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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세 | 파 | 인 명(자, 호) | 이력, 주요 직책 |
11 | Ⅰ-1 절제사 | 정복문(鄭復門) 중선(重宣) 남포(南浦) | 성품이 순수후덕하고 기품이 맑고 깨끗하며 효도가 지극하였다. 정유재란(1597~1598년)에 팔십 조모를 업고 벽도(외진 섬)에 피란하여 일가를 보전하였다. 형제간 우애가 깊고 화락하며 생을 즐겼다.
성심 깊고 어진 이를 쫓아 낙사(낙향한 선비)를 밀고, 자기를 사양하였다. 출세에 뜻이 없었으며 북학에 밝고 문장이 넓고 깊었다. 만년에 시골에 은둔하여 남포(榮山浦)에 몇 칸의 초옥을 짓고 1~2명의 벗과 책을 읽으며 갈대꽃 달빛과 갈매기를 주인삼아 늙도록 평온하게 살았다. 종후손 규종이 묘갈문을 지었다
賦性淳厚 稟氣淸明 誠孝極至 丁酉之亂 負八耆祖母奔避僻島一家賴全 友于昆季 連床湛樂 誠沈慕賢爲落士推讓 少志立陽 優遊北學文章宏博 晩樂遺逸隱跡江湖 結數間茅屋于南浦 與一二同志 琴書自娛 蘆花煙月共作沙丘鳥主人安閒終老 從後孫 圭綜 撰 墓碣銘 |
11 | Ⅰ-2 응교 | 정흥문(鄭興門) 경백(敬伯) (1562~1631) |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벼슬을 버리고 나이 들어 용인 파담으로 돌아와 지냈다 棄歸終老於龍仁琶潭
아들 집(䌖)이 수 가의대부 되어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
11 | Ⅰ-2 응교 | 정창문(鄭昌門) 경선(慶先) 송암(松岩) (1565~1604) | 선교랑(宣敎郞) 증손 선(敾)이 수 동지가 되어 증 사복시정(贈 司僕寺正)
문학의 재질이 이름났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가전되던 유집이 있었는데 여러 번 실전되어 평생 업적을 상고할 수 없으니 영원히 자손들의 한이다
文學才望擅名一時不幸早世 家傳遺集累失回祿 平日志業今無可考 永爲子孫之恨矣 |
11 | Ⅰ-5 능파정 | 정은수(鄭訔秀) 경헌(景獻) 미능재(未能齋) (1567~1612) 忠孝 倡義 | 참봉(參奉)
이율곡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를 전전하였으나 부친이 청주에서 순절하시자 대신 병을 통솔하여 경성에 이르렀다. 군자감 정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반장하여 나주에 머물며 여묘하였는데 묘 옆에 호랑이가 와 같이 지키니 기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묘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켜 “충효송”이라 불렀다. 그 행적이 「금성지」,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李栗谷門人 宣祖壬辰 從父倡義轉戰 淸州親竟歿節 代領其兵直到京城 除軍資監正不就 反葬羅州居廬墓側 有虎來同守之異 鄕人稱其墓前松曰忠孝松 事載「錦城誌」及「湖南節義錄」 |
11 | Ⅰ-6 승지 | 정민철(鄭敏轍) 여유(汝由) 남은(南隱) (1572~1634) | 1591년 진사(進士)
문장과 덕망이 높아 동년에 학교에 모시어 스승으로 삼았다 文章德望名重當世 舘伴同年侍而宿師 |
11 | Ⅱ-9 성재 | 정전창(鄭展昌) 자전(子展) 율탄(栗灘) (1631~1685) | 1662년 진사, 1665년 광릉참봉(光陵參奉), 1668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1682년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 1685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바다 섬으로 귀양 가심에 공께서 시를 지어 올렸다
상담천리 귀양길 고난에 눈물짓고 도의 꺾어짐에 하늘도 슬퍼하고 의로운 길은 폐허가 되었구나! 옛 성은 입은 향기가 아직도 흩어지지 않아 지절의 호소 십언이 태양처럼 빛나네! 외로운 충정 의심하니 천주(하늘의 기둥)를 거스르네! 모든 일이 상처 되니 언월당이로구나! 금년에 대의를 결의하고 조정이 밝아지면 원앙처럼 노니세!
‘언월당’ 세 글자로서 시정잡배가 크게 어지럽히니 은거하여 벼슬에 나기지 아니했다
尤庵宋先生 謫遷海上 公呈詩曰 “湘潭*千里泣風霜 道屈堪悲義路荒 貂拜舊恩香未末 志言新什日爭光 孤忠自擬警天柱 萬事從傷偃月堂* 最是當年結大義 明廷整笏摠鴛行” 以偃月堂三字大忤時輩屛跡不仕
* 언월당(偃月堂) : 이임보는 당 현종 때의 재상으로 간신(奸臣)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서재인 언월당(偃月堂)에서 깊게 생각을 하면 누군가가 주살(誅殺)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
11 | Ⅱ-9 성재 | 정의창(鄭儀昌) 자강(子强) 국부(國副) (1633 ~ 1708) 隱士 | 의를 행하며 은거하여 경사를 익히며 시와 예로서 유연자적하며 집안을 이끌어 향리에서 이를 칭송하였다
秉義遯跡經史自娛詩禮治家一鄕稱之 |
11 | Ⅱ-9 성재 | 정우창(鄭佑昌) 길보(吉甫) (1651 ~ ?) | 성리주자학을 일찍 성취하여 문묘의 집례를 맡았으며 위엄 있고 엄숙하여 유림들이 칭송하고 존앙하였다
道學夙就 文廟集禮 威儀表著 儒林稱仰 |
12 | Ⅰ-2 응교 | 정작(鄭綽) 중유(仲裕) |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 광해군의 혼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증손 내봉이 수동지가 되어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時當昏朝棄官歸鄕 以曾孫來鳳貴贈司僕寺正 |
12 | Ⅰ-2 응교 | 정유(鄭維) 지세(持世) (1593~1654) | 광해군 무오년(1618년) 생원
사마시험 치룰 때 적신 이이첨(李爾瞻)이 사마 급제자를 부추겨 장차 폐모의 소를 올리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불의한 자와 영화를 누리느니 바름을 지키고 죽는 것이 낫다. 또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는 사람과 사대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며 대과를 보지 않고 나주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인조반정으로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재상이 되자, 최우선으로 공을 천거하였다
光海 戊午 司馬時 賊臣李爾瞻 嗾新榜 將上廢母疏 公曰 與其不義而榮寧守正而死 且無父無君之人 士大夫不可同席而立遂不應榜遯歸羅州故庄 仁廟改玉申象村欽以冢宰首薦公
1634년 전의현감(全義縣監) 1636년 병자란에 안무사(按撫使) 박횡(朴橫)의 종사관으로 근왕병(勤王兵)을 통솔하였다. 1641년 구례현감(求禮縣監) 1648년 백천군수(白川郡守)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한데도 죽을 먹으며 항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돌아가신 날(1652년)과 같았다. 3년 탈상을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순조 임오년(1822년)에 대신 김재찬과 한용구가 임금의 면전에서 충효를 아뢰니 정려를 내렸다. 8대손 제인이 묘 앞에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天性篤孝及丁外艱年己衰而啜粥呼泣常如袒括之日隔終祥五月而孝宗甲午(1654년)卒 純祖 壬午(1822년) 大臣 金載瓚 韓用龜 以忠孝筵奏命旌閭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
12 | Ⅰ-2 응교 | 정시형(鄭時亨) 숙하(叔夏) 반주(盤洲) (1619~1699) | ㅇ효종 정유(1657) 진사 1658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667년 호조정랑(戶曹正郞), 1668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669년 공산판관(公山判官), 1672년 부평부사(富平府使) 167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1680년 原州牧使(원주목사) 7邑元,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임천에 내려가 강산을 유람하며 지냈다(遯于林川優遊江山之間) 1698년 수승 첨지중추부사 * 수첨지, 수동지에 대하여는 후손의 확인이 필요(수직에서 언급) |
12 | Ⅰ-2 응교 | 정육(鄭䋭) 여욱(汝郁) (1603~1681) | 1646년 생원(生員) 1646년 강릉참봉(康陵參奉), 1648년 章陵參奉(장릉참봉) 문장과 행의가 뛰어나 칭송받았다(文章行誼見稱於時) |
12 | Ⅰ-4 자의 | 정임(鄭紝) 사유(士維) (1615~1674) | 유학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남들이 추앙하였다 勤於儒業素有雅望 |
12 | Ⅰ-4 자의 | 정환(鄭絙) 사평(士平) 기서(箕西) (1615~1674) | 글과 학문이 뛰어나고 행의가 두터워 추앙받았다 文學行誼爲世推重 |
12 | Ⅰ-5 능파정 | 정의민(鄭誼民) 公甫(遲軒) 지헌(遲軒) (1602 ~ 1643) 은사(隱士) |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켜 청주에 이르러 화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였다. 남쪽 고향으로 내려와 자적하며 살았다. 증손 창후(壽同樞)가 귀하게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仁祖丙子(1636년) 倡義旅到淸州 聞和成痛哭南下 屛跡溪陽琴書魚樵逍遙以終 以曾孫昌垕貴 贈司僕寺正 |
12 | Ⅰ-6 승지 | 정선(鄭繕) 보경(補卿) 갈은(葛隱) (1688~1771) | 1767년 수 용양위부호군(壽 龍驤衛副護軍), 80세 1770년 수승 동지중추부사(壽陞 同知中樞府事), 83세 1771년 우승 가의대부(又陞 嘉義大夫, 종2품상), 수 84세
지조와 행실이 고결하고, 학문을 닦음이 독실하였다(志行高潔學文篤實) 문헌록(文獻錄)과 기성지(箕城誌)에 실렸다. |
12 | Ⅱ-9 성재 | 정치상(鄭致相) 퇴경(退卿) 허주(虛舟) (1658~1722) | 음직(蔭職) 1706년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 170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16년 군자주부(軍資主簿), 1717년 하양현감(河陽縣監) 문장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세상의 명망이 높았다 文章德行見稱於世 |
12 | Ⅱ-9 성재 | 정언상(鄭彦相) 군언(君彦) (1653~1709) | 학문을 닦고 깊은 덕이 있었다. 선대의 유훈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有文行潛德從先訓不仕 |
12 | Ⅱ-9 성재 | 정설상(鄭卨相) 중설(仲設) | 수암 권상하 선생에게 배웠으며 경행이 높아 존경받았다
受業于遂菴權先生門下 經行爲世推重
* 권상하(權尙夏) : 1641년∼1721년,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 이조참판과, 1712년 한성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이단하(李端夏), 박세채(朴世采), 김창협 등과 교유했다. |
12 | Ⅱ-9 성재 | 정익상(鄭翼相) 휘경(翬卿) (1631~1710) | 체격이 크고 뛰어났으며 생각도 깊어 모두가 나라의 큰 그릇이 될 줄 알았는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저서가 수편 있는데 「견사록」에 이름이 있다
狀貌魁偉志慮淵深 人皆許以經濟器 不肯仕宦 著書數篇名曰「見思錄」 |
12 | Ⅲ-1 통정 | 정만하(鄭萬夏) 수이(遂而) 풍헌(風軒) (1692 ~ ?) | 경암 윤동수 선생에게 배웠으며 글과 학문 덕행이 높아 사람들이 받들었다
受業于尹敬庵東洙門 文學德行爲世推重
* 윤동수(尹東洙) : 1674 ~ 1739, 호 경암(敬庵), 파평
1706년(숙종 32)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사헌부지평, 1727년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728년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전심하여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선생유고』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3 | Ⅰ-2 응교 | 정수만(鄭壽萬) 성구(聖耈) (1638~1699) | 숙종 병진, 1676년 무과(武科), 금위영초관(禁衛營哨官) 1694년 군기시별좌·주부(軍器寺別坐·主簿), 사헌부감찰 1699년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만년에 판서 박장건(朴長健) 이하 ‘26인 수동경계’(二十六人修同庚契) 에 참여하였으며 계첩이 있다(有契帖) 손자가 수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以孫來鳳貴(壽同知) 贈左承旨) |
13 | Ⅰ-2 응교 | 정시설(鄭時卨) 우경(虞卿) 목눌자(木訥子) 반곡(盤谷) (1621~1681) | 1650년 생원(生員) 희릉참봉(禧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노년을 나주 반남의 우산 안방준 공 문에서 지냈고 사림들이 공을 높이 받들었다 終老於羅州潘南遊安牛山邦俊門爲諸公推重 |
13 | Ⅰ-2 응교 | 정인(鄭粦攵) 문중(文仲) (1674~1719) 은사(隱士) | 9세에 생부 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어른과 같아 동리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장성하여 문장이 높고 품행이 바르고 도의가 있어 사우로부터 존경받았다
九歲丁生考憂哀毁如成人鄕里莫不感歎及長文章行誼爲士友推重 |
13 | Ⅰ-6 승지 | 정시래(鄭時來) 태경(台卿) 망북헌(望北軒) (1653~1713) | 병자호란의 삼전도 치욕을 한스럽게 여겨 조용히 물러나 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恨南漢之恥 自靖不仕 |
13 | Ⅰ-6 승지 | 정복만(鄭復晩) 초보(初甫) (1620~1673) | 의를 지키며 은둔하여 시를 짓고 예를 지키며 살았다 秉義遯跡詩禮自娛 |
13 | Ⅰ-6 승지 | 정시학(鄭時學) 사열(士悅) 죽포(竹圃) (1729~1799) | 도암 이재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심성은 이기에서 온다는 변론이 절실하여 원근학자가 경서의 어려운 문제를 물어오니 글방에 다 들이지 못하였다. 도내의 많은 선비가 계속 천거하고 임금께 아뢰니 순조 계유년(1813년)에 학행으로 이조참의에 증직하였다
受業于陶菴李先生門 心性理氣辯論切實遠近學者執經問難庠舍不容有遺稿 道內多士相繼累薦筵臣上奏純祖癸酉以學行贈吏曹參議 見「文獻錄湖南誌」
* 이재(李縡) : 1680년 ~ 1746년, 조선후기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유겸(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숙(䎘)이고,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대제학, 공조판서를 지냄 |
13 | Ⅰ-6 승지 | 정시하(鄭時夏) 사우(士禹) 자휴당(自休堂) (1731~1802) | 초야에 은둔하여 시와 책을 벗 삼아 지냈다. 순조 임술(1802년) 졸 후 유림들이 누차 천거하니 도신들이 임금에게 계를 올려 병인년(1806년)에 효행으로 사헌부지평을 증직하였다
遯跡湖海琴書自娛 純祖壬戌卒後 士林累薦道臣上啓 丙寅以孝司憲府持平
* 湖海之士(호해지사) : 호탕(豪宕)한 기풍(氣風)으로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사람을 이르는 말 |
13 | Ⅱ-3 판서 | 정만광(鄭萬光) 휘백(輝伯) 삼산(三山) (1652~1715) | 문장과 행의가 뛰어나 이름이 알려졌다 文章行誼名重鄕邦 |
13 | Ⅱ-6 양촌 | 정계광(鄭啓光) 경승(敬承) 관점당(觀漸堂) (1654~1721) | 박현석 공의 문하인이며 문학과 행의로써 세상에 명망이 높았다 朴玄石門人 文學行誼著稱於世
* ~~ (정사위)공이 죽은 지 88년이 지난 뒤에 현손(玄孫)인 정계광(鄭啓光)이 나를 찾아와 묘갈(墓碣)에 새길 글을 청하기에, 나는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오래 지나도록 굳이 간청하기에 위와 같이 쓰는 바이다(정사위공 묘갈문 중, 박세채)
* 박세채(朴世采) : 1631 ~ 1695 호 현석(玄石), 시호 문순(文純)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아버지는 홍문관교리의(猗)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家系)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朴世堂)과 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 등은 당내간의 친족이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분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국운영에 참여하였으며, 정치현실의 부침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649년(인조 27)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1651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박세채는 우의정·좌의정을 두루 거치며 이른바 소론의 영도자가 되었다. 남구만(南九萬)·윤지완(尹趾完) 등과 더불어 이이·성혼에 대한 문묘종사 문제를 확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대동법의 실시를 적극 주장하였다 |
13 | Ⅱ-9 성재 | 정화기(鄭華基) 성잠(聖岑) 무하당(無何堂) (1693~1770) | 통덕랑(通德郞)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문장이 빛나고 아름다워 성망이 높아 선비와 벗들이 받들었다 孝友純至文章華邵 聲望蔚然士友推重 |
13 | Ⅱ-9 성재 | 정후기(鄭垕基) 중진(重震) 육오와(六汚窩) (1674~1747) | 숙종34년(170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1732년 숭릉참봉(崇陵參奉) 1733년 평시서봉사(平市奉事) 만년에 무송정을 짓고 장암 정호가 제액을 썼다. 증손 희승이 수승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아들 희주가 가장을 짓고, 손자 진사 국휘가 행장을 쓰고, 지평 김일주가 묘표를 쓰고, 5대손 일수가 무송정 유허비를 세웠다
晩築撫松亭 丈岩鄭澔*題額 以曾孫姬升貴贈司僕寺正 姬柱述家狀 孫進士國輝述行狀 持平金日柱撰墓表 五代孫一洙立撫松亭遺墟碑 * 정호(鄭澔) : 1648∼1736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냄 |
13 | Ⅱ-9 성재 | 정택기(鄭宅基) 대거(大居) 애일당(愛日堂) (1706~1773) | 성품이 의지가 굳건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예학에 밝았다. 性度剛毅 明於禮學 |
13 | Ⅱ-9 성재 | 정내기(鄭來基) | 문장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문단에서 명예와 이름을 떨쳤다.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는데 진사시에 급제하지 못하여 시론이 이를 아쉬워하였다
文章華邵擅譽詞壇 累捷鄕解 竟屈禮圍 時論惜之 * 예위(禮圍) : 진사시 * 시론 : 당시의 평론(세평) |
13 | Ⅱ-9 성재 | 정온(鄭蘊) 시회(時晦) 월천(越川) | 글과 학문이 뛰어나고 행의가 독실하여 사우들로부터 존경받았다 文學行誼 士友推重 |
14 | Ⅰ-2 응교 | 정유(鄭柔攵) 여문(汝文) 검약재(儉約齋) (1682~1747) | * 생부 시익(時翊) : 겸재(謙齋) 공의 아우
갈매기에 대한 시를 읊기를(詠白鷗詩 曰)
淡烟疎雨裏 옅은 연기 가랑비 속에 求食下江洲 음식 구하듯 강가로 내려오는데 人稱此非烟 사람들은 연기라 하지 않고 火食人語鷗 화식하는 백구라 말하네 |
14 | Ⅰ-2 응교 | 정선(鄭敾) 원백(元伯) 겸재(謙齋) (1676~1759) | 한성 북부 순화방 유란동(幽蘭洞)에 살면서, 외사촌 형제들과 인근에 살던 안동 김씨 명문가인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의 문하에 드나들었고, 성리학과 시문을 수업 받으며 이들 집안과 깊은 인연을 쌓았다.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는 시화의 평생지기이고, 이웃 관아재 조영석(趙榮祏, 1686~1761) 등과도 시화를 교유하며 지냈다.
공은 주역(周易)에 능통하여 30세 이후 사용한 호 겸재(謙齋)도 주역 권6 겸괘(謙掛)의 ‘겸형군자유종(謙亨君子有終) : 겸손은 형통하니 군자의 마지막 덕목이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에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었던 영조는 1699년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진 후, 13세(1706년)에 창의궁으로 이사와 살면서 공에게 그림을 배웠다 한다. 스승으로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호(號)로만 부를 정도로 재능을 아끼고 존중했다. 그림 독서여가(讀書餘暇)>에서 보듯이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여 공의 독서벽을 알 수 있다.
이웃집에 살던 관아재(觀我齋)가 애사(哀辭)에서 평하기를 “경학(經學)이 깊어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논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꿰뚫는 것이 마치 자기가 말하듯 하였다. 만년에는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힘썼으니 손수 뽑아 베끼기를 파리 대가리와 같이 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의 이름을 그림으로만 알고 경학에 깊은 것이 이와 같음을 모른다.” 하였다.< 최완수의 ⌜진경시대⌟에서 발췌 편집>
도설경해(圖說經解)』라는 책과 유고(遺稿) 수십 권이 전하지 않으며, 자작시나 화론(畫論)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을 주고 있다. 겸재의 3대 명화 < 박연폭포(朴淵瀑布) > |
14 | Ⅰ-2 응교 | 정부(鄭敷) 대재(大哉) 종애(鐘崖) (1659 ~ 1712) | 고요히 도와 덕을 닦고 학문에 힘쓰므로 선비와 벗들이 존경하였다. 귀영당 이만성 공이 조정에 천거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수암 권상하 선생이 그 묘에 “종애처사“라 제를 썼다. 저서로 「사준십책」이 있고 이밖에 유고가 남아있다.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짓고, 판서 권적이 행장을 썼다
淸修力學爲士友推重 歸榮堂李公晩成薦于朝 未及筮仕 遂菴權先生題其墓曰鐘崖處士 嘗著「士儁十冊」 又有遺稿 陶菴李縡撰墓表 判書權樀撰行狀
* 이만성([李晩成) : 1636 ∼1708, 본관 전주, 자 기숙(器叔)
1666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문음으로 입사(入仕)하여, 1670년 동궁세마(東宮洗馬)가 되었다. 형조좌랑이 되어 직사(職事) 처리를 공정히 하여 간리(奸吏)의 횡포를 근절시켰다. 이어서 호조정랑에 승진하여 평강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는데, 향리의 불법을 금하고 포탈된 조세 징수 등을 추진하여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1683년(숙종 9) 평시서령(平市署令)을 거쳐 안성군수가 되어 혜정을 베풀고 동헌을 중수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집권하자 사직하였다. 성천부사와 1696년 선혜랑을 거쳐 성주목사·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강화부경력(江華府經歷)·선공감부정·예빈시정 등을 역임하고, 1708년 호군을 거쳐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이만성은 급제를 하지 않아 주로 관리직을 역임하였지만, 천성이 엄중하여 남과의 교제를 많이 하지 않았으며, 가정에서 서사(書史)의 섭렵에만 힘을 기울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권상하(權尙夏) : 1641∼1721, 조선 후기의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은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1704년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1712년 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
14 | Ⅰ-2 응교 | 정인(鄭粦攵) 문중(文仲) (1674~1719) | 19세에 생부(시상)을 당하여 슬퍼함이 어른과 같아 동리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장성하여 문장이 높고 품행이 바르고 도의가 있어 사우로부터 존경받았다
九歲丁生考憂(時相)哀毁如成人鄕里莫不感歎及長文章行誼爲士友推重 |
14 | Ⅰ-3 지평 | 정광린(鄭光麟) 공서(孔瑞) 남일재(南一齋) (1715~1784) 은사(隱士) | 통덕랑(通德郞) 부 수 자헌대부(壽 資憲大夫) 시익(時益)
수양하고 공손함이 도가 있었다. 좌명은 효제요, 가훈은 근검이며, 선대의 행적을 기록하여 보장하였다 修齋有道 座銘曰孝悌 家訓曰勤儉 撰先世遺事藏于家 |
14 | Ⅰ-4 자의 | 정덕후(鄭德垕) 재숙(載叔) 눌와(訥窩) (1684~1721) | 일찍이 글과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일찍 세상을 떠 뜻을 이루지 못하니 사우들이 이를 애석히 여겼다 文學夙就 不幸早世士友惜之 |
14 | Ⅰ-5 능파정 | 정치복(鄭致復) 덕이(德以) (1730~1797) | 1753년 성균진사(成均進士) 1773년 생원(生員) * 생진구중(生進俱中)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문학의 성망이 높았다(孝友純至文學贍富) |
14 | Ⅰ-5 능파정 | 정상교(鄭相僑) 국구(國耈) 눌정(訥亭) (1663~1740) | 초야(계산)에 물러나 술과 시로서 여생을 보냈다. 아들 창호가 귀하게 되어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遯居溪山 詩酒自娛 以子昌垕貴贈戶曹參判 |
14 | Ⅰ-6 승지 | 정환(鄭土奐) 성회(聖誨) 성암(醒菴) (1758~1821) |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근검하고 경서와 사서를 즐기었다 재덕을 감추고 이름 내지 않으며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 孝友勤儉書史自娛韜晦名跡不求榮利 |
14 | Ⅰ-6 승지 | 정환(鄭璇 ) 형옥(衡玉) 기남(箕南) (1685 ~ 1743) |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글과 학문의 명망이 높아 추앙받았다
孝友文學 爲世推重 |
14 | Ⅱ-3 판서 | 정언택(鄭彦宅) 상훈(祥勳) 동은(東隱) (? ~ 1854) | 고을 원 이승훈(평택현감)이 사악한 무리와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며 인륜에 어긋난 짓을 하며 문묘에 배향치 않으므로 격문을 내어 그 죄악을 성토하였다. 저들이 안무사를 뇌물로 무마하고 오히려 목에 칼을 씌우고 발에 차꼬를 채워 녹도로 유배하였다. 정조 갑인 년(1794년)에 유배지에서 졸하였다. 향도가 누차 예조에 충정을 천거하였다
本倅李賊承薰 以邪黨惑世誣民 乖敗倫常不拜聖廟 發文聲討罪惡 彼賂結按使酷被桁楊 流配鹿島 正祖甲寅卒于配所 鄕道累薦于禮曹 |
14 | Ⅱ-6 양촌 | 정운천(鄭雲天) 유룡(幼龍) (1692~1752) | 통덕랑(通德郞)
글과 문장의 재주가 뛰어나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文翰才諝見稱於世 |
14 | Ⅱ-9 성재 | 정헌주(鄭憲柱) 소백(昭伯) (1711~1766) | 천성이 순수하고 올바르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진혈하여 생명을 연장했다. 문장 또한 일찍 성취하였으나 불행이 일찍 세상을 뜨니 사우들이 이를 애석해 하였다
賦性純正誠孝根天 丁憂斷指延縷 文章夙就 不幸早世 士友嗟惜
증손 석인(錫仁)이 귀하게 되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
14 | Ⅱ-9 성재 | 정희주(鄭嬉柱) 명좌(明佐) 자암(紫岩) (1700~1750) | 수암 권상하, 봉암 채지홍 양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고 일찍 과거를 접고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어 견식이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실천함이 독실하니 마치 공부자의 제자 자하와 같았다. 돌아가신 7년 후 유림을 시작으로 판관 송가상, 참봉 변희하 등 4백여 명이 학문의 탁월함을 조정에 아뢰니 1759년에 사헌부지평의 증직을 내렸다
受業于權遂菴蔡鳳岩兩先生門早廢擧業專意攻學見識明詣踐履篤實殆若孔門子夏. 卒後七年儒儀始發 判官宋可相 參奉卞熙下等四百餘人 以經術之行相繼聞朝 己卯(1759년) 贈司憲府持平
* 채지홍(蔡之洪) : 1683 ~ 1741, 호 봉암(鳳巖), 삼환재(三患齋)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스승의 영향으로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고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실천적 수행에 힘써 당시 많은 학자들로부터 추앙받았다. 1721년(경종 1)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그 해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소론의 죄를 논하여 배척하는 소를 올렸으며, 이후 구운산(九雲山)에 들어가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고을 선비들과 함께 격문을 써 붙여 적도(賊徒)들에 가담하는 자들을 회유하였고, 의병을 모집하던 중에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1740년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를 거쳐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에 취임하였다가 사퇴하고 귀향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경학·예학을 비롯하여 역사·천문·지리·상수(象數)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4 | Ⅱ-9 성재 | 정희보(鄭姬輔) 문좌(文佐) (1712~1741) | 한수 권상하, 삼환재 채지홍 양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고 법과 예절을 법도에 따라 행하고 견식이 탁월하여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경행으로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다
受業于寒水三患兩先生門循蹈規矩見識明詣爲世雅望 以經行 贈司憲府持平 |
14 | Ⅱ-9 성재 | 정익주(鄭翼柱) 성좌(聖佐) 휴암(休岩) (1726~1805) | 미호 김원행(金元行)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경서에 밝고 행실이 높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受業于 渼湖金先生門 經明行高爲世雅望
* 김원행(金元行) : 1702년 ~ 1772년, 호는 미호(渼湖)
1719년(숙종 45)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조부 창집(昌集)이 노론 4대신으로 사사되고, 생부 제겸과 친형인 성행(省行)·탄행(坦行) 등이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어머니의 유배지에 따라가 『맹자』·『율곡집(栗谷集)』·『우암집(尤庵集)』 등을 탐독하였다. 1725년(영조 1) 조부·생부·형 등이 신원된 후에도 시골에 묻혀 살며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174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고, 1750년 위수(衛率)·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59년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퇴하였다. 1761년 공조참의·사성(司成)에 임명되고, 그 후 찬선(贊善)에도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4 | Ⅱ-9 성재 | 정복천(鄭復天) 숙도(叔度) 강재(剛齋) (1689~1745) | 경서에 밝고 행실이 드높아 재상 송인명과 김재로가 연이어 천거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여 모두 아쉬워 하였다. 문집3권이 있다 以經明行高 宋相國寅明金相國在魯相繼薦剡而未及登庸世皆歎惜有文集三卷
* 송인명(宋寅明) : 1736년 우의정, 1745년 좌의정 * 김재로(金在魯) : 1740년 ~ 1758년간 4차례 영의정 |
15 | Ⅰ-1 절제사 | 정내동(鄭來東) 윤집(允執) 문월당(問月堂) (1718~1770) | 글과 학문 행의가 뛰어나 사람들이 받들었다 文學行誼 爲時推重 |
15 | Ⅰ-2 응교 | 정만적(鄭萬迪) 혜중(惠仲) 관란재(觀瀾齋) (1660~1711) | 通德郞 글과 글씨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문집이 전한다. 文章筆翰名於當世 有文集 |
15 | Ⅰ-2 응교 | 정오규(鄭五奎) 자문(子文) (三悔齋) (老學齋) (1678~1744) | 일찍 수암 권선생 문하에서 배우고 사물의 이치를 바로 실천하며 경사와 백가서에 더욱 정진하므로 천인성정의 근원을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저서로「독서질의」「의례영언」및 유고가 있다. 병진초보를 편찬하고 발문을 썼다
早師遂菴權先生門 路旣正踐履益篤於經史 百家之書天人性命之源無不該貫而究極 著「讀書質疑」「疑禮零言」又有遺稿 編纂所爲丙辰草譜 實是我宗初譜也書跋
현손 구석이 묘지를 짓고 도암 이재가 묘표를 지었으며 퇴어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玄孫龜錫述墓誌 陶菴李縡撰墓表 退漁金鎭商書 부여군 세도면 반조원리 고암의 은거생활을 그린 겸재 그림 < 임천고암(林川鼓岩) > : 19세 석당 정구석공도 이곳 출생 |
15 | Ⅰ-2 응교 | 정오운(鄭五雲) 사룡(士龍) (1689 ~ ?) | 문행과 재물로서 형제지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니, 사람들이 “노학선생(老學齋) 오규(五奎)의 현명한 아우”라 했다 以文行資 益於塤箎之間 人稱 老學先生賢弟 |
15 | Ⅰ-2 응교 | 정오위(鄭五緯중운(仲運) (1684~1723) | 성품이 관후하였다. 문장의 장구에 얽매이지 않고 춘추에 몰입하였다. 차기가 있다, 할아버지 목사(鄭時亨) 공이 만년에 출계하도록 유명을 남기셨다. 후일 자식 택(擇)이 수동지로 귀하게 되어 공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생부 부(敷), 부 장(章攵)
性寬厚不事章句專用力於春秋 有箚記 以祖考牧使遺命晩暮出系 以子擇貴工曹參判 |
15 | Ⅰ-2 응교 | 정내휴(鄭來休) 사량(士良) (1700~1751)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지간의 우애를 더욱 돈독하여 화목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났다 孝友敦睦文翰贍富 |
15 | Ⅰ-2 응교 | 정내의(鄭來儀) 성화(聖和) (1711~1778) |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사우들이 받들었다 文學行誼士友推重 |
15 | Ⅰ-3 지평 | 정홍심(鄭弘心) 내일(乃一) 운번(雲樊) (1735~1793) | 초야에 묻혀 독서하며 지내며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杜門讀書不仕擧業 |
15 | Ⅰ-3 지평 | 정홍참(鄭弘參) 사견(士見) 초암(草菴) (1751~1806)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지간의 우애가 깊고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孝友文學爲世師表 |
15 | Ⅰ-3 지평 | 정홍규(鄭弘規) 사건(士建) 운와(雲窩) (1753 ~ 1836) | 학문이 넓고 독행하며 지조가 높고 진실하였다. 저서로 「경필삼육조」가 있고, 효성이 남달라 어버이 상에 여묘하였다. 향도가 여러 번 추천하고 고종 경오년(1870년)에 승지 이장렬과 유생 조철호가 조정에 아뢰니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되고 정려를 내렸다. 「나주군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유고가 있다
博學篤行操履純眞 著「警筆三六條」 誠孝根天 丁憂廬墓鄕道累遷 高宗更午 承旨 李章烈 儒生 趙喆浩 擧實行聞于朝 贈童蒙敎官朝奉大夫 命旌閭 事載「羅州誌」及「三綱錄」 有遺稿 |
15 | Ⅰ-3 지평 | 정오관(鄭五觀) 경응(慶應) (1721~1790) | 문학이 고명하고 효행이 남달랐다. 광산군지에 실렸다 文學孝行 事載光山郡誌 |
15 | Ⅰ-3 지평 | 정오빈(鄭五贇) 무여(茂汝) 봉당(蓬堂) (1715~1795) 은사(隱士) |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서 집상을 못하였기에 돌아가신지 60년에 다시 상복을 입고 여묘하였다. 향약을 만들어 벼리를 세우고 풍속을 바로 하여 향도가 천거하였다. 수 첨지중추부사로서「기성지」에 실렸다
早失所怙幼未執喪當外憂周甲追服廬墓 創設鄕約立綱正俗鄕道交薦 壽僉知中樞府事 事載「箕城誌」 |
15 | Ⅰ-4 자의 | 정덕성(鄭德星) 성징(聖徵) (1697~1726) | 천품이 영오하였다. 문장의 글이 매우 폭넓고 깊었다 天分穎悟文詞贍博 |
15 | Ⅰ-5 능파정 | 정택엽(鄭宅燁) 성후(聖厚) 초암(楚岩) (1778 ~ 1859) | 지조를 행함이 굳건하며 문장과 글이 여유가 있었다. 만년에 초산에 은거하며 유연자적하였다. 철종 무오년(1858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좌승지에 이르렀다. 수 82세
操履堅確 文詞贍富晩隱楚山悠然自適 哲宗戊午(1858년) 以學行薦至左承旨 |
15 | Ⅰ-5 능파정 | 정창후(鄭昌垕) 복(復) 청취옹, 북헌 (淸翠翁, 北軒) (1694 ~ 1775) | 어버이 병환에 신단을 구하여 목숨을 연장했다. 영조 무신년(1728년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수령 구윤명이 그 공적을 칭송하는 증시를 하였다. 도리를 다하고 효도에 정성을 다하여 강신도 감탄하였다. 문명이 높은데도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다들 이를 칭송하였다. 계사년(영조49년, 1773년)에 천수로 첨지하고 갑오년(영조50년, 1774년)에 동지로 승자하였다(수 82세). 유고가 남아있고 예조문첩에 행적이 실렸다
親癠得神丹延壽 英祖戊申(1728년)倡義旅勤王 本倅具公允明贈公時 以窮道誠孝感江神 半世文章傾俗類等語獎詡之 癸巳壽僉知中樞府事 甲午陞同知中樞府事 有遺稿 事載「禮曹文帖」 |
15 | Ⅰ-6 승지 | 정오윤(鄭五潤) 덕유(德裕) 백헌(柏軒) (1720 ~ 1780) | 천품이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버이 병환에 넓적다리 살을 베어 드리고 상을 당하여 여묘하였다. 경서에 밝고 행의가 높아 선비와 벗들로부터 추앙받았다
天性至孝親癠刲股 遭艱廬墓 徑行高明 士友推仰 |
15 | Ⅱ-6 양촌 | 정항섭(鄭恒燮) 자유(子柔) (1709~1765) | 현감(縣監) 여선량이 지은 만사에서 덕행을 칭송했다 呂善良撰輓詞稱德行 |
15 | Ⅱ-9 성재 | 정산휘(鄭山輝) 사온(士蘊) 금천(錦川) (1763~1810) | 문장과 학문이 높고 바르게 행하여 세상에서 추중하였다 文學行義爲世推重 |
15 | Ⅱ-9 성재 | 정규휘(鄭奎輝) 오이(五而) (1749~1804) | 본암 김종후(金鍾厚) 선생에게 배웠으며 경행이 고명한데 일찍 세상을 뜨니 유림과 벗들이 애석해 하였다 受業于本菴金先生經行高明不幸早世士友嗟惜
* 김종후(金鍾厚) : 1721(경종1)∼1780(정조4).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청풍(淸風). 호는 본암(本庵) 또는 진재(眞齋). 어려서부터 사부(詞賦)에 능하여 문명이 있었고, 1741년(영조 17) 생원이 된 뒤부터는 성리학자로 알려졌다. 1776년 지평(持平)에 이어 장령(掌令)·경연관을 역임하였다. 이에 1778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령이 되고 경연관을 거쳐 자의(諮議)에 이르렀다.
영조대 신임사화 때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를 궁지에 몰아넣은 홍계희(洪啓禧)·김상로(金尙魯)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또, 김종수가 벽파(僻派)인 김구주(金龜柱)와 일당이 되자, 행동을 같이하여 장헌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하였다. 그 뒤, 김구주 일당이 제거되자 원빈(元嬪)의 오빠인 세도가 홍국영(洪國榮)을 따랐다. 다시 원빈이 죽고 홍국영이 물러나자 소를 올려, 그에게 기만당하였다고 변명하는 등 보신에 급급하였다.
후세 학자들은 권력에 추종하는 이 같은 정치적 행적을 비난하여, 유자(儒者) 또는 선비로 자칭하면서도 유가(儒家)의 진의(眞義)를 해치고 국가의 흉화와 세도의 극치를 초래하는 역할에 가담하였다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본암집(本庵集)』이 있고, 편서로 『가례집고(家禮集考)』·『청풍세고(淸風世稿)』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15 | Ⅱ-9 성재 | 정익휘(鄭益輝) 술보(述甫) (1723~1789)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글과 학문 또한 높았으며 선대의 행적을 본받았다 孝友文學克趾先美 |
15 | Ⅱ-9 성재 | 정두휘(鄭斗輝) 계칠(啓七) (1737~1805) 晉人楷體書法 | 통덕랑(通德郞)
경서에 밝고 덕행이 높아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서법에 정진하여 진나라 해서체 분야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經術德行爲世推重尤精於書法沈得晉人楷體 |
15 | Ⅱ-9 성재 | 정이휘(鄭履輝) 상보(商輔) 묵재(默齋) (1749~1814) | 가풍을 이어받아 글과 행실이 남달랐다 承襲家訓文行著世 |
16 | Ⅰ-2 응교 | 정추(鄭樞) 사언(士言) (1682~1738) | 일찍 과거시험을 접고 시와 거문고를 벗 삼아 지냈다
早廢擧業以琴書自娛 |
16 | Ⅰ-2 응교 | 정원(鄭瑗) 서옥(瑞玉) (1683~1751) | 공이 사재를 내어 문월당 공을 모시고 제 종친을 초청하여 옛 선현의 공적을 연구하고 의론하였다. 유집이 전한다
公時在問月堂招會諸宗講舊修誼 家有遺蹟 * 문월당(問月堂) : 절제사공파 15세 정내동(鄭來東) |
16 | Ⅰ-2 응교 | 정구(鄭捄) 성여(聖汝) 천은(川隱) 인소(忍所) (1697~1772) | 순수하고 덕이 높았으며 독서하면서 지냈다. 예절과 법도에 따라 지내되 세상일을 가벼이 생각하지 않았다. 유작 시가 있다
有純德篤行端居讀書循蹈規距不以俗事經心 有詩稿 |
16 | Ⅰ-2 응교 | 정확(鄭擴) 원리(原理) (1702~1772) | 글과 행의로 명망이 높았다. 만년에 사매당 김극효 후손 곤(昆)과 ‘구로회’를 조직하고 우선 여러 자료를 모아 저술하였다. 계첩이 있다
有文行雅望 晩年與金四昧堂克孝后昆講九老會 先好修述有契帖 |
16 | Ⅰ-3 지평 | 정운화(鄭運華) 경심(敬深) (1792~1849) | 효성이 깊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다. 글과 학문이 빛났다
孝友純篤文學華邵 |
16 | Ⅰ-3 지평 | 정운창(鄭運昶) 계원(啓元) 담락재(湛樂齋) (1784~1839) |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고 의로움을 행함이 바르고 엄하였으므로 세상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라도 ‘담락 노인’이라 하면 알았다. 고종 1876년에 뛰어난 학행의 공적으로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學文純實行義端嚴 世不知名者稱以湛樂翁則知 高宗丙子(1876년) 以學行 贈戶曹佐郞 |
16 | Ⅰ-3 지평 | 정운배(鄭運培) 윤원(允元) 서남(棲南) (1798~1844) | 성품과 행실이 성실하였다. 기개가 높고 뜻이 컸고 갚아야 할 은혜와 의리를 지켰다. 집 생각에 미치면 항상 만족하고 과거를 그만두고 자연과 더불어 즐길 뿐 이었다
性行純實氣宇倜儻 恩義推及戶屢常滿 不圖擧業瀟洒自適 |
16 | Ⅰ-3 지평 | 정운형(鄭運亨) 사심(士心) 매헌(梅軒) (1765~1832) | 장성군 황룡면 분매동에 ‘매산서실’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시문을 지으며 지냈다. 매산서실(梅山書室)의 제액에 쓰기를,
매산 깊은 곳 수양버들 사는 시냇가에 초가삼간 짓고 만년을 보내네! 매화와 버들은 내가 일력(달력) 없음을 알고 정초에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네!
在長城黃龍面分梅洞選築梅山書室 講學詩文傳題梅山書室曰梅山深處柳溪邊 建草三間送暮年 梅柳知吾無歷日 陽春信息最先傳 |
16 | Ⅰ-3 지평 | 정운하(鄭運河) 경좌(景佐) (1766~1831) | 어버이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고 학문에 힘쓰고 실천하였다.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효행을 여러 차례 추천하여 조정에서 동몽교관 조봉대부에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事親至孝力學篤行 道內多士 以孝累遷于朝 贈童蒙敎官 朝奉大夫 命旌 |
16 | Ⅰ-4 자의 | 정건(鄭楗) 군협(君挾) 모당(慕堂) (1737~1800) | 어버이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고 조상을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경서에 밝고 행의가 고명하여 사람들의 사표가 되었다. 1892년 증손 성진이 귀하게 되어(수 동지)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事親至孝奉先盡誠 早廢擧業講究性理 經明行高爲世師表 高宗 壬辰 以曾孫成鎭貴 贈司僕寺正 |
16 | Ⅰ-4 자의 | 정영(鄭欞) 국노(國老) (1764~1836) | 장님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사물을 알고 학문도 깊어 백가를 두루 통했고 역서를 물 흐르듯 꿰뚫으니 역법의 종이 되었다
生而眼廢資近生知學問淵深旁及百家流書渙然氷釋爲南服象數之宗 |
16 | Ⅰ-5 능파정 | 정두용(鄭斗用) 만여(萬汝) (1819~1866) | 글과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文學德行爲世推仰 |
16 | Ⅰ-6 승지 | 정창흡(鄭昌洽) 성철(成徹) 치재(癡齋) (1675~1699) | 삼환재 채지홍 선생에게 배웠다. 일찍부터 경서에 밝았으나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뜻을 이루지 못함에 애석해 하였다
受業于三患齋蔡先生門 經行夙就不幸早世人惜未究 |
16 | Ⅰ-6 승지 | 정역(鄭櫟) 자후(子厚) 도계(陶溪) (1744~1780) | 글과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文學德行名重鄕里 |
16 | Ⅰ-6 승지 | 정해(鄭楷) 백후(伯厚) 도장재(道藏齋) (1765~1834) | 충의로운 마음이 복받쳐 중화를 존숭하며 서양 오랑캐를 한탄하였다. 학문을 전념할 정사를 지으며 벽에 현판을 걸어 가로대 “숭정천지 대명일월(대략, 청나라 오랑캐를 증오하고 친명 시대를 추모한 뜻)”이라 했다. 사림들이 조정에 천거해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忠義慷慨 尊華洋夷卜築精舍揭壁帖曰崇禎天地大明日月 士林薦于朝 贈童蒙敎官 |
16 | Ⅰ-7 진사 | 정운련(鄭運蓮) 경렴(景濂) 신헌(愼軒) (1819~1889) | 고산 임헌회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학문에서 배운 바를 성실히 실천하고 이행하므로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고종 기축년 1889년 별세하였다. 도내의 많은 선비들이 계속 천거하므로 상주하여 고종 경인년 1890년에 예조참의에 추증되고 1892년에 다시 유림의 상소와 사헌부(臺)의 천거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문헌록과 삼강록에 행적이 실렸다
受業于鼓山任先生門 踐履篤實造詣精深 高宗己丑二月二十七日卒 道內多士相繼累薦 筵臣上奏 庚寅(1890년) 贈禮曹參議 壬辰(1892년)更因儒狀及臺薦加 贈戶曹參判 見文獻錄 及 三綱錄
* 임헌회(任憲晦) : 1811∼1876, 시호 문경(文敬)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1858년(철종 9)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이듬해 다시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전라도사·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61년 조두순(趙斗淳) 등의 천거로 경연관에 발탁되었으나 역시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864년(고종 1) 장령·집의·장악정(掌樂正)이 되었고,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 때 만동묘(萬東廟)의 제향을 폐지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절대 부당함을 재삼 상소하여 다시 제향하게 하였다. 1874년 이조참판에 임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나오기를 청하였으나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그 뒤 대사헌·좨주 등에 임명되었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 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의 주청으로 내부대신에 추증되었다. 연기의 숭덕사(崇德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전재문집』 20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6 | Ⅱ-1 참봉 | 정운형(鄭運亨) 성여(聖汝) 매헌(梅軒) (1735~1792) | 도학과 경서에 뛰어나 여러 번 사헌부 대관(臺官)에 천거되었다. 정조 병오 년(1786년)에 시강원 자의로 연이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은둔하여 조용히 여생을 지냈다. 유고가 있다
以道學經術累入南臺薦 正祖丙午以侍講院諮議連召不起隱遁自終 有遺稿 |
16 | Ⅱ-6 양촌 | 정재원(鄭載遠) 사의(士毅) 덕촌(德村) (1742~1801) | 1790년 진사(進士)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문장으로 이름났다 孝友文章擅名當世 |
16 | Ⅱ-6 양촌 | 정재권(鄭載權) 덕경(德經) 만성(晩星) (1741~1810)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학문이 깊고 심오하여 호남의 선비와 벗들이 우러러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孝友純至 學文沈邃 兩湖士友 莫不景仰 |
16 | Ⅱ-9 성재 | 정희원(鄭喜元) 완지(緩之) (1744~1816) | 문장과 언변이 뛰어나 성망이 드높았다. 행적이 「탐라수수기」에 실렸으며, 현손 장환이 엮은 유고가 있다
文辭贍博聲聞藹蔚 歷觀「耽羅隨手記」 玄孫章煥編遺稿 |
16 | Ⅱ-9 성재 | 정희상(鄭喜祥) 사정(士精) (1772~1810)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가 우애가 돈독하고 경서에 밝고 행실이 순실하여 세간으로부터 존경받았다
孝友經行 爲世推重 |
16 | Ⅱ-9 성재 | 정재충(鄭載忠) 성화(聖和) (1749~1828) | 통덕랑(通德郞)
문장이 뛰어나고 의를 행하니 사람들의 본보기로 명망이 높으므로 여러 번 감역에 천거되었으나 성은을 받지 못했다 文章行義爲時標望累擬監役未蒙點 |
16 | Ⅲ-1 통정 | 정중현(鄭重鉉) 내순(乃淳) 만오(晩塢) (1832 ~ ?) | 숨어서 덕을 행하고 행의가 아름다우므로 동리에서 칭송하였다 隱德懿行鄕里稱頌 |
17 | Ⅰ-2 응교 | 정이찬(鄭履燦) 중명(重明) (1723~1791) | 통덕랑(通德郞)
남천으로 무과선전관에 천거 받았으나 부친(정즙, 鄭檝)의 유훈으로 나가지 않았다. 용인의 선친 묘소 아랫마을로 내려와 거문고와 바둑을 즐기며 지냈다 擬薦武南宣傳官以親遺訓不就 撤歸龍仁墓下琴棋自娛 |
17 | Ⅰ-3 지평 | 정이철(鄭履哲) 철언(哲彦) 매곡(梅谷) (1776~1840) | 선친에 효성을 다하고 공경하였다. 성리학을 연구하고 산수를 벗 삼아 세속의 번거로움을 끊었다
孝盡誠敬學究性理放跡山水謝絶塵累 |
17 | Ⅰ-3 지평 | 정이동(鄭履東) 군좌(君佐) 입암(立岩) (1767~1845) | 덕을 닦고 의를 행하므로 향리에서 존경하였다 修德行義鄕里推重 |
17 | Ⅰ-3 지평 | 정이복(鄭履福) 성백(成伯) (1767~1787) | 학문에 밝고 효성스러웠다. 광산군지에 실렸다 學孝 事載光山郡誌 |
17 | Ⅰ-3 지평 | 정이형(鄭履衡) 재옥(在玉) 은재(隱齋) (1778~1815) | 성품이 인자하고 무거웠다. 풍채가 당당하고 글과 행실이 고명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흠모하였다 賦性仁厚風儀魁偉文行高明世皆仰慕 |
17 | Ⅰ-3 지평 | 정이흠(鄭履歆) 사익(士翊) 묵계(默契) (1761~1809)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며 글과 학문이 깊었다. 「광산지」에 실렸다 孝友純至文學贍富見「光山誌」 |
17 | Ⅰ-4 자의 | 정이환(鄭履煥) 유경(猷卿) 노탄(老灘) (1767~1852)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했다. 문장과 학문이 높아 선비들로부터 추앙받았다 1892년 손자 성진이 수승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孝友文學爲世推重 高宗壬辰 以孫成鎭 壽貴 贈左承旨 |
17 | Ⅰ-5 능파정 | 정이택(鄭履澤) 영수(永壽) 모은(茅隱) (1848~1923) | 천품이 명민하고 행의가 삼가고 인정이 많았다.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자녀를 교육함에 법도가 있었다. 초야에 은둔하여 오랫동안 속세를 멀리하였다. 天資明敏行誼純謹勤儉治家敎子有方遯跡林泉與世長謝
1891년(신묘) 광릉참봉 행 사복시정(光陵參奉行 司僕寺正)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7 | Ⅰ-6 승지 | 정이철(鄭履喆) 성겸(聖謙) 정재(正齋) (1797~1836) |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덕행과 학문도 높아 많은 선비들이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여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다. 행적이 「기성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孝友德學 爲世師表 多士累薦 贈司憲府持平 事載「箕城誌」 及 「三綱錄」 |
17 | Ⅰ-7 진사 | 정이호(鄭履浩) 도연(道然) 일재(逸齋) (1858~1946) | 중암 김평묵(金平默) 선생에게 배웠다 受業于 重菴金先生門
1884년 익릉참봉(翼陵參奉)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김평묵(金平默) 1819∼1891,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淸風).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5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십구사략(十九史略)』 및 『소학』을 읽고, 13세에 경서를 대략 이해하였다. 24세에 이항로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매우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넓고 온건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에 기울여졌다. 또한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기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81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일로, 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900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미원서원(迷源書院) 및 보산서원(寶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17 | Ⅱ-1 참봉 | 정이황(鄭履璜) 경록(景錄) 묵재(默齋) (1770~1840) | 글과 학문이 뛰어나고 덕행으로 당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였다. 남쪽지방의 학자들이 경서를 들고 난제들을 묻기 위해 날마다 문과 뜰을 메웠다. 만년에 ‘유천정사(柳川精舍)’를 짓고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유연자적하게 살았다. 행적이 「송사지」*와 「삼강록」에 실렸다
道德學文爲時師範 累入剡薦 南服學者執經問難日塡門庭 晩構柳川精舍與世不關悠然自適 有遺稿 事載 「松沙誌」*及「三綱錄」 * 송사지(松沙誌) : 송사 기우만(奇宇萬) 문집 |
17 | Ⅱ-6 양촌 | 정석린(鄭錫麟) 성구(聖九) 상산(商山) (1778 ~ 1864) | 헌종1년(1835) 을미(乙未) 증광시(增廣試) 문과 맥호(麥湖) 김수조(金壽祖) 선생 문인(門人)
183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841년 군자시정(軍資寺正) 1841년 태안군수(泰安郡守), 치적으로 거사비(以治績 去思碑) 1843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소를 올린 것이 곧바르고 직설적이어서 거슬려 배척하므로 관직을 물러났다 陳疏直切 忤視見斥 因屛不仕 忤視見斥 1857년 고령으로 병조참지 승자(壽陞 兵曹參知 : 兵曹參議)
문장에 능하고 덕과 신의가 높았으며 선조의 행적이 본받았다 종손 인직이 가장을 짓고, 동강 김영한이 묘갈문을 쓰고, 족손 문학박사 기호가 추념비문을 지었다
文章德義克趾先美 從孫寅直述家狀 東崗金寗漢撰碣銘 族孫 文學博士 琦鎬撰 追念碑 |
17 | Ⅱ-6 양촌 | 정석원(鄭錫元) 인백(仁伯) 완계(浣溪) 은선자(隱仙子) (1762~1834) | 천성이 순수하고 바랐다. 재주와 사고가 명민하여 일찍 어린나이부터 하서 선생의 도학을 추앙하여 장성에 있는 외가로 거처를 옮겨 외삼촌 맥호 김수조 선생과 족숙 매헌 정운형 양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고 높으며 독실히 실천하니 그 성망이 드높으므로 유림들의 영수가 되었다
賦性純正才藝明敏 早自弱齡慕仰河西先生道學 隨外家移居于長城麥洞 受業于舅氏麥湖壽祖族叔梅軒兩先生門 造詣深高踐履篤實 聲望藹蔚爲士林領袖
* 김인후(金麟厚) : 1510~1560, 호 하서(河西) 시호 문정(文正)
1510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5대조 김온(金穩)은 서울에서 살았으나 세자 책봉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가족들은 전라도 장성 땅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528년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뒤에 설서(說書)·부수찬(副修撰)을 거쳤고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1545년(인종 1)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뒤에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매년 4월에 선생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가, 9월에는 추향제(秋享祭)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필암서원에서 열린다.(두산백과)
* 정운형(鄭運亨) : 1735 ~ 1792, 호 매헌(梅軒), 참봉공파 16세, 시강원자의(侍講院 諮議)를 천거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
17 | Ⅱ-9 성재 | 정석영(鄭錫永) 치망(致望) 석릉(石陵) (1840 ~ 1911) | 고산 임헌회 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경행이 현저하였다 내부주사 통훈대부로 승자
受業于鼓山任先生門 經行著世 內部主事 陞通訓
* 승정원일기의 1897년 군부군의(軍部軍醫) 및 1903년 광제원위원(廣濟院委員), 1905년 승육(陞六), 1905년 사릉참봉(思陵參奉) 기록이 동일인인지 확인 필요 |
17 | Ⅱ-9 성재 | 정석구(鄭錫九) 국보(國寶) (1774~1835) | 문장이 빛나고 아름다워 칭송을 받았다. 국학의 명망이 높아 관아와 유림으로부터 존경받았다
文譽華邵 入國學爲館儒推重 |
17 | Ⅱ-9 성재 | 정석구(鄭錫龜) 자현(子玄) (1798~1874) | 어려서 시와 예를 배우고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를 돈독히 했다. 조상을 모시고 현인을 배우고 따르니 선비와 벗들이 존경하였다
早染詩禮 孝友爲政 奉先慕賢之誠 士友推重 |
17 | Ⅱ-9 성재 | 정석준(鄭錫駿) 치성(致誠) 소릉(巢陵) (1829~1885) | 천성이 대쪽같이 엄정하였으나 부보에 지극히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고산 임헌희 선생 문하에서 배웠으며 경서와 행의가 드높아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인근학자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賦性簡嚴孝友純至 受業于鼓山任先生 經術至行爲世推重 遠近來學者日塡門庭
* 고산 임헌회(任憲晦) : 1811년 ~ 1876년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 호는 고산(鼓山)·전재(全齋)·희양재(希陽齋). 아버지는 천모(天模)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익화(益和)의 딸이다. 송치규(宋穉圭)·홍직필(洪直弼) 등의 문인이다. |
17 | Ⅱ-11 사간 | 정석홍(鄭錫鴻) 양여(陽汝) 질사(臷士) (1821~1880) | 1846년 생원(生員) 유고(遺稿)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