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서 단종(端宗) 시신 수습한 엄흥도 선생 향사(享祀)
조선조 비운의 왕인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후, 세상을 피해 떠난 충의공 엄흥도(嚴興道) 선생의 향사가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 ‘충의각(忠毅閣)’에서 4월 5일 봉행됐다.
충의각과 관련 비석, 충절의 상 등은 2007년 충의공의 22세손인 엄태우 아시아트레이딩 대표가 중심이 돼 조성했으며, 그 후 매년 충의공의 후손과 지역 사람들이 모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그러다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숨을 거두었을 때,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3족(본가, 외가, 처가)를 멸한다는 추상같은 어명 속에서도 단종의 시신을 세 아들과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이 사실을 계룡산 동학사에 있는 생육신 김시습에게 알린 후 세상을 피해 행방을 감췄다.
충의공은 200여년이 지난 현종 9년(1668)에 복호되어 그의 자손들이 등용될 수 있게 되었고, 영조 때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고종 때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단종의 ‘자규루’)
또한, 충의공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간곡히 말렸으나,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떠한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爲善被禍吾所甘心)”라는 말을 남겼고, 그 후손들은 이 말을 지금까지 받들고 있다고 한다.
그는 고려 때 원외랑(員外郞) 벼슬을 역임하다가 신경과 함께 산수가 빼어난 영월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정착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결의형제를 맺게 되었으며, 엄씨들은 하송리 은행나무 근처에 행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영월 신씨들은 영흥리 물거리 부근에 이화정을 세운 채 두 집안은 후손 대대로 의좋게 살아오다가 단종과 연을 맺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경매일신문 http://mgmaeil.com/detail.php?number=2327&thread=22r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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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경매일신문 원문보기 글쓴이: 문경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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