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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81
창세기 29:16-30
야곱의 결혼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한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결혼을 위한 것이고 그 결혼은 언약의 후손을 얻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야곱은 언약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하란에서의 모습은 야곱의 죄성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신부로 삼아 교회를 이루시는 것을 보여준다.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16절). 야곱이 라반의 집에 “한 달”(14절) 있었다는 것은 신부를 얻는 일을 시작하는 새로운 달이 되었다는 의미를 이미 생각했었다. 문자적으로는 라반이 야곱을 한 달 동안 살펴보니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다는 사실과 쉽고 고향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고 야곱에게 품삯에 대한 제의를 한다(15절). 라반은 자기 이익을 위해 딸을 품삯으로 정하는 존재라는 것을 통해 하란의 상태가 어떤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기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셨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말씀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이 잘 되는 이익을 위해 이용할 뿐이다.
“언니”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가돌’은 ‘위대한, 큰, 더 늙은, 건방진’이라는 뜻이고 “아우”라는 말의 ‘카탄’은 ‘작은, 어린, 하찮은, 중요치 않은’이라는 뜻이다. “레아”는 ‘라아’(지치다, 싫증나게 하다, 기진하다, 슬프다, 몹시 싫어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지친’이라는 뜻이며 “라헬”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암양’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하란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라헬이라는 양을 찾아오시는 언약의 아들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하찮게 여기는 상태이다. 레아라는 이름에서 지쳐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율법적 자기 행위로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것을 더 위대하고 큰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언약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율법의 수고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함이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17절). 비교가 잘못되었다. 시력이 약한 것과 곱고 아리따운 것은 비교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다른 의미가 있다. “시력”이란 ‘아인’으로 ‘눈’이라는 뜻이고, “약하고”라는 말의 ‘라크’는 ‘부드러운, 연한, 온화한, 약한’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율법으로 영생을 이루려는 것은 연약함 속에 있는 것으로 곧 무능함인데 그것으로는 결코 생명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율법을 잘 못 보고 있다는 뜻이다.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 7:18-19)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곱고 아리따우니”라는 말씀은 ‘아름다움, 어여쁜’이라는 뜻의 말 ‘야페’, ‘야페’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쓰고, 그 사이에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토아르’(모습, 윤곽, 모양, 형태)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같은 표현을 요셉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토아르)가 빼어나고(야페) 아름다웠더라(야페)(창 39:6)
그렇다면 이 표현은 라헬이 외관상 얼굴이 예쁘다는 뜻이 아니라 요셉과 같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 모양 형상이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다는 것을 통해 언약의 아들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 안에 들어가 있는 아름다움의 상태라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후 4:4, 골 1:15).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0-11)
“18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18-20절). 문자적으로 보면 야곱은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한 것으로 선악체계 속에 있는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선악의 기준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그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이기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그것이 우리의 죄악이다.
“칠 년을 섬기리이다”라는 표현의 ‘아바드’는 ‘일하다, 섬기다, 종사하다, 경작하다’라는 뜻으로 2:5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라고 하였을 때 땅을 섬길 자가 없었다는 것을 통해 진리의 말씀이 충만하지 않은 상태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통해 땅을 섬길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이다. 그것을 야곱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다. 그러므로 야곱이 섬긴다는 것은 단순히 라반을 섬기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없는 하란과 같은 땅에 오셔서 진리로 충만하게 하실 그 섬김을 말씀한 것이다.
그래서 “칠 년”이라는 언약의 수를 말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으로 완성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야곱이 칠 년을 잠시 잠깐의 시간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지만 “며칠”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욤 에하드’를 직역하면 ‘하나의 날’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일하심은 하나의 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칠 년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약이 성취되는 한 날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히 섬기심으로 교회라는 신부를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는 섬김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은 친족이니까 야곱을 생각해서 그 딸을 준다는 것이 아니다. 라반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는 야곱을 타인이 아닌 친족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나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배척하고 거부하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 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21-24절). “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라는 말씀은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 섬겼지만 “저녁”(히, ‘에레브’)에 레아를 취하게 된다. 야곱이 취하고자 한 자는 라헬이었지만 레아도 취할 수밖에 없는 어둠의 상태에 있는 것이 진리가 없는 이 땅의 상태이다.
“들어가니라”라는 말의 ‘보’는 ‘연합, 하나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언약의 아들이 라헬뿐만 아니라 레아도 사랑하고 취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비유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의 여종 실바를 … 시녀로 주었더라”라는 말씀에서 “시녀”의 ‘쉬프하’는 ‘가족, 친척들의 집단’이라는 뜻의 ‘미쉬파하’에서 온 말로 결국 가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야곱의 결혼은 단순히 아내를 얻고 여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아들 안에서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왕국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족이 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 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 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 28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 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25-30절).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라고 하였는데 잘 속이는 야곱이 속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언약의 복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속임은 라반을 통해 야곱의 본성을 반추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야곱에 대하여 “조용한 사람”(25:27),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속이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죄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야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언약을 온전히 이루실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안에서 야곱은 언약을 보여주는 온전한 사람이다.
“칠 일을 채우라”라는 말씀의 히브리어 ‘말레’는 ‘충만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으로 문자적으로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 7일 동안 이루어지는 결혼 풍습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당시의 결혼 풍습에 대해 말씀하고자 한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이 표현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나타낸 표현이다. 이렇게 하여 결혼이라는 언약적 의미를 온전히 성취한다는 의미이다. 언약 성취의 본질적인 뜻을 나타낸 것이다.
결국 “아침에 보니 레아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율법을 온전히 성취함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오심으로 율법을 성취하심으로 아침이 드러나게 된다. “아침”이라는 말 히브리어 ‘보케르’는 ‘새벽, 아침’이라는 뜻으로 낮의 상태가 됨을 의미한다. 즉 율법의 사람은 언약의 아들과 하나 되어 온전한 신부가 되었을 때 복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20240707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