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 유성룡> <관용의 리더십>
임진왜란은 조선의
역사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대표적인 인고의 역사다. 하지만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영웅이 탄생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시다.
10여 년 전, 김훈이라는 소설가가 ‚‘칼의 노래‘라는 역사소설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삶을 재 조명했다. 그리고 장군의 죽음에 대해 논했다.
결론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을 통해 “스스로 사지
(死地)를 찾고자 했다“ 라는 것이다.
이런 가설은
믿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둘러 싼 역사적 상황을 종합
해 보면, 그 내용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아니 충분히 사실로 여겨
진다. 그 배경에는 태생적 콤플렉스가 크고, 민심이반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당시의 왕, 선조 때문이다.
선조의 아버지는
선왕 중종의 7번 째 아들이었고, 이에 더해 서자 출신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선조가 왕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종의 적자들이었던 인종, 명종이 후에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요절 했거나, 후손들이 제대로 번성치 못했다. 그 만큼 어렵게 얻은 왕권이라 그는 이를 꼭 지켜 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은 선조를 더욱 무능한 임금으로 비치게 했다.
선조 재위 시는
고질적인 정쟁의 표상인 당쟁이 최고조에 달하던 암울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당쟁의 역사에서 동인과
서인으로 갈렸던 때도 이 시점이었는데, 이런 계기가 된 사건은 절대적인 인사권을 갖게 되는 이조정랑직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에서 시작된다. 동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성룡, 김성일과
같은 이황과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으며, 서인은 정철, 송익필을 중심으로
이이, 성혼의 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
출신 중 한 사람인 정여립이 모반을 획책했다는 이유로 서인에게 주도권이 옮겨 간다. 이후, 서인의 거두 정철의 주도 하에 희생된 동인의 수는 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축옥사)
동인에 속했던
유성룡을 이해하기에 앞서, 가사문학의 대표작품인 ‘관동별곡‘, ‘사미인곡‘의 저자인 정철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송강 정철은 그의 작품과는 달리 그다지
합리적이다 거나, 관용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 보다는 원칙과
소신에 입각해서 관료생활에 충실했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말은 꼭 하고야 마는 매우 곧은 성향의 인물이다.
당시 반대파인 동인의 세가 월등하였기 때문에 남 이야기를 들어 줄 처지가 못되기도 했겠지만, 이에 앞서 소위 4대 사화가 모두 발생했었던 터라 당쟁으로 인한 골육상쟁의 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성룡의 성품은
이 와는 정반대 유형이다. 권력과 부귀 영달에 별 관심이 없었고,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인재를 발굴하려 했던 겸손한 지도자다.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도 유성룡이 임진왜란 얼마 전에 픽업한 대표적인 인재들이었고, 이를 극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위인들이다.
어릴 적부터
천재라 불리던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조련을 통해 겸손함이 더 해진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 이기도 하다. 반대파였던 서인이 기축옥사를 통해 정권을 잡아 수 없이 많은 동인들을 살육했을 때도 선조는 오히려 이들을 견제하고자 유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을 정도다. 또한 임진왜란 발발 후, 투정도 심하고,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군주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하고, 나아가 국경을 넘으려 했을 때도 그는 끝까지 왕을 설득했던 인물이다.
선조가 한양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성난 시민들은 경복궁을 불태웠고, 노비문서들도 소각 했다.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으나, 전국 각지의 의병들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차츰 안정을
되찾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조선의 왕이 국민들을 뒤로 하고 명나라에 망명하는 사태는 없었다.
유성룡의 말로 (末路)
역시 그리 순탄치 않다. 전란 말, 일본과의
화친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쓰고, 영의정 직에서 파직을 당한 후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낙향했다.
결국 그의 누명이 벗겨져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끝까지 그는 조정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그의 공적을
살펴 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인재의 발굴에 더해, 임진왜란 시 설치한 훈련도감은 군사운영의 중요한 기구로 자리매김한다. 낙향한 후에는 임진왜란에
대해 정리한 ‘징비록‘을 편찬함으로써 반면교사로 사용하고자 했다.
실패는 할 수 있어도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 소중한 자산이다. 같은 해,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어디에서든 잘 살 수 있다는 메세지를 전해 주고자 했고, 아울러
자식들에게도 청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생을 마감했다. 모든 재앙은 개인의 이욕 (利慾)
에서 싹 튼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의심의
대가다.
그럼에도 이순신, 유성룡 두 영웅은 의심 많은 군주의 허물을 덮어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들이 펼친 <관용의 리더십>이 진정한 <의리의 리더십>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후에 광해군도 아버지를 닮아서 인지 형과 동생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 마저 폐한다. 그래서 역사의 그림자는 무서운 것인가 보다.
이순신 장군
관련 자료들을 조사해 보면, “정말 이렇게 위대한 애국자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뛰어난 지략과 훌륭한 리더십으로 무장되어있다 하더라도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간질 속에선 자아란 쉽게 무너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장군님은 끝내 구국의 의지를 저버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 결사항전 했고,
승리했다.
“전하, 신(臣)에겐 아직12척의 배가 남아 있지 않사옵니까!“
갖은 문초를
겪으며 휘어 버린 골반과 다리를 이끌고 전쟁터로 급히 달려 가시는 장군님의 뒤 모습에 마음이 무거워 진다. 아니 감동의 눈물이 고인다.
<관용의 리더십>본래 주인은 바로 이 분임에 틀림 없다.
<다음은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참모 최명길에 대해서 논해 보고자 합니다>
첫댓글 유성룔과 이순신장군이 없었으면 조선은 망했을 것이고 현재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를 가끔 생각합니다.
유성룡과 동향 출신이며, 함께 수학한 김성일은 (동인) 선조의 명에 따라 일본수신사로 다녀 온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킬 인재가 못 된다는 식으로 보고하지요. 평소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율곡 이이 (서인의 영두)와는 반대되는 의견이었는데, 결국은 동인출신들 때문에 안일한 대처를 하게 된 것이고, 전쟁 후에 수습한 꼴이 되어 버립니다. 준비도, 대처도, 결과도 모두 좋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