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성-7
<예전에 들은 얘기입니다. 형수님이 있었는데요, 어린 시동생에게 늘 누룽지를 줬다고 합니다. 시동생은 그게 불만이었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가 있었답니다. 누룽지를 많이 먹으면 자지가 커진다는 얘길 어디선가 듣곤 시동생을 위해 그렇게 했답니다. 남편의 자지가 작아 자신은 성적으로 늘 불만이었고, 그런 성적불만이 나중에 시동생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봐 그렇게 했던 것이죠.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아주 고마운(?) 형수님입니다.>
물론 ‘자지 중심’의 섹스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유전(遺傳)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왜 형수님은 남편의 자지와 시동생의 자지가 비슷한 문제(?)가 있을 거라고 여긴 걸까요? 그것은 둘 다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기질은 남성에게로 전달된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저는 머리칼이 많이 빠졌습니다. 물론 젊었을 때부터 빠진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저의 아버지는 머리숱이 빽빽했습니다. 할아버진 젊었을 땐 모르겠고 나이 드셔서는 역시 머리숱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머리칼에 관해서는 저와 할아버지를 늘 연결 짓습니다. 때론 외할아버지를 연결 짓기도 합니다. 외삼촌 중엔 머리 빠지신 분이 없거든요. 친가든 외가든 제가 남성이기에 남성 선조들과만 연결 짓습니다.
이런 것도 있죠. 가령 여성 젖가슴 크기의 경우, 엄마, 이모, 고모, 할머니 등을 연결시키죠. 그래서 넌 누구를 닮아 그렇다고 말하곤 하죠. 왜 우린 여성은 여성, 남성은 남성으로만 연결시키는 걸까요? 가령 딸의 젖가슴 크기와 모양, 혹은 감각능력(?) 등은 남성인 저와는 상관이 없을까요? 상관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젖)가슴의 여러 가지 기질이 딸에게 전달될 수도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성의 생리적 기질은 남성에게, 여성의 생리적 기질은 여성에게로 전달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어떤 성의 생리적 기질은 정해져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리적 기질과 관련된 생물학적 성 역시 젠더처럼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가령 여성 젖가슴의 경우 태어나면서 꾸준하게(?) 여성의 그것으로 여겨지고 관리(?) 됩니다. 그 근거 중의 하나가 사춘기 이후가 되면 여성의 젖가슴은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물론 브래지어로 억압하게 됩니다. 반면에 남성은 어떻습니까? 해수욕장 등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상체를 드러냅니다. 사회적 터부에 의해 자신의 신체를 자신 혹은 사회가 억압하는 것이죠. 여성은 젖가슴 뿐 아니라 많은 부위가 사춘기가 되면서, 아니 사춘기 이전이라도 억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남성은 대부분의 신체부위를 드러내도 문제가 되질 않지만 여성은 다릅니다. 여성은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게 금기시 되죠. 아이들의 백일이나 첫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또 여성의 화장도 그런 것 같습니다. make up. 만들어서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죠. 여성에게 날 것 그대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성은 그 자체로 ‘추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지요. 고대나 중세 사회에서의 아름다움은 남성의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원론의 세계에 여성은 아름답지 않을 뿐 아니라 온갖 나쁜 것과 연결 지어져 왔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과 관련된 말, 즉 beauty는 연약함이며 그것도 남성의 시선이 자신을 보아 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즉 남성은 외부의 시선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데 여성은 반드시 시선, 그것도 남성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군요. 만약 남성의 시선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이 연약함이라는 의미에서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아직 규정되지(완성되지) 않은 존재처럼 그저 연약할 뿐이죠.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들의 아름다움이란 연약하기 그지없는 것의 상징인 것으로 보입니다. 바싹 마른 상태의 이데아! 연예인이 아니라도 여성은 팔뚝이나 종아리가 굵고 튼튼한 게 보기 싫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울퉁불퉁한 게 아니라 매끄러워야 그게 아름답다고 하지요. 그것은 연약함을 보여 주고자 함이 아닐까요? 남성의 시선이 보기에!! 그런 연약함은 자세(姿勢)에 대한 의미를 전도(顚倒)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령 남성의 팔로 여성의 목을 두르는 장면의 경우,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감싸 안거나, 포옹, 혹은 제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여성이 남성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저만 그렇게 보이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전도된 의미체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될 겁니다.
아버지라도 아들의 신체를 만질 수 있는 범위와 딸의 신체를 만질 수 있는 범위가 다르죠. 어린 아들의 성기를 유심히 보며, 뭐라고 하면서 웃는 것은 아버지의 부드럽고 자랑스러운 부성(父性)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아무리 어린 딸이라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이상하게(혹은 금기로) 여겨집니다. 이건 이성(異性 혹은 양성) 간의 함부로 넘기 어려운 간극이 이미 만들어져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간극을 만드는 것, 여성은 여성, 남성은 남성의 생물학적 성격(性格)을 가졌다는 것을 굳게(?) 믿은 것이 우리 주변에 만연해 버렸습니다. 일종의 이분법이지죠. 그런데 이런 넘을 수 없는 양성(兩性) 간의 간극은 결국 양성주의와 관련된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여성이거나 남성이거나 어떤 성에 속하지 않으면 곤란(?)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성이 젖가슴을 드러내는 것은 금기시 되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것처럼 말입니다. 딸의 젖가슴을 아버지, 할아버지의 (젖)가슴과 관련짓지 않고 어머니, 할머니와 연결시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습관화(혹은 억압)된 것이지요. 그런 것들에서 벗어난 사람은 매우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만들어진 생물학적 성으로부터 또 한 번 더 만들어진 사회적 지위로서의 성, 즉 젠더가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우린 한 번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두 번 아니 여러 번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여성’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아니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남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는 게 양성주의라면 여성과 남성은 양성주의라는 보편개념 내에서만 차이를 가집니다. 여기선 누구라도 남성과 여성 중 하나여야만 합니다. 반드시 하나여야만 합니다. 중간지대나 섞인 게 있어서는 안 되죠. 그건 양성주의라는 보편개념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 룰을 깨뜨리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실은 양성주의는 하나의 성, 즉 남성을 위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성주의 내에선 남성과 여성 이렇게 나누는 것 같지만 남성이 아닌 것은 모두 여성이라고 취급합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도 사실은 그렇죠. 선과 악이 뚜렷하게 반으로 분리된 게 아니라 선이 적은(혹은 없거나) 게 악이죠. 양성주의 내에서 여성은 남성이 부족한 성이 됩니다. 즉 여성은 결핍으로서의 성이죠. 여성은 남성을 강화하거나, 구별 짓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언어적으로 보면 남성은 일반명사이지요. 여성에겐 여류(女流)라는 접두사를 붙입니다. 가령 여류작가 같은 것 말이죠. 남성은 그냥 작가(남성)인데 여성은 그냥 작가가 아니라 여성작가라는 말이죠. 여류라는 접두사가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죠. 여성은 남성의 파생물 취급을 당하는 겁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도 성적욕망은 모두 남성의 성적 욕망이지요. 여성의 성적 욕망은 그냥 남성의 성적 욕망이 조금 변형된 것일 뿐입니다. 모든 게 ‘자지 중심’이지요. 여성은 그게 결핍한 존재이므로 늘 자지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간주 됩니다. 그리고 남성은 늘 결핍으로서의 여성을 전제로 하고 욕망하지요. 더 간단하게 말하면 남성의 자지가 결핍된 게 여성의 보지인 것입니다.
이원론이 궁극적인 실체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실체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주변으로서 결핍 혹은 찌꺼기가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죠. 양성주의 내에서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존재가 아니라 늘 열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성주의란 ‘남성주의’라는 말과 동일한 것이라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양성주의 내에서 ‘남녀평등’ 혹은 ‘(양)성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성주의 내에서는 절대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보편 개념 내에 갇힌 것들은 차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보편개념, 즉 양성주의 내에서는 ‘남성이나 여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전의 ‘순수 차이’를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배우자나 딸을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한 그의 ‘진여(眞如)’를 볼 수 없습니다. 늘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배우자와 딸로만 보일 뿐이죠.
양성주의 내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고 그것은 남성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도 내에서 과연 진정한(?) 남성은 얼마나 될까요? 가령 남성과 여성이 반반(半半)일까요? 즉 반은 남성으로 취급 받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남성중에서도 진짜(?) 남성이 있지요. 그런데 진짜 남성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완벽한 실체는 하나뿐이죠. 다른 것들은 모두 실체에 대한 재현(再現)일 뿐입니다. 양성주의 같은 이원론은 그런 구도를 동일하고 무한하게 반복하지요.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반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하나, 정점의 실체를 위해 존재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