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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아버지와 어머니 Père et mère
Deleuze, in 냉정함과 잔인함(Le froid et le cruel, 1967), 원50-61, 번 68-82
- Deleuze, Présentation de Sacher-Masoch. Le froid et le cruel, avec le texte intégral de La Vénus à la fourrur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coll. « Arguments », 1967, P. 276.
*** 라깡을 벗어나 다른 길로, 이 5장은 들뢰즈를 읽을 수 있는 좋은 통로이다. 기원후 서구 철학사가 크리스트교라는 너울에 씌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황제를 만드는 시절에 파란 너울처럼을 씌었다. 진리의 탐구는 너울을 벗기는 것이다. 맨살로 세상을 만난다기보다 세상 속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사캬족의 현자는 그 자연의 숙명을 알았던 최고의 철학자들 중의 한 철학자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제국과 전쟁에서 이긴 시기에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싯달다는 출가전의 왕국이 망하는 것을 보아야했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등불이 꺼지는 그 시점에 독배를 마신다. (53WKE)
* 이 5장(§05.)의 제목이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아버지 대 어머니’이다. 이 두 단어는 부모라는 한 단어와 다르다. 또한 신랑과 신부(남편과 아내)의 이성(二姓)의 결합(부부)과도 다르다. 게다가 페니미즘의 주제인 여성과 남성이라는 주제와 다르다. 그러면 이런 문제거리의 논의에서 뭣이 문제거리이냐에 대해 말하려면 주춤하게 된다. 여성 대 남성으로 본다면 가정 또는 가족을 포함해서 인류학적으로 논의 되어야 할 것이고, 남편과 아내라는 주제에는 가정의 결성과 합의 또는 사회적 공통규약에 대한 논의가,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명칭에는 이를 부를 수 있는 자식이라는 제3의 인격이 첨가되어야 한다. 논의를 도식상으로 보면 대립과 조합 그리고 관계와 연관에 따라 달리 서술해야 하는 경우들이 있다. 문제거리를 올바로 제시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치유)라기보다 해소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선은 통시태(시대와 사건의 계속적 관계)보다, 형성되어진 장면에서 공시태를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둘 또는 양자의 만남의 공시태의 관계를 본다는 것은 다른 연관들을 우선 제외하고 본다는 점에서 도식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명과 해석은 공시태의 도식에서 이루어지고, 프로이트의 후기에서 상징-상상-실재라는 삼원성에서 보려고 할 것이다. 가정이 사회의 부분이고, 사회는 보다 큰 공동체의 부분이라는 점은 그래도 유효하다. 이런 확장에서 공시태에서 통시태의 관점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두 인격이 가정을 이루는 것은 어째거나 다른 성씨의 부모들의 각각에서 나온 두 인격의 결합이고, 이 결합의 요소들이 두 인격의 어제-이제-아제의 연관이 이어져 온 과정 속의 한 위치 또는 현실이라는 점들과 같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가족이라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고, 둘 사이의 연관에서 세력적으로 보아, 가부장인지, 모계적인지는 둘의 앞 시대의 연관을 벗어나서 탐색할 수 없다. 그럼에도 공시태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아버지 우선 또는 어머니 우선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면, ‘우선’이라는 조건을 갖추는 상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삶의 터전에서 역할의 차이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성차(性差)가 있어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성차를 위계로 볼 것인가 또는 계약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요즘 사회에서 당연히 계약이라고 할 것이다. 사회나 공동체에서 다루기를 미루고, 가족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사이의 계약이 무엇이냐는 공동의 선을 향하는 노력의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즉 살아가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분석이나 분열분석의 주제는 둘 사이에 성적 또는 애정관심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회 또는 공동체에로 확장하려고 한다. 또는 공동체 안에서 애정관심의 축소판이 가정의 애정관심으로 다루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둘은 별개이다. 사회적 애정관심은 너무나 다양하여 법과 제도로서 규제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겉으로는 유지하고 있는 듯해 보이지만, 개별 인격의 애정관심에 관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제도와 관습이 있어서 여성의 모성애를 말하고 있지만, 모성애란 것도 인격 대 인격의 연관은 천차만별의 다양체들이다. 변종들이 활동상이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시대와 한 사회의 공시태에서 부모상, 아버지상 또는 어머니상이 공통감각(공통개념)으로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양체들과 변종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변에서 얼마든지 사례를 볼 수 있다. 그 사례들에 대해 조언, 충고, 치유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저 자기의 살아온 내력에서 사례에 대해 비유적 표현과 서술을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사례에 속한 자에게 해결 또는 해답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치유를 했다고 하는 것은 환상 또는 망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우여곡절의 사례들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무엇인가를 담론으로 끌어내어, 대화자들의 사유의 폭을 넓히고, 또한 삶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노력은 인류 역사상 꾸준히 있어왔다. 그런 담론을 하나의 주인공을 설정하여 논의하게 되는 것은 인민이 성립하려는 19세기에서부터라고 보면 그럴듯하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애정관심 또는 성적문제가 자식이 있을 때 또는 자식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유성을 찾아나갈 때,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을 논의하는 것은 소설을 넘어서 학문적 담론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드의 소설과 마조흐의 소설이 담론의 장으로 들어올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종속인가? 가부장제와 위계체계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른 삶의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는가? 여기에 모계사회와 아마존의 여성들을, 또는 유목민족의 가족관계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소설 상에 또는 학문상의 인격들에 관한 논의에서 어쩔 수 없이 인류가 살아온 방식을 끌어올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공시태의 주인공이 아니라 통시태라는 인류 인격 형성의 과정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인류의 삶의 과정에서 현재 공시태의 삶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문제제기의 실마리가 다른 길로 가고 있다고 여긴다. 애정관심에서만 문제 삼자라고 하게 되면, 인류의 사유과정에서 애정관심과 성관심이 왜 19세기말 20세기 초 인가를 제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신나는 세기(벨 에포크)가 남성 권력체제에서 인민들 사이에서도 제도처럼 재영토화 과정을 겪으면서, 혁명을 수행했던 여성들이 배제되고 소외되고 부인되어간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의 지위에 대한 것보다 먼저 인민이 스스로의 지위를 차지하려는데, 배제, 소외, 부인의 현상이 어디에서부터 등장했던가? 여기에 맑스의 장점이 있다.
19세기 인민의 성장이 산업사회의 부의 축적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그 생산물의 소유와 활용에서도 소외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한 배제와 소외가 무엇을 부인하고 부정할 때 이런 현상이 생길까? 인민은 잘 몰랐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인민의 개혁과 혁명의 의식은 여전히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고 확장하려 하는데 대한 부정과 부인이 있다는 것을 겪는다. 그 부정과 부인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로서는 한마디로 유일신앙이 자기 이외를 배척하고 무시하고 무화하려는 과정을 이용했을 것이다는 점이다. 그 무화의 배경에 속좁은 이성의 과학주의도 가담하였다. 깊이 들여다보면, 국가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카르텔이 공고화됨에 따라 인민이 배제되어 가고, 그리고 여성이 가부장의 가족 안으로 갇히게 되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민의 성장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금기시하는 그 유일신앙과 국가의 제도 체계가 협동으로 만든 제도 또는 영토화가 지구상에 보편이란 이름으로 퍼져나가면서 생긴 것이리라. 이런 제국주의화 과정에서 무시된 것은 여성뿐만이 아니라 제도 안에서 인민들이라는 점이다. 내 생각으로는 혁명은 필요했고 또한 일어나야만 했다. 그럼에도 두 번의 세계 전쟁은 그 혁명의식을 무화시켰다. 물론 1차대전이 소련을 2차대전이 중국을 만들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술과 산업이 주가 되었지 인민은 뒷전이었으리라.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하다. 태평양 전쟁에서 인민 전체가 무화되었고, 그리고 자의식의 발현 시기에 제국주의의 전쟁으로 폐허 속에서 생존이 문제거리였다. 애정관심 또는 성관심이 없다고? 그 전쟁은 성의 지배와 제도조차도 무시하였고 또한 계약조차도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유일신앙이 이런 무질서에 질서를 가져온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질서가 제국주의 재영토화의 과정과 같았다고 본다. 전쟁이 아니라 공화의 투쟁과 전투가 제국의 재영토화에 빠져 들어갔으리라. 그러고 나서 이런 투쟁과 전투조차 사치로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배제하면서, 강압과 착취, 그리고 지배와 예속의 강화의 과정을 걸었다.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니체의 말이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넘어오면, 부인, 부정, 무화의 상징적 대상에 대한 해결의 방식처럼 쓰인다. 그러나 프로이트와 그 이용자들은 상징에 포획되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그러나 가타리의 분열분석에서는 괴물과 싸우는 이들이 있거나 말기나, 새로운 창안자들은 달리 탈영토화의 길을 가자고 한다. 이들이 그 제도와 체제와는 다른 것을 생성하려는 노력을 하면, 이번에는 두 괴물들이 합심하여 이 이들을 먼저 괴물로 만들려 덤벼든다. 국가 보안법이 두 괴물이 싸우는 동안에 사문화되었다고 하지만, 서로 싸우는 동안에는 탈을 벗지만, 새로운 창안자를 몰아붙일 때는 이들 둘다 같은 괴물로 덤벼든다. 즉 탈영토의 생성을 만나면, 이 두 괴물은 언제든지 국가보안법을 들이밀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인민의 성립과정에서 이 새로운 생성자들을 주목해 보면, 이들은 정상과 비정상(anormal)이라는 이분법의 구별에서 벗어난 별종(anomalie)이라는 것이다. 두 괴물이 이 별종을 언제든지 자신들은 선하고 별종을 괴물로 취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쟁 없는 평화의 구축, 8천만이 다양체로서 사유할 수 있는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탈영토와의 길을 걷는 별종들의 것이리라. 이 별종들은 현실 사회의 규범과 법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들을 두고서도 달리 말하기, 달리 표현하기, 달리 살기로 하면, 변곡점을 만들 상황들은 너무나 다양하게 널려져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 다양체로서 별종은 역사의 과정을 포함하고, 현재의 상태의 균열을 내고 그 통로를 만들어, 아제인간에게 다양하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게 할 것이다. 남북이 북남이, 이제는 전쟁 없이 서로 서로 다양체와 별종의 역할들 기대할 때가 올 것같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위는 가정, 가족, 사회, 국가라는 제도의 산물이라기보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스스로 인격 만들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의 사건들 또는 공통개념들이다. 그 별종들로서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 있고, 수도자(un moine)와 여성 수도자(une nonne)도 있고,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시태에서 우선성을 담론으로 설명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의 성격을 해설 또는 표현하는 우화적 이야기의 하나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신화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영웅이라는 이름의 비유를 쓰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 우화의 성립은 공시태에서가 아니라, 그 등장인물을 생성한 시기가 통시적으로 의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변곡점은 자본의 투기처럼 도박(le pari)가 아니라, 삶의 양식을 다양하게 하는 놀이(les jeux)일 겄이다. 우선 대중 가요의 사건이 놀이를 하고 있다. 니체의 주사위 놀이는 아제인간의 것이듯이. (53ULH, WKE)
{들뢰즈가 1967년 이 작품을 쓰기 전에 아마도 프로이트에 대해 많은 부분에 관해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구강에 관한 이야기든, 여기에서 외디푸스에 관한 것이든 또한 앞에서 라깡의 해석 따위든, 프로이트에 관한 일반적 해석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1967년 이런 책이 나왔을 때, 왜 라깡이 세미나에 들뢰즈를 부르려 하지 않았겠는가? 불렀는데도 가지 않았다는 설이 더 유력할 것 같다. 학위논문을 써야 하는 시기인데다가,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을 이미 마조흐에서 느꼈으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부분적으로 이의 제기를 할 정도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마조히즘을 분석하다니? 즉 사디즘과 마조히즘 속에서 자아와 비인칭적 연관을 찾으려 했을까?
한가지 더, 가타리를 만났을 때 이 작품에 대해 상당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다. 안티외디푸스에서 분열분석은 이 작업이 기초가 되었을 것 같다. (lu, 53TLG), (53WKF)}
** 들뢰즈와 가타리가 철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philosophie?, 1991)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하는 태도에 대해 강조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 크리스트교의 복음서로부터, 즉 삼원성에서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게다가 들뢰즈가 쓴 짧은 논문인 「플라톤과 그리스인들(Platon, Les Grecs)」에서 내재성과 권능을 강조하며, 그 논문의 의도는 진솔하고 소박한 그리스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리라. <“선별은 주장에 더 이상 근거하지 않고 권능(la puissance)에 근거한다. 이 권능은 주장들과 반대로 소박하다(modeste). 진실로 플라톤주의를 벗어나는 철학들은 순수내재성의 철학들이다. 즉 스토아학자들에서부터 스피노자 또는 니체이다.”(논문 마지막 문장들)>. 이 논문을 보건데, 마조흐의 분석의 노력은 이미 그리스인에 대한 크리스트교의 이교도로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서구의 플라톤주의 또는 주지주의는 너무나도 크리스트교로 덮여져 있다. 20세기 현상학이 또는 하이데거가 알레테이아를 말한다면, 크리스그트교의 너울을 벗겨야 한다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상의 너울을 벗기려 했기에, 신칸트 학파의 속좁은 이성에 매여 있었던 것 같다. (53W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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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정함과 잔인함(Le froid et le cruel, 1967)
§05. 아버지와 어머니68-82 Père et mère 50-61.
Problème du role du père dans le masochisme. / Rôle du père dans le sadisme et chez Sade. / Annulation du père dans le masochisme et chez Masoch. / La série des trois femmes et le triomphe de la mère orale: la bonne mère. / Le Tiers, et le retour hallucinatoire du père. / Le contrat et l’annulation. (50)
마조히즘에서 아버지 역할의 문제. / 사디즘에서와 사드에게서 아버지의 역할. / 마조히즘에서와 마조흐에게서 아버지의 무화. / 세여성의 계열과 구강 어머니의 승리; 선한 어머니. / 제3자, 그리고 아버지의 환각적 귀환. / 계약과 무화.
§05.1. 마조히즘에서 아버지 역할의 문제. - Problème du role du père dans le masochisme.
어머니와의 명백한 갈등과 모든 원인을 어머니 탓으로만 돌리려는 마조히스트의 태도를 생각해 볼 때, 마조히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주장이 있다. (50, 68) [이런 주장에는 오류가 많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매질을 가하는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인 이유는 무엇인가? ... 첫째로 너무 노골적인 동성애를 회피하기 위한 필요가 있고, 둘째로 갈망하는 대상이었던 어머니가 최초의 단계로서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대상에게 아버지의 처벌행위를 접목시킬 필요가 있고, 마지막으로[셋째로] 아버지에 대한 탄원한다는 증명으로 이러한 [과정] 전체를 재통합하려는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보세요,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바로 저를 괴롭히고 거세하고 때리는 어머니라구요‥….” (51, 69)
이런 계기들의 계속에서 아버지는 계속해서 규정하는 인물로 되는데, 이유는 사람들이 마조히즘을 서로가 서로를 상호 변형할 수 있는, 통과[이행]할 수 있는, 매우 추상적 요소들의 조합으로서 다루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일체[집합]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오해가 있다. (51, 69-70)
라이크(Theodor Reik, 1888-1969) .. “마조히즘적인 경우들을 연구해 볼 때 마다 항상 우리는 매질하는 여성 뒤에 숨어 있는 아버지나 그 대리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 역사적인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환상과 행위로서 가장 오래된 마조히즘의 배내옷(la couche 근원)은 결국 어머니-자식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필수적이고 항구적인 아버지의 역할에 관한 소위 자신의 “인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51-52, 70)
§05.2. 사디즘에서와 사드에게서 아버지의 역할. - Rôle du père dans le sadisme et chez Sade.
확실히 사디즘에는 부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주제가 지배적이다. 사드의 소설에 여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위, 그들이 공유하는 쾌락, 공통의 계획은 모두 남성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사드의 양성(l’androgyne)은 딸과 아버지의 근친상간적 결합의 산물이다. (52, 71)
어머니는 “몰랑한” 분자로 구성되어 있고, 창조ㆍ보존ㆍ재생산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 이차적자연에 동일시되어있다. 반대로 아버지는 사회적 보수주의에 의해서만 이런[이차적] 자연에 속할 뿐이다. 아버지 자신은 통치들과 법률들 그 위에서, 무질서와 아나키를 옮기는 난폭하거나 날카로운 분자들로 구성되어있어서 일차적자연을 증거한다: 아버지 즉 제일 자연(pater sive Natura prima)이다. (52, 71)
사드적 환상은 클로소프스키(Klossowski, 1905–2001)가 깊이 있게 분석했던 궁극적 주제에 근거한다. 즉 자기 자신의 가족의 파괴자로서 아버지는 딸로 하여금 어머니를 고문하고 살해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52-53, 71) - [사디즘을 사회 문화적 통제의 관점에서 읽으려는 것도 삼원성의 삼각구도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자연도 그 구도 속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일 것인데 클로소프스키의 1933년 작업은 그 분위기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면에서 볼 때, 사디즘은 어머니에 대한 능동적인 부정이며, 동시에 모든 법칙들 그 위에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의 팽창(une inflation)이다. (53, 72) - [유일신앙은 다단계처럼 팔루스라는 성부의 아래로 확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민의 회오리의 성장은 팔루스와 방향만이 반대방향이라는 것을 넘어서 결(파장)의 확장이다. (53ULG)]
§05.3. 마조히즘에서와 마조흐에게서 아버지의 무화. - Annulation du père dans le masochisme et chez Masoch.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몰락(Le déclin du complexe d'Oedipe, 1924)」에서 두 가지 출구를 지적한다. 어린애가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사드적인 능동적 출구, 반대로 그 애가 어머니의 자리를 차지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수동적 출구가 있다. (53, 72)
프로이트는 「늑대인간(Wolfsmann, l'homme aux loups, 1910-1914 임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디즘에서는, 그가 아버지와 가장 오랜 동일화 방식을 확고하게 유지하고, 마조히즘에서 그는 이 아버지를 성적 대상으로 선발했다.” (53, 72) -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프로이트가 성적으로 생각하기를 고집했는지에 의문이 생긴다. 아버지는 경쟁대상이기도 하고 애정관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그 대상은 비유에 가까운 비유 설정에 관계이지, 이데아적 대상 설정에 집착하는 것이 위계적(유일신앙) 사고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53ULF)]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조히즘에서 매질하는 진실한 인물이 아버지이라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할 때, 또한 우리가 바로 질문해야하는 것은 그 아버지이다. 우선 누가 매를 맞는가? 아버지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아버지가 매 맞는 자(le battu) 속에 있지 않을까? 그 마조히스트[매맞는자]가 스스로 혐의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매를 벌어 당하고, 속죄한다. 그러나 무엇에 대해서 왜?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매를 벌며 소형화 되어 있는 자, 웃음거리가 되고 굴욕당한 자, 그 자안에 있는[감춰져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아닐까? 그 자가 속죄하는 것은 자신과 아버지의 유사성, [자신의 내부에 감춰져 있는] 아버지의 닮음 모습이 아닌가? 마조히즘의 공식은 바로 굴욕 당한 아버지가 아닌가? 아마도 그 아버지는 매질하는 자라기보다 당하는 자일지 모른다‥… (53-54, 73) - [매를 맞는 자에 대한 프로이트의 논의에서 한 아이가 맞는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맞는다고 해야 한다고 들뢰즈는 본다. 아버지(팔루수)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가부장제, 군주제의 체제에 대해 매질하는 것이 비너스(어머니)인 셈이다. - 진솔한 페미니스트는 한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체제, 게다가 권력과 권위에 대한 저항과 부인이다. (53ULG)]
이러한 이유로 세 어머니의 환타즘 속에서 매우 중요한 점이 나타난다: 어머니의 삼원성 해체의 효과는 상징적으로 여성의 이미지들에 관한 아버지의 기능들로 상징적으로(symboliquement) 전이하는데(transférer) 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배제되고 무화된다. 마조흐의 대부분의 소설들에서, 사냥장면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이상적 여성은 곰 또는 늑대를 사양하고, 가죽을 벗긴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남성에 대한 여성의 투쟁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었으리라. 사실상,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승리는, 마조히즘이 시작할 때, 이미(déjà) 획득되었다. (53, 73) -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대립항이 아니라, 마조히즘이 사디즘 보다 먼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 어쩌면 모계사회 또는 군혼(난혼)시대에 여성은 남성보다 또는 남성만큼이나 사냥을 하는 아마존여인들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까? / 마조흐가 어린 시절 경험한 사르마티아 여인의 모습에서, 먼 친척 아줌마의 모습에서, 여성의 야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동맹(alliance)이 셋째 어머니와 사디스트 남성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 이처럼 청춘의 샘물(Eau de Jouvence)의 엘리자베스와 이폴카, 영혼을 낚는 어부의 드라고미라와 보구슬라프, 모피를 입은 비너스 완다와 그리스인 등이 나온다. .. 그런데 남성의 재등장은 마조히즘 양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외디푸스적 어머니가 자기의 권리들과 자신의 총체를 간직할 수 있는 경우이다. ..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그리스인[여성복장으로], 청춘의 샘물(Eau de Jouvence)에서 엘리자베스는 어린 소녀 지젤을 죽임을 [연출된다]. ... (54, 74)
§05.4. 세 여성의 계열과 구강 어머니의 승리; 선한 어머니. - La série des trois femmes et le triomphe de la mère orale: la bonne mère.
그러나 아버지의 기능들을 어머니의 세 이미지로 전이하는 것은 환타슴의 첫째 측면일 뿐이다. 그 환타즘은 다른 한 요소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발견한다. [즉 그 다른 요소들 안의 의미란,] 둘째 측면의 어머니, 구강적 어머니, “선한 어머니”라는 모성적 기능들을 유지하는 모든 기능들의 압축이다. 마조히즘을 나쁜 어머니 주제와 연관 시키는 것은 오류이다. 마조히즘 속에 약간의 나쁜 어미들이 있기는 하다; 즉, 자궁의 어머니, 외디푸스적 어머니, 추의 두 극단. (54-55, 74) - [자궁 어머니, 구강 어머니, 외디푸스(남근) 어머니, 이 셋이 세 이미지이다. 둘째 구강 이미지는 좋은 것이고, 첫째와 셋째에는 나쁜 이미지라고 하는데, 첫째 이미지는 중성적이고 셋째 이미지가 나쁜 이미지로 보인다. 그 팔루스적인 행위에 대해 매맞는 것은 아버지라는 의미일 것이다. 셋째와 유비적 연관은 “8장의 계약에서 의례로”에서 가부장과 모권제로 이어갈 것인데, 마조흐도 이에 대해 그리스 이방인(이교도)에서 끌어내지 않고, 유일신앙의 카인과 예수에서 끌어낸다는 점에서, 유럽 크리스트교 제도 속에서 공론화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공통용어는 삶에서 공통이지, 유일신앙에서 공론화가 아니다. 유일신앙에서 공론화는 자본제국 속에서 공론화와 유비적으로 닮았다. 아버지 신앙과 반공산주의가 발흥하는 1871년 이후의 독일 공론화가 공통용어가 아니라 개념화의 길로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53UMC)]
사드에게서 보편적화류계[매춘]의 꿈은, 그 꿈이 “범죄 동료 조직”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은, 어머니들의 파괴와 동시에 딸들의 선별을 보증[확인]해야만 하는 객관적 제도(une institution objective) 속에 투사 된다(“거지(gueuse)”로서 어머니와 공모자로서 딸). 마조흐에게서 이상적 화류계(매춘)는 사적인 계약(un contrat privé)에 근거한다. 계약에 의해서 마조히스트의 영웅은 선한 어머니인 한에서 그의 아내를 다른 자들에게 제공하도록 설득한다. (55-56, 75)
구강적인 선한 어머니로 향한 이런 집중화는 첫째 측면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 측면에 따라서 그 아버지는, 세 여성 사이에서 아버지의 구성물들과 기능들로 분배되어서, 무화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 세 여성은, 정확히 구강 어머니의 승리로 이끌어야만 하는 자신들의 투쟁과 자신들의 구현(épiphanie, 실현)을 위하여, 자유로운 영역[장(場)]을 갖는다. (56, 76)
§05.5. 제3자, 그리고 아버지의 환각적 귀환. - Le Tiers, et le retour hallucinatoire du père.
그러면, [우리는] 제3자로서 남자가 마조히스트의 환타슴에 도입되고 또는 재도입되는 방식을 더욱 가까이에서 고려해야만 한다. 제3자의 탐구, “그리스인”의 탐구가 마조흐의 생애와 작품을 지배한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리스인은 두 모습을 갖는다. 하나는 환타슴에 내적으로서, 여성적이고 변장되어 있다. 그 그리스인은 “여성에 닮았다‥… ...”. 다른 하나는 남성적인 측면으로서, 반대로 환타슴과 마조히즘의 연습에 종지부를 찍는다.(57, 77)
우리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무화된 아버지가 그래도 계속해서 실재적 또는 체험된 질서 속에서 작동한다고 이해해야만 한다. 라깡(Lacan, 1901-1981)은 깊이 있는 법칙을 알렸는데, 그 법칙에 따르면 상징적으로 폐기된 것은 실재(le réel)에서 환각적(hallucinatoire) 형태로 다시 일어난다.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마지막은 전형적으로 아버지의 공격적이고 환각적인 귀환을 표시한다. 앞서 인용된 텍스트에서, 모든 것은, 장면의 실재성이 환각적의구심(appréhension hallucinatoire)의 양식(un mode)을 요구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 실재성은 판타슴(le phantasme환상)의 추구 또는 연속성을 불가능하게 한다. (57, 77-78)
라이크(Reik, 1888-1969)는, 마조히스트 장면의 “마술(magie)”이 사라진다는 한 경우를 인용하는데, 왜냐하면 주체는 아버지를 팰 준비가 된 여성 속에서 그녀에게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어던 것을 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라이크는 이 경우에 주를 다는데, 아버지가 박해자 여성의 진리일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의 이미지로 위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이크는 이로부터 사도-마조히즘을 위한 논증을 끌어낸다. 우리는 그로부터 반대 귀결들을 끌어내야만 한다고 믿는다. 라이크는 주체[환자]가 “착각에서 깨어나다(désillusionné, 환멸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환상에서 깨어났으나(dé-phantasmatisé)”, 반대로 환각적이 되고 환각화 되었다고 말해야만 했을 것이다. (57-58, 78) [마조히스트는 착각에 빠진 것이 아니라 환상에 빠졌다가 벗어났지만, 환각적이 되었다.]
§05.6. 계약과 무화. - Le contrat et l’annulation.
그렇다면 마조히스트는 그러한 회귀에 반대하여 - 아버지의 공격적인 회귀(le retour)라는 실재성과 환각에 동시에 반대하여 - 스스로 조심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만드는가]? 마조히스트의 주인공은 자기의 환타스틱과 상징적 세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또한 실재의 환각적 타격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복잡한 절차를 사용한다(사람들은 환각의 실재적 타격들을 또한 말하리라). 우리는 그러난 절차는 마조히즘 속에서 통상적 방식이라는 것을 볼 것이다. 즉 그것은 계약(le contrat)이며, 여성과 맺어진다. (58, 79)
계약에 의해서 마조히스는 매 맞게 되어있다. 그러나 자기 속에 매를 맞게 하는 것, 굴욕당하게 하는 것, 조롱 당하게 하는 것, 그것은 아버지의 이미지, 아버지를 닮은 것, 아버지의 공격적 회귀이다. 매를 맞는 사람은 “어린이”(un enfant)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인 것이다. 마조히스트는 새로운 탄생을 위해 자유롭게 되는데, 거기서 아버지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한다. (58-59, 79)
그러나 계약에서조차 마조히스트가 제3자, 즉 그리스인을 부르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매우 열렬하게 제3자 또는 그리스인을 원하는가? 틀림없이 한 측면이 있는데, 그 특면에 따르면, 제3자는 아버지의 공격적 회귀(귀환)의 위험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아주 다른 의미에서 새로운 탄생의 기회(la chance)이고, 마조히스트 훈련(연습)으로 나오게 되는 새로운 인간의 투사이다. (59, 80)
마조히즘은 환타슴의 기술[기예]이다. 그 환타슴(환상)은 두 계열에서, 두 극단에서, 두 “가장자리”에서 역할을 한다. 이 둘 사이에, 환상의 진실한 삶의 구성하는 공명이 정립된다. 이리하여 마조히스트의 환상은 상징적 가장자리들로서 자궁의 어머니와 외디푸스적 어머니를 갖는다. 이 둘 사이에는 구강적 어머니가, 즉 환상의 심정(핵심)이 있다. (59, 80)
루드비히 2세에 관한 에피소드 이런 점에서 표본이다. 그의 희극적 효과는 서로 대치된 과시(des parades 행진)들로부터 온다. (59, 81)
물음이 있다. 마조히즘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사디즘은 마초적이고 능동적인가? 이런 물음은 이차적인 중요성일 뿐이다. 이 물음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공존에 대한, 서로서로에로 귀환(retournement), 양자의 통일성에 대한 편견이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각각 부분 충동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형태들이다. 마조히즘은 자신 속에(en lui) 구강적 어머니와 아들의 동맹으로 살고 있고, 마찬가지로 사디즘은 아버지와 딸의 동맹으로 살고 있다. (60, 82)
우리는 마조히스트가 자웅동체(hermaphrodite)[예, 지렁이]이며, 사디스트가 양성체(androgyne)[호박꽃]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세계는 평행선과 같으며, 자체로서 완전하므로 서로 상대의 세계에 침투할 필요도 없고 침투할 수도 없다. ... 그러나 사디즘과 마조히즘 사이에는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불균형이 존재한다. (60, 82)
사디즘은 어머니에 대한 적극적인 부정(négation)과 아버지의 확대(법칙보다 더 위에 있는)를 나타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마조히즘은 이중적인 부인(dénégation)으로, 즉 어머니(법칙과 동일시되는)에 대한 긍정적이고 이상적인 거창한 부인과 아버지를 무화시키는(상징적 질서로 쫓겨난) 부인으로 작동한다. (82)
(53TLH) (8:28, 53VKA) (9:06, 53V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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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 Le déclin du complexe d'Oedipe, 1924.
구강 단계(Stade oral: 18개월까지), 항문 단계(Stade anal(+ oral): 18개월-3살), 남근단계(Stade phallique(+oral, +anal), 3살에서 7살): 이때가 외디푸스 상황(Situation œdipienne), 잠재 기간(Période de latence(+oral, +anal, +phallique), 7-8살), 생식기 단계/ 국면(Stade génital « phase génitale »: 청소년기(Adolescence), 신체 성징이 드러남)
« Extrait de l’histoire d’un névrose infantile » (l'homme aux loups) (1914) in Cinq psychanalyses, Paris, Puf, 1954.
1888 라이크(Theodor Reik, 1888-1969) 오스트리아-미국 정분석학자. Trente ans avec Freud (From Thirty Years with Freud, 1940), 현대인에서 마조히즘(Masochism in Modern Man, 1941(Le Masochisme, Paris Payot, 1953) / 성과 사회에 있어서 마조히즘, M. H 바이젤, B.M. 커스 역(그로브, 1962), pp 201, 209.
1901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 티비 대담 정신분석학(La Psychanalyse) I,II - 1973 영화감독 쟈꼬(Benoit Jacquot, 1947-)는 밀레(Jacques-Alain Miller)와 작업하여, Psychanalyse I and II를 프랑스TV에 방영하였다(1973). 다음해 책으로 두 권이 나온다. / 영국 비데오(1974): 1. Lacan on the unconscious, 2. La Jouissance. 3. What Freud Discovered in the Unconscious. 4. Repression, Family, and Society. 5. Psychoanalysis and Psychotherapy. 6. Le Versant[경사면] De L'Analyse.[여기만 불어로] 7. Lacan on La Guerison (the Cure). [치료라기보다 해소, 다음에는 다른 문제제기]
1905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프랑스 소설가, 철학자, 번역가 화가. Sade mon prochain (1947), Le Souffleur ou le Théâtre de la société (1960)(프롬프터: 배우에게 대사를 나지막히 읽어주는 사람). Les Derniers Travaux de Gulliver suivi de Sade et Fourier (1974) [걸리버 여행(Les Voyages de Gulliver) 스위트트(Jonathan Swift)의 풍자소설, 1721년에 쓰고, 1726년 출판하고, 1735년에 완성본을 낸다.]
"Éléments d'une étude psychanalytique sur le Marquis de Sade", in Revue Française de Psychanalyse, vol. VI, N°3-4, pp.459-474, 1933. 이 논문에서 I. 사드 작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2. 사드 작품에서 악의 의미, 두 가지를 다루고 있다.
「롱샹 호텔레서 로베르(Roberte à l'Hôtel de Longchamp. 1979」 클로소프스키의 연필과 파스텔 그림(148 x 152 cm)
환대의 법칙들(Les lois de l’hospitalité (L'Imaginaire), 1965)(P. 364)
1923 올라니에(Piera Aulagnier, née Spairani, 1923-1990)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이탈리아에서 의학, 그리고 라깡의 제자가 되었다. 그녀는 “제4집단”의 회원이며, 정신분석학 잡지인 Topique의 공동편집자였다. La violence de l'interprétation - du pictogramme à l'énoncé, 1975,
1944 밀레(Jacques-Alain Miller, 1944-) 프랑스 정신분석가. 프로이트 대의파(École de la cause freudienne) 소속, 라깡(Jacques Lacan)의 사위.
1947 쟈꼬(Benoit Jacquot, 1947-), 프랑스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그는 라깡의 사위인 밀레(Jacques-Alain Miller)와 작업하여, 라깡의 Psychanalyse I and II를(1973) 프랑스TV에 방영하였다. (53TLH)
(9:37, 53VKA) (10:14, 53VLF) (11:17, 53W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