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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경덕경장(慶德更張)
동아전쟁에서 승리한 대한제국은 1893년 1년 총예산의 10배에 달하는 약 900만 파운드, 한화로 약 8100만원의 자금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자금은 제국의 산업을 부흥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데 들어가야 했죠. 그러나 본격적인 투자에 앞서 제도를 먼저 손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헌법 제정작업은 제주성 사건, 유인석의 난, 동아전쟁 등으로 인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형국이었고, 중앙군과 지방군의 통합 문제 또한 실마리를 찾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한 지난 창의군 봉기의 후속대책으로 공소청과 경찰부를 신설해 지방관들의 권한을 제거하면서 지방에서는 토호와 유지들이 향회를 기반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죠. 이 문제들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습니다.
우선 헌법 제정에 있어서는 여러 쟁점들이 제기되었습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오쿠마 시게노부의 입헌파와 이토 히로부미의 존황파가 정쟁을 벌였듯, 한국에서도 비슷한 주장들이 제기되었습니다. 아예 헌법 제정작업 자체에 회의적인 근왕당과 급진적인 프랑스식 헌법을 주장하는 신민당을 제외한다면, 주된 논점은 자유당이 주장하는 영국식 입헌주의 헌법을 지향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보국당은 절충안으로 “주권은 황제에게 있으되 황제는 법에 따라 신민의 기초적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는 독일식 논리를 주장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절충안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주권재민과 천부인권 개념을 토의 주제로 만드는 데 성공한 신민당은 이유하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영국식 헌법 찬성으로 선회했고, 대세를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근왕당 역시 보국당과 함께 ‘온건화’ 작업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보국당 소장파의 선두주자이던 이현이 주권재민, 천부인권, 심지어 사회계약론까지 수용하겠다는 매우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자 보수파 연합 또한 발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이후 이현이 보국당을 나가 무당파 기술관료의 길을 굳히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만, 아무튼 대세는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동아전쟁의 영웅 박태양이 민회 총선거 연기를 조건으로 영국식 헌법을 지지하고 한국 최고의 근대법학자 김한립이 “입헌민주주의의 틀 내에서도 황제의 권위를 살릴 수 있다”고 설득하자, 최신우와 자유당은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896년 4월 1일 대한제국 헌법(경덕헌법)이 최종 반포되었습니다. 중추원은 추밀원과 민회로 분리되었고, 민회가 입법권과 심의권을 모두 가져가는 대신 (황제가 임명하는)추밀원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삽입되었습니다.
다음 주제는 군제 개혁이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박태양이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모든 당파들은 ‘심각하게 급진적이지만 않다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자는 분위기였습니다. 조선의 전통인 문민통제를 법제화해 군정권을 육군상서와 해군상서가 각각 담당하고, 통수권은 황제 직속기구인 원수부를 통해 국가원수인 황제가 보유하되 실질적인 군령권은 육군 총참모장과 해군성 사령장관이 행사하는 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이유하의 조언으로 통수권의 위임에 민회의 의결이 필요하도록 하는 조항이 삽입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앙군과 지방군의 계급 및 행정체계를 중앙군을 중심으로 일원화하고 육해군의 계급 또한 통일하는 개혁이 이루어졌습니다. 근대적 사관학교 또한 문을 열었습니다. 입찰 결과 육해군 모두 미국인 교관들이 생도들의 교육과정을 자문하게 되었죠.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여군의 자원입대를 규정하는 조항이 신설된 것이었는데, 이유하의 막내 여동생 이진하가 지난 전쟁 당시 엽보병 군관으로 종군했던 일과 연관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징병법의 예외조항을 엄격히 하여 상비군 숫자를 늘리자는 주장도 여러 번 제기되었으나, 당장 3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 큰 재정적 부담이라는 점, 그리고 이들이 생계현장에 나가있는 것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훨씬 이득이라는 점이 반론으로 제시되어 최종적으로 부결되었습니다. 또한 방군수포제(군포)가 금납화된 형태인 ‘군세’에 의한 재정수입을 무시할 수 없었죠. 그렇게 상비군은 약 8만명, 총동원 시 50만명까지 확장 가능한 대한제국군이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안건인 행정체계 개편의 핵심은 상술했듯 지방관 제도 개혁이었습니다.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 흥선왕 이하응을 대신해 총리직을 승계한 어윤중은 이참에 향회를 대폭 손보고 근대적 지방제도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우선 최신우는 미국의 제도를 예로 들면서 주요 도시(한성, 평양, 동래)를 독립시로 두어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자는 주장을 냈습니다. 그러나 각 도의 지방관을 민간에서 선출하게 하자는 안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오히려 향회의 영향력을 강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 최종 반려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도지사를 상피제 원칙에 의거해 중앙에서 임명하는 쪽을 선호했습니다. 또한 지방의 경찰권을 둘로 분할해 도청에 소속된 민정경찰이 행정과 순찰업무를 담당하되 중앙(경찰부) 소속의 사법경찰이 감찰과 중대범죄를 담당하는 이원화 체제가 수립되었습니다. 즉 사법경찰은 훗날 설립될 미국의 FBI, 더 정확하게는 마치 프랑스의 국가헌병대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행정부담 경감을 위해 평안도, 함경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남북도로 분리되어 13도 체제가 자리잡았습니다. 제주도의 경우 전라남도에서 관할하되 조금 더 자율성을 가지는 형태가 되었죠.
그렇게 1896-97년에 걸친 2차 제도개혁 작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민회 선거가 불과 3년도 남지 않았으므로 전통적 붕당체제에 근거한 ‘당파(fraction)’는 의회민주주의 제도 내의 ‘정당(party)’으로 개편되어야 했습니다. 근왕당과 보국당 내 일부 계파는 급진 민족주의, 국수주의, 보황주의 성향의 국민당(國民黨)을 결성했습니다. 급진 우익이 빠져나간 보국당은 거의 유사한 성향의 자유당과 합쳐 입헌자유당(立憲自由黨)을, 신민당은 ‘당’의 한자만 고쳐 같은 이름의 정당(新民黨)을 등록했습니다. 김영천은 농본주의 성향의 군소정당 종횡당(縱橫黨)을 설립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외 종교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보장되었고, 신헌법을 비방하는 많은 이들은 “황제의 통치 근거가 보국안민, 경세제민에 있다는 것은 삼봉 선생께서도 주장하던 바이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조선의 건국이념도 부정한다는 것”이라는 정부의 논리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은 이로써 한층 더 관료중심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단기적으로 국가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겠으나, 장기적 영향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09. 민족의 고토?
가고시마 조약으로 대한제국에 할양된 북변 신영토, 즉 간도에는 고등판무관부가 세워졌습니다. 초대 판무관으로는 박태양이 선임되었고, 그는 간도 지역의 운영방침을 수립해야 했습니다. 간도는 석탄, 구리, 납 등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벼농사가 가능해 개척하기에 따라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김영천은 이 곳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업화 드라이브에 나서자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간도 지역의 한족 및 만주족 인구를 최대한 포용해야 한다는 견해 또한 피력했죠. 이는 판무관부 내 관료파의 의견과 맞닿은 것이었습니다. 판무관부 양전과장 이승만은 김영천의 의견을 적극 지지하며, 외무성에서 파견된 최신우의 방침에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만주족을 배척하고 한족을 제한적으로 수용하자던 최신우는 이승만을 권력으로 위압하고, 한성에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동료들과 모욕까지 섞은 ‘전보 배틀’을 벌였습니다.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끝에 어윤중이 김한립과 이현의 관여를 중단시키고 최신우를 즉시 소환하면서 ‘드디어’ 판무관 박태양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박태양 판무관은 일이 하나도 진척되지 않은 현실(...)을 보고 뒷목을 잡으며 우선 실태조사를 나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선계 개척민들이 자경대를 결성해 한족과 만주족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살해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습니다. 한족과 만주족 마을의 대표들은 박태양에게 1) 선주민 개척권 인정, 2) 조선계 자경대 진압, 3) 토지보상금 지급이라는 조건 하에 대한제국의 동화정책에 참여하겠다는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 중 1번과 2번 조항이 받아들여졌고, 보상금의 경우 제한된 금액만이 책정되어 결과적으로는 떠나고자 하는 한족과 만주족의 숫자를 줄였습니다. 어차피 선주민들은 청 정부로부터도 ‘버린 백성’ 취급을 받았기에, 이들을 동화시키는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선계 개척민들 역시 판무관부가 자신들을 편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닫고 ‘먼저 개척하는 놈이 임자’라는 논리에 맞추어 미친 듯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하, 이현, 김영천 등의 지원으로 이 분위기는 국가 프로파간다로 변해 간도 지역 전체에 퍼졌고, 지역은 빠르게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0. 내셔널 웨이트 트레이닝
개혁 도중,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이 1897년 10월 21일 지병이 악화되어 서거하는 일, 최신우의 주홍콩총영사 파견이 취소되고 전라북도지사로 좌천되는 일 등이 있었죠. 아무튼 기차는 계속 달려야 했습니다. 국가 공업화, 토지 개혁, 그리고 군비(특히 해군) 확장에 관한 사안이 제시되었죠. 공업대신으로서 국가 공업화를 진두지휘하던 김한립은 어떻게든 산업화에 많은 예산을 배분받고 싶어했습니다. 가장 만만한 희생자는 해군성이었습니다. 동아전쟁 때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빨 터져서 한 대 맞춘 것 가지고 되게 유세 떠네. 솔직히 일본 애들이 다 한 거 아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해군성이 야심차게 주장하던 44함대(정규전함 4척, 순양함 4척)는 대폭 칼질되어 4000톤급 순양함 4척과 2500톤급 방호순양함-중구축함 1척을 추가하는 안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물론 이 역시 해군에게는 감지덕지였지만 말입니다.
토지개혁 문제의 경우 김영천의 ‘공공주거지역’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이유하의 전폭적 찬성, 그리고 김한립 등 관료들의 지원사격으로 토지가격은 형편없이 추락했고, 버티지 못한 지주들은 토지 매도경쟁에 나섰습니다. 시장에 공급이 급증하며 토지가격은 더욱 기하급수적으로 추락, 미리 세워둔 계획대로 정부는 매우 싼 값에 전체 토지의 절반 이상을 매입할 수 있었죠. 경작지역의 과반을 관리하게 된 내장원은 3할의 소작료를 받으며 소작농들의 부담을 경감시켰고, 8년 뒤 이들이 자영농으로 전환할 수 있게끔 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공업부는 700만 파운드, 한화로 6300만원이나 되는 거액을 산업화에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함흥, 성진, 청진에 이르는 동북해안 공업벨트의 건설, 원산항 및 나진항 확충, 국가적 장기프로젝트인 압록강 수풍댐 건설, 허도순(도슨)의 황립광산공사가 주도하는 간도 광산종합개발계획, 제3차 철도기본계획이 차례차례 통과되었습니다. 평양에서 삼남도에 이르는 남부지역에는 농업과 축산업, 경공업 집중정책이 적용되었죠. 이유하의 제안으로 대한제국 노동자총연맹(한국노총)이 설립되어 도시노동자 간 협업과 상조, 근면노동문화 진흥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노동자의 정치계급화를 부추기려는 이유하와 신민당의 뒷공작이기도 했습니다. 자본가 계층을 육성하려는 김한립에게는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이외에 보조금 등의 감사를 담당하는 법무성 사정위원회가 설립되며 신규창업자들의 공금유용을 감시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행해졌습니다.
대한제국의 강력한 공업화 드라이브는 지주 계층의 몰락, 자영농과 자본가 계층의 비약적 성장, 노동계급의 대두를 불러왔습니다. 대한제국의 정치지형은 기존의 보수적 지주-진보적 도시부르주아의 구도에서 보수적 자본가-진보적 노동자의 구도로 변형되었습니다. 국가의 1년 예산은 1900년 총 2400만원(267만 파운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동시기 일본의 예상치인 1억 2천만원의 약 2할에 달하며, 10년 전 양국의 가용자금이 10배나 차이났던 것에 비하면 비약적 성장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어엿한 후발 산업국가로 도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1. 이룡치수(以龍治水)
1899년 5월 11일, '중화의 지식인이자 선비'를 자처하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북경 거리에서 가두행진을 벌였습니다. 이들은 강유위와 양계초 등 소위 '변법유신파'들의 석방과 입헌통치 도입을 외쳤습니다. 이들이 천안문 앞 광장에 도열하자 당황한 서태후는 풍국장의 신군에게 즉각 진압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총칼에 짓눌려 해산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19일, 이번에는 '의화단'이라는 권법운동 무리가 "부청멸왜양"을 내세우며 일본령 칭다오를 공격했다가 학살당했습니다. 잠잠해진 줄 알았던 22일, 이번에는 북경에서 의화단 무리가 일제히 봉기했습니다. 교회와 성당에서 세운 고아원을 '아동유괴시설'이라 생각하던 이들 의화단은 고아원을 습격해 수녀들과 선교사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길거리에서 서양인들에게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 살해행위를 저질렀습니다.
5월 22일-23일 양일간에만 서양인 등 외국인, 중국인을 모두 포함해 총 216명이 사망하자 외국인들은 공사관 구역과 그 인근의 외국인 거주구역으로 도피했습니다. 의화단은 천진으로 이어지는 철도를 모두 끊어 외국인 구역은 그대로 고립되었고, 가장 공격을 심하게 받은 것은 일본 공사관이었습니다. 공사관 직원 수 명이 희생당하는 난리판에서 공사를 비롯한 나머지 직원들은 인근에 있던 이탈리아 공사관으로 대피해야 했습니다. 한국 공사관 역시 안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청공사 김영천, 그리고 때마침 한청우편물협정 조인 문제로 북경에 출장을 나가있던 이유하 우정총국장 역시 공사관에 발이 묶였습니다. 한국 공사관의 방어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으므로, 이들은 최소한의 기본정보를 조사해 본국에 알리고 피신하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 이유하는 놀라운 무력으로 의화단 무리 4명을 제압할 수 있었고, 그들 중 하나로부터 독일 공사의 피살, 그리고 서태후의 의화단 지원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정보를 본국에 송신하고 그들은 독일 공사관으로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한성은 몹시 경악했습니다. 의화단이라는 사교 무리가 날뛴다는 정보는 이미 1-2년 전부터 받고 있었으나, 이들이 직예 일대를 장악하고 대륙 전역에서 창궐한다는 소식, 무엇보다도 서태후가 이들의 편을 들어 전 세계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죠. 5월 24일, 대한제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일본과 함께 9개국 연합에 가담하는 동시에 간도의 주민 보호를 위해 만주로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슈페이에르 공사가 접근하여 송화강 분할안을 제안했으나, 그 조건이 “영국 및 일본과의 동맹협상 파기”였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 극동군이 의화단 사건을 핑계로 만주를 침탈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어윤중은 박태양에게 “러시아와의 충돌은 극구 회피하되 남만주에 병력을 주둔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1군의 3개 사단 18,000명이 여기 동원되었고, 제2군 병력 중 11,700명 가량이 인천항을 출발해 황해에서 연합군과 합류, 천진으로 향했습니다.
6월 11일, 사태 발생 19일째가 되었습니다. 9개국 연합군은 천진에 상륙해 큰 어려움 없이 북경으로 진군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금성에서 흰 연기가 솟아올랐습니다. 이를 본 김영천은 단번에 “신군의 쿠데타”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유하는 공사관 경비대 몇 명을 보내 이 ‘신정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고, 그 결과 서태후에 의해 숙청당했던 변법유신파의 주요 인물들(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이 풀려나 자금성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변법파 수장 강유위와 신군 내 ‘가로회(또는 동맹회)’ 인사들의 입장이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로 갈린다는 소식 또한 들려왔습니다. 남쪽에서도 손문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봉기가 예정되어 있다는 이야기마저 접수한 이유하는 김영천과 함께 직접 자금성으로 진입하자는 ‘몹시 과감한’ 제안을 날렸습니다.
이런 제안을 거부한다면 그건 김영천이 아닙니다. 내친김에 청국 관료와 청국 군관으로 변장한 김영천과 이유하는 자금성의 부서진 담벼락을 통해 내부에 진입, 염탐하던 도중 공화파의 수장 담사동이 이끄는 병사들과 마주쳤습니다. 서로 총을 겨누는 상황은 확실히 대화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담사동의 이상이 자신들의 것(물론, 그보다는 김영천 개인의 이상일 확률이 높았습니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한국 공사관 일행은 “대가가 충분하다면 혁명정부를 원조하겠다”는 제안을 날렸고, 이는 순식간에 자금성 내 입헌군주파의 실각과 공화파의 득세로 이어졌습니다. 군병을 몰아쳐 자금성을 장악한 풍국장 이하 신군 무리는 한국이 연합국과 신정부 사이를 중재해줄 것이라 기대했고, 담사동과 양계초 등 혁명가들은 “저 ‘군벌’들과 공화혁명가들이 결별할 시” 한국이 자신들을 지원해 혁명을 완수하는 데 도움을 주길 바랬습니다. 신군, 즉 북양군벌에게는 안타깝게도 김영천과 이유하는 후자에 집중했죠. 그렇게 자금성 모 병기창고에서 아시아의 역사를 결정지을 밀약이 체결되었습니다.
1) 중화민국 임시정부 외무장관 양계초는 송화강 이남, 요하 이동의 남만주 영토가 대한제국에게 귀속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2) 대한제국은 이후 민국에 급변사태가 발생했을 시 민국 외무장관 양계초 및 내무장관 담사동 등과 뜻을 같이 하여, 인민의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정부를 지지하며 원호한다.
3) 이 각서는 몽골, 북만주 등 언급되지 않은 관외 지역에서 적용되지 아니한다.
밀약이 체결되고 꼭 이틀 뒤인 6월 13일, 광주, 곤명, 무창 등을 비롯한 남부의 도시들에서 동시다발적인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광주 등 광동성에서 일어난 봉기가 가장 강했죠. 아직도 북경이 군인들의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전해듣지 못한 지방 군사들은 열심히 사태를 진압했지만, 중앙으로 보고를 해도 그 누구도 응답하지 않는 상황은 충분히 이상했습니다. 봉기 4일차인 6월 16일, 광동, 광서, 귀주, 운남의 4개 성이 '민국 충성'을 선포하며 이제는 전세계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북경과 동떨어진 월경지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민국사성연맹이라는 가설조직이 세워졌습니다. 광동순무 당소의가 위원장을, 여원홍이 부위원장을, 그리고 손문이 서기국장을 맡았습니다. 서기국에는 진형명, 호한민, 왕조명 등 손문이 죽으라면 죽는 젊은 심복들이 자리했죠. 그 외 교통부장에 임삼, 순찰부장에 양사이, 군무부장에 육영정이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총리니 총통이니 대통령이니 수상이니 장관이니 하는 '국가를 연상시키는' 직함은 모두 공석이었고, 이는 ‘남부 봉기’가 자금성의 공화혁명가들, 즉 담사동 일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6월 20일, 북경이 함락되었습니다. 물론 전투다운 전투 하나 없었기에 함락이라기보다는 ‘입성’이 맞는 표현이겠으나, 아무튼 60,000명이 넘는 연합군 병력이 들어서 의화단 잔당들을 토벌하고 중국인들에게 분풀이를 시작했습니다. 의화단이 북경 근처에서 자취를 감춘 6월 29일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외무상서 이범진이 협상대표로 나섰고, 원래 북경에 있었던 김영천과 이유하, 그리고 한성에서 파견된 이현, 김한립, 박태양, 최신우가 자리했습니다. 한국 공사관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던 이들은 김영천의 폭탄선언을 듣고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김한립은 “삼국간섭 때처럼 열강들의 개입으로 남만주를 빼앗기고 러시아의 분노만 초래할 것”이라며 밀약의 무효화와 두 외교관들의 엄벌을 주장했습니다. 역시 당황한 이범진 상서는 “일단 주변국의 입장을 알아본 뒤 결정하자”며 상황을 진정시켰죠.
최신우와 이현이 발품을 판 결과, 꽤 의외의 사실이 전해졌습니다. 러시아는 예상대로 여순항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동청철도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할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영국과 일본이 매우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복건성 등 동중국해 방면으로 눈을 돌린 일본은 한국이 러시아의 공세적 남하를 막아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국익과 부합했고, 영국은 독일과 러시아가 한꺼번에 미친 듯 달려드는 통에 어떻게든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약 2달 뒤 런던에서 조지프 체임벌린 식민장관이 도착, 대뜸 영-한-일 3자동맹을 제안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세 체약국들은 9개국 연합과 중화민국 임시정부 간 체결된 조약(※ 아직 미체결)의 내용을 충실히 이행하며, 그에 부속된 체약국들의 특수한 이권 - 즉, 영토의 할양, 조약항의 임대, 군대의 배치, 배상금의 책정 등을 포함한다 - 을 각자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2. 세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경우 다른 체약국들은 즉각 응답하여 전력으로 원호한다.
3. 세 체약국 중 한 나라가 전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1개국과 교전할 경우 다른 체약국들은 우호적 중립을 지킨다. 이 조항은 다른 체약국이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4. 본 조약의 유효기간은 5년으로 하며, 만료 1년 전 재협상한다.
즉 남만주를 두고 전쟁이 벌어진다면 일본은 함대와 원정병력을 파견, 영국은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가장 강력한 반대자였던 김한립의 의견마저 선회시킬만큼 막대한 파급력을 지녔고, 그렇게 세 국가는 동맹조약의 체결 및 불평등조약 개정, 그리고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에 동의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간 체임벌린은 마치 어떤 세계관에서 자신의 둘째 아들이 그랬듯 독일과의 협상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과, 극동과 남아시아에서 러시아와, 그리고 이제는 독일과 건함경쟁까지 벌여야 했던 영국은 적국을 하나(러시아)만 남기고 나머지와는 손을 잡기로 했습니다. 오랫도록 이어졌던 영국의 ‘명예로운 고립(splendid isolation)’ 기조가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동맹조약이 체결되자마자, 한-영-일 3국은 마치 짠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한족 민족주의"를 채택했다는 것을 빌미삼아 영국은 한국이 "만주족의 보호자"임을 내세웠고, 담사동이 미리 약속한 대로 해당 안을 수락하며 모두에게 충격을 선사했습니다. 일본은 하문(샤먼) 및 주변 도서의 조차권을, 영국은 신계 지역의 영구할양권을 받아갑니다. 연합국에서 준비해간 대부분의 조항들(의화단 가담자 처벌, 외무부 설치 및 최상위기구화, 의화단을 지원한 황족의 처벌 등)은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국체가 들어선 이상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렸고, 중국에서의 대사건을 겪으며 열강들은 중국을 아예 멸망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득을 취할 방법을 궁리했고, 이는 중국 내의 유력자들, 즉 군벌들을 후원해 이권을 갈라먹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러시아는 송화강과 고비사막을 경계로 한 영토, 그리고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의 '보호권'을 요구했고, 내몽골과 외몽골은 러시아의 지원으로 독립했습니다. 독일, 프랑스, 미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는 상하이 일대를 조차지로 요구해 이를 분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1900년 2월 2일, 경자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배상금은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책정되었습니다. 그 대신 중화민국은 정말로 한족의 영역(그것도 요동을 제외한)만 남은 국가가 되어버렸고, 풍국장의 군부는 아연실색해 담사동, 양계초 등의 체포를 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풍국장 등에게 "서태후와 광서제를 살해하고 외국에게 이권을 팔아먹은 희대의 한간" 누명을 씌운 뒤 남쪽으로 달아난 지 오래였고, 중국 민중들은 자연스레 오랜 고사들을 떠올렸습니다. 상식적으로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가 그 대표단으로 민간 관료들을 보냈다면, 누가 실권자겠습니까? 그렇게 광주에서 담사동을 대총통으로, 양계초를 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호민(護民)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호민정부’라는 명칭은 생각보다 빨리 그 쓸모를 다했습니다. 북경의 풍국장은 순식간에 천하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서태후는 이미 '처리'했고, 광서제는 국외로 추방해버렸으니 이제 와서 애신각라조 복벽을 시도한다고 해서 사태가 수습될 리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풍국장은 강유위에게 조언을 구했고, 몇 번의 대화 끝에 이들은 산동성 곡부에 있는 연성공 공령이(孔令貽)를 옹립해 중화제국을 수립했습니다. 그렇게 대륙은 직예와 산동을 기반으로 하는 제국과 남부 4성을 기반으로 하는 민국,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군벌들의 각축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자유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인 조지프 체임벌린은 홍콩에서 민국 외무장관 웅희령을 만나 모종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극동 부왕 리하초프 대공은 친히 북경에 왕림해 부수상 원세개를 만나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레이트 게임’이 중국 대륙까지 그 무대로 장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12. 기회와 책임
주청국공사 김영천과 우정총국장 이유하의 독단적 행동은 대한제국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선사했습니다. 극단주의와 총력전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까지 이 정도의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죠. 그러나 이들은 엄연히 권한을 벗어나 월권을 저질렀고, 국가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임을 알고 이를 행했습니다. 이들의 해임과 처벌 자체에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죠. 물론 본인들도요.
법무성 사정위원장 이준(李儁) 검사장은 자신의 책임을 겸허히 인정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둘의 발언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법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준 검사장은 기소의견서를 작성, 사건은 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한성지방법원은 형법 두 사람이 제147조와 공직자법 제3조, 제4조를 위반했음을 인정, 두 피고인에게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습니다. 또한 의회는 이러한 상황이 더욱 빈발할 것을 대비하여 ‘공직자관계법’을 새로 제정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월권행위로써 국가안보와 공공복리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행동을 저질렀고 또 이를 알고 행한 자에게 최대 징역 25년을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김영천과 이유하의 정치생명은 그 끝을 고했습니다.
그 동안, 나머지 일행들은 다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900년 7월, 경자조약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은 동청철도와 남만주철도 노선을 경계로 하여 군대의 철수를 거부하고 나섰습니다. 이는 당연히 적대행위이자 전쟁 명분이었고, 대한제국 정부는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습니다. 러시아 측에서는 1) 여순 조차권 인정, 2) 남만주철도 및 동청철도의 이권 인정, 3) 남만주철도 및 동청철도 연변 지역의 러시아군 주둔권 인정, 4) 철도 연변 양측 30km의 비무장지대 설치를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기에, 민회는 순식간에 “협상 정도는 해보자”는 주화파(입헌자유당 주류)와 “바로 개전하자”는 주전파(국민당, 신민당, 입헌자유당 비주류)로 갈렸습니다.
조사 결과 러시아는 현재 85,000명을 주둔하고 있었으며, 최대로 동원하더라도 단기간 내에는 10만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 한계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유럽 러시아에서 병력을 추가 동원하려면 바이칼호에서 끊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야 하는데, 복선화가 안 된데다 바이칼호를 건너기 위해 단 한 대뿐인 철도연락선에 의존해야 하므로 증원병력을 보내는 데는 수 개월이 소요될 전망이었습니다. 또한 최근 영국과 독일이 동맹조약에 조인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러시아가 극동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습니다. 물론 주력함대를 아시아로 보내는 과감한 행동 역시 어려워졌죠. 모든 정보를 취합한 대한제국은 ‘즉시 개전’, 그것도 일본 해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을 대규모로 기습공격하는 방법으로” 개전하는 안을 채택했습니다. 손병희가 주장했듯 “러시아에게 시간을 주는 건 그 자체로 치명적 패착”이었기 때문이죠.
1900년 7월 25일 자정, 한국 및 일본 해군 연합어뢰전전단에 전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도라, 도라, 도라!” 두 군항 인근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어뢰함과 어뢰정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들을 아낌없이 쏟아부었고, 항구 기능을 사실상 마비시켜버렸습니다. 또한 러시아 전함 2척이 대파, 2척이 중파되는 피해를 입었죠.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일본의 함대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시멘트를 가득 채운 폐선들을 여순항에 가라앉혀 입구를 봉쇄해버렸습니다. 물론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 양쪽에 기뢰를 대량 매설해 함대를 완전히 마비시키는 조치도 빼놓지 않았죠.
여순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있던 새벽 5시, 한성과 도쿄의 러시아 공사관에는 선전포고문, 아니 ‘후전포고문’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는 대한제국이 완전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는 순간이었으며, 김영천과 이유하가 각각 환멸과 씁쓸함을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훗날 김영천은 제국주의 국가로 변해버린 대한제국을 비판하며 공화주의자가 되어 반제국주의 운동에 나서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이는 몇 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유하는 해외로 망명해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 한국에 저명한 좌익 사상가들의 글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몇 년 후의 일이었죠.
그러나 개개인의 선택과 행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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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처참한 차이.. 그리고 만주가 당시 중국 산업력 대부분이었던 이유도 나와있네요..
한강의 기적인 이유가 있다...
@렌지파일 박태양이 "북만주로 굳이 진격을 왜해..." 한 이유도 여기 나오죠 ㅋㅋ
물론 다칭유전의 존재를 모르니까 하는 이야기였겠지만...
@통장 공산당 식으로 운영하면 전세계 자원 다 줘도 성공 못한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ㅋㅋㅋ
일본 본토와의 인구비중은 적어도 1.5:1까진 따라잡았겠네요. 물론 그 중 절반 가까이가 논코어인게 치명적이지만(...)
@E.E.샤츠슈나이더 하지만 만주국은 공산당 식으로 개발했다는게 (....)
+참, 저 요하이동-송화강이남과 한반도를 합치면 현대엔 1억 5천만(......)이더라고요. 중국인들의 이주를 감안해도 엄청난수치..
@렌지파일 일본보다 약 3000만 정도 많네요...
(평행세계의 어딘가)
???:
"아버지. 왜 그러세요?"
???:
"아니다. 그저 재미있는 꿈을 하나 꿔서 말이다."
마지막화... 새벽을 불태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