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등꽃 아래서
이영백
나이가 들어가면 귀소본능이 저절로 생기는가 보다. 간밤에 꿈도 어린 날 살았던 고향의 금모래 밭에 뒹굴고 있지 아니하였든가? 불현듯 내 고향이 보고파 공휴일 아침을 부산하게 만들었다. 느닷없이 일행(흔히, 둘째 아들 기사, 난 조수, 내자와 큰 처제는 귀빈) 넷은 의기투합하여 고향 경주를 찾아 나섰다.
그 날도 무턱대고 생수, 끓인 물, 모자, 장갑, 동전지갑만 챙기고 출발하였다. 비록 한나절치기 짧은 여행일지라도 집을 나선다는 것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들뜨고 신나한다. 보통사람이라면 모두가 똑같은 심사일 것이다.
단숨에 경부고속도로를 내달리다 영천 산업도로로 빠져들었다. 첫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단골로 가는 로드카페 이름이 “아화(阿火)휴게소”이다. 차가 멈춰 서기 바쁘게 동전주머니 들고 가장 먼저 차에서 내린다. 누구에게 물어볼 의향도 없이 먼저 가는 곳은 커피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여기는 고속도로 휴게소보다 예전에는 값이 쌌다. 넉 잔의 커피 뽑는 동안 저절로 줄 서서 종이컵 커피를 한 잔씩 받아들고 불의 언덕, 아화의 언덕에 있는 등나무 휴게소로 나선다.
늘 고향산천은 언제보아도 반갑고 즐겁다. 저 멀리 오봉산이 우리를 맞이하고 그 뒤로 구름이 산허리를 둘러싼 단석산(827m, 경주 제일 높은 산)이 지켜본다.
“아, 등꽃이 피었네.”
큰 처제가 자연의 변화에 가장 눈 밝게 느껴 말한다. 우리도 관심을 보이며 등꽃 핀 아래에 넷이 모인다. 누구의 시를 읊었다. “등을 보이고 떠나는 사람의 등 뒤를 등꽃이 핀다.” 땀이 날 정도로 더운 시기라 등꽃이 피어있는 등나무그늘에 진한 향기의 커피 마시며 코로는 연신 등꽃의 향기도 섞는다.
등나무 줄기가 왼 돌아감아 올라 파고라(pergola)를 덮었다. 줄기 따라 잎이 자라면서 만든 넓은 그늘이 좋아 들릴 때마다 그곳에서 고향 소식을 톡 맛본다. 앉아서 저 먼 하늘에 연보라색 주렴 만들어 풍경을 새롭게 만든다. 대구선 기찻길에 긴 화물이 지나간다. 애기 못이 아래에 그 기적소리 녹음을 한다.
일어서서 등꽃을 본다. 연보라색 속 꽃잎을 부여잡듯 흰색 꽃잎이 감쌌다. 마치 한 마리의 나비 같다. 두 뼘 가량의 꽃줄기에 송이로 매달려 팔랑거린다. 등꽃에 취해 그만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바람과 등꽃 향기 자꾸 들이마신다.
다시 바람이 일면 등꽃이 나비되어 날아가 버리듯 한다. 콩꼬투리 녹색 열매도 등꽃 향기 맡으면서 함께 익는다.
어린 날 심심하여 봄 등꽃과 제비 한 마리 곁들이어 소품 그림을 그렸다. 벽에 붙여둔 그림은 집 방문객마다 한 장씩 떼어내 가져가 버렸다. 등꽃그림 없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