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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 형성과 성경 비평
안 유 섭 목사 (아르케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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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 형성과 성경 비평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의문은 불신자들과 또 기독교 내에서는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사실 모든 성경의 기록자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의문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앙의 근본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경은 믿음 성장에 필요한 영적 양식을 공급하여 주며, 참된 신앙과 변질된 신앙을 판별하는 기준도 성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다운 성도라면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섭리하셨음에 감사하여야 한다.
1. 성경의 영감이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사람이 쓴 수많은 책들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인간 지성과 사고의 산물로서 인류의 정신과 문명을 보존시키는데 귀중한 몫을 담당하여 왔다. 그런데 세상의 책과 구별되는 유일한 책이 있으니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비록 인간에 의해 기록되어졌을지라도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을 한 말씀 한 말씀 씩 받아 적어 성경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즉, 성경 기록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면서 비록 자신의 개성과 인격과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였으되, 하나님의 성령의 개입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지에 조금도 대립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나타나도록 기록하였다는 뜻이다.
성경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경 도처에서 발견되어진다.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경 66권이 1,500년이 넘는 기간동안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어졌으나 그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야말로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완벽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성경 기자들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주님의 제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역사 속에서 각각 제각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며, 또 저마다 뚜렷한 개성과 인격과 신념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수천 년에 걸쳐서 별개로 기록된 문서가 모아졌을 때 중심 사상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고 있으며 어느 것도 중심 주제에서 이탈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분명히 성경을 기록할 때 기록자의 역량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어떤 통일을 이루는 힘에 의해 그것이 이루어 졌음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계속적으로 모든 인류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어떤 특별하신 개입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계시와 영감의 관계 속에서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계시와 영감
성경은 세상 역사나 인간의 문학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으며(갈 1:12, 계 1:1) 영감을 받는 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딤후 3:16, 벧후 1:21)고 성경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 계시(Revelation)란 말은 글자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며 헬라어 아포칼륍시스(αποκ?λυψι?)를 번역한 것으로서 원래는 뚜껑을 열어서 감추었던 것을 꺼내어 보인다는 뜻이다. 따라서 계시는 인간에게 진리를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계시하시며, 계시의 목적은 무엇인가? 계시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가 있는데, 자연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심으로써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하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섭리를 도저히 알 수 없으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도 없고, 다만 인간에게 있는 종교심을 통해 막연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정도에 그치게 되므로 자연계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자연계시와는 전혀 다르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한 특별계시를 주셨다. 이러한 계시는 인간이 들을 수 있도록 여호와의 사자들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 경우가 많으나, 인간이 초감각적인 감동을 통해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전달해 주시기도 하셨으며, 드물게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 위에 기록하셔서 주신 일도 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은 모세 이전에는 기억으로 전승되었지만, 모세 이후에는 항상 기록되어졌으므로 그 다음부터는 주로 기록된 형태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며, 그것은 인간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로부터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혜와 지식을 담고 있다. 첫 인간 아담의 범죄와 타락으로 영적 자각능력을 잃어버린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얻는 참된 길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길을 정하시고 그것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성경을 통하여 인류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보통 계시라고 하면 특별계시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영감(Inspiration)은 데오프뉴스토스(θε?πνευστο?)를 번역한 말인데, 글자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입김 또는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기록자들에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으로서 이것을 통해 신적 확신을 얻고 성경을 기록하게 된다. 따라서 마 4:4에서 주님께서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영감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성경 기록자들이 받아들이고 기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물론 영감의 근본적인 동인(動因)은 하나님이시므로 성령께서 감동을 받은 자에게 직접 작용하시지만, 인간은 영감에 의해 지각을 얻고 이러한 영감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거나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라면 영감에 대해서는 인간이 영감을 통하여 영감에 따르는 행위를 하기 때문에 인간의 행동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감은 기록자의 인격과 개성을 무시하고 작용하지 않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에 영감을 받고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각 받은 대로 성경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다.
영감과 조명
그런데 이렇게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읽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인간의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많은 내용들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의 한계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초월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나 사도들 이전의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조명(Illumination)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성령께서 주시는 독해력(Comprehens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깨닫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에게 창조적인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다면, 그것을 읽어야할 사람들에게는 해석할 수 있는 독해력으로서의 조명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영감을 일종의 창작력(Creation)이라고 할 때 조명은 독해력인 것이다. 영감은 성경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개입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조금도 훼손되지 않도록 최초의 성경 기록자들에게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작용한 반면, 조명은 성경을 이해하고 보존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개입으로서 성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기 때문에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인도를 받는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성령께서 똑같이 조명하시는 조건하에서 각인이 성경을 읽지만 그 깨닫는 분량과 깊이는 제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계시와 영감과 조명의 관계를 살펴보았으나, 영감의 본질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영감을 받은 대상이 사람에 국한되는가 아니면 말씀에까지 적용되는가에 관한 영감의 범위에 대한 논란을 포함하여 영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한 것인지 그 성격에 대한 논란이 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로부터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감에 대한 견해는 성경말씀 자체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성경 기록자인 사람이 영감을 받고 그들의 종교적 삶과 신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현대신학으로 오면서 이러한 견해는 더욱 확산되어 아예 영감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고, 인정하더라도 말씀 자체는 영감을 받지 않고 사람이 그의 사상과 관념에 영감을 받아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들에 의하면 영감을 받은 것은 사람이므로 성경의 기록 중에는 영감을 받은 부분과 그렇지 않은 것이 함께 포함되므로 성경의 절대 무오류성(無誤謬性)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부분적 영감이나 목적 영감 또는 개념적 영감을 주장하는 것으로,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로 볼 때,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영감을 받지만(요 10:35, 벧후 1:21),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가 말씀을 기록할 때 계속해서 성령께서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므로 그가 기록한 성경말씀 자체가 영감을 받은 것이다. 딤후 3:16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더욱이 사람이 영감을 받았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경에서 그들은 때로는 단순히 말씀의 대언자의 역할을 한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단 12:8-9에서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이 전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사람과 말씀 모두 영감을 받았지만, 영감의 산물은 신적 권위를 지닌 말씀이지 사람은 아닌 것이다. 또한 성경 자체가 모든 말씀을 하나님께서 주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최초의 선지자이며 성경 기록자인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는 말씀을 들었으며, 그밖에도 성경 도처에서 하나님께서 일러 가라사대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신약에서 바울 사도 역시 고전 2:13에서 성령의 가르치신 말이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 모든 구절들은 성경말씀 자체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말(Words)은 사상을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하여 의미가 담긴 말을 사용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말은 표시기호로서 의사소통을 이루는 것인데 자유주의자들의 견해처럼 사람의 관념만이 영감을 받는다는 것은 오히려 애매모호한 것이다. 영감은 말이라는 표시기호로 나타날 때까지 작용하여야 비로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경 기록자의 기록하는 말씀에 간섭하셨다면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역사하셨음이 틀림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경말씀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은 성경 기자 한 사람이 감동을 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즉, 성경은 구원과 영생에 필수적인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간을 사용하시면서 그들을 감동시키시고 그 후에는 그들의 자의에 맡겨놓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이루어질 때까지 직접 개입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성경이 구원과 영생을 얻는데 필요충분한 말씀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말씀이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충분히 이해하게 되며, 결국 축자 영감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감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런데 성경말씀이 영감을 받았으며,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말씀에 대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받았다는 것을 오해하여 마치 한 말씀 한 말씀 기계적으로 받아 적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축자 영감설이 아니라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이다. 이에 따르면 성경 기자들은 아무 생각도 없고 로봇처럼 하나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그저 받아쓰기만 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그저 성령의 말씀이 흘러간 통로였을 뿐 말씀을 기록할 때 그들의 정신이 정지상태가 되어서 자기들의 기록의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십계명 등 성경 일부에는 적용될지 모르지만 전체 성경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획일적으로 성령께서 구술하셨다면 성경 중에 똑같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언급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 저자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의 문체와 수많은 표현법이 구사되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전혀 대답이 되지 못한다.
기계적 영감설의 억지를 피하기 위하여 생각해낸 것으로 동력적 영감설(Dynamical Inspiration)이 있다. 이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에서 기인한 영감이론으로서 성경이 만들어짐에 있어서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을 부인하고 성경 기록자들의 일반적인 영감 정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는데, 이를 영적 통찰력 또는 영적 직관(Spiritual Intuition)이라고 부르며 여기에서 동력적 영감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동력적 영감설에서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초자연적 요소가 없어지고, 성경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인간이 종교적이고 도덕적 차원에서 인간이성과 합리적 정신으로 자신의 종교적 삶과 신념을 기록한 인간의 작품으로 되고 만다. 동력적 영감설이 성령의 활동을 전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단지 성령의 감동이 어디까지나 사람에게 그치는 것으로 보고, 말씀에는 성령의 개입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성경의 무오성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두 가지 영감론은 모두 옳지 않다. 모두 극단적인 사고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받아쓰기만 했다는 기계적 영감설과 성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성령의 초자연적인 개입이 없었다는 동력적 영감설은 성경 자체의 증언과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감은 어떻게 작용한 것인가? 두 가지 극단적 사상을 피하고 조화시키는데 유기적 영감설(Organic Inspiration)이 적절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하시기 위하여 성경 기자들을 감동시키시되 그들의 내적 존재 법칙에 조화되게 유기적인 방법으로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시되 있는 그대로 그들의 성격, 기질, 재능을 비롯하여 교육수준과 문화적 배경 및 어휘와 문체에 이르기까지 함께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유기적 영감설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는데 필요하다면 특별한 능력을 더하시고 환경을 인도하기도 하셨으며, 성경 기자에게 특별한 지혜와 믿음을 더하시고, 때로는 격려하셨으며, 죄의 영향력을 억제시키시고, 그들이 언어를 선택하고 생각을 표현하는 일을 유기적인 방법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유기적 영감은 성경적 증거를 통해 올바른 견해라는 것이 입증된다. 눅 1:1-4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성경 기록자들은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 저자들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자신들의 개인적인 흔적과 자신이 살던 시대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또 개인적인 신앙에 대하여 각각 다른 문체로 표현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격을 억누르지 않으시고 그대로 사용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력적 영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비록 성경 기자의 내적 존재를 인정하시고 그대로 사용하셨지만 성령께서 직접 간섭하셨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계시되었으며 따라서 무오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기적 영감은 개념적 영감(Conceptual Inspiration)과도 다르다. 개념적 영감은 성경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에게 어떤 관념과 개념만을 주시고 어휘의 선택과 표현의 기술 등은 자유롭게 하셨다는 주장인데, 그렇다면 성도들은 성경에 포함된 내용만 이해하면 되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있다고 믿는 믿음은 무너지게 된다. 개념적 영감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경에서 동일한 내용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상의 모순 때문에 축자 영감을 부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들이 기록하는 말씀에 개입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기록자들의 관점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신 것뿐이다. 즉 어떤 사건에 대해 기록자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본 것을 그대로 표현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성경에 모순으로 보이는 내용 중에서 특히 숫자상의 오류는 사본 필사과정에서 생긴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유기적 영감은 동력적 영감이나 개념적 영감이 아닌 축자 영감과 맥락을 같이 한다. 성경 말씀이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믿는 자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앙의 기초가 성경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으로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러한 성경을 근거로 하는 신앙 자체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종교개혁이래 개혁신앙을 지켜온 복음주의 신앙은 성경의 영감을 철저히 주장하며 동시에 성경의 무오성을 지켜온 것이다.
사본도 영감을 받았는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다고 해도 문제는 또 있다. 그것은 최초의 기록으로서 원본이 오늘날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원본만이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면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현재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성을 주장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본과 번역본까지 영감을 받았다고 하면 문제는 더 커진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사본과 번역본은 수없이 많은데, 어느 것도 서로 일치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성경들이 저마다 영감을 받았다고 하면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많을 수 있다는 큰 모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원본만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아니면 원본으로부터 만들어진 사본과 번역본까지도 영감을 받았는가에 관하여 규명해야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먼저 원본에서 사본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원본은 아마 거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을 것인데, 그 시대 인간의 문명으로는 원본을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원본은 재질의 수명과 보관상의 한계로 인하여 만들어진지 불과 수세기 안에 유실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원본의 유실을 대비하여 그 전에 원본을 베낀 사본이 만들어졌을 것이고, 이런 작업은 계속해서 이어져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본 작업에서 원본에 작용하였던 영감이 그대로 작용하였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원어 성경의 본문은 어떤 하나의 사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본문비평을 통해 현존하는 여러 사본들을 비교분석하여 재구성하고 편집한 몇 가지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이 만들어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성령의 감동으로 얼마나 개입하셨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사본 영감론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본이 기록될 때 성령께서 철저하게 간섭하셨음을 믿는다면 원본이 사본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성령께서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성경은 기록되어진 당대에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 모든 시대 많은 자들의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원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메릴 F. 엉거(Unger)는 전 인류에게 진리가 보존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경의 본질은 항상 보존되어왔다고 했다.
그러나 사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성령께서 성경 기자들에 의해 원본이 기록될 때와 똑같이 축자적으로 개입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사본들이 원본처럼 축자적으로 영감되었다면 모든 사본들이 원본과 동일하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만들어진 모든 사본들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필사자의 역량에 따라 원본과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 사본들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현존하는 모든 사본이 다른 것은 필사자들이 인간으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본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들은 원본과 똑같이 하려고 노력하였겠지만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원본을 그대로 베껴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것은 초기에 사본의 재료들과 필기구들이 거칠고 조잡해서 한 자씩 필기하는 것이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필사자들이 성경 기록자들의 원문을 100%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으며, 성경 언어로 사용된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의 고대 문자와 문법에 대한 지식이 체계화되지 않은 시대에 필사되었으므로 때로는 원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경우도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원본과 사본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최초의 기록으로서 원본은 말씀 전체가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으나, 사본의 경우는 한 말씀 한 말씀이 모두 영감을 받았다고 하기는 어렵고 사본 필사 과정에서 성령께서 필사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그들의 헌신과 열정이 식지 않도록 인도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즉, 원본에 있어서는 말씀 그 자체가 영감을 받은 측면이 강조되었다면, 사본 형성과정에서는 하나님의 개입이 필사자인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본 형성과정에서는 원본에 작용했던 영감과는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하였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를 성령의 조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영감(Inspiration)을 받은 원본을 필사자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대로 베낄 수 있는 능력으로서 성령의 조명하심(Illumination)이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조명은 원본 기록자들이 받은 영감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기록하여 완성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라, 성경을 이해하고 보존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개입이므로 영감만큼 완전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 자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완전하고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이며, 거역할 수 없는 영감의 작용과는 달라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각인의 분량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본이 영감받은 원본만큼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본문비평을 통하여 사본들의 본문을 검토한 결과 좋은 사본으로 인정받는 것들은 약간의 세부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에서 정확하며 충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원본만이 직접으로 완전한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훌륭한 사본에도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사본에는 극히 미세한 필사 과정의 오류가 있을 뿐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고 완전하게 드러나고 있으므로 영감을 받은 원본과 다름이 없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원본만이 오류가 없고 그 밖의 모든 성경은 오류가 있다는 극단론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원본과 똑같은 사본을 보존하도록 하지 않으셨을까? 그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종교적인 유물을 숭배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원본을 남겨두지 않으시고, 대신에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끊임없이 찾아가도록 과제를 주셨는지 모른다. 그럼으로써 성경의 본질적인 메시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하나님의 뜻을 모든 세대에 드러내신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번역 영감론
최초 기록된 원본이 없을 지라도 원본의 내용이 제대로 전승된 여러 사본들을 편수하여 만든 원문성경에는 성령께서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셨다는 것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지만, 수많은 번역 성경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단언하기는 곤란한 점이 있다. 성경은 워낙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문화의 시대적 특수성까지 반영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번역본들간에 존재하는 격차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이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가 번역 성경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현실로 볼 때 구원과 영생의 유일한 성경의 진리가 제한되거나 약화된다면 큰 문제가 된다. 성경이 모든 시대 모든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필요충분한 말씀이 되어야 하는 성경의 본질이 보존되어야 할 당위성에 따라 번역본에도 하나님의 뜻이 충분하게 드러났음을 의심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번역본에 대해서는 충분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번역자 역시 성경의 기록자와 마찬가지로 영감을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번역자와 번역본이 원본에 작용했던 것과 같이 실제로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문제는 사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원본에 작용했던 영감과는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즉, 번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정확하게 전달되어지도록 번역자가 원본이나 사본의 본문내용을 바르게 해석하고 정확한 의미로 번역할 수 있게 성령께서 도와주셨다는 뜻이다. 이는 일종의 독해력을 주신 것으로서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이라고 하였다. 이 역시 원본의 기록자들이 받은 영감과는 다른 것으로서 성경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영감만큼 완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번역본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 개입된 하나님의 능력은 원본의 영감과는 다른 형태의 하나님의 영향력임을 이해해야 한다. 즉, 사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있어서도 영감 대신에 성령의 조명하심이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원본은 기록자의 재능과 역량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전적인 영감이 작용하였다면, 사본과 번역본은 기록자와 번역자의 역량에 많이 좌우된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원본의 영감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원본만이 완전한 축자 영감으로 완성된 것이고, 원본으로부터 만들어진 사본과 번역본에는 영감이 아닌 성령의 조명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간에 번역에도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영향력이 작용하였으므로 번역을 순수한 인간의 작품으로 생각할 수는 없으며, 훌륭한 사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정되는 몇몇 번역본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은 틀림없다. 따라서 훌륭한 번역본은 영감 자체를 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원본이 받은 영감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번역본으로도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뜻이 충분히 반영되었다는 말이다. 원본에서 사본으로 전해지고 다시 번역본으로 전해지면서도 원본 내용의 손상 없이 원문 전체의 가르침이 그대로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훌륭한 사본과 번역본들은 원본과 같은 영감을 받지 않았어도 원본이 받은 영감을 그대로 잘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번역 성경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 한다. 첫째는 원본과 사본으로부터 만들어진 원문만이 신뢰할 수 있고 모든 번역본은 믿을 수 없으므로 원문성경만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는 어떤 번역본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원본과 동일한 영감을 받았다고 무리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우선 훌륭한 번역본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고 영생 얻는데 필요충분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달되도록 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훌륭한 번역본은 원본과 사본처럼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동등하게 신적인 권위가 있고 진리인 것이다. 영감이나 조명의 구체적인 과정과 방법은 이론을 떠나서 하나님의 섭리와 신비적 영역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영감의 결과는 모든 훌륭한 번역성경에 완전하게 드러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토대로 신앙 생활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본을 무조건 배제하고 원문만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원문을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훌륭하게 번역된 번역본을 보는 것이 더 안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떤 번역본을 선택하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번역이론에서 살펴보겠지만 원본을 완전하게 재현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번역은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번역본을 완벽한 것으로 주장하며 맹신하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훌륭한 번역본을 택했을지라도 다른 번역본들을 참고로 비교하면서 보완하여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번역 이론들
수많은 번역본 중에서 신뢰할 수 있는 번역들은 많지 않으며, 또 그것들끼리 서로 일치하지도 않을지라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원문(Text)을 재생함으로써 원본이 받은 영감을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번역본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든 번역본들이 나름대로 채택한 번역이론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번역의 전제조건이 되는 번역이론 없이 번역된 성경은 있을 수 없다.
번역은 원문을 초역(初譯)한 것과 이미 번역된 것으로부터 다시 번역하는 중역(重譯)이 있는데,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한 언어로 된 성경을 다른 말로 번역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예를 들면, 원천언어(Source Language)와 대상언어(Target Language) 간에 단어끼리의 정확한 대응을 찾기가 쉽지 않고, 고대어와 현대어의 표현의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우며, 화법과 시제에 있어서 특수한 용법의 차이가 있을 때 정확한 의미 전달이 어렵다. 그밖에 인칭과 성수격(性數格)의 부적절한 대응과 시어(詩語) 표현에서 운율 등의 묘미 전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역사와 배경 지식 부재로 인하여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번역이 되기 위해서는 양쪽 언어에 대한 완전한 문법 지식은 기본이고, 시간과 공간적 격차를 없앨 수 있도록 역사와 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의 조명을 잘 받는 일일 것이다. 사람이 연구한 지식은 한계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드러내지 못할 가능성이 항상 있다. 따라서 사람의 인위적인 오류로부터 벗어나려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할 것은 분명하다. 훌륭한 번역은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드러냄으로써 신뢰를 받아 온 것이다. 번역본들이 저마다 채택한 번역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각각의 방법들은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번역에 사용되어져 왔다. 대표적인 번역 방법으로는 직역과 의역 그리고 역동적 번역과 형식일치 번역 등이 있다.
(직역)
직역(Literal translation)은 축자역 또는 문자적 번역이라고도 하는데 글자 그대로 본문의 단어 하나 하나마다 번역어의 대응하는 말로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일대일 번역이다. 직역은 원문과 같은 언어 계열로 번역할 때는 비교적 유리하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옮긴다면 원천언어와 수용언어가 서로 유사어이기 때문에 일대일 대응 번역이 어렵지 않으며 이런 경우에는 정확한 번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어 계열이 많이 다른 번역이나 중역에서는 일대일 대응이 어렵기 때문에 사용하기 힘든 번역방법이다. 직역은 원천언어의 자구(字句)나 어법에 따라 원래의 순서대로 충실하게 옮기는 번역이므로 때로는 정확한 번역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보통의 경우 무리한 기계적 대응으로 인하여 읽기에 거칠며 때로는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의역)
의역(Paraphrase)은 헬라어에서 온 말로 말을 쉽게 바꾸었다는 뜻이며, 자유역(Liberal Transl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역은 원문의 본래적인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기보다는 번역어로 표현되었을 때 의미가 잘 통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의역은 단어보다는 의미에 비중을 두게 되므로 원문을 직접 번역하는 경우에는 별로 사용될 수 없다. 의역은 일단 어떤 언어로 번역된 것이 읽기가 불편하고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여겨질 때 다시 같은 언어로 의미가 잘 통하게 번역할 때 사용되므로 중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의역의 대표적인 것으로 영어의 Living Bible과 Good News Bible을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기존의 영어 성경들을 같은 언어인 영어를 사용해서 좀 더 쉬운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의역은 원문이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번역자가 이해하는 대로 쉽게 고쳐 쓰는 것이므로 번역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즉, 번역이란 서로 다른 언어로 된 두 개의 문장이 같은 내용을 담는 것인데, 이해하기 쉽도록 같은 언어로 표현만 다르게 바꾸는 의역을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동적 번역)
역동적 번역(Dynamic Translation)은 일종의 의역으로서 낱말의 일대일 대응을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메시지 중심으로 원천언어와 수용언어 간에 역동적 관계를 강조하는 번역으로서 내용 전달에 중점을 두므로 내용동등 번역(Dynamic Equivalence translation)이라고도 한다. 이는 단어 자체에 집착하지 않고 의미나 느낌 혹은 인상을 위주로 옮기는 것인데, 원본의 저자들이 의미했던 바를 어떻게 적절하게 표현할 것인가를 중시하며, 원본이 원래의 독자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현재의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에 관심을 가지므로 감화적(Influential)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동적 번역의 목표는 수용(受容)문화 안에서 번역된 문장들이 단어의 의미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또한 그 문화 상황 안에서 일치되는 행동 양식과 독자 사이를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원천언어의 문화적 상황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일상적 수준에서 특별한 자료를 통해 배경연구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가적인 정보를 포함한 번역을 하게 된다. 새 국제역(NIV)과 미국 표준역(ASV)에서 이러한 번역 방식이 많이 적용되었는데, 이들은 직역의 경직성과 의역의 지나치게 자유로운 입장 사이에 조화를 꾀하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역동적 번역의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것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성경은 문화적인 계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계시로서 사용된 단어들까지 영감되었음이 간과되었다. 둘째, 말씀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제거하지 말라는 가감금지의 성경의 경고(계 22:18-19)를 무시하였다. 셋째, 성령의 조명을 혼란케 할 우려가 있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다섯째, 수용언어에 중점을 두고 번역을 하기 때문에 번역자의 원문해석 능력이나 기타 영적 역량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 등이다.
(형식일치 번역)
형식일치 번역(Formal Equivalence Translation)은 원문의 메시지 자체를 중시하면서도 원천언어와 수용언어의 형식의 일치까지 추구하는 번역이다. 형식이라는 말은 융통성 없는 형식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된 원전(原典)의 본래적인 의미를 최대한 살려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어뿐 아니라 의미와 문체, 강세 등까지 원문을 따라 번역하게 되므로 시어(詩語)는 시어로, 문장은 문장으로, 개념은 개념으로 최대한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직역과 비슷해 보이지만 많은 점에서 다르다. 직역은 원문의 메시지보다는 단어의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을 중시하는 반면, 형식일치 번역에서는 원문의 메시지가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에도 매우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역동적 번역과 유사한데, 서로 다른 점은 역동적 번역이 주로 수용언어의 사용자들인 독자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면 형식일치 번역은 원문 자체를 중시하면서 원문의 형식까지 강조를 두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형식일치 번역은 직역과 역동적 번역의 한계를 극복한 효과적인 번역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일치 번역도 문제점은 있다. 즉, 수용언어가 원천언어를 완전하게 재현하지 못하는 한계 때문에 원문의 문체를 따르는 부적절한 표현이 오히려 오역을 유발할 수 있으며,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원문의 상황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에 원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생각의 방식, 표현의 의미를 독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수많은 각주와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데, 이럴 때 독자들의 부담이 가중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형식일치 번역의 대표적인 예로는 흠정역본(KJV)을 들 수 있는데 대체로 원문에 충실하여 잘 번역되었다는 평가를 받고있지만, 한편으로 저본(底本)으로 사용된 표준원문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또한 지나친 일대일 대응 번역과 문자적 번역으로 인하여 읽기가 부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통하지 않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오히려 원문의 의미가 왜곡되었다는 지적도 함께 받고 있는 역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