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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쇼조의 토착적 근대
- 오니시 히데나오의 연구를 중심으로 -
조성환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다나카 쇼조와 동학
일본 최초의 ‘환경운동가’로 평가받는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박사학위논문이 국내에서 최초로 나왔다. 그것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와의 비교를 겸한 연구이다. 주인공은 일본의 중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정년퇴임하고,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로 유학 온 만학도 오니시 히데나오(大西秀尚).
논문 제목은 「다나카 쇼조와 최제우의 비교 연구 – 공공철학 관점을 중심으로」이다(이하, 논문의 쪽수만 표시). 지도교수는 30여년 동안 동학을 연구해 온 박맹수 교수. 2002년에 원광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니까 박사논문을 제출하기까지 무려 16년이 걸린 셈이다. 2005년에 제출한 석사논문은 <원불교의 민중종교사상 연구>이다.
다나카 쇼조(1841~1913)는 최제우(1824~1864)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보다는 한 세대 뒤이고, 전봉준(1854~1895)보다는 한 세대 앞을 살다간 인물이다. 죽기 1년 전에 쓴 일기장에다 “참된 문명은 산을 황폐화하지 않고 강을 황폐화하지 않으며 마을을 부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산업화를 막 시작한 일본에서 ‘생태문명론’을 제창한 셈이다.
오니시 박사의 연구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2년 뒤인 1896년에 다나카 쇼조가 쓴 「조선잡기」라는 글에서 출발한다. 이 글에서 다나카 쇼조는 “동학은 문명적”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당시에 ‘폭도’로 규정되었던 동학에 대해 어떻게 이런 평가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놀람과 의문이 다나카 쇼조 연구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저자가 다나카 쇼조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동학사상과의 ‘비교’이다. 즉 동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다나카 쇼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나카 쇼조가 동학에 대해 사상적 공감을 표명했다면 두 사상 사이에는 일정한 유사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사점은 당시의 사상적 분위기로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왜냐하면 동학은 당시에 한일 양국의 주류 사상계에서 ‘혹세무민’이나 ‘이단’으로 배척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학에 공감하는 입장을 표명한 다나카 쇼조의 사상 역시 당시 일본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동학은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참고자료가 된다. 마찬가지로 다나카 쇼조 역시 동학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소재가 된다. 이처럼 동학과 다나카 쇼조, 다나카 쇼조와 동학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공공성과 근대성
다나카 쇼조 사상의 특징은 ‘공공(公共)’에 대한 각별한 관심에 있다. 다나카 쇼조 연구의 권위자인 고마쓰 히로시(小松裕. 1954-2015)에 의하면, 19권이나 되는 그의 전집에는 ‘公共’이라는 말이 총 162차례나 나오고 있다. 용례도 ‘민인공공(民人公共)’, ‘공공협력(公共協力)’, ‘자연공공(自然公共)’과 같이(2쪽) 기존에는 볼 수 없는 개념이다. 이 점에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일본의 교토포럼이었다. 이 포럼에서 나온 총서에서 고마쓰 히로시는 다나카 쇼조를 ‘공공성’의 관점에서 재조명하였다(5쪽).
(「田中正造における自治と公共性」, 『(公共哲学11) 自治から考える公共性』, 東京大学出版会, 2004; 「公共(する)知識人としての田中正造」, 『(公共哲学17) 知識人から考える公共性』, 東京大学出版会, 2006; 「いま,なぜ田中正造か」,『(公共する人間4) 田中正造』,東京大学出版会, 2010.)
교토포럼에서 다나카 쇼조의 ‘공공’ 개념에 주목한 것은 이 포럼의 핵심주제가 ‘공공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교토포럼의 연구 성과를 망라한 총서 제목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가령『중간집단이 여는 공공성(7)』,『종교에서 생각하는 공공성(16)』 등등.
한편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동학을 ‘공공성’의 관점에서 분석한 선구적인 연구가 나왔는데, 오문환의 「동학에서의 자율성과 공공성」(2002)(오문환,『동학의 정치철학: 도덕, 생명, 권력』, 모시는사람들, 2003에 수록)이 그것이다.
또한 최근에는 교토포럼에 참여했던 박맹수가 ‘공공한다’는 개념에 입각해서 동학을 분석하였고(「‘공공하는 철학’에서 본 동학의 공공성」, 박맹수,『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모시는사람들, 2014에 수록).
최근에 조성환도 ‘공공한다’는 개념을 분석틀로 삼아서 동학의 개벽사상을 ‘토착적 근대’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조성환, 「공공철학의 관점에서 본 동학의 개벽사상 - ‘공공(公共)’과 ‘천인(天人)’ 개념을 중심으로」(2017), 이후,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근대 한국 개벽종교를 공공하다』, 모시는사람들, 2018에 「동학이 그린 공공세계」라는 제목으로 수록.(이상, 5-6쪽, 126쪽).
여기에서 ‘공공(公共)한다’는 사마천의『사기」에 처음 나오는 개념으로(法者天子所與天下公共也(법이란 천자라 할지라도 천하와 함께 ‘공공하는’ 것입니다. 「장석지열전」), “모두가(公) 함께 한다(共)”는 뜻이다. 이후 19세기까지 동아시아에서는 ‘공공’이 줄곧 동사로 사용되었다. ‘공공성’이라는 명사가 처음 출현한 것은 1930년대의 일본에서이다(와쓰지 데츠로, 『윤리학」).
모두에게 잊혀져 있던 ‘공공한다’는 개념을 발굴한 것은 교토포럼의 김태창 선생으로, 서양의 공공성과는 다른 동아시아적 공공성의 특징을 ‘공공한다’는 실천성에서 찾고, 나아가서 이것을 바탕으로 오늘날 동아시아에 요청되는 현대철학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김태창 선생은 ‘공공한다’를 ‘대화한다’・‘협력한다’・‘개신한다’는 세 가지 의미로 재해석하였다(여기에서 ‘개신(開新)한다’는 “새로운 차원을 연다”는 뜻으로, 동학이나 개벽파의 어휘로 말하면 ‘개벽한다’와 유사하다).
한편 박맹수는 교토포럼에서 고마쓰 히로시와의 만남을 계기로 처음으로 동학사상과 다나카 쇼조를 비교하였다(「‘녹두장군’ 전봉준과 다나카 쇼조의 ‘공공적’ 삶」, 2013.『박맹수,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모시는사람들, 2014에 수록).
오니시 박사의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선행연구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전봉준 대신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를 비교대상으로 삼아서 ‘공공철학’ 또는 ‘공공성’의 관점에서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고찰하고 있다.
오니시 박사의 연구의 특징은 이러한 선행연구를 토대로 다나카 쇼조의 ‘공공성’을 ‘근대성’이라는 보다 넓은 역사적 지평 위에서 조망하면서, 최제우의 사상과 비교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다나카 쇼조를 <영성과 생명과 평화와 환경(자연)>을 중심으로 하는 ‘토착적 근대’를 지향한 사상가로 평가하고, 그가 추구한 공공성도 이런 점에서 서구적 공공성과 달랐으며, 이런 근대성과 공공성이 동학과 상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나카 쇼조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오니시 박사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미 고마쓰 히로시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고마쓰 히로시는 다나카 쇼조를 “전통=근대형 민중사상가”라고 평가했는데, 여기에서 ‘전통=근대’는 기타지마 기신의 용어로 말하면 ‘토착적 근대’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138쪽).
이러한 평가는『다나카 쇼조의 근대」라는 고마쓰 히로시의 책 제목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이 제목에는 다나카 쇼조가 추구한 근대는, 후쿠자와 유키치식의 서구적 근대가 아닌 토착사상을 바탕으로 한 토착적 근대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
생애와 운동
선행연구를 참고하여 필자 나름대로 다나카 쇼조의 일생을 시기별로 나누고, 각각의 특징을 잡아보면 다음과 같다. 오니시 박사는 제3기를 두 개로 나누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편의상 하나로 합쳤다.
제1기(7세~36세): 토착과 전통 학습시기(1848~) - 나누시 생활
제2기(37세~49세): 서구적 근대 수용시기(1878~) - 자유민권운동
제3기(50세~72세): 토착적 근대 모색시기(1891~) - 공해반대운동
제1기는 전통사상(유교)과 토착종교(후지도)를 학습하면서 농촌생활을 체험하는 시기이다. 7세부터 16세까지 서당에서 존황유학(尊皇儒學)을 배웠고, 비슷한 시기에 ‘후지도(不二道)’라는 토착종교를 신앙하였다. 후지도는 평등과 도덕을 강조하는 민중종교로, 평생동안 다나카 쇼조의 종교의식과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68쪽).
17세부터는 부친의 뒤를 이어서 ‘나누시’가 되었는데, ‘나누시’는 마을 농민을 관리하는 농민대표와 같은 직책을 말한다. 다나카 쇼조는 나누시 시절, 영주의 지배정책과 수탈에 분개하여 나누시들의 항쟁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다(30-1쪽).
제2기는 서구근대사상을 수용하는 시기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의 영향을 받아서 서양근대의 계몽주의사상 및 자유민권사상을 접하였다. 이 시기부터 지방 의원이 되어 정치적 활동을 통해 ‘공공’을 위해 헌신하는 공공적 삶이 시작된다(12쪽).
제3기는 서구근대문명의 한계를 자각하면서 토착적 근대를 모색하는 시기로, 광산에서 나오는 광독으로 고통받는 야나카마을 주민들을 위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공해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다나카 쇼조의 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운동을 통해서 형성되어 갔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제3기가 주목할만하다. 굵직한 사건을 체험할 때마다 사상적 각성이 찾아왔는데, 그 첫 번째 계기는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다.
사상의 전환
오니시 박사에 의하면, 다나카 쇼조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사상적으로 주목할만한 세 차례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17쪽).
첫 번째는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쓰여진 “국가는 정치적, 공공은 사회적”이다. 이것은 오니시 박사에 의하면, 천황제국가체제의 수립을 통해 ‘공공’을 독점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의문을 품고 ‘국가적 공공’이 아닌 ‘사회적 공공’을 모색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한다(17쪽).
이와 유사한 생각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03년에는 “야나카 (마을의) 문제는 러일 문제보다 더 큰 문제”라는 말로 표출되고 있다. 다나카 쇼조는 이듬해에는 아예 야나카마을로 이주하여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수호하기 위한 비폭력 평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오니시 박사는 이것을 “국가적 공공에서 사회적 공공으로의 실천적 심화”라고 평가하고 있다(117쪽).
두 번째는 다음 해인 1895년에 쓴 종교적 각성에 관한 언급이다: “나는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졸고 있었다. 1890년부터 조금씩 깨어나서 1895년에 겨우 종교를 자각하게 되고, 다시 1886년 이전으로 돌아가서 정인(正人)이 되었다.”(17쪽) 앞의 “공공은 사회적”이라는 말이 ‘사회적 공공’을 말하였다면, 이곳은 ‘영성적 공공’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그 다음 해인 1896년에 쓴 동학에 관한 평가이다: “동학은 문명적이다. 12개조의 규율은 덕의(德義)를 지키는 것이 엄격하다...녹두(전봉준)의 뜻은 종교로 근본적인 개혁을 꾀하고자 하였다...조선 백년의 대계를 정신부터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군대는 그것을 모르고 새싹을 짓밟았다. 애석하다...”(「조선잡기」) 다나카 쇼조의 「조선잡기」에 나오는 동학 관련 부분의 전문 번역은《개벽신문》 66호(2017.08)에 실린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 다나카 쇼조의 동학평가를 중심으로〉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평가에 대해 오니시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정부=국가에 의한 공공성 독점의 추세에 의심을 느끼고 사회적 공공, 즉 아래로부터의 공공을 모색하기 시작한 다나카가,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던 덕의를 중시하는 문명관의 담당자를 동학농민군에서 발견한 사건, 즉 종교로써 나라를 개혁하려는 새싹이 바로 동학농민군이고 ‘민’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건이었다.”(81쪽)
이 해석은 이 논문의 출발점인 “동학에 대한 다나카 쇼조의 찬사가 어떻게 해서 가능했을까?”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대답이기도 하다. 즉 다나카 쇼조는 국가와 산업 중심의 ‘위로부터의 공공성’이 아닌 민중과 영성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공공성’을 지향하는 것이 ‘문명적’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의 구체적인 실천을 동학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후에도 다나카 쇼조는 또 한 번의 결정적인 사상적 전환을 경험하는데 이것을 선행연구에서는 ‘야나카학의 전환’(고마쓰 히로시) 또는 ‘가치관의 전환’(하나자키 코헤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공해와 홍수의 피해로부터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야나카 마을에 거주한지 3년째인 1907년의 일이었다.
정부의 강제철거로 인해 파괴된 가옥의 남은 재목으로 만든 판잣집에서 홍수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지내는 민중들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이다(28쪽). 그 충격을 다나카 쇼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들의 자각은 신에 가까울 정도의 정신으로, 나는 별 수 없이 지내는 꼴입니다.”(119쪽)
이때의 경험이 계기가 되어 다나카 쇼조는 민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는데 이것을 ‘야나카학’이라고 명명하였다. 오니시 박사는 이 때 다나카 쇼조의 민중에 대한 인식이 ‘교화의 대상’에서 ‘공공하는 주체’로 전환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즉 “공공하는 주체로서의 민중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후에 ‘사회공공’(1909)이나 ‘공공민인’(1908)의 용례가 보이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120-1쪽).
고마쓰 히로시에 의하면 다나카 쇼조가 사용한 ‘공공’의 용례의 반 수 이상이 생애의 마지막 5년에(1907년 이후) 집중되고 있고, 그 내용상에 있어서도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大西, 115쪽), 이 역시 사상의 전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자키 코헤이에 의하면, 이 시기에 다나카 쇼조는 강의 수량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대화를 하면서 ‘생명’의 눈으로 세계를 다시 보는 체험을 하고, 여기에서 사람과 자연을 모두 평등한 생명으로 보는 사상이 싹트게 된다(122-4쪽, 134쪽). 그렇다면 죽기 1년 전에 제시한 ‘생태문명론’은 이런 체험과 사상의 산물일 것이다. 말년에 이르러 동학의 생명사상과의 접점이 생긴 셈이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다나카 쇼조는 1894년과 1907년에 두 차례의 사상의 전환이 있었는데, 1894년의 청일전쟁은 ‘국가’와 ‘공공’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고, 1907년의 야나카마을 체험은 ‘민중’과 ‘생명’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1907년의 전환은 선행연구에서 이미 지적한 내용이었지만, 1894년의 전환은 이번에 오니시 박사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일본의 개벽사상가
이상으로 오니시 박사의 논문을 중심으로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오니시 박사의 논문의 핵심은 다나카 쇼조의 사상을 “사회적 공공”의 모색과 확립 과정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국가적 공공’과는 다른 “사회적 공공을 모색하기” 시작했고(2, 56, 81, 93, 112, 117쪽), 그로부터 10년 뒤인 1904년에 야나카마을에 이주하면서 “사회적 공공을 실천적으로 심화”시켰으며(117쪽), 마지막으로 1907년에 야나카마을에서 ‘공공하는 주체로서의 민중’, 즉 사회변혁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발견함으로서 “사회적 공공이 확립”되었다(120쪽)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오니시 박사의 논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었다. 아마도 선행연구를 충실히 섭렵한 상태에서 한일 양국의 비중있는 사상가를 다루고 있어서일 것이다. 가장 먼저든 생각은 다나카 쇼조의 일생에 동학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것이다.
나누시 시절에 농민을 대표하여 영주에 항의한 점은 전봉준의 봉기를 연상시키고, 젊은 시절에 서구근대문명을 수용한 점은 천도교를 창시한 손병희와 유사하다. 또한 말년에 생명에 눈을 뜨고 생태문명론을 제창한 점은 한살림의 창시자 장일순과 닮아 있다. 그런 점에서 다나카 쇼조를 일본의 ‘개벽사상가’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나카 쇼조가 젊은 시절에 신앙했다고 하는 후지도의 사상은 여러 면에서 동학과 유사하다. 가령 인간에게는 ‘천(天)’이라 불리는 ‘원래의 부모’가 있다는 사상은(66쪽) 최시형의 ‘천지부모’와 상통하고, 그런 점에서 신분의 귀천과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평등사상(67쪽) 역시 최시형의 “하늘만은 반상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사상과 흡사하며, 후지도의 원류인 후지코(富士講)의 창시자인 지키교 미로쿠(食行身祿. 1671~1733)가 1688년을 우주의 주재자가 교체되는 시기로 보았다는 점도(67-8쪽), 최제우의 ‘다시 개벽’적 역사관과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후지도와 그것을 이은 마루야마교(丸山敎)나 오모토교(大本敎) 등을 일본의 토착적 근대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일본의 경우에는 국가적 ‘공’이 너무나 강력하였기 때문에 이들 토착종교들이 동학과 같은 세력을 떨치기는 어려웠다는 차이가 있다.
한편 고마쓰 히로시의 《다나카 쇼조의 근대》 라는 책 제목은, 동학으로 말하면 ‘최제우의 근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양자에는 ‘개화파의 근대’나 ‘서구적 근대’와는 다른 ‘개벽파의 근대’또는 ‘토착적 근대’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 다만 동학과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오니시 박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다나카 쇼조에게서는 최제우의 ‘하늘’ 사상과 같이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일관된 토착 관념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137쪽).
최제우의 ‘하늘’ 관념은 고대로부터의 한국의 ‘천학(天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것의 원형은 고대 한반도의 제천행사에서 찾을 수 있고, 그 후로 퇴계나 다산과 같은 사상가들의 언설 속에 숨어 있다가, 최제우에게서 정식으로 ‘천도(天道)’라는 이름으로 ‘학문화’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다나카 쇼조가 162번이나 말한 ‘공공’은 동학이나 천도교로 말하며 ‘하늘’에 다름 아니다. 동학과 천도교는 토착언어인 ‘하늘’로 표현한 것이고, 다나카 쇼조는 ‘공공’이라는 중국사상의 개념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표현은 다르지만 담고자 하는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민중이 주체가 되어 생명 중심의 평등한 세상을 연다”고 하는 ‘개벽’의 이념이었다.
출처: 《개벽신문》 76호. 2018.07.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 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