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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82강
출애굽기 34:1-9
처음 것과 같은 돌판
34장은 시내산(모세) 언약을 갱신하는 내용이다. 1-4절에서 열 말씀의 돌판이 다시 만들어지고, 5-9절은 야훼의 이름을 선포하심으로 용서가 어떻게 베풀어지는지를 말씀하고, 10-28절에서 언약을 갱신하고, 29-35절은 모세의 광채나는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1절).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율법의 말씀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계시한다. 말씀을 행할 수 없는데 돌판이 그대로 공개된다면 죄인은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모세가 돌판을 깨뜨린 이유이다. 말씀을 행할 수 있는 인간도 없지만 말씀을 행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인간도 없다. 그러므로 언약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은 언약의 실체가 오셔야 한다는 것이다. 산 돌, 즉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깨어지는 죽음으로 생명이 주어진다는 언약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깨어진 처음 돌판과 같은 것으로 다시 만들라고 하신다. 이제는 돌판을 모세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언약이 깨어진 책임이 인간 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송아지 숭배로 드러난 인간의 죄악을 담고 있는 돌판이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 것, 처음 판”과 같은 것이다. 처음 것과 같다는 것은 말씀의 역할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영의 말씀으로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어졌다는 것은 분명히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강조한다(시 40: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왔을 때 이렇게 말씀하시고 보여주셨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5-9)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시니 양심의 가책을 느낀 자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고”라고 하였는데 ‘엑셀코마이’는 ‘떠나다, 나가다, 피하다, ~로부터 벗어나다’라는 뜻이다. 인간의 양심은 예수님을 떠나게 한다. 유대인들은 죄지은 자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라고 착각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께서 돌판에 두 번 쓰심으로 영의 말씀으로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땅에 글을 두 번 쓰심으로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실 것임을 나타내셨다. 유대인들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기에 떠났지만 “여자만 남았더라”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을 떠나지 않도록 남겨두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라는 말씀은 문자 그대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시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 즉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동참되어진 자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땅에 두 번 글을 쓰신 이유이다.
“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2-4절). 이스라엘 진 밖 회막에서 모세를 만나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시내산으로 부르신다. 시내산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회막을 다시 시내산에서 보여주신다는 뜻이다. 처음 언약하신 그 시내산 언약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세 언약은 새로운 의미로 다시 주어진다. 시내산 위에 있던 회막이 이스라엘 가운데 내려온 모세 언약이 된다. 이 말은 본래 하나님 편에서는 성막에 대한 계획이 없었는데 계획이 돌연 변경되어 성막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즉 이제까지의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성막이 이스라엘 속에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이 확립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3절)라는 말씀으로 아론조차도 시내산에 오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양과 소”(3절)라는 표현을 통해 육체뿐인 존재들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영의 말씀을 아무도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5절). “이름을 선포하실새”라는 표현은 야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이름을 가진 존재로 이 땅에 오실 것을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신 것으로 계시하신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1-23)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6절). 6-7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다(시 145:6-9, 민 14:18-24). “여호와라 여호와라”라는 표현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변치 않는 언약을 하시고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자비롭고”의 ‘라훔’은 ‘자비로운, 긍휼히 여기는, 동정심이 있는’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근원은 ‘레헴’(어머니의 태)으로 ‘어머니가 자기 태에 있는 자녀에 대한 부드러운 마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막 1:41)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여기서 “불쌍히 여기사”의 ‘스플랑크니조마이’는 히브리어 ‘라훔’의 역어로 쓰인 표현이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깨끗함”, 곧 죄에서의 정결함이다. “은혜롭고”의 ‘한눈’은 ‘하난’(호의를 베풀다, 자비롭다, 불쌍히 여기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은혜로운, 자비로운, 친절한’이라는 뜻이다. ‘한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비유로 이렇게 설명하셨다.
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27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한눈)(출 22:26-27)
겉옷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덮어주심의 은혜가 없다면 그 자체가 죽음이고 멸망의 상태이다.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진리가 충만한 상태이다(요 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상태가 된다. 이것을 생명이라고 한다(롬 5:15-17).
“노하기를 더디하고”의 ‘아프’는 문자적으로는 ‘콧구멍이 불타다’라는 말이다(출 4:14). ‘에레크 아파임’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콧구멍을 길게 늘이다’라는 말로 참을성이 많다는 뜻이다. “인자”(6, 7절)의 ‘헤세드’는 ‘은혜, 자비, 인자, 친절, 자애, 사랑’이라는 뜻인데 재밌는 것은 ‘하사드’(책망하다, 비난하다, 수치스럽게 하다, 부끄럽게 하다)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부끄럽게 함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음의 수치를 친히 감당하심으로 생명이 주어지는 은혜이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변함없는 사랑, 끊임없는 사랑으로 나타낸다(대상 16:24, 대하 7:3, 시 25:6, 100:5, 106:1, 107:1, 118:1-4, 136:1-26 등). 그러므로 영원하신 분 안에서만 인자하심, 은혜가 이루어진다.
“진실”의 ‘에메트’는 ‘진리, 신실, 성실, 확실함’이라는 뜻인데 ‘아만’(믿다, 충실하다, 신실하다, 확실하다)에서 유래하였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히브리어 ‘라브’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충만한’이라는 뜻이다. 즉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에메트)(시 119:142)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7절). “천대까지 베풀며”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천까지 베풀며’라는 말이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베풀며”의 ‘나차르’는 ‘지키다, 보호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이다. 하늘의 생명으로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은혜)이다. “악”의 ‘아온’ 혹은 ‘아본’은 ‘불법, 부정, 죄악, 죄의 벌’이라는 뜻이고, “과실”의 ‘페샤’는 ‘반역, 범죄, 죄’라는 뜻이며, “죄”의 ‘하타아’는 ‘죄, 속죄제’라는 뜻인데 기본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는 것이다. 세 가지로 표현한 것은 죄라는 모든 종류의 것을 다 용서하신다는 의미를 강조하신 것이다. “용서하리라”의 ‘나사’는 ‘들어 올리다, 가지고 가다’라는 뜻으로 모든 죄책을 하나님께서 들어 올려 가지고 가신다는 것이 용서하신다는 의미이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나사)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나사)(사 53:4-6)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라고 번역하였는데 “벌”이라는 말은 없다. “면제”로 번역한 ‘나카’는 ‘깨끗하게 하다, 비우다, 제거하다, 무죄로 하다’라는 뜻으로 즉 ‘깨끗하게 하지 아니하고’ 혹은 ‘제거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이다. “보응하리라”의 ‘파카드’는 ‘세다, 계수하다, 돌보다, 임명하다, 방문하다’라는 뜻이다. 악의 지속적 결과가 가족의 삼사로 찾아가 존속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악과 과실과 죄가 깨끗하게 제거되지 않으면 죄악이 가족의 집, 아들과 아들의 아들 위에 찾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죄의 영향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말씀한 것이다.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8-9절). “경매하며”(8절)의 ‘샤하’는 ‘(몸을) 구부리다, 절하다’라는 뜻이다. 언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된 것을 안다면 목이 뻣뻣한 자는 그 몸을 구부려 절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사하시고”(9절)는 ‘샬라흐’로 ‘보내다, 파송하다’라는 뜻이다. “기업으로 삼으소서”(9절)의 ‘나할’은 ‘소유로 얻다, 상속하다’라는 뜻이다. 즉 이스라엘이 성소가 되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의미이다(출 15:13-17).
결국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금방 마음이 변하여 같이 가겠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를 통해 드러난 이스라엘의 죄악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은 상태라는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 친히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세의 죽음을 담보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언약의 갱신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막이 우연히 이스라엘 가운데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하심, 긍휼 베푸심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것으로 완성되어 그 안에서 우리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성도의 마음 중심에 새겨진다는 것은 죄악을 보게 하시며 또한 은혜와 긍휼을 확인하게 하시는 것이다(202608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