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한 사랑(Everlasting Love)(렘31:1-3)
2016.5.8어버이주일(김상수목사, 안흥교회)
오늘은 복된 어버이주일이다. “사랑합니다!”는 말은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말들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간단한 말 한 마디에 대해 우리가 너무 인색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모 기업에서 40개월 미만을 둔 젊은 아빠들 몇 명을 초청하여 깜짝 이벤트를 했던 적이 있다(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9-VkbFe2U3U). 빈방에 젊은 아빠들을 한 명씩 불러서 설문조사 항목에 표시하게 했다. 항목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아이의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 있나요?”
“당신의 차, 핸드폰, 지갑 등에 아이의 사진은 몇 장 있나요?”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언제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젊은 아빠들은 미소 지으며 대부분 자신 있게 답을 적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똑같은 질문을 대상만 달리해서 다시 질문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아버지의 자는 모습을 지켜본 적 있나요?”
“당신의 차, 핸드폰, 지갑 등에 아버지의 사진은 몇 장 있나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언제인가요?”
아이를 아버지로 단어를 바꿨더니, 대부분이 선뜻 답을 적지 못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준비된 화면에 그들의 아버지들의 인터뷰 모습이 나오고, 젊은 아빠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온갖 것을 다 해주면서 정작 자식 된 자기는 부모에게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 인색했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들이 자식에게 하는 그 모습이 바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기에게 해주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아버지와 자녀가 함께 들어왔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호주에 사는 젊은 청년들 몇 사람을 대상으로 "엄마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했다. 그들은 부모나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의 앞날만을 위해서 멀리 떠났다. 그러나 그들의 부모는 그들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그 어머니들을 자녀들 몰래 호주로 보내서 음식을 차리게 하고, 자식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할 즈음에,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내용이다. 뜻 밖에 엄마를 만난 자녀들은 한결같이 눈물로 상봉을 했다.
이 두 이야기에서 보듯이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 보다는 자신의 앞길이나 자녀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의 마음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나 반대로 부모들은 노심초사 늘 자녀들을 잊지 못한다. 생각해보면 이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부모의 마음도 이와같을진데, 하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어떻겠는가? 말할 나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31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이 말씀은 출애굽과 광야시대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주신 말씀이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Everlasting Love)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렘 31:3)
“무궁한 사랑(Everlasting Love)”이라는 말은 다른 표현으로 “영원한 사랑, 끝없는 사랑, 변치 않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얼마나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요한복음 3장16절에 보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다고 했다. 다함께 믿음으로 읽자.
“하나님이 세상을 (나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로마서 8장 3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바로 이러한 무궁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가페(Agape)의 사랑이라고 한다.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22-23)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기다리실까?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the breath of life)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living being)이 된지라”(창2:7)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없이 못생긴 아기라도 그 아이의 존재는 귀하고 예쁘다. 왜 그런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낳은 내 자식이기 때문이다. 내가 낳았기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생명이 서로 공유되어 있다. 생명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사람을 만드실 때, 짐승과는 달리 하나님의 숨결(생기)을 불어 넣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녀 된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와 어두움 가운데 살아갈 때도 주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그래서 독생자를 희생시켜서라도 우리들을 구하실 계획을 세우셨다. 그 희생의 장소가 바로 십자가다. 잘 생각해보면 십자가는 우리들이 죽어야하는 절망의 장소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 죽음의 장소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기어이 우리를 살려내셨다.
1989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때 있었던 일이다(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Z80oZBbFGE). 지진 후 한 한 아버지가 아들이 다니는 학교를 향해서 뛰어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학교는 이미 완전히 납작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는 평소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아들아, 무슨 일이 있든지 네가 아빠를 필요로 할 때는 내가 반드시 그 자리에 갈 것이다. 너의 곁에는 언제든지 내가 있어 줄께!"
그러나 눈앞에 현실은 너무도 절망적이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교실이 있던 건물 뒤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온힘을 다해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들 옆에서 늦었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과 약속을 되뇌며 파고 또 팠다. 그렇게 무려 38시간을 파내려갔다. 그러던 중에 사력을 다해 어느 큰 돌을 옮길 때였다. 그곳에서 아들의 목소리를 들려왔다. 그래서 목이 터지도록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랬더니 그 밑에서 아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버지예요? 저 여기 있어요"
그 큰 돌 밑에 몇 명의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그때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제가 여기 있는 아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만약 우리 아버지가 살아있다면, 아버지는 반드시 나를 찾아와 구해주실 거라고요."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을 살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수 많은 약속을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지키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살려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지역주민 여러분,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듯이, 부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내 자녀에 대한 관심의 절반이라도 부모를 향해 갖자. 더나아가 자식과 부모를 선물로 주시고,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을 더욱 귀히 여기자.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본래부터 주신 창조의 질서요, 효(孝)의 근본원리요, 하나님의 숨결을 부여 받은 자로서 해야 할 마땅한 인륜이요 천륜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치않는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