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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2차대전 참전 국가 | 전사자 숫자 |
1 | 소련 | 870만명~1,385만명 |
2 | 독일 | 430만명~550만명 |
3 | 중국 | 300만명 |
4 | 일본 | 212만명 |
5 | 미국 | 42만명 |
6 | 영국 | 38만명 |
7 | 이태리 | 30만명 |
: : | 그외 국가들 | .................. |
합계 | 2,200만~3,000만명 |
하지만 보통 2차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보면 미군과 독일군의 전투라든가 아니면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할리우드에서 양산되었고 동부전선에서 독소전쟁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들은 드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냉전 상황에서 굳이 독재자 스탈린의 붉은 군대를 찬양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동부전선 이야기를 소재로 다루는 것이 흥행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력적인 소재일 수 없었고 그런 탓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지상 최대의 작전"), 벌지 대전투("벌지 전투"), 멀고 먼 다리("마켓 가든 작전"), 패튼 대전차군단 등등 미군을 포함한 서방 연합군들의 영웅담을 소재로 하였습니다.
(1962년작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 존 웨인이 마치 주연인 것처럼
광고에 나왔지만 영화 속에서는 적지에 강하하자마자 다리가 부러져서
부하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505 공수여단에 실존인물 반더후르트 대령을
연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웨인이 영화에 등장하는 시간은 무척 짧았고
실제 반더후르트 대령은 D-Day 당시 27살의 젊은 장교였지만 영화 제작
당시 55세였던 존 웨인이 이役을 고집하였던 이유는 당시 떠오르는 스타였던
찰톤 헤스톤(1959년작 "벤허"의 주인공)에게 비록 짧지만 영화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미육군 공수부대 장교역이 돌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마지막 순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1977년작 "멀고 먼 다리"(a bridge too far)에서 미육군 82 공수사단에 쿡 대위로 등장하는
로버트 레드포드, 영화는 당시 최고의 훈남 스타였던 로버트 레드포드가 마치 영화 내내
등장하는 주연급인 것처럼 선전하였지만 거의 카메오 수준으로 영화 끝부분에 잠깐 등장합니다.
제작 초기에 이役은 로버트 레드포드에 버금가는 스티브 맥퀸("빠삐용"과 "타워링"의 주인공)
에게 먼저 캐스팅 제의가 갔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저 역시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이고 이석기나 이정희와 같은 인물들의 종북 주장을 이해해줄 정도로 관대한(?) 사고를 갖지 못한 편입니다만 어쨌든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2차대전 중에 가장 커다란 전쟁터는 동부전선이었다는 "팩트"만 놓고 본다면 2차대전 주요 사건들과 무기들을 소개하는 이곳 게시판에서 소련관련 글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금년 카페 "붉은군대 프로젝트"에서 나름 고증적으로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이글을 시작하게 된 계기 중에 하나입니다.)
(비록 할리우드産 블록버스터 영화였지만 2001년작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는 독소
전쟁에서 실존 인물인 전설적인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다룬 수작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 "셜록 홈즈"에서 닥터 왓슨으로 출연한 주드 로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붉은 군대의
저격수를 연기하면서 귀신과 같은 실력으로 순식간에 눈 앞에 독일군들을 몰살시켜 버리는 2분 남짓한
장면은 지금 다시 봐도 대단한 명장면입니다.)
사족이 너무 길었네요...... 뭐 하지만 어차피 성급한 뜀뛰기가 아니라 느긋하게 전쟁사를 둘러본다는 마음으로 이글을 쓰기 때문에 이런 식의 사족은 얼마든지 저지르려고 합니다...........
결국! 소련은 2차대전 기간 중에 가장 큰 희생을 겪고, 가장 끔찍한 희생을 당한 참전국이었고 동부전선의 치열한 전투들은 나치 독일의 승패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서방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못지않게 큰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앞에서도 설명드렸지만 1939년 폴란드를 포함한 북동부 인접 국가들을 점령해버린 나치 독일은 1940년에 급기야 프랑스를 점령해버리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시작하면서 금방이라도 전쟁을 끝내버릴 듯이 위세를 떨치지만 1941년 2월에 동맹 관계를 배신하고 소련에게 기습 작전을 감행한 "성채 작전"은 소련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1941년 초기 독일의 소련 침공은 2월 개시되는 "성채(바바로싸)작전"에서 시작됩니다.
소련 마을을 불태우면서 초토화시키고 있는 독일 침공군과 Sd.Kfz251 하프트랙 장갑차)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군의 탱크들은 진격하는 독일군 탱크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상대였습니다. 아직 타이거와 같은 독일 탱크 개발력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걸작이 등장하지 않았고 2호,3호 전차들이 주종을 이루면서 4호 전차의 숫자가 점차 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독일군의 탱크들 역시 강력한 장갑과 화력과는 거리가 먼 조건이었지만 당시 소련 탱크들에 비하면 "매우 우수한" 성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불세출의 명작 "T-34"를 소개하기 앞서서 그 이전 탱크들을 소개해보록 하겠습니다.
(3호전차 N형, 독일이 자랑하는 "전격전"은 화력보다 기동성에 더 촛점을
맞춘 탓에 1호~4호전차까지는 화력 증강에 한계가 있었고 전쟁이 중반
이후에 독일과 연합군 모두 강력한 화력의 中전차급의 대결 구도가 되자
신속하게 전선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1941년 독소전쟁 초기에는
2호,3호전차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소련군에게 공포를 안겨줄 수 있었는데
이유는 초기 소련 탱크들이 그만큼 무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공산 소련이 있기 전에 그곳에는 제정 러시아가 있었습니다. 1917년에 공산 혁명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되는 러시아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1914년~1918년) 기간 중에 "짜르 탱크"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개발 초기 단계에서 폐기되기는 했지만 "베르즈데코드"와 같이 최소한 양산 前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정 러시아 시절이었던 1914년 몇몇 몽상가 과학자들이 모여서
제안했던 "짜르 탱크"는 무려 12m 지름의 거대한 바퀴가 캐터필러
트랙 대신에 사용되었는데 첫번째 실물 테스트에서 기대 이하의
출력과 포격에 의해 너무 쉽게 파괴되는 등 수많은 문제점
이 발견되어 계획 자체가 폐기되었습니다. )
(베르즈데코드 - 제정 러시아에 최초로 그럴 듯한 모양을 갖춘 탱크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TV만화 주인공 "꼬마 자동차 붕붕이"
가 연상되는 이 작은 탱크는 실전에는 사용되지 않고 취소됩니다.)
(1차대전 말기에 프랑스가 운용한 FT 르노 탱크, 훗날 일본에서도 이 프랑스제
소형 탱크를 사용하게 됩니다. 지금 보면 허접하기 이를데 없는 디자인이고, 성능
이지만 캐터필러 트랙 차체 위에 360도 회전 가능한 포탑을 얹어놓는
FT 탱크의 구조는 1930년대부터 본격화된 유럽 열강과 소련의
탱크 설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러시아 내전 발발(1918년~1920년)
1918년 공산주의 세력인 赤軍과 귀족을 중심으로 反공산주의 세력인 白軍의 내전에는 프랑스와 영국군까지 지원군으로써 참전하게 되는데 적군의 경우 드넓은 러시아 대륙을 신속히 이동하기 위해서 장갑 열차를 사용하였고, 한편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투입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가지고 온 마크 V 탱크나 FT 탱크가 전투에 등장하면서 훗날 소련 붉은 군대의 근간이 되는 적군의 지휘관들에게 기계화된 군사력의 필요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가능했습니다.
(내전 중에 14대의 프랑스의 FT 탱크가 적군들에게 노획당한 후에
적군을 위해 개조되어 전선에 등장하였습니다. 적군들은 이 탱크들을
"자유의 투사 레닌 동지!"(Freedom Fighter Lenin)라고 불렀습니다.
(역사상 최초의 탱크들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영국 마크 V 탱크.
1차대전에 처음 등장했지만 영국이 러시아 내전 중인 귀족측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1920년 적군의 승리로 내전이 막을 내린 후에 새롭게 태어난 소련은 5개년 계획을 세워서 중공업 중심의 산업 발전을 가속화하게 되는데 이런 산업 기반으로 인해서 탱크의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습니다. 또한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미국으로부터 중장비와 기술을 도입하여 수십개의 자동차와 트랙터 공장을 건설하게 됩니다. 훗날 이런 대규모 공장들은 탱크와 장갑차를 대량 생산하는 공장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이 거대한 소련의 독재자인 스탈린의 산업화와 기계화에 대한 신봉은 1930년대말까지 과감한 군비 확장 계획을 집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써 엄청난 숫자의 탱크들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1920년 스탈린은 중공업 위주로 드라이브를 거는
5개년 계획을 밀어 붙혀서 소련의 경제 발전을 꾀하였습니다.
이런 계획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
지만 불과 20여년 후에 유럽 최강의 군대를 보유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를 이끌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사진의 중공업 발전을 독려하는 당시 홍보 포스터.)
(T-18(or MS-1)은 최초의 소련 탱크로써 1929년부터
소련 기갑 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프랑스의 FT-17 탱크를 수입하여 기갑 부대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 부대에는 러시아 내전 중에 전쟁터에 버려진 영국 탱크들도 소수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1926년에 최초의 소련제 탱크 T-18이 등장하는데 사실 이탱크는 프랑스 FT-17을 서스펜션을 좀 더 강화하고 포탑의 크기를 키운 일종의 개조 수준의 모델이었습니다. 이 최초의 소련 탱크는 1차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과의 은밀한 협력 관계를 통해 독일의 기술을 도입한 결과물이었습니다. T-18(혹은 MS-1이라고도 불림)은 1929년 소련 기계화 부대에 소속된 탱크들의 주력 기종으로 운용되었습니다.
T-18이 FT-17의 개조 수준이었다면 1928년 설계가 시작된 소련 최초의 차체 개발 탱크 프로젝트의 결과로 T-18의 덩치를 키우고 좀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형태의 T-19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T-24로 재편되어 1931년에 최초의 테스트를 실시합니다. 하지만 불안정한 엔진은 화재가 발생하였고 결국 T-24는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소련 탱크 개발 기관은 T-24의 개발 중에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1931년부터 BT 탱크 시리즈의 개발을 시작하게 됩니다.
(실패작이었던 T-24)
최초의 대량 생산 탱크 - T-26 경전차
1931년부터 소련은 외국 탱크들을 수입해오고 심지어 외국 신형 탱크들의 시제품까지 구하여 그 기술들을 참고하여 매우 인상적인 탱크 시리즈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T-26 경전차라 불리는 그 결과물은 소련이 1930년 초에 영국을 방문하여 수입을 결정한 영국제 "빅커즈 E" 탱크의 설계를 기반으로 제작한 자체 제작 탱크였습니다.
(1931년 소련이 영국에서 구입한 빅커즈 E 탱크는 두개의 포탑이 나란히
얹어져 있는 독특한 디자인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대포 대신에
2정의 빅커즈 수냉식 기관총이 나란히 포탑에 장착된 탱크였습니다.)
(최초로 대량 생산에 적합한 탱크로 평가된 T-26, 사진은 한개의 포탑을 가진 T-26 탱크입니다.
1939년까지 T-26 시리즈는 총 11,000대 이상 생산되었는데 1개 또는 2개의 포탑 숫자의 차이
뿐만 아니라 화염 방사기를 갖춘 모델까지 다양한 기능과 설계로 차별화된 무려 53개의 파생
모델들이 생산되었습니다. 탱크 역사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인 점을 감안할 때
매우 의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 유지 작업 중인 T-26, 2개의 포탑이 독특한 형태였습니다.)
소련의 탱크 역사를 볼 때 제대로 군사력의 보탬을 준 모델은 T-26이 최초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대량 생산이 시작된 첫 모델이기도 했지만 비록 영국 빅커즈 경전차의 설계를 상당 부분 본 뜬 탓에 자체 기술력으로 개발된 탱크라고 볼 수는 없지만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탱크였기 때문에 의미가 큰 것이었습니다.
(하비보스社의 1/35 T-26 쌍두 포탑형 - 비록 30년대 최다 생산 모델
이었지만 2차대전에 나치독일의 기갑부대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탓에 플라모델 제조업체들의 지명도에서는 한참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메서슈미트 Bf-109 전투기의 역사를 소개할 때 나치 히틀러가 신무기의 시험을 위해서 2차대전 발발 직전에 스페인 내전에 루프트바페 신형 전투기와 폭격기를 프랑코 장군의 군대를 지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소련은 스페인 집권 공산당 정부군을 위해서 군사력을 지원하여 결국 스페인에서 독일과 소련의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했었지요. 그때 소련의 스페인으로 보낸 주력 탱크가 바로 T-26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년 후인 1941년 본격적으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소련의 붉은 군대가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던 탱크 역시 T-26이었습니다.
(3호전차 F형 - 37mm 주포를 탑재한 이 모델과 G형이 1941년 6월 소련 침공이 시작될 당시
독일 기갑 병력의 주력 탱크였습니다. T-26의 얇은 장갑 덕분에 3호전차가 절대적인 우세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T-26은 1941년 소련 침공 초기에 나치의 주력 탱크였던 3호전차와 비교해서 화력에서는 비슷하거나 (T-26 : 45mm 주포 vs 3호전차: 37mm or 50mm 주포) 장갑 두께을 비교하면 너무 얇았습니다. (포탑과 차체 측면 장갑의 경우, T-26:16mm vs 3호전차 F형 기준: 30mm) 1941년 6월부터 시작된 성채 작전에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독일 기갑부대를 맞닥뜨렸을 때 장갑의 열세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고, 굳이 독일 탱크가 아니더라도 독일 육군이 보유한 37mm 대전차포 (앞에 글에서 소련군과 연합군들에게 "문을 노크하는 대포"라는 비웃음을 당했던 바로 그 대전차포)의 포격에도 단번에 구멍이 뚫려버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나치 독일 육군의 37mm 대전차포 - T-26 탱크에게는 위협적인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비록 T-26이 독일 대전차 공격에는 취약하더라도 보병 지원을 위한 경전차 고유의 임무에는 여전히 효과가 있었던 탓에 1945년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공격하는 임무에 투입될 정도로 종전때까지 극히 한정적인 지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독일의 최강 기갑 전력을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임을 1941년 초기에 입증되었으며 1940년 이후에는 더 이상 T-26의 성능이 개선된 파생 모델의 등장이 멈추게 됩니다.
이후에 T-34 탱크도 그랬지만 T-26의 장점 중에 하나는 심플한 설계로 안정된 성능과 보수 유지가 간편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장갑의 열세 외에도 독일 탱크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 속도 (포장도로 시속 31km - 3호전차는 시속 40km ) 역시 뒤떨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화염 방사기로 무장한 T-26 파생 모델)
BT 탱크 시리즈
"BT"는 러시아어 "Bystrokhodny" 의 약자로써 영어로는 "Fast Moving" 즉 "고속 기동" 탱크를 의미합니다. 특히 "BT" 탱크 시리즈는 메이저 브랜드인 타미야에서도 BT-7과 BT42 두 모델이 키트로 출시되어서 T-34 이전 탱크로써 모델러들에게도 익숙한 편입니다.
(정말 뜻밖에 타미야답지 않은 변두리 탱크를 키트화하였던 예입니다.
BT42는 소련 탱크가 아니라 전쟁 중에 핀란드군이 우연히 노획하게 된
BT-7 탱크에 포탑을 아예 제거해버린 후에 영국제 114mm 곡사포를
장착한 일종의 "변종"입니다. 이런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극히 한정된
숫자가 운용된 탱크를 키트로 만들었다는 것이 정말 의외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깐만.....!!! 위에 타미야 BT42 탱크의 탄생 배경이 되는 소련과 핀란드의
전쟁은 1939년~1944년 약 6년간 2회의 전쟁("겨울 전쟁"과 "계속 전쟁")이 벌어집니다.
당시 독일과 소련의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자주 독립을 유지하려는 핀란드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소련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핀란드와 같은 작은 나라에게 쩔쩔매는
소련을 보고 히틀러는 1941년 6월 소련 침공(성채 작전)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진은 빅커스 기관총을 사격 중인 핀란드 산악부대원들....핀란드의 전쟁
이야기는 언젠가 훗날 좀 더 자세히 풀어놓을 기회가 있겠지요............)
다시 BT 탱크 이야기로 돌아오면......... BT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는 여러가지 종류의 탱크들은 1932년~1941년 사이에 많은 숫자가 생산되었습니다. BT 탱크 시리즈의 특징은 우선 경무장이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나름 효과적으로 무장되었으며 당시에 어떤 탱크들에 비해서도 뛰어난 기동성을 가졌습니다. BT 탱크 이후의 직속 후계 모델이 바로 2차대전 최고의 걸작 탱크들 중에 하나인 T-34입니다. 따라서 소련 탱크 개발 역사에서 BT 탱크 시리즈가 갖는 기술적이나 전술적인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 초에 미국에서 J. 월터 크리스티라는 엔지니어는 자신의 이름을 몀명한 "크리스티 서스펜션 시스템"을 적용한 일련의 고속 주행 탱크들을 개발하였습니다. 뉴저지 출신에 크리스티는 원래 경주용 자동차 제작 엔지니어인 동시에 경주용 자동차 레이서였습니다. 그는 크리스티 서스펜션 시스템을 발명하여 미육군에게 제안하였는데 미군은 이런 그의 기술에 대해서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크리스티의 이런 제안은 빛을 보지 못하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암약하던 소련 첩보원에 의해서 그의 기술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소련은 미국 정치가들을 설득하여 크리스티 서스펜션이 적용된 최소한 2대 이상의 시제품 탱크 (포탑이 없는 상태의)들을 구매하여 소련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이 귀중한 군사 기술의 유출을 탄로나지 않기 위해서 선적 서류에 이탱크들을 "농업용 트랙터"로 표기하여 소련으로 가지고 오게 됩니다.)
이렇게 수입해온 시제품들은 급기야 BT 탱크 시리즈와 2차대전 최고 성능의 명작 탱크들의 반열에 오르는 T-34의 설계에 기초를 이루게 됩니다. 비록 소련의 고유 기술은 아니었지만 탱크가 향후 지상 전투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활을 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한 소련 군 지휘관들의 혜안 덕분에 (물론 이런 유능한 지휘관들의 상당수는 독일의 소련 침공 이전에 스탈린에게 숙청되어 총살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지만....) 소련은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탱크들을 개발하게 됩니다.
(미국에 엔지니어인 J. 월터 크리스티(1865년~1944년))
소련에 도착한 이 탱크 시제품들은 BT-1이라는 모델명이 부여되었고 이어서 이 설계들을 바탕으로 개발된 BT-2 (비무장 시제품)가 소련 기술진에 의해서 1931년 10월 제작되었습니다. 곧바로 1932년부터 37mm 주포를 탑재한 BT-2가 양산을 시작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37mm 주포가 부족하여 일부 BT-2는 3대의 기관총이 대신 장착되는 버전도 있었습니다. BT-5부터는 T-26과 마찬가지로 45mm 주포를 장착하여 생산됩니다.
(포장도로에서 무려 시속 74km로 달릴 수 있었던 BT-2 탱크의
기동성 데스트 장면. 거의 날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엄청난 스피드는
당시 다른 어느 나라의 탱크들과 비교가 안되는 성능이었습니다.)
BT-5는 BT-2 양산 개시 후에 BT-3와 BT-4의 시제품 개선 버전을 거진 후에 1933년에 보다 커진 원기둥 형태의 포탑과 45mm 주포 그리고 차체에 장착된 동축 기관총으로 무장한 양산 버전입니다. 하지만 BT-5는 무려 9개의 시험 버전들을 제작하면서 향후 소련 탱크 발전을 위한 기술 축적에 사용됩니다.
(사진은 이탈레리 1/35 BT-5 탱크 키트의 박스 커버)
1935년 개발된 BT-7 탱크는 차체를 새롭게 디자인하였고 독일에 BMW사가 개발한 엔진을 라이센스 생산하게 된 미쿨린 M-17T 엔진을 장착하게 되면서 포장도로에서 무려 시속 86km의 놀라운 속도가 가능해집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1939년 촬영된 BT-7 탱크의 실제 기동 장면.
엄청난 스피드에 놀랄 것입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를 위해서는 차체의 무게가 가벼워야 함은 당연한 이야기였고 BT-2에서 BT-7까지 장갑의 두께는 최대 13mm로써 37mm 대전차포라면 충분히 관통하고도 남을 얇은 수준이었습니다.
BT 탱크 시리즈는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에서 4대의 BT-5 탱크가 중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T-26 탱크와 함께 투입되었습니다. 이어서 BT-5 1개 사단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였고, BT-7 탱크가 할힌골 전투(1939년 만주에서 벌어진 소련과 일본간에 국경 분쟁 전투), 겨울 전쟁 (핀란드와의 전쟁), 폴란드 침공 그리고 2차대전 내내 소련 붉은 군대에서 운용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소련이 지원한 BT-5 탱크들은 독일의 경전차들(주로 2호전차)과 같은 추축국인 이태리군의 탱크들과 전투를 벌일 기회가 생겼는데 45mm 주포의 위력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독일 2호전차의 장갑의 최대 15mm를 넘지 못한 탓에 BT-5 탱크와 비교해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므로 화력에서 도리어 앞서는 BT-5 탱크가 우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2호전차의 장갑이 30mm 이상으로 보강되고, 3호전차와 4호전차가 등장하면서 1941년 성채 작전 개시와 함께 BT시리즈 탱크들이 맞닥뜨리게 된 독일의 탱크들은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됩니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군의 화염병 공격에 불이 붙은 미군 스튜어트
경전차의 모습, 만주에서 일본군의 이런 공격으로 소련의 BT 탱크들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1939년 9월에 만주에 할힌골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일본군의 전투에서 BT-5와 BT-7이 투입되는데 일본 관동군들은 탱크가 아니라 "탱크 킬러 부대"라고 불리는 특수 부대들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어이없게도 일본군 보병들이 접근하여 던지는 화염병(훗날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도 불림.) 때문이었는데 전투 기간동안 몽고 평야는 섭씨 40도를 넘는 무더위였는데 이런 기온에서 화염병 공격은 BT시리즈 탱크들의 가솔린 엔진에 쉽게 화재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기동성만 가지고는 우수한 탱크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BT-7 탱크에 올라타고 진격하는 소련 보병 부대)
2차대전 발발과 함께 음흉한 스탈린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보조를 맞추어 반대편에서 폴란드를 침공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동맹관계였습니다.) 이때 BT-2와 BT-5가 폴란드로 진격해들어갑니다. 전력상 비교가 안되는 폴란드 군을 상대로 BT 시리즈 탱크들은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지만 1941년 동맹 관계를 깨고 진격해오는 나치 독일 기갑부대를 맞이한 BT 탱크들은 적들이 스페인 내전 때 경험했던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닳게 됩니다. 장갑이 보강되고 심지어 50mm 주포까지 탑재한 3호전차 F형,G형과 4호전차는 BT 탱크에서 발사하는 주포 사격에도 쉽게 파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BT 탱크들은 독일군 탱크는 물론 심지어 포병들이 끌고와서 발사하는 37mm 대전차포 한방에 관통되어버리는 약점을 보이게 됩니다.
소련군은 더이상 BT 탱크들이 전선에서 독일군 탱크들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깨달을 때까지 수천대의 BT 탱크들이 대륙에 전쟁터에서 불덩어리가 되어버려야 했습니다. 독소전쟁이 불과 1년도 안되어 대부분의 BT 탱크들은 후방으로 퇴각했고 그자리를 드디어 T-34가 메우게 됩니다.
BT 탱크가 활약한 마지막 전투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BT-7 탱크가 만주에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진격해들어갔던 임무였습니다. 비록 BT 탱크들은 2차대전 발발 이후 독일 기갑부대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지만 기술적으로 소련이 T-34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보유하게 해준 기술적인 징검다리였다고 판단됩니다.
T-28과 T-35 (닮은 꼴 형제 탱크들)
(T-28 탱크 1/35 키트 박스 커버)
(T-35 탱크 - T-28의 "뻥튀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BT 탱크 시리즈가 전형적인 "경전차"(light tank)로 신속한 기동성을 가진 반면에 가벼운 무게를 위해서 장갑을 포기하였던 반면 T-28(中전차:medium tank)과 T-35(重전차:heavy tank)는 비록 체급은 틀렸지만 동일한 외형을 가졌고 그 역활 역시 영국의 마틸다 탱크와 같은 보병 지원 탱크(Infanty tank) 개념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특히 3개의 포탑들이 차체 위에 설치된 모습이 독특했습니다. 소련의 자체 개발 모델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영국에 빅커스 社가 개발 중이던 탱크 설계를 거의 베끼다시피 하여 만든 탱크들입니다.
1931년에 시작품이 최초로 완성되었던 T-28과 닮은 꼴 중전차 T-35는 비록 전투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향후 T-34나 KV-1과 같은 걸작품이 개발되기 전에 소련의 탱크 개발 기술의 발전을 위한 의미있는 징검다리 역활을 해준 모델들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T-28의 경우 가장 큰 포탑에는 76.2mm 주포로 무장되었고 나머지 두개의 포탑에는 각각 7.62mm 기관총이 장착되어 상당히 강력한 화력을 갖추었습니다. 1933년에서 1941년까지 약 500대가 생산되었고, 그보다 무거웠던 T-35의 경우는 훨씬 적은 수량의 생산에 그쳤습니다.
T-28은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당시에는 독일과 동맹국 입장에서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을 침공하였을 때 투입되었고, 이후 핀란드와의 "겨울 전쟁"(1939년~41년)에서 일부 운용되었습니다. 핀란드와의 전쟁 초기에 중전차 치고 빈약한 장갑으로 인해서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급히 장갑을 보강하여 전면의 경우 50mm~80mm 두께로 변경하였고 후면은 40mm로 강화하였습니다. 분명히 기갑 전력에서 열세였던 핀란드군과의 전투에서는 T-28의 위력은 충분히 먹혀 들어가는 수준이었습니다.
(T-28의 3개의 포탑은 그리 효과적인 설계가 아니었고 도리어 차체의 무게만 증가
시키고 피탄 부위만 증가시킨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총공세 (성채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 400대 이상이 소련군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던 T-28은 더 이상 쓸모있는 탱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영국 보병 전차의 설계가 바탕이 되었다고해도 마틸다 탱크보다는 훨씬 빠른 시속 37km 속도(마틸다는 포장 도로에서도 시속 20km를 갓넘기는 수준)를 낼 수 있었지만 핀란드와의 전쟁 중에 장갑을 보강한 결과 실제 속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고 굳이 독일군의 탱크들과의 맞대결이 아니더라도 독일 육군의 대전차포 한방에 무력화되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또한 잦은 고장과 불안정한 성능은 비록 나치가 성채작전에서 운용한 탱크들이 주로 경전차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독일 탱크들을 공격할 수 없었고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2개월 이내에 대부분의 T-28과 T-35는 독일군에 의해서 파괴되거나 전장에 버려져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KV-1(사진)과 불세출의 명작 T-34 탱크는 다음에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워낙 2차대전
소련은 이 두 탱크들과 서방 연합군이 지원했던 탱크들을 가지고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치뤄냈다고 봐야 하겠지요. 그런 탓에 좀 차분하게 이 탱크들은 소개해야 하겠습니다.)
첫댓글 좋은 내용들 잘 읽었습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작가님 몸은 어떠신 지요? 러시아의 피해가 그냥 크다는건만 알았는데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글 이었습니다! 물론 재미도 있고 자료도 풍성하고 아주 유익했 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여러분들 댓글 감사합니다. 요즘에 몸이 좀 아팠었습니다. 아직도 완전히 회복은 안되었지만 어쨌든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구요. 이번 몸살 감기 오래 가네요.
재미있고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
아... 이형님은 언제 펜을 놓고
언제 이 연재가 끝날까?
지금까지의 자료만해도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을 오늘에서야 읽었습니다.
역시 흥미진진하고 공부가 많이되는 글, 감사합니다.^^*
(소개하신 영화, 저도 잘보았던 영화로 비디오테입으로 가지고 있지요.)
건강 속히 회복하십시요...
캄사합니다! ^^
츠쿠바에서 아키하바라 가는 고속철 안에서 다 읽었어요. 다음 이야기로 갑니다.
ㅋㅋㅋㅋㅋ 아키하바라 전자상가로 유명한?
에.. 아키하바라라 하면 전자 상가도 전자 상가지만, 취미가들의 천국이라 할 수 있지요. 작년까진 프라모델 샵 위주로 다녔는데, 오늘 피겨 샵 좀 보니까 꽤나 재밌더군요. 아이언맨 흉상 피겨 완전 땡겼는데, 참느라 좀 힘들었습니다. -_-;;
@미친도사(정권희) 어? 그래요??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