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철학과 헛된 속임수 -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신앙을 변질시키는 유혹
본문: 골로새서 2:8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여러분,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경험 있으실 겁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사주를 보러 가거나, 좋은 날을 받아서 이사를 하거나,
누군가 "저 사람 기가 세다"고 하면 괜히 신경이 쓰이던 경험 말입니다.
젊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살다 보니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되고,
자식 문제든 건강 문제든 뭔가 붙잡을 게 필요해서 그랬던 적, 이게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은 본래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손이 무엇을 붙잡느냐입니다.
요즘은 그 손이 사주팔자 대신 다른 것을 붙잡습니다.
자기계발서가 말하는 "네 안의 잠재력을 믿어라", 어느 유명 강사가 말하는 "네 감정이 곧 진리다",
자녀 교육서가 말하는 "이 방법만 따르면 성공한다"는 공식들 말입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 그들도 똑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골로새는 헬라 철학과 유대교 전통, 신비종교, 천사숭배, 금욕주의가 뒤섞인 도시였습니다.
여러 사상이 "이것만 더하면 완전해진다"고 속삭이던 곳이었습니다.
그 한복판에서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로새서 2:8).
하나. 그럴듯하지만 텅 빈 것
바울이 쓴 "철학"이라는 단어, 헬라어로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는 "지혜를 사랑함"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이 구절 하나뿐입니다.
바울이 지식이나 학문 자체를 정죄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칼빈은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바울이 학문 전체를 반대한 게 아니라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을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섞으려 하는 시도를 경계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거짓 교사들을 양떼를 몰래 훔쳐가는 도둑에 비유했습니다.
대놓고 빼앗는 게 아니라, 양 한 마리씩 슬그머니 빼가는 도둑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철학을 곧바로 "헛된 속임수"라고 부릅니다.
헛되다는 단어, 케노스(κενός)는 "속이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겉은 그럴듯한데 안이 텅 빈 것을 가리킵니다.
마치 화려한 포장지로 싸여 있는데 뜯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상자 같은 겁니다.
속임수라는 단어 아파테(ἀπάτη)는 거짓 약속, 기만을 뜻하는데, 성경에서 이 단어는 종종 사탄의 활동과 연결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것들 중에도 이런 것이 많습니다.
"네 감정이 기준이다", "너 자신을 믿으면 다 된다"는 메시지는 회개나 자기부인 같은 신앙의 본질을 심리적 위로로 바꿔치기합니다.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생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줍니다.
겉으로는 다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뜯어보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둘. 포로로 끌려가는 것
바울이 사용한 동사가 더 강렬합니다.
"사로잡다"는 헬라어 실라고게오(συλαγωγέω)인데,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에만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원래 뜻은 전쟁에서 포로를 끌고 가거나 전리품을 노획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단순한 "잘못된 정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넘어가는 것을 "전쟁 포로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렇게 끌려갈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한 번에 신앙을 버리는 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다가
어느새 마음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옮겨가 있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같은 편지 뒷부분인 골로새서 2장 15절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시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셨다고 말합니다.
이때 쓰인 단어는 개선행진에서 포로를 이끄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정확히 같은 단어는 아니지만, 이미지는 정반대로 겹칩니다.
사탄의 세력은 우리를 자기 전리품으로 삼으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세력들 자체를 자신의 전리품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포로인지, 그것이 이미 십자가에서 결정 났다는 뜻입니다.
셋. 사람의 전통, 세상의 초등학문
바울은 이 거짓 가르침의 뿌리를 두 가지로 짚습니다.
"사람의 전통"(παράδοσις)과 "세상의 초등학문"(τὰ στο이케이아 투 코스무).
사람의 전통은 말 그대로 사람이 만든 종교적 관습입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7장에서 사람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을 폐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표현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갈립니다.
어떤 학자는 고대인들이 우주를 구성한다고 믿었던 기본 원소들을 가리킨다고 보고,
어떤 학자는 초보적인 종교 규례를, 또 어떤 학자는 세상을 지배한다고 여겨진 영적 세력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솔직히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 이것은 그리스도 없이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종교적·도덕적 체계 전체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규칙을 지키면 하나님이 인정해주신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금욕주의는 몸의 욕구를 억누르면 더 거룩해진다고 믿는 태도입니다.
신비주의는 특별한 체험을 해야 진짜 신앙이라고 믿는 태도입니다.
이 셋 모두 골로새 교회를 흔들었던 사상들인데,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 한 분으로는 부족하다고, 무언가를 더해야 완전해진다고 속삭인다는 것입니다.
넷. 그럼에도 그리스도
바울은 이 모든 경고 끝에 딱 한 문장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판별 기준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을 더 크게 보이게 하는가, 아니면 작아 보이게 하는가.
그런데 여러분, 이 경고가 있기 바로 앞 구절을 놓치면 안 됩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바울은 "속지 말라"는 명령보다 먼저,
"너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자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속지 않으려고 애써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속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또 다른 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 경고는 두려움의 메시지가 아니라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넘어지고, 그럴듯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에도,
그분은 이미 십자가에서 그 모든 거짓의 세력을 자기 전리품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얼마나 똑똑하게 속지 않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 하루 내 마음이 가장 자주 붙잡았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그리스도보다 더 크게 느껴진 순간이 있었습니까.
이것 하나만 조용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에는, 평소 즐겨 보시던 자기계발 콘텐츠나 인생 조언 영상 하나를 성경 본문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십시오.
"이 말이 나를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이끄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게로 이끄는가"를 한 번만 점검해 보시는 겁니다.
이번 달에는, 가족이나 가까운 성도 한 분과 이 본문을 나누며 서로에게 이렇게 물어봐 주십시오.
"요즘 당신은 무엇을 붙잡고 삽니까."
서로의 대답을 듣고 함께 기도해 주는 것, 그것이 이번 달의 작은 순종입니다.
결론
우리는 완벽하게 안 속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가 지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오늘 다시 돌이킬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이미 뿌리내린 자로서, 오늘 하루도 그 뿌리를 확인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보다 먼저, 내가 누구에게 붙잡혀 있는지를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