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5166]退溪先生-次韻奉呈彦遇
次韻奉呈彦遇[차운봉정언우]
退溪 李滉[이황]
白首攻書恨未成。백수공서한미성
늦도록 글씨를 익혔어나 이루지 못함을 한하거늘
客來攜卷摠循名。객래휴권총순명
攜=끌 휴. 동자(同字)㩦 속자(俗字)㩗, 懏. 循=좇을 순.돌 순.
책권끼고 찾아드니 헛된 이름 따른것이
唯君筆力堪追古。유군필력감추고
堪=견딜 감. 이기다. 뛰어남. 하늘. 천도(天道).
오직 그대 필력은 옛것을 따를 수 있으니
莫惜加工振美聲。막석가공진미성
공부 아끼지 말라 아름다운 소리 떨치리라.
김부필金富弼언우(彦遇), 후조당(後彫堂), 문순(文純)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彫堂).
안동 예안 출신. 아버지는 대사헌 김연(金緣)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치당(曺致唐)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였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제자로서의 예를 올렸으며,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 …….”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평소 효제를 학문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일생 『심경(心經)』을 애독하였다고 한다.
1571년(선조 4) 스승 이황이 사망하자 소의(素衣)·소대(素帶)·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 1년을 행하였다.
아우 김부의(金富儀), 4촌형 김부인(金富仁), 4촌아우 김부신(金富信)·김부륜(金富倫),
고종 금응훈(琴應壎)·금읍협(琴應夾)과 한 동네에 살면서 학문을 토론하고
덕업을 권장하여 향리에서는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라 칭송되었다.
1570년 이황이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1574년에는 조목(趙穆)과 함께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하였다.
구봉령·권호문·조목 등 동문들과 두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행실로서 사림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1822년(순조 22)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文純)의 시호를 내렸다.
예안의 낙천사(洛川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후조당문집(後彫堂文集)』이 있다.
원문=退溪先生文集卷之五續內集 / 詩
近觀柳子厚,劉夢得以學書相贈答諸詩。
戲笑中猶有相勸勉之意。令白頭翁不禁操觚弄墨之興。
各取其末一絶。次韻奉呈彦遇。
筆追王法謾虛名。習氣還同不樂京。
歸寫道經非我事。臨池忘老作眞行。
王羲之雅好服食養性。不樂在京。故云。
白首攻書恨未成。客來攜卷摠循名。
唯君筆力堪追古。莫惜加工振美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