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誡命 / 律法 / 福音 스크랩 ?율법의 마침 (The End Of The Law) [복음, 죄사함, 거듭남에 관하여...] / 챨스 하돈 스펄젼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9 14.07.22 2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율법의 마침 (The End Of The Law)
[복음, 죄사함, 거듭남에 관하여...]  

챨스 하돈 스펄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당신은 지난 안식일 아침 '인자의 아들의 날들'에관한 말씀을 기억할 것이다. 모든 안식일은 이제 매우 영적인 의미의 날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로 사람들의 모임이 인도될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매우 즐거워하고, 예수님을 위해 일하며, 더욱더 절실한 기도들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대부분을 생각함으로써 각각의 주일이 주님의 하루로 만들도록 노력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많은 안식일들을 함께 하지 못할 수 있으며, 죽음이 우리를 곧 갈라놓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크리스쳔 모임으로 만날 수 있다면, 예수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것임을 결코 잊지말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항상 빛과 삶과 사랑 안에서 주님께서 현존하심을 보이시도록 주님께 간구하자! 나는 점점 모든 설교시간이 영혼 구원의 시간이 될 정도로 정직해지고 있다. 나는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롬10:1)고 말한 바울과 깊히 공감한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설교를 해왔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너무 적다; 만일 그분에대한 믿음이 없다면, 율법도 복음도 그것의 목적을 얻지 않은 것이며, 우리의 노력도 전적으로 헛된 것이었다.

여러분중 어떤 이는 들어왔고, 들었고, 그리고 또 들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만일 복음이 당신의 청각에 도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서 유죄는 아니다. "그들이 듣지못하느뇨" 사도가 말한다. "아니요, 듣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복음을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 바로 이순간까지 마음의 귀로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영혼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동역자들이여, 항상 그럴 것인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럴 것인가? 외부적으로는 방법들을 수용하지만 내부적인 은혜는 거절하는 이러한 것의 끝이 곧 오지 않겠는가? 현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영혼은 곧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지 않을 것인가? 깨어라! 깨어라, 오 이 천국의 날이여, 이 무지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들이 그들에 대해서 깨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오지않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정직하지 않거나, 신중하지 않거나, 구원받으려는 열망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에대해서 질투한다" 그들이 영생을 얻기를 갈망하도록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권고를 통해 그들을 이끌었으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10:3) 마가는 "그들 자신을 복종시켰다." 그것을 위해 복종이 필요하다. 자만한 자는 그 자신을 구원하기를 원하고, 그는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는 불행한 실패들로 인해 자신이 무기력함을 발견할 때까지,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로 인한 구원은, 극도의 궁핍상태에서 간청되고, 자격없는 혜택처럼, 값없고 분에 넘치는 은혜가 요구되어질 때까지, 육적인 사고가 그것을 도울 수 있는 동안은 이르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들중 어떤 이들이 그것을 도울 수 없게 하시기를 주님께 간청한다. 그리고 오, 나는 그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 아침에 내가 예수님을 율법의 마침으로써 설명하고자 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몇몇 영혼들에게 축복을 주셔서,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깨닫게 되고, 그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일보다 더 큰 위대한 일임을 인식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 끝내신 일을 알고, 그들 자신들이 지금까지 노력해온 것들에 지치게 되기를 바라며, 이 날에 심지어는 그것들이 잘 시작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완성으로 그들을 매혹시킨다면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다. 번연이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입들에 그 후에 살수기를 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성한 식욕이 시작되면, 그 주연이 흥겨운 것이 되기 전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벗은 영혼들에게 아무 값없이 하사한, 정금의 의상을 볼 때, 현재 그들이 그토록 친밀하게 끌어안고 있는 자신들의 불결한 누더기들을 던져버릴 것이다.

나는 이 아침에 두가지에 관하여 말씀드리고자 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나를 도우시기를 원한다: 첫째는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로서 - 그분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우리자신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로서 -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10:4)

율법 앞에 두려워하는 인생

첫째,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 율법에대해서 죄인들로서의, 우리는 모든 항목들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그리고 죄의 권능은 율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향해서 율법은 게걸스런 욕망을 화살처럼 쏘아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그리고 비장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저주받은 자들과 함께 하는 곳으로 임명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0) 그러나, 이상한 열중이다! 모기를 그 날개들을 태울 촛대로 유혹하는 미혹처럼, 인간들은 본성으로 구원을 위한 율법으로 날아가지만, 그것으로부터 피할 수는 없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어 죄인에게 정죄를 선고하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인간들을 그것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는데, 비록 얼마나 다정하게 예수님께서 그들과 율법 사이에 서계심을 그들에게 보인다해도 말이다. 그곳에 그들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까지, 그들은 그것을 붙들려는 합법적인 희망에 그토록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갈보리보다 시내산을 더 선호한다, 비록 시내산이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한 트럼펫 경고와 번개 외에는 그들을 위해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말이다. 오, 내가 예수님을 내 주로 설명할동안, 당신이 신중하게 청종한다면, 당신은 그분 안에서 율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주님께서 율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분은 그것의 모든 것인데, 왜냐하면 그분은 고귀한 목적 즉 의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의 마침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율법의 마침"이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그것이 세 가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예수님은 율법의 목표이자 목적이시다; 둘째, 그분은 그것의 성취이시다; 그리고 셋째 그분은 그것의 종결이시다.

먼저, 우리의 주 예수님은 율법의 목적이자 목표이시다. 그것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하도록 주어졌다.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혹은 예수님 학교로 인도하는 우리의 보좌관이다. 율법은 물고기가 들어있는 커다란 그물이며, 그들은 죄의 요소들로부터 밖으로 건져올려 질 수 있다. 율법은 폭풍이며 영혼들을 항구나 혹은 피난처로 데려간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들의 죄에대하여 감옥에 수감시키는 보안원들이며, 그들이 석방을 위해 오직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만을 바라도록, 그들 모두를 정죄 아래 둔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이다: 그것은 은혜가 채울 수 있도록 비워주고, 은총이 치유할 수 있도록 상처낸다. 율법이 우리들에게 있는 구원의 방법으로서 간주되어지는 것은 결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구원의 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대로 남아있을 것이며, 율법은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을 그에게 보이는 그에게 가장 유용한 것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면서 그는 살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을 행하는 그는 그 안에서 살리라".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주님은 그에게 행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것이 죄있는 피조물에게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율법은 이미 깨어졌다; 그리고 인간이 무엇을 하든, 그는 결코 그 고장을 수리할 수 없으며, 그는 이미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공로의 희망에관해서는 뜰 밖에 있다. 율법은 완전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그것에 부족하게 타락해버렸다; 그리고 그래서 그로하여금 최선을 다하게 한다. 그는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을 성취할 수 없다. 율법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함을 보여주며, 죄인들을 예수님에대한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양떼를 목자에게로 몰고가는 검은 개이며, 여행자를 힘겨운 땅에서 커다란 반석의 그늘로 데려가는 타는 열기이다.

율법이 어떻게 이렇게 수용되는지를 살펴보라; 왜냐하면 첫째, 그것은 사람에게 그의 죄를 보여준다. 십계명을 읽어보라 그러면 당신이 그것들을 읽을 때 전율할 것이다. 자신이 기준에 훨씬 못미치게 타락했음을 즉시 자각하지 않고, 신성한 지침의 두가지 서판과 나란히 자신의 인격을 둘 수 있는 자가 누구겠는가? 율법이 영혼의 집으로 들어올 때, 그것은 감지할 수 없는 먼지와 티끌을 밝혀주는 어둔방의 불빛같은 것이다. 그것은 영혼에 죄라는 독의 존재유무를 조사해주는 테스트이다. "나는 율법없이 살았다" 사도는 말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율법이 그것을 드러내면 우리의 고상함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계명들을 보라,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얼마나 영적인지,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를 기억해라. 그것들은 단순히 외적인 행동만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동기를 튐으며 영혼, 마음, 정신을 다룬다. 규례들에는 표면에 드러난 것보다 더욱 깊은 의미가 들어있다. 그것들의 깊이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거룩함을 요구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여러분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이 얼마나 그것을 이행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있는지, 그리고 여러분은 죄가 아주 적거나 혹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그곳에 얼마나 풍성한 죄가 있는지 자각할 수 있다. 여러분은 자신이 선에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부요하고 점점 확장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깨어진 율법이 당신을 방문할 때, 당신의 영적 파산과 전적인 빈곤이 당신과 대면하게된다. 진정한 균형은 부족한 무게를 드러내고, 그렇게 율법의 첫 번째 영향력은 인간의 양심에서 나타나게 된다.

율법은 또한 죄의 결과와 해악을 보여준다. 구약 모세의 섭리의 형태를 보라 그러면 그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불결한 조건들과 그들의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런 세제의 필요성을 알게함으로써 인간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게끔 의도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형태는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적했다. 만일 인간들이 병 혹은 불결함으로 분리되어졌다면, 그들은 죄가 어떻게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분의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켰는지를 깨닫을 수 있게 되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진홍색 양털과 우슬초와 기타 다른 것들에 있는 신비한 의식으로 깨끗해졌을 때, 그들은 자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에의해서만 회복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리의 새가 죽임을 당했을 때, 나병환자가 깨끗해졌으며, 한 생명의 희생에의한 깨끗해짐의 필요성이 설명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과 밤에 한 어린양이 매일의 용서의 필요성을 알려주며 죽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면 말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너무나도 피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함으로해서 과실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피는 모든 것이였고, 그리고 기록되었을 뿐만아니라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가?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18-22)

그 피는 휘장 위에, 제단 위에, 걸치는 천 위에, 그리고 성막의 바닥 위에 있었다: 누구도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동일한 성격의 내 사역을 하고자 결심하며, 더많이 그것에 속죄의 피를 뿌릴 것이다. 이제 구약의 많은 피는 죄가 그토록 우리를 오염시켜서 하나님의 속죄없이는 근접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자 의도된 것이였다: 우리는 반드시 희생의 방법에 따라 가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너무나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우리 위에 덮힌 예수님의 피와 함께 우리를 보시지 않으신다면, 그분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실 수가 없다. 구약 율법은, 그것의 상징과 외형에서, 인간들 자신들에 관한 것과 오실 구세주에 관하여 많은 진리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의도된 것이였다. 만일 누군가 예수님께 못 미쳐서 멈춘다면, 그들은 율법의 의도와 목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인도하였고, 율법은 예수님에게서 끝났다.

율법앞에 힘없는 죄인

다시 율법의 의식적인 면보다 윤리적인 면으로 돌아가보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전적으로 무기력함을 가르치려고 의도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바람직한 자신들의 모습에서 얼마나 부족하게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며, 또한 그들이 그것을 신중하게 살펴볼 때, 그들이 그 규범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철저히 불가능한 지를 그들에게 알려준다. 율법이 요구하는 그 거룩함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다. "계명은 몹시 폭넓은 것이다" 만일 인간이 그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가 율법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시내산의 흔들리는 측면을 기어올라 천국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자처한다면, 분명히 그는 결코 불타는 산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라! 아, 형제들이여, 우리가 그것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그것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문자들을 성취할 수 있는 척 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의 정신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만은 정욕 또는 살인만큼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14-4)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욥15:14) 아니다, 영혼들이여,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이점에 있어서 도울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완전함으로만 여러분은 율법에 의해서 살 수 있고, 그 완전함은 불가능하며, 여러분은 행위의 약속에서는 어떠한 도움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은혜 안에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빚과 관련해서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노 밖에는 아무것도 공이 없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우리가 더 빨리 그것을 알수록, 더 좋은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더 빨리 예수님께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또한 우리에게 우리의 가장 시급한 것- 죄사함, 물과 피로 죄 씻음의 필요성을 알려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불결함을 알려주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그것으로부터 씻김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한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우리를 깨끗케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그리고 우리를 가장 거룩하신 분의 임재 앞에 있는 휘장 안에 서기에 적합하게 만드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으로써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율법 그 자체는 오직 먼지만 불러 일으키지만, 그러나 복음은 그 먼지 위에 깨끗한 물을 뿌려주고, 모든 것은 영혼의 방에서 정돈된다. 율법은 죽이고, 복음은 살리신다; 율법은 벗기고,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셔서 영혼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혀주신다. 모든 명령들과 모든 형태들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들의 명확한 의도만 주의한다면 말이다. 그들은 우리를 자아에서 떼어놓으며, 그것들은 우리를 자칭-의로움의 거짓 기초들로부터 떼어놓으며,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의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시며, 그 안에서 그분은 그것의 지대한 목적이시다.

이제, 두 번째로, 그분은 율법의 성취이시다. 우리중 누구도 의로움없이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서는 불변의 법칙으로서 모든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의로움을 요구하신다. 이제, 율법이 요구하는 그러나 율법이 결코 줄 수 없는 의로움을 우리에게 주시기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 우리 앞에 있는 장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되는 의로움" 또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도 불리는 것에 관하여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자들에 관하여 읽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의로움에 관하여 믿음에따라 그들이 의롭기 때문이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신 행하지는 못하는 의로움을 그분께서 주신다. 율법 자체만큼 넓고 깊고 길고 그리고 높음에 틀림없는 그 의로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명령은 과도하게 넓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의로움은 명령만큼 넓고, 그것의 마침이 되신다. 예수님은 율법을 보다 부드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며, 혹은 율법이 우리의 비뚫어지고 망가진 복종과 일종의 타협으로써 받아들이도록 하시려는 것도 아니다. 마치 율법이 근본적으로 너무 많이 요구했던 것처럼, 그것의 규정들을 더 낮추도록 명령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그것은 조금도 변경되어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의 주님은 율법이 원하는 모든 것-부분이 아니라-을 율법에게 주신다 왜냐하면 그렇지않다면 율법이 최초보다 덜한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한 점, 한 흠, 실패 혹은 결점없이 완전한 복종을 주장하며, 예수님께서 그와같은 의로움을 가져오셨다, 그리고 그것을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신다.

율법은 의로움이 의무의 예외가 없어야하고, 범죄함이 없어야한다고 요구하고, 에수님께서 가져오신 의로움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에게 점이나 혹은 주름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들이 없다고 간주하실 만큼 그러한 것이다. 율법은 정신적인 복종 없이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단순히 외적인 복종은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의 순종은 그것이 넓은 만큼 깊은데, 왜냐하면 그분을 보내신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그분의 열정이 그분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분 스스로 말씀하신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그러한 의로움을 그분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셨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예수님 안에는 완전하고 충만한 의가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련해주신 정당한 하얀 세마포의 값비싼 옷을 기쁘게 입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무서움에 떨지 않고 천국의 지극하신 분 앞에서 그것을 입고 설 수 있다. 이것은 숙고해야할 문제이다, 벗들이여. 오직 의로운 자로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하셨고, 따라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 그분은 그분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시며,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여겨진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의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바울의 입을 통해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 천사들, 그리고 마귀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선택의 대가로 무언가를 놓으라고 도전하셨다. 오 율법이여, 네가 나에게 완전한 의로움을 요구할 때, 나는 믿는 자로써, 그것을 네게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이 나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의는 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믿음으로 그분과 하나이며, 따라서 그분이 불리 우시는 그 이름-"우리의 의로움 되시는 주님"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율법의 근본적인 요구들을 성취시키셨으나, 여러분, 형제들이여, 우리가 율법을 깨뜨린 이후, 거기에는 다른 요구들이 있음을 안다.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

과거의 죄들을 용서받기 위해서는 현재와 미래의 순종보다 이제 무언가가 더 요구된다. 우리에 대한, 우리의 죄들 때문에, 그 저주는 공표되어 왔고, 그 형벌이 초래되어 왔다. "무엇으로도 그 죄를 깨끗이 할 수 없다"고 씌여있지만, 모든 죄와 불법은 그것의 정당한 처벌과 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그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함께 그 처벌에 있어서도 마침이 되었다는 점을 숙고해보자. 그 저주와 처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서운 것들이지만, 예수님께서 모든 그들의 불행을 끝내셨고, 따라서 우리를 모든 죄의 결과들로부터 면제시키셨다. 모든 믿는 자들과 관련하여, 율법은 어떠한 처벌도 요구하지 않고, 어떠한 저주도 내리지않는다. 믿는 자는 갈보리의 나무 위의 위대한 속죄물을 지적하며 말할 수 있다, "그곳을 보라, 오 율법이여,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신성한 의로움의 증거물이 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심장의 피를 그분의 상처들로부터 쏟으시고, 나를 위해서 돌아가심이 너의 요구들에 대한 나의 대답이며, 내가 그분으로 인해 진노에서 옮겨졌음을 나는 알고 있다." 율법의 요구들은 깨진 것이든 깨지지 않은 것이든 예수님께서 충족시키셨다: 명문화된 것이든 형벌적인 것이든 그분 안에서 만족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의 대가이시고, 그리고 보라, 인간의 모습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루셨다. 그분은 허물을 마치시며, 죄를 끝내시고, 죄악을 영속시키시며, 영원한 의를 드러내셨다. 모든 영광이 그분의 이름에 있다(단9:24, 히10:15-18).

더구나, 그 죄값만 지불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율법에 대한 위대하고 특별한 영광을 가지셨다. 나는 감히 말하건대, 만일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들중 누구도 그것들을 범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늘날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그것에 경의를 표하셨을 때, 그토록 빛나는 영광의 자리에 서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그분 자신이, 육신을 입으시고, 그분의 삶에서, 그리고 보다 그분의 죽음에서, 율법의 최고권을 보이셨다; 그분은 사랑도, 그리고 주권도 의로움과 나란히 할 수 없음을 보이셨다. 누가 감히 율법을 주신 분 자신이 복종하시는 그 율법에 대항하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누가 이제 그것을 만드셨던 그분이 스스로를 그 처벌에 복종시키셨을 때 너무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분은 인간으로서 열정으로 발견되시고, 우리의 대변자이시며, 주님은 그분의 유일하신 아들로부터 율법에대한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셨고, 그 아들은 자발적으로 그분 자신을 한 마디 말씀도 없이 그분의 사역에대한 어떤 변명도 취함없이 자신을 그것에 복종시키셨다. "예, 당신의 법은 나의 기쁨입니다"(히10:10)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에 경배를 표하심으로써 완전하게 그것을 증명하셨다. 임마누엘께서도 섬기신 경이로운 율법이여?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그 멍에를 지는 것을 하챦게 여기지 않으셨던 위대한 율법이여, 그러나 그분의 선택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고자 결심하시고 그 율법 아래오셨고, 그 아래 사셨으며 그 아래 죽으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율법의 견고함은 또한 예수님에 의해서 지켜졌다. 그 자체만이 그것이 의로움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예수님께서 그것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영화롭게 하심으로써 율법이 그러함을 증명하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예수님께서 또 다른 의미에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지만, 의와 불의의 영원한 원칙들을 세움에 있어서,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이 이것을 영원히 성취시키셨음을 여러분에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율법을 세웠다." 바울은 말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3:31) 그 복음에의해서 율법이 거룩하고 의로운 것임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믿음은 율법을 변경시키거나, 혹은 그것을 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떻게 그것이 최대한 성취되었는가를 가르쳐준다. 이제 율법은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인데, 왜냐하면 심지어 택함받은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실 때도 하나님은 그것을 변경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한 민족을 택하셨고, 사랑하셨고, 생명을 정하셨지만, 그분은 그들을 의로움의 한 원칙을 희생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죄인이였으며, 율법이 정지되었거나, 변경되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의로워질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율법이 변했는가? 만일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그렇게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셔서 우리에게 율법이 바위처럼 견고하게 서있음을 보이셨고,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은 한없는 은혜로만 적법하게 구원얻을 수 있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궤도에서 빛나고 있는 은혜와 의로움을 볼 수 있으며, 그들중 어떤 것도 다른 하나를 조금도 가리고 있지 않다. 율법은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모든 것을 가졌으며, 모든 자비의 아버지께서, 그분이 정해놓으신대로,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얻어야 함을 그분의 선택된 자들에게 보이셨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맨 마지막 부분까지 성취하셨음을 여러분에게 보이고자 노력해왔다. 성령께서 이 가르침을 축복하시기를.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이제, 세 번째로, 예수님이 율법의 종결이라는 의미에서 그분은 율법의 마침이시다. 그분은 두가지 의미에서 그것을 종결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사람들은 생명의 언약으로서, 그 아래 있지 않다.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조상 아담과 함께 세워진 구약은 "이것을 하라 그러면 살리라"였다: 그가 그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그는 살 수 없었고, 우리도 그 안에서 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죽었기 때문이다. 구약은 깨어졌고, 따라서 우리는 정죄되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 안에서 죽음을 겪었기에, 우리는 더 이상 그 아래 있지 아니하고, 그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다. 형제들이여, 이 순간, 비록 우리가 선행을 함으로 기뻐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통하여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를 희망하지 않으며, 또한 심지어 우리 자신의 어떠한 장점으로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 자신들을 지킬 수 없다. 선택되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과 영원한 의지에 따른 것이다; 부름받는 것은,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이며, 우리는 이 은혜 안에 계속하기를 바라며, 더 이상 구약의 노예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갈5: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에의해서 주어지고 적용되는 속죄에 대해서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녀이며, 구원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얻었고, 우리가 구원얻었기에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것도, 심지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도 우리에게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와 기초는 아닌데, 왜냐하면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를 사랑하셨고, 비록 우리가 그만한 가치가 없는 자임에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여전히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시며, 그리고 우리 자신들로서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 안에서 씻김받고 그분의 의로움으로 덮여진 우리를 보시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가혹한 정죄의 언약의 종속에서 끌어내시고, 자녀로 선택되는 것을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셨다. 따라서 이제 여러분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

다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종결자이신데,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그것의 저주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은 믿는 자들을 저주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를 축복하고, 그렇다, 그리고 그는 축복받은 자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의로움을 요구하고 예수님 안에서 믿는 자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로움을 주셨음을 보고, 율법은 그에게 축복을 선언할 수 밖에 없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4:7-8) 예수님에의해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속량된 자들의 기쁨이여,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셨다" 기록된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3:13) 형제들이여 구원의 이 달콤한 신비함을 이해하는가? 여러분은 당신이 그분의 자리에 설 그 당신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서계심을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은 송사당하시고, 예수님은 정죄당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은 죽으시도록 내주심 당하셨으며, 예수님은 하나님을 죽기까지 복종하셨고, 따라서 당신은 깨끗해졌고, 의로워졌으며, 저주로부터 건져졌다. 왜냐하면 저주는 당신의 구세주에게 그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것인 의로움이 이제 당신에게 전이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축복을 누리도록 허락되었다. 당신은 끝없는 주님의 세계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여러분이여 이 안에서 영원히 승리하고 기쁨을 누리자. 우리가 왜 그럴 수 없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중 몇몇이 그들의 감정에 따라서 율법 아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3:18)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받지 않고 죄를 자각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죄인의 구세주 곁에 살기를 원한다. 만일 주님 앞에서 내 자리가 내 스스로의 내 모습에만 의존하고, 내가 행할 선한 행위들과 의로움에만 의존한다면, 확실하게 나는 하루에도 수천번씩 내 자신을 정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나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왔고 그래서 의로움은 내 것이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평화이고, 쉼이고, 기쁨이고 그리고 천국의 시작이다! 누군가가 이 경험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셨다면, 그는 죄 안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그는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고자 노력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우리는 값으로 사신 바 되었고, 우리는 따라서 주님의 것인 우리 몸과 우리 영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한다. 이상이 율법과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예수님안에서 완전한 의로움

이제, 두 번째로,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이다 -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마침"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요점이 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를 살펴보자. 형제, 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믿는가?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없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가?"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일련의 교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그런 교리들이 당신의 것이라고 말하고, 그때 그 자리에서 선반에 올려놓은 후 잊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믿는다는 것은, 신뢰하고, 맡기고, 의지하고, 의뢰하고, 그 안에서 쉬는 것이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것을 믿는가? 당신은 그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의인이 고통받은 것을 믿는가? 예수님께서 그분으로 인해 하나님께 오도록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음을 믿는가? 그리고 여러분들은 자신들의 영혼 구원의 모든 무게와 강세를 그분에게, 그렇다, 오직 그분 홀로에게만 두었는가? 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의로움을 위한 율법의 마침이시며, 여러분은 의롭다. 만일 여러분이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마침이 되었다. 만일 당신이 믿고있지 않다면, 어떤 것이 제시되어도 아무 쓸모가 없는데 왜냐하면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결핍된 것이다: 성례식, 기도들, 성경 봉독, 복음 듣는 것, 당신은 그 모든 것들을 별만큼, 산만큼 높이, 높은 올림포스 산만큼 거대하게 쌓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단순한 가라지에 불과하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말이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이 문제를 당신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당신은 의로움을 위해서 스스로에게서 예수님께로 시선을 돌려본 적이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랬다면, 그분은 당신에게 있어서 율법의 마침이시다.

이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고 기록되었으므로, 이전 장에 대해서는 아무런 질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 그가 믿기 전에 이 사람은 박해자요 불경한 자였으며, 그는 격동하고 성도들에 반대해서 외쳤으며 그리고 그들을 감옥으로 집어넣었고, 그들의 피를 구했다. 그렇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리고 성령에의해 다음을 기록한 바로 그 사람도 그랬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따라서 만일 내가 오늘 아침 여기 있는 누군가를 향하여 그의 삶이 매일의 죄로 더럽혀졌다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죄들로 얼룩져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나는 그에게 말한다, 기억하라 "모든 죄된 태도들과 불경의 태도들은 사람들에게서 용서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신들의 불법들은 도말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죄인들의 복음: 죄 없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그것을 자백하는 자들을 위한 축복의 좋은 소식인 영광의 복음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없는 자들을 상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따라서 그는 잃어버려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와서 그분을 믿고, 따라서 그분이 죄들 위에 의로움을 줄 수 있음을 알게될 것이다. 그분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즉 가난한 창기가 믿는다면, 여러해 동안 주정뱅이였던 자가 믿는다면, 도둑, 거짓말쟁이, 강탈자가 믿는다면, 이전에 죄 안에서 반항하였던 자가 이제 그것으로부터 돌이켜서 그분을 믿는다면, 그들에게 의로움을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그러나 이와같은 그런 경우들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성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경이로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있어서 의로움을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 지 알고 있으며, 또한 나는 그분이 내가 그날까지 그분에게 맡긴 것을 지키실 것임을 확신한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믿는 자는 의인들임

이 장에서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것은 믿음의 능력에 관한 자질과 관련하여 기록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의 믿음이 크든, 적든, 의로움을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예수님께서 선두와 함께 후미도 보호하신다. 의롭다하심에 있어서 한 신앙인과 또 다른 신앙인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당신과 예수님 사이에 관계가 있는한, 하나님의 의로움은 당신의 것이다. 그 연결고리는 마치 하나의 필름, 떨리는 믿음의 거미줄과 흡사하지만, 그러나 만일 그 마음에서 예수님에게까지 전체적으로 연결되어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가장 가느다란 실을 따라 흐를 수 있으며 또 흐를 것이다. 그토록 가는 선이 전기섬광을 나를 수 있음은 경이적인 것이다. 우리는 바다 건너까지 메시지를 전송하는 케이블을 원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선의 보호를 위한 것이고, 실제로 메시지를 나르는 그 선은 가느다란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믿음이 겨자씨와 같은 것이라면, 만일 그것이 오직 구세주의 옷 가장자리를 살짝 만질 정도로 작은 것이라면, 만일 당신이 오직 "주님, 나는 믿습니다, 저의 불신앙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만일 그것이 흔들리는 베드로 또는 울고있는 마리아의 믿음이라도,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그분은 사도들에게 뿐만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의로움을 위한 율법의 마침이 되실 것이다.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사랑하는 벗들이여, 믿는 우리 모두는 의롭다.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율법의 행위를 쫓는 자들이 알지 못하는 의로움을 얻었다. 우리가 완전하게 죄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하셨다; 우리는 죄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회원들 안에서 죄를 끊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우리는 진실로 의로우며,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되었음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 자격이 있는 것이다. 죄의 자각으로 짐진 자들아 와서, 보라. 당신 스스로를 억압하고, 당신의 죄들로 슬퍼하면서, 당신의 구세주를 의심하지 말라, 그분의 의로움을 의심하지 말라. 당신은 검지만, 그곳에서 멈추지 말고, 신랑이 했던 대로, 계속해서 말하라, "나는 검다 그러나 어여쁘다."

"비록 우리 자신들로는 추하고,
코끼리 가죽 텐트처럼 검지만,
우리가 당신의 아름다움을 입었을 때,
솔로몬의 궁전처럼 아름답습니다."

완성된 구원

이제, 본문과 연결해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았고 의롭다는 확신이 뚜렷해졌다; 왜냐하면, 여기 기록되어있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의롭게된 그는 구원을 얻지만, 무엇이 의롭다하심의 유익인가? 여러분이여, 믿는 자들이여, 하나님은 "구원얻는다"고 평결하셨고, 누구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은 죄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구원얻는다; 당신은 심지어 지금 구원얻어, 현재 구원을 소유한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셨다." 이 시간에 그러한 이동을 느끼라. "사랑하는 자여,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내가 방금 이것을 말했을 때 나는 다 한 것이다. 만일 여기 어느 누가 그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서 충분하리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친근하게 그에게 그의 구세주를 모욕하지 말라고 애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의 의로움이 충분하다면, 왜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겠는가? 당신은 잠시동안 당신의 의로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비교해볼 것인가? 당신과 그분 사이에 어떤 유사한 점이 있는가? 개미와 천사장 사이와 같을 수 있다. 아니, 그것으로도 안 된다; 낮과 밤, 지옥과 천국과 같다. 오, 만일 내가 누구도 결점을 찾을 수 없을 만큼의, 스스로의 자기 의를 가지고 있다해도, 나는 예수님의 의로움을 얻기위해 자발적으로 그것을 던져버리리라, 그러나 나는 아무런 내 의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나는 내 주님의 의로움을 가진 것을 더욱 기뻐한다. 화이트필트(Whitefield)씨가 최초로 브리스톨 근처, 킹스우드에서 광부들에게 설교했을 때, 그들이 감동하여 뺨에 눈물이 흘러 그들의 검은 얼굴에 하얀 줄들이 그려지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는 그들이 복음을 받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일기를 썼다, "이 가난한 광부들은 자기 의를 전혀 갖고있지 않았기에, 청중들과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 안에서 영광받았다." 광부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검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여기 여러분들 대부분들에게 있어서도 동일한 진리이다, 우리는 검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 역시 기꺼이 우리 자신의 의를 던져버리고 그것을 찌꺼기와 배설물로 여기며, 우리는 예수님을 얻을 수 있으며, 그리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 질 수 있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다. 그분 안에 우리의 영혼의 희망이 있고 유일한 믿음이 있다.

영원히 버림받는 단 한가지 이유

끝으로, 여러분 중 누군가 예수님의 의를 거절하는 것은 영원히 멸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안에서 여러분 앞에 놓으신 진정하고 신성한 의를 여러분이 거절했을 때, 하나님은 당신이나 당신의 거짓 의를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천국문까지 이를 수 있다면, 천사가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여기 들어가기 위해 당신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대답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당신의 의가 임마누엘 그분의 그것과 동등한가가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거짓이 용납되는 것을 허용하신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분께서 한 가난하고 불쌍한 죄인의 위장된 의로움이 예수님의 완전하신 정금과 함께 나란히 흘러가게 하시겠는가? 만일 당신이 씻을 필요가 없다면, 왜 갈보리가 피로 채워졌겠는가? 예수님께서 실수로 흘리신 것인가? 오, 그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신은 반드시 예수님의 의를 가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의한 자이며, 불의한 자로써 당신은 구원얻지 못하며, 구원얻지 못한 당신은 영원히 영원히 잃어버린 자로 남아야 한다.

무엇이라고요! 그렇다면, 나는 의로움을 위해서 주 예수님을 믿어야만하며, 믿음을 통해서만 의로워지는군요? 예, 바로 그렇다: 그것이 전부이다. 무엇이라구요! 예수님만 믿고 내가 좋아하는 대로 살라구요! 당신은 예수님을 믿은 후로, 당신은 죄에서 살 수 없는데, 왜냐하면 믿음의 법이 본성의 변화와 당신 영혼의 새로워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당신을 믿음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마음을 또한 변화시키실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대로 산다"고 말했지만, 당신은 현재 당신이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사는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회심 전에 사랑했던 것들을 당신이 믿은 후에는 싫어하게 될 것이며, 당신이 싫어했던 것들을 당신은 사랑하게 될 것이다. 현재, 당신은 선하고자 노력하지만, 당신은 큰 실수를 하는데,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구원을 받을 때,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 것이고, 그것들이 더 이상 당신을 슬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변화가 당신이 원하는 것이고, 당신은 결코 은혜의 언약을 통하지 않고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 낡은 약에는 회심에 관한 단어가 없고,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위해서는 새 언약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 있다. -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겔36:25-27) 이는 위대한 언약의 말씀중 하나이며, 성령께서는 구속받은 자들 안에서 그것을 이루신다.

주님께서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드럽게 당신을 설득하시기를! 그 약속과 모든 다른 언약의 말씀들이 당신의 영혼에서 이루어지기를! 주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성령께서,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족한 자의 입술에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아멘.

 

출처: 로이드존스연구사이트  http://lloydjones.org/zbxe/?mid=Puritan05&page=2&listStyle=list&document_srl=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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