 악공에게 명하여 ‘오나라 정벌(伐吳)’이라는 노래를 짓게 하고, 악사를 시켜 거문고를 연주하게 했다. 그 가사에 이르기를, “뛰어난 무용의 우리 대왕이 군사의 위세를 축적하여, 무도한 자를 죽이려고 어느 때가 적당한가? 물으니, 대부 문종과 범려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오나라에서 충신 오자서를 죽였으니, 지금 오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또 언제 하겠습니까? 했네. 훌륭한 신하들이 꾀를 모아 하늘의 뜻을 맞으려고, 한번 싸워서 천 리의 영토를 넓혔네. 크고 큰 공훈으로 떳떳함을 얻고, 상을 아끼지 않고 벌을 주저하지 않으니, 군왕과 신하들은 같이 술잔을 높이 들어 즐기네.” 했다. 문대에 모인 여러 신하가 크게 기뻐하여 웃었으나, 오직 구천은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없었다. 범려가 혼자 한탄하며 말하기를, “월왕이 공로를 신하들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드러내는구나!” 했다. 다음날 범려가 들어와 월왕에게 사의(辭意)를 표하며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지난날 대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실 때 신이 죽지 않은 까닭은 그것을 참고 견디며 월나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함이었습니다. 지금 오나라가 이미 멸망했으니 대왕은 아마 회계에서 신을 죽이지 못한 것을 사면했을 것입니다. 원컨대 해골을 보전하기를 청하여 강호에 돌아가 늙고자 합니다.” 했다.
越王惻然,泣下沾衣,言曰:「寡人賴子之力,以有今日,方思圖報,奈何棄寡人而去乎?留則與子共國,去則妻子為戮!」蠡曰:「臣則宜死,妻子何罪?死生惟王,臣不顧矣。」是夜,乘扁舟出齊女門,涉三江,入五湖。至今齊門外有地名蠡口,即范蠡涉三江之道也。次日,越王使人召范蠡,蠡已行矣。越王愀然變色,謂文種曰:「蠡可追乎?」文種曰:「蠡有鬼神不測之機,不可追也。」種既出,有人持書一封投之。種啟視,乃范蠡親筆。其書曰:「子不記吳王之言乎?「狡兔死,走狗烹﹔敵國破,謀臣亡。」越王為人,長頸鳥喙,忍辱妒功﹔可與共患難,不可與共安樂。子今不去,禍必不免!」
월왕이 측은히 생각하여 눈물로 옷을 적시며 말하기를, “과인이 그대의 힘을 입어서 오늘이 있게 되었으므로, 이제 그 보답을 하려는데 어찌하여 과인을 버리고 간다고 하시오? 머무르면 그대와 함께 나라를 같이 다스리고, 간다면 처자를 죽이겠소.”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나 처자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죽이고 살리는 일은 오직 대왕에게 달렸으니 신은 돌아보지 않겠습니다.” 했다. 그날 밤 범려는 조각배를 타고 제녀문(齊女門)을 나와서 삼강(三江)을 건너 오호(五湖)로 들어갔다. 지금도 제녀문 밖에 지명이 여구(蠡口)라는 곳이 있는데, 범려가 삼강을 건너간 길이다. 다음날 월왕이 사람을 시켜 범려를 불렀으나 범려는 이미 달아난 뒤였다. 월왕이 슬픈 기색을 띠고 문종에게 말하기를, “범려의 뒤를 쫓아갈 수 있소?” 하니, 문종이 말하기를, “범려는 귀신도 예측하기 어려운 지혜를 가지고 있어서 쫓아갈 수 없습니다.” 했다. 문종이 월왕에게서 물러 나오니 어떤 사람이 편지 한 통을 전했다. 문종이 열어보니 범려의 친필 편지였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그대는 오왕의 말을 기억하시오?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겨 죽고, 적국을 멸하면 모의한 신하는 죽게 된다.’라고 했소. 월왕은 사람됨이 목이 길고 입이 새처럼 뾰쪽하게 나왔으니 인내심은 강하나 남의 공을 시기하오. 그런 사람과는 환난을 같이 할 수는 있지만, 함께 편안함을 누릴 수는 없소. 지금 그대가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오.” 했다.
文種看罷,欲召送書之人,已不知何往矣。種怏怏不樂,然猶未深信其言,嘆曰:「少伯何慮之過乎?」過數日,句踐班師回越,攜西施以歸。越夫人潛使人引出,負以大石,沉於江中,曰:「此亡國之物,留之何為?」後人不知其事,訛傳范蠡載入五湖,遂有「載去西施豈無意?恐留傾國誤君王」之句。按范蠡扁舟獨往,妻子且棄之,況吳宮寵妃,何敢私載乎?又有言范蠡恐越王復迷其色,乃以計沉之於江,此亦謬也。羅隱有詩辨西施之冤云:「家國興亡自有時,時人何苦咎西施!西施若解亡吳國,越國亡來又是誰?」再說,越王念范蠡之功,收其妻子,封以百里之地,復使良工鑄金,象范蠡之形,置之座側,如蠡之生也。
문종이 보고 나서 편지를 가져온 사람을 부르려고 했으나, 이미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종이 섭섭하고 기쁘지 않았지만, 그 말을 깊이 믿지 않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소백(범려)이 염려하는 바가 어찌 이렇게 지나친가?” 했다. 며칠 후에 월왕 구천이 철군하여 월나라로 돌아가면서 서시를 데리고 갔다. 월왕의 부인이 몰래 사람을 시켜 서시를 끌어내어 큰 돌을 매달아 강물 속에 가라앉히라고 하며 말하기를, “이 년은 나라를 망친 요물이니, 살려 두어 무엇 하겠는가?” 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 일을 모르고 와전하여, 범려가 서시를 배에 태워 오호에 들어갔다고 하여, 마침내 “서시를 태워 가며 어찌 다른 뜻이 없었겠는가? 그냥 두면 월왕을 그르쳐 나라를 망칠까 걱정했기 때문이라.”라는 구절도 있다. 그러나 살펴보면 범려가 조각배를 타고 홀로 가며 그 처자까지도 버렸는데, 하물며 오왕이 총애하던 여자를 어찌 감히 사사로이 실었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월왕이 서시의 미색에 현혹될까 걱정하여 범려가 서시를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데 그것도 역시 틀린 말이다. 당나라 나은(羅隱)이 서시의 원통함을 변명하여 이르기를, “집안이나 나라의 흥망은 각자 때가 있는데, 그때 사람들은 어찌 괴로이 서시에게 허물을 돌리는가? 서시가 만약 오나라를 망하게 했다면, 월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은 또한 누구란 말인가?” 했다. 한편, 월왕은 범려의 공을 생각하여, 범려의 처자들을 거두어 백 리의 땅을 봉해 주고, 다시 솜씨가 좋은 장인에게 범려의 동상을 만들게 하여 자리 옆에 두고 살아 있는 듯이 대했다.
卻說,范蠡自五湖入海,忽一日,使人取妻子去,遂入齊。改名曰鴟夷子皮,仕齊為上卿。未幾,棄官隱於陶山,畜五牝,生息獲利千金,自號曰陶朱公。後人所傳《致富奇書》,云是陶朱公之遺術也。其後吳人祀范蠡於吳江,與晉張翰,唐陸龜蒙為「三高祠」。宋人劉寅有詩云:「人謂吳癡信不虛,建崇越相果何如?千年亡國無窮恨,只合江邊祀子胥。」句踐不行滅吳之賞,無尺土寸地分授,與舊臣疏遠,相見益稀。計倪佯狂辭職,曳庸等亦多告老,文種心念范蠡之言,稱疾不朝。越王左右有不悅文種者,譖於王曰:「種自以功大賞薄,心懷怨望,故不朝耳。」
한편 범려가 오호를 통해 바다로 나가서, 갑자기 어느 날 사람을 보내 처자를 데리고 마침내 제나라로 들어갔다. 범려는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바꾸고 제나라에 벼슬하여 상경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도산(陶山)에 숨어 살며 목축을 하여 천금의 이익을 얻고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했다. 후세 사람이 ‘부자가 되는 기이한 책(致富奇書)’를 전했는데, 이르기를 도주공이 남긴 저술이라고 했다. 그 뒤에 오나라 사람이 오강에서 범려의 제사를 지내고, 진나라 장한(張翰)과 당나라 육구몽(陸龜蒙)을 함께 모셔 삼고사(三高祠 ; 세 분의 고결한 선비를 모신 사당)를 지었다. 송나라 유인(劉寅)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람들은 오나라가 어리석었다는 게 참으로 헛말이 아니라고 말하니, 월나라 정승 범려의 사당을 모신 것만 보아도 과연 어떠하냐? 천년전에 나라가 망한 것이 아주 한스러웠다면, 다만 강변에 오자서의 사당만 모셔야 했을 것이다.” 했다.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데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지 않아, 한 치의 땅도 나누어 주지 않았으며, 옛 신하를 멀리하고 만나는 것도 더욱 드물었다. 계예(計倪)가 미친 척하고 벼슬을 내놓았으며, 예용(曳庸) 등도 또한 늙었다고 고하고 물러났다. 문종은 마음속으로 범려의 말을 생각하고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월왕 좌우에 있는, 문종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월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문종은 스스로 공이 큰데 상이 작다고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원망하여 그래서 조회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했다.
越王素知文種之才能,以為滅吳之後,無所用之,恐其一旦為亂,無人可制,欲除之,又無其名。其時魯哀公與季、孟、仲三家有隙,欲借越兵伐魯,以除去三家,乃借朝越為名,來至越國。句踐心虞文種,故不為發兵,哀公遂死於越。再說,越王忽一日往視文種之疾,種為病狀,強迎王入。王乃解劍而坐,謂曰:「寡人聞之:『志士不憂其身之死,而憂其道之不行。』子有七術,寡人行其三,而吳已破滅,尚有四術,安所用之?」種對曰:「臣不知所用也。」越王曰:「願以四術,為我謀吳之前人於地下可乎?」言畢,即升輿而去。遺下佩劍於座。種取視之,劍匣有「屬鏤」二字,即夫差賜子胥自剄之劍也。
월왕은 평소에 문종의 재능을 잘 알고 있었으나 오나라를 멸망시킨 다음에는 그를 쓸 일이 없었다. 그가 하루아침에 반란을 일으키면 그를 당해 낼 사람이 없다고 걱정하여 제거하려고 했으나 또한 명분이 없었다. 그때 노애공(魯哀公)이 계손씨, 맹손씨, 중손씨 등 세 집안과 틈이 벌어져 월나라의 군사를 빌려서 노나라를 쳐 세 집안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에 월나라에 조례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월나라에 갔다. 구천은 마음속으로 문종을 걱정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고, 노애공은 마침내 월나라에서 죽었다. 한편, 월왕이 갑자기 어느 날 문종의 병을 보러 갔다. 문종이 병든 체하며 억지로 월왕을 맞이해 들였다. 월왕 구천이 허리에 찬 칼을 풀어 놓고 앉으며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에 ‘뜻 있는 선비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라고 했소. 그대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일곱 가지 계책을 말했는데 과인은 그중에 세 가지를 행했소. 오나라가 이미 멸망했으니 아직 네 가지 계책은 남아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쓰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신은 그 계책을 어디에 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했다. 월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그 네 가지 계책을 나를 위해 이미 죽어 지하에 묻힌 오나라의 왕들에게 사용하면 어떻겠소?” 했다. 말을 마치자 곧 가마를 타고 가 버렸다. 월왕은 허리에 찼던 칼을 자리에 남겨놓았다. 문종이 칼을 들고 살펴보니 칼집에 촉루(屬鏤)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곧 오왕 부차가 오자서에게 주어 자살하게 했던 칼이었다.
種仰天嘆曰:「古人云『大德不報。』吾不聽范少伯之言,乃為越王所戮,豈非愚哉!」復自笑曰:「百世而下,論者必以吾配子胥,亦復何恨!」遂伏劍而死。越王知種死,乃大喜,葬種於臥龍山,後人因名其山曰種山。葬一年,海水大發,穿山脅,冢忽崩裂,有人見子胥同文種前後逐浪而去。今錢塘江上,海潮重疊,前為子胥,後乃文種也。髯翁有《文種贊》曰:「忠哉文種,治國之傑!三術亡吳,一身殉越。不共蠡行,寧同胥滅,千載生氣,海潮疊疊。」句踐在位二十七年而薨,周元王之七年也。其後子孫,世稱為霸。
문종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며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큰 은덕은 보답하지 않는다.’라더니, 내가 옛날에 범소백(범려)의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월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어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고, 다시 스스로 웃으며 말하기를, “백 세대 후에 평론하는 사람이 있어 나를 오자서와 같은 반열에 놓을 것이니 또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했다. 문종은 마침내 촉루검으로 자살했다. 월왕은 문종의 죽음을 알고 크게 기뻐하고, 그를 와룡산(臥龍山)에 장사지냈다. 후세 사람들이 그 산을 종산(種山)이라고 불렀다. 문종을 장사지내고 일 년 후에 바닷물이 크게 들이닥쳐 산허리를 파헤쳐 문종의 무덤이 무너져 갈라졌다. 어떤 사람이 오자서와 문종이 같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물결을 따라,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지금도 전당강(錢塘江)에는 조수(潮水)가 중첩하는데, 앞에 오는 물결을 오자서라 하고, 뒤에 오는 물결은 문종이라고 한다. 염옹(髥翁)이 ‘문종을 찬양함’이라는 시를 지어 이르기를, “충성스럽구나, 문종이여! 치국의 호걸이었다. 세 가지 계책으로 오나라를 망하게 했으나, 그 한 몸은 월나라를 위해 죽었다. 범려와 같이 물러나지 않아, 차라리 오자서의 뒤를 밟아 죽었다. 천년 세월에도 그 기운은 생생하니, 바다의 조수가 되어 첩첩이 밀려오는구나.” 했다. 구천은 재위 27년 만에 죽었다. 주원왕 7년이었다. 그 뒤의 자손은 세상에서 패자(霸者)라고 일컬었다.
話分兩頭。卻說,晉國六卿,自范中行二氏滅後,止存智、趙、魏、韓四卿。智氏荀氏因與范氏同出於荀,欲別其族,乃循智罃之舊,改稱智氏,時智瑤為政,號為智伯。四家聞田氏弒君專國,諸侯莫討,於是私自立議,各擇便據地,以為封邑。晉出公之邑,反少於四卿,無可奈何。就中單表趙簡子名鞅,有子數人,長子名伯魯,其最幼者,名無恤,乃賤婢所生。有善相人者,姓姑布,名子卿,至於晉,鞅召諸子使相之。子卿曰:「無為將軍者。」鞅嘆曰:「趙氏其滅矣!」子卿曰:「吾來時遇一少年在途,相從者皆君府中人,此得非君之子耶?」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은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가 멸문된 뒤에는 지(智), 조(趙), 위(魏), 한(韓) 등의 네 경(卿)이 있을 뿐이었다. 지씨(智氏)와 순씨(荀氏)는 원래 범씨(范氏)와 함께 순씨(荀氏)에서 나왔으나, 그 족속들과 구별하려고 이에 지앵(智罃)의 옛 예에 따라 지씨(智氏)로 바꾸어 불렀다. 그때는 지요(智瑤)가 진(晉)나라의 정사를 맡아서 지백(智伯)이라고 불렀다. 진(晉)나라의 네 가문은 제나라에서 전씨(田氏)들이 주군을 시해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제후들이 토벌하지 않자, 이에 몰래 자립하기로 의논하여 각각 편한 근거지를 택하여 봉읍으로 삼았다. 진출공(晉出公)의 고을이 도리어 네 경의 영지보다 작았으나 출공으로서는 어쩌는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조간자(趙簡子)의 이름은 앙(鞅)인데, 아들이 여럿이었다. 장자는 이름이 백노(伯魯)이고, 가장 어린 아들은 이름이 무휼(無恤)인데 천한 비첩의 소생이었다. 어떤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성은 고포(姑布)이고 이름은 자경(子卿)인데, 진(晉)나라에 오자 조앙이 여러 아들을 불러 관상을 보게 했다. 자경이 말하기를, “장군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조앙이 탄식하기를, “조씨가 망하겠구나!” 했다. 자경이 말하기를, “제가 올 때 길에서 한 소년을 만났는데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공의 부중 사람이었습니다. 그 소년도 공의 아들이 아닙니까?” 했다.
鞅曰:「此吾幼子無恤,所出甚賤,豈足道哉?」子卿曰:「天之所廢,雖貴必賤﹔天之所興,雖賤必貴。此子骨相,似異諸公子,吾未得詳視也。君可召之。」鞅使人召無恤至。子卿望見,遽起拱立曰:「此真將軍矣!」鞅笑而不答。他日悉召諸子,叩其學問,無恤有問必答,條理分明,鞅始知其賢。乃廢伯魯而立無恤為適子。一日,智伯怒鄭之不朝,欲同趙鞅伐鄭。鞅偶患疾,使無恤代將以往。智伯以酒灌無恤,無恤不能飲。智伯醉而怒,以酒斝投無恤之面,面傷出血。趙氏將士俱怒,欲攻智伯。
조앙이 말하기를, “그 아이는 나의 어린 아들 무휼이라고 합니다만 천한 비첩이 낳았으니 어찌 족히 관상을 말하겠소?” 했다. 자경이 말하기를, “하늘이 버리면 비록 귀하다 해도 반드시 천해지며, 하늘이 일으키면 비록 그 소생이 천해도 반드시 귀하게 됩니다. 그 아이의 골상은 여러 공자와는 다른 것 같은데 제가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 대감께서 한번 불러 주시지요.” 했다. 조앙이 사람을 시켜 무휼을 불러왔다. 자경이 바라보고 갑자기 일어나 두 손을 모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이고 서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진정한 장군감입니다.” 하니, 조앙이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날에 조앙이 여러 아들을 모두 불러 그들이 배운 것을 물었다. 무휼은 물으면 반드시 대답을 했고 조리가 분명하여 조앙은 비로소 그 애가 현명함을 알았다. 이에 백노를 폐하고 무휼을 적자로 세웠다. 하루는 지백이 정나라에서 조회에 오지 않았다고 성을 내어 조앙과 함께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조앙이 마침 병이 나서 무휼을 시켜 자기 대신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했다. 지백이 술자리에서 잔에 술을 가득 따라 무휼에게 주니, 무휼이 술을 마시지 못했다. 지백이 술에 취해 화를 내며 술잔을 무휼의 얼굴에 던졌다. 무휼의 얼굴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렸다. 조씨의 장사들이 모두 노하여 지백을 공격하려고 했다.
無恤曰:「此小恥,吾姑忍之。」智伯班師回晉,反言無恤之過,欲鞅廢之。鞅不從。無恤自此與智伯有隙。趙鞅病篤,謂無恤曰:「異日晉國有難,惟晉陽可恃,汝可識之。」言畢遂卒。無恤代立,是為趙襄子。(此乃周貞定王十一年之事。)時晉出公憤四卿之專,密使人乞兵於齊魯,請伐四卿。齊田氏,魯三家,反以其謀告於智伯。智伯大怒,同韓康子虎、魏桓子駒、趙襄子無恤,合四家之眾,反伐出公。出公出奔於齊。智伯立昭公之曾孫驕為晉君,是為哀公。自此晉之大權,盡歸於智伯瑤。瑤遂有代晉之志,召集家臣商議。
무휼이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작은 치욕이니 내가 잠시 참겠다.” 했다. 지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晉)나라로 돌아가서 도리어 무휼의 잘못을 말하고, 조앙에게 무휼을 적자에서 폐하라고 했다. 조앙은 따르지 않았다. 무휼은 이때부터 지백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조앙의 병세가 위독하여 무휼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진(晉)나라에 난리가 일어날 터인데 오직 진양(晉陽)이 믿을 수 있음을 너는 알아야 한다.” 하고, 말을 마치자 마침내 죽었다. 무휼이 대를 이었다. 이가 조양자(趙襄子)다. (이것은 주정정왕(周貞定王) 11년의 일이었다.) 그때 진출공(晉出公)은 네 집안(四卿 : 智, 趙, 韓, 魏)이 정사를 멋대로 하는 것에 분노하여, 몰래 사자를 제나라와 노나라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진나라의 네 집안을 토벌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제나라의 전씨들과 노나라의 삼환씨들은 도리어 진출공의 모의를 지백(智伯)에게 알렸다. 지백이 대로하여 한강자(韓康子) 호(虎), 위환자(魏桓子) 구(駒), 조양자(趙襄子) 무휼(無恤) 등과 함께 네 집안의 군사들을 합하여 도리어 진출공을 공격했다. 진출공이 제나라로 도망쳤다. 지백이 소공(昭公)의 증손자 교(驕)를 진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이때부터 진나라의 대권은 모두 지백(智伯) 요(瑤)에게 돌아갔다. 지백 요가 마침내 진나라의 군주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는 뜻을 품고 그의 가신들을 불러 상의했다.
畢竟智伯成敗如何,且看下回分解。
마침내 지백의 성패가 어찌 될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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