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진보이차 대표 천용탕 |
보이차 숙성창고는 사각형의 건물 안에 또 하나의 건물이 들어간 형태다. 금괴를 보관하는 은행의 육중한 이중철문처럼 생긴 보안문을 통과해야만 숙성창고로 통하는 복도로 들어설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습도에 민감한 보이차를 위해 저녁과 우천 시에는 이중으로 된 창문과 창고 문을 절대로 열지 않는다.
“비 때문에 창고 문을 열 수 없다”는 공장장에게 ‘쌍진보이’의 천용탕(陳永堂) 사장이 유선으로 직접 양해를 구했다. 복도에서 이중창 너머로만 보이차 숙성고를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사진 촬영은 금지됐다. 올해도 작년처럼 창고 안에 못 들어가나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군기지를 방불케 하는 육중한 철문은 자동으로 열렸다. 정문 경비실에서 나온 베레모를 쓴 두 명의 경비원이 거수 경례로 맞이했다. 차로 한참을 들어가서야 본관 건물 앞에 내릴 수 있었다. 현관에서 천용탕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비는 잦아들었지만 비가 그쳤다고 습기까지 바로 사라지지는 않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보이차는 한날한시 한곳에서 똑같이 만들어졌어도 보관 장소와 방법에 따라 맛이 천양지차다. 가격 또한 편차가 크다. 최고의 보이차란 좋은 찻잎을 이용해 숙련된 기술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을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다. 오래 묵힐수록 맛이 뛰어나다는 뜻의 월진월향(越陳越香)이 보이차의 핵심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보관한 ‘시간의 양(量)’에만 관심을 둔다. 어떠한 환경에서 보관돼 제대로 숙성됐는지를 뜻하는 ‘시간의 질(質)’에는 무심하다.
‘쌍진보이’의 천용탕 사장은 시간의 양보다 시간의 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이에 대한 연구와 개척을 해왔다. 보이차를 단순 보관하는 창고가 아닌 제대로 숙성시키는 개념을 도입해 보이차 보관 혁명을 일으켰다.
1992년 당시만 해도 차업과 무관했던 천용탕 사장은 보이차를 친구로부터 받았다. 그는 보이차 맛에 매료됐다. 포장지를 들고 홍콩으로 향했다. 천 사장은 “그 맛을 잊지 못해 똑같은 포장지와 내용물을 찾아 여러 상점을 다녔지만 똑같은 맛을 내는 보이차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답답함에 보이차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전문지식을 익혔다. 이후 그는 “같은 보이차라도 보관 방법에 따라 맛의 변화가 천양지차”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보이차 보관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가 만난 차상(茶商)들은 “보이차는 오래 묵힐수록 좋다”고 선전하며 팔면서도 보이차 보관 방식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시 보이차 보관 방식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는 비를 맞지 않는 곳에 보이차를 그냥 쌓아두는 일반 창고 보관 개념이다. 둘째는 세월을 뛰어넘기 위해 고온다습한 창고에 보이차를 넣어 단기간에 외형을 산화시켜 오래된 노차(老茶)처럼 속여 파는 소위 ‘작업용 창고’ 보관이다. 천용탕은 “오래된 보이차를 꺼내보면 한 통 안에 있는 7편(片) 가운데 2편 정도만 가장 좋은 상태의 맛을 내 상품가치가 있었다”며 “보이차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해 낭비되는 게 안타까웠다”고 했다.
천용탕 사장은 보이차의 가장 적합한 숙성과 저장 방식을 찾기 위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2년 동안 보이차 저장 상태 분별 실험을 진행했다. 수백 차례의 시행착오와 각고의 노력 끝에 그는 보이차 숙성의 저장방법을 찾아냈다. 잡미(雜味)가 없이 향기가 깔끔하고 탕색도 농후하며, 구감(口感·입맛)이 좋은 중량감 있는 보이차였다.
1992년 당시만 해도 동관은 중국 개혁개방의 최일선에 서 있었다. 중국 전역에서 몰려든 젊은 노동력을 이용해 무엇을 만들든지 모두 팔려나가던 황금시절이었다. 이웃들은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돈 쓸 생각만 하는 천 사장을 비웃었다. 상인들은 그를 정신나간 사람 취급했다. 일부러 습(濕)을 먹여 오래된 차로 보이게 하는 방법은 익숙했지만, 보이차를 과학적으로 건강하게 건창(乾倉)으로 숙성시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는 “최근까지도 상당수의 상인들은 선진 보관 방식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며 “안다고 해도 비용을 쉽게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천 사장은 주변의 우려를 무시하고 1995년 자신의 첫 번째 보이차 숙성차창인 ‘쌍진보이’를 창업했다. 윈난(雲南)의 고수차(古樹茶)와 좋은 원료를 찾는 업무를 전담하는 ‘윈난팀’과 보이차를 저장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동관팀’으로 조직을 이원화했다. 10여년의 준비를 거쳐 2006년부터 차 판매를 시작한 ‘쌍진보이’는 보이차 저장기술을 발전시켜 6개의 생태 차창을 건설했다. 2007년 보이차 시장이 폭락했을 때도 커다란 충격 없이 발전을 거듭했다. 저장창고는 초기 290㎡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총면적만 10만㎡를 넘어섰다. 창업 당시의 350배에 달하는 면적의 숙성고를 운영 중이다. 천용탕 사장은 “시류에 따라 부화뇌동하고 싶지 않았다”며 “큰돈을 벌 수 있는 생산업 대신에 수익 없이 장기투자만 요구하는 보이차 숙성·저장 연구에 뛰어든 나를 응원해준 아내가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보이차는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에 따르면, 차나무에서 자라는 엽편(葉片)은 생명체다. 일단 모체에서 떨어지면 생명을 잃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생명 상태의 전환이지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며 “보이차의 숙성·저장 과정은 살아있는 차의 진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향후 보이차 시장 전망에 대해서는 “지금은 비교적 이성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면서도 “지난해부터 대형 차창의 가격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고수차를 중심으로 수요와 공급을 무시한 투기조짐이 확산되는 건 불안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불안한 시장 전망처럼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음날 ‘쌍진보이’를 다시 찾았다. 광저우와 동관을 잇는 고속도로에서 내려 동관시로 들어서자 대로(大路)의 이름이 ‘쌍진로(雙陳路)’임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쌍진보이’의 위상을 설명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화창한 날씨다. 창고 안 사진을 건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1956년 부산 태생. 유현목·이두용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운 뒤 1984년 영화감독으로 데뷔.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조예가 깊음. |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힘찬 한 주 되세요~~!
알맹이를 알면 껍질이나 형식에는 연연해하지않죠. 유익하고 흥미있는글 감사하며 잘읽고있습니다.이십여년 입으로만 마셔알던 보이차를 님께선 몸으로 부딪히며 느끼시는것같아 존경심과 아울러 수고에 진심어린박수와 성원을 보냅니다.주옥같은다음글을 기대하며..._()_
격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신바람나는 한 주 되세요~~!!
살아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차생활 되세요~~!!
보이차를 마시면서 "세월 흐름 & 모료 좋음"이면 좋은 보이차로 숙성이 되는 줄 알았기에 지난 몇 년을 아파트 서재에서 동고동락했는데 제가 간과한게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국내 출판된 보이차 책 or 카페 주워 들은 애기"를 통해 삶의 한 공간에 그냥 두고 있으면 되는줄 알았는데...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쪼매라도 참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