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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3권
17.3.12. 12연기법의 상세한 주석[6]
273. 여기서 근심 등은 맨 마지막에 설하셨고,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라고 이 존재의 바퀴의 처음에 무명을 설하셨기 때문에 무명은 마침내 근심 등으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가. 존재의 바퀴 1
존재의 바퀴의 시작은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은 만드는 자도 느끼는 자도 없다.
열두 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공하고
이것은 끊임없이 항상 회전한다.
274.
‘① 어떻게 여기서 무명이 근심 등에 의해 성취되는가?
② 어떻게 이 존재의 바퀴의 시작이 알려지지 않았는가?
③ 어떻게 행위자도 느끼는 자도 없는가?
④ 어떻게 열두 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이것이 공한가’라고 만약 한다면,
275.
① 여기서 근심, 정신적 고통, 절망은 무명과 분리할 수 없고, 탄식은 어리석은 자에게 있기 때문에 이들이 성취될 때 무명도 성취된다.
더욱이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무명이 일어난다(M.i.54)”라고 설하셨다.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근심 등도 있다.
276. 어떻게?
사물에 대한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격리될 때 일어나는 근심은 감각적 욕망의 번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감각적 욕망의 수레를 가지고
[갈애의] 열의에 찬 사람에게서
감각적 욕망들이 사라져버릴 때
그는 화살에 찔린 것처럼 무너진다(Sn.767)”
다시 이처럼 말씀하셨다.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근심이 생긴다(Dhp.215)”
277. 견해의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있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내 것이다.’는 [견해에] 사로잡힌 자에게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이 일어난다.(S.iii.3)”
278. 마치 견해의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근심 등이 있듯이,
존재의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도 이들은 생긴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비록 신들이 장수하고 아름답고 아주 행복하고, 높은 천상에서 오랜 시간을 머문다 하더라도 여래의 설법을 듣고서 두려워하고 불안하고 분발한다(A.ii.33)”
이는 마치 다섯 가지 조짐을 보고서 죽음을 두려워하여 초조해 하는 신들과 같다.
279. 마치 존재의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근심 등이 있듯이 무명의 번뇌가 일어나기 때 때문에 이들은 생긴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지금 여기(現今)에서 세 가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경험한다.(M.iii.165)”
이와 같이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이 [근심 등의] 법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 근심 등이 성취될 때 무명의 원인인 번뇌가 성취된다.
번뇌가 성취될 때 무명도 성취된다.
왜냐하면 조건이 있을 때 결과가 [즉,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근심 등을 통해서 무명이 성취된다고 알아야 한다.
280.
② 이와 같이 조건이 있을 때 결과가 있기 때문에 무명이 성취되면,
다시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고,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의 상속(흐름)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의 연결에 의해서 일어나는 12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존재의 바퀴는 그 시작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성취된다.
281.
“이와 같다면 [‘존재의 바퀴는 그 시작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경의 말씀은]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라는 구절에서 무명이 첫 시발점임을 설명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가?”라고 만일 한다면,
[답한다]
이것은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요한(padhāna)법을 설명하는 것이다.
[업과 오염원과 과보의] 세 가지 회전은 무명을 근본으로 한다.
무명을 꽉 쥠으로써 나머지 오염원의 회전과 업 등이 어리석은자를 방해한다.
마치 뱀의 머리를 잡음으로써 뱀의 나머지 몸이 그의 팔을 감아말 듯이.
무명을 끊어버릴 때 그들로부터 벗어난다.
마치 뱀의 머리를 끊어버릴 때 감긴 팔이 해방되듯이.
이처럼 말씀하셨다.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고 소멸할 때 상카라들이 멸한다.(S.ii.1)”
이와 같이 이것을 꽉 쥐기 때문에 묶임(bandha)이 있고, 놓아버리기 때문에 해탈(mokkha)이 있는 그 중요한 법을 설명하는 것이지 시작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이 존재의 바퀴는 그 시작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알아야 한다.
282.
③ 이 [존재의 바퀴] 무명 등에 기인한 상카라들 등의 일어남이다.
그러므로 무명 이외의 “범천, 대범천, 최승자, 창조자(D.i.18)”등으로 상상해온 범천 등 윤회를 만드는 자가 없다. 그리고
“그런 나의 이 자아가 말하고 느낀다(M.i.8참조)”라고 상상해온 행복과 고통을 경험하는 자아가 없다.
이와 같이 만드는 자와 결험하는 자가 없다고 알아야 한다.
283.
④ 무명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질(dammakatta)을 가졌기 때문에 영원한 성질(常性)이 공하고,
오염되었고 오염을 초래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성질(淨性)이 공하고,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억압받기 때문에 행복한 성질(樂性)이 공하고,
조건을 의지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자재자인 자아(我)가 공하다.
상카라들 등의 구성요소도 그와 같다.
무명이 자아도 아니고,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니고, 자아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아를 가진 것도 아니듯이,
상카라들 등의 구성요소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12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이 존재의 바퀴가 공하다고 알아야 한다.
나. 존재의 바퀴 2, 삼세
284. 이와 같이 알고 다시,
이것의 뿌리는 무명과 갈애이고 과거 등 삼세에 속하며
구성요소들은 유사성에 따라 둘, 여덟, 둘로 나뉘어 진다
285. 무명과 갈애, 이 두 가지 법이 존재의 바퀴의 뿌리라고 알아야 한다.
과거로부터 왔기 때문에 무명이 그 뿌리이고 느낌이 마지막이며,
미래로 상속하기 때문에 갈애가 그 뿌리이고 늙음과 죽음이 마지막이 되어,
이 윤회의 바퀴는 두 가지이다.
286. 이 가운데서 먼저 것(무명)은 사견의 기질을 가진 자를 따라 설했고,
나중 것(갈애)은 갈애의 기질을 가진 자를 따라 설했다.
무명이 사견의 기질을 가진 자들을 윤회로 인도하고, 갈애가 갈애의 기질을 가진 자들을 윤회로 인도한다.
혹은 먼저 것은 단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원인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중 것은 상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일어난 것들의 늙고 죽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혹은 먼저 것은 태생의 중생들에 따라 설했다. 왜냐하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중 것은 화생의 중생에 따라 설했다. 왜냐하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287. 이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에 속한다.
이 가운데서 성전에서 전승되어온 가르침에 의하면 무명과 상카라들, 이 두 가지 구성요소는 과거에 속하고,
느낌부터 존재까지 8가지 구성요소는 현재에 속하며,
태어남과 늙음·죽음, 이 두 가지 구성요소는 미래에 속한다고 알아야 한다.
다. 존재의 바퀴 3
288. 다시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1)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앞서고, 원인이 앞서는
세 가지 연결이 있고 (2) 네 가지 포함이 있다.
(3) 20가지 형태의 바퀴살을 가졌고
(4) 세 가지 회전을 가져 이것은 쉼 없이 굴러간다.
289.
[‘(1)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앞서고, 원인이 앞서는 세 가지 연결이 있고’]:
상카라들과 재생연결의 알음알이 사이에 원인·결과의 연결 하나가 있다.
또 느낌과 갈애 사이에 결과·원인의 연결 하나가 있다.
다시 존재와 태어남 사이에 원인·결과 하나가 있다.
이와 같이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앞서고, 원인이 앞서는 세 가지 연결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290. [‘(2) 네 가지 포함이 있가’]:
[세 가지] 연결의 처음과 긑으로 결정된 네 가지 포함이 있다.
즉 무명과 상카라들이 하나의 포함이고,
알음알이와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과 느낌이 두 번째 포함이고,
갈애와 취착과 존재가 세 번째 포함이고, 태어남과 늙음·죽음이 네 번째 포함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포함(sa ṅgaha)을 알아야 한다.
291. [‘(3) 20가지 형태의 바퀴살을 가졌다’]:
① 과거의 원인이 다섯이고 ② 지금의 결과도 다섯이다
③ 지금의 원인이 다섯이고 ④ 미래의 결과도 다섯이다
이 스무 가지 형태라 불리는 바퀴살들로 20가지 형태의 바퀴살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92.
① ‘과거의 원인이 다섯이고’:
무명과 상카라들의 이 둘은 이미 설했다.
무지한 자가 갈증을 느끼고, 갈증을 느끼는 자가 취착히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
그러므로 갈애, 취착, 존재도 여기게 포함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이전의 업으로서의 존재에서 어리석음이 무명이요, 노력이 상카라들이며, 집착이 갈애요, 접근이 취착이며, 의도가 존재다.
이와 같이 이전의 업으로서의 존재에서 [있었던] 이 다섯 가지 법들이 금생의 재생연결의 조건이 된다.(Ps.i.52)”
293.
‘이전의 업으로서의 존재에서’(purimakammabhavasmin):
이 합성어는 purime kammabhave라고 풀이된다.
전생에 [행했던] 업으로서의 존재에서란 뜻이다.
‘어리석음이 무명이요’:
괴로움 등에 대한 어리석음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업을 짓는다. 그것이 무명이다.
‘노력이 상카라들이며’:
업을 짓는 자의 이전의 의도를 뜻한다.
마치 보시를 하리라는 마음을 낸 자가 한 달이고 이 년이고 보시할 물건을 준비하는 그런 이전의 의도와 같다.
받는 자의 손에 실제로 시물을 놓는 자의 의도를 일러 존재라 한다.
혹은 같은 전향을 가진 여섯 번째까지의 속행(javana)들의 의도를 노력의 상카라들이라 하고, 일곱 번째 속행을 일러 존재라 한다.
혹은 모든 종류의 의도를 존재라 하고 [의도와] 관련된 [법들을] 노력의 상카라들이라 한다.
‘집착이 갈애요’:
업을 짓는 자가 가지는 과보인 재생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집착과 열망을 갈애라 한다.
‘접근이 취착이다’:
업으로서의 존재의 조건이고,이것을 짓고서는 이러이러한 생에서 욕망을 즐기리라 혹은 욕망을 끊으리라는 방법으로 일어나고, 접근하고, 꽉쥐고, 집착함을 취착이라 한다.
‘의도가 존재이다’:
노력의 끝에 설한 의도가 존재이다. 이ㅘ 같이 뜻을 알아야 한다.
294.
② ‘지금의 결과도 다섯이다’:
이것은 알음알이를 처음으로 느낌을 맨 마지막으로 성전에서 전승되어 온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금생의 재생연결이 알음알이요, [모태에] 들어감이 정신·물질이며, 감성(pasāda)이 감각장소요, 닿음이 감각접촉이며, 느껴진 것이 느낌이다.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법들이 금생의 재생으로서의 존재에서 이전에 지은 업을 조건한 것이다.(Ps.i.52)”
295. ‘재생연결이 알음알이요’:
그 알음알이는 다음 [생의] 존재와 연결함으로써 일어나기 때문에 재생연결이라 한다.
‘[모태에] 들어감이 정신 · 물질이며’:
모태 속에 물질과 법들이 들어간다.
마치 들어와서 도착한 것처럼. 이것이 정신·물질이다.
‘감성이 감각장소요’:
이것은 다섯 가지 감각장소에 따라 설했다.
‘닿음이 감각접촉이며’:
대상을 이미 닿았거나 닿을 때 일어난 것이 감각접촉이다.
‘느껴진 것이 느낌이다’:
재생연결식이나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과 함께 일어난 과보로 나타난 느낌이 느낌이다.
이와 같이 뜻을 알아야 한다.
296.
③ ‘지금의 원인이 다섯이고’:
이것은 갈애 등이다. 갈애, 취착, 존재가 성전에 전승되어오다.
존재가 포함될 때 그 존재에 선행하는 상카라나 혹은 관련된 상카라들도 포함된다.
갈애와 취착이 포함될 때 그들과 관련된 무명도 ― 이것 때문에 어리석은자는 업을 쌓는다 ― 포함된다.
이와 같이하여 다섯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금생에서 감각장소가 성숙해지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무명이요, 노력이 상카라들이며, 집착이 갈애요, 접근이 취착이며, 의도가 존재다. 이와 같이 금생의 업으로서의 존재에서 다섯 가지 법들이 미래의 재생연결의 조건이 된다.(Ps.i.52)”
‘금생에서 감각장소가 성숙해지기 때문에’:
감각장소가 성숙해진 사람이 업을 지을 때에 어리석음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나머지는 뜻이 분명하다.
297. ④ ‘미래의 결과도 다섯이다’:
알음알이 등의 다섯이다. 이들은 태어남이라는 [용어에] 의해서 표현되었다. 늙음·죽음은 [알음알이 등 다섯의] 늙음·죽음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미래의 재생연결이 알음알이요, [모태에] 들어감이 정신·물질이며, 감성(pasāda)이 감각장소요, 닿음이 감각접촉이며, 느껴진 것이 느낌이다.
이와 같이 이 다섯 가지 법들이 미래의 재생으로서의 존재에서 금생에 지은 업을 조건한 것이다.(Ps.i.52)”
이것이 스무 가지 형태의 바퀴살이다.
298.
(4)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쉼 없이 굴러간다’:
여기서 상카라(行)들과 존재(有)들과 업(kamma)의 회전이고,
무명과 갈애와 취착은 오염원(kilesa)의 회전이고,
알음알이(識)과 정신·물질(名色)과 여섯 감각장소(六入)와 감각접촉(觸)과 느낌(受)은 과보(vipāka)의 회전이다.
세 가지 회전을 가진 존재의 바퀴는 오염원의 회전이 끊어지지 않는 한 쉼이 없다. 왜냐하면 조건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회전하면서 굴러간다고 알아야 한다.
299. 이것은 이와 같이 회전한다.
① 진리의 근원에 따라
② 역할에 따라
③ 차단함에 따라
④ 비유를 통해서
⑤ 심오함을 통해서
⑥ 방법의 분류를 통해서
[존재의 바퀴를]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00.
[(1) 진리의 근원에 따라]:
유익하거나 해로운 업은 구별없이 일어남의 진리(集諦)라고 『위방가』의 진리의 분별에서 설하셨다.
그래서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고 한 무명에 기인한 상카라들이 두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두 번째 진리이다.
상카라들에 기인한 알음알이는 두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첫 번째 진리(고제)이다.
알음알이 등에 기인한 정신·물질부터 시작해서 과보로 나타난 느낌까지의 법들은 첫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첫 번째 진리이다.
느낌에 기인한 갈애는 첫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두 번째 진리이다.
갈애에 기인한 취착은 두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두 번째 진리이다.
취착에 디인한 존재는 두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두 진리이다.
존재에 기인한 태어남은 두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둔 첫 번째 진리이다.
태어남에 기인한 늙음과 죽음은 첫 번째 진리에 근원을 두 첫 번째 진리이다.
이와 같이 진리의 근원에 따라 이것을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01.
[(2) 역할에 따라]:
무명은 대상에 대해 중생을 미혹하게 만들며 상카라들을 나타나게 하는 조건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상카라들도 형성된 것을 잘 형성하며 알음알이의 조건이다. 알
음알이는 대상을 알아차리며 정신·물질의 조건이다. 정신·물질은 서로서로 지탱해주며 여섯 감각접촉의 조건이다.
여섯 감각장소는 각자 자기의 대상에서 일어나며 감각접촉의 조건이다.
감각접촉은 대상을 닿으며 느낌의 조건이다.
느낌은 대상의 맛을 즐기며 갈애의 조건이다.
갈애는 탐착할만한 법들을 탐착하며 취착의 조건이다.
취착은 집착할만한 법들을 취착하며 존재의 조건이다.
존재는 여러 가지 태어날 곳으로 [중생을] 던져버리며 태어남의 조건이다.
태어남은 무더기들을 태어나게 한다. 그들을 거듭 태어나게 함(abhinibbtti)으로써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늙음·죽음의 조건이다.
늙음·죽음은 무더기들의 성숙과 파괴를 주관한다. 다음 생이 나타나는 데 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근심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구성요서들에서 이처럼 두 가지로 [삶의] 전개과정의 역할에 따라 이 존재의 바퀴를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02.
[(3) 차단함에 따라]: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는 구절은 짓는 자가 있다는 견해를 차단한다.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는 구절은 자아가 옮겨간다는 견해를 차단한다.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는 구절은 덩어리라는 인식을 차단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아라고 상상해온 토대가 분해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는 구절은 자아가 보고 ··· 알고, 닿고, 느끼고, 갈망하고, 취착하고, 존재하고,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고 하는 그런 견해를 차단하다.
그러므로 삿된 견해를 차단함에 따라 이 존재의 바퀴를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03.
[(4) 비유를 통해서]:
무명은 법들에 대해 개별적인 특징(自相)과 보편적인 특징(共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장님과 같다.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는 것은 장님이 비틀거리는 것과 같다.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는 것은 비틀거리는 자가 넘어지는 것과 같다.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이 있다’는 것은 넘어진 자에게 종기가 생기는 것과 같다.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있다’는 것은 종기에서 터진 고름과 같다.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있다’는 것은 곪은 종기가 부딪치는 것과 같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는 것은 부딪침으로 인해 생긴 고통과 같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있다’는 것은 고통이 치료되기를 열망함과 같다.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있다’는 것은 치료되기를 열망하는 자가 부적절한 [약]을 쥐는 것과 같다.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부적합한 약을 취하여 바르는 것과 같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은 부적합한 약을 바름으로써 그 종기가 더 악화되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은 종기가 터지는 것과 같다.
혹은 무명은 도닦지 않음과 삿된 도닦음의 상태로 중생을 뒤덮어버린다. 마치 백내장이 두 눈을 덮듯이,
그것에 가린 어리석은 자는 다시 태어남으로 인도하는 상카라들에 자신을 말려들게 한다. 고치에 휩싸인 누에처럼 상카라들에 자신을 말려들게 한다.
고치에 휩싸인 누에처럼.
상카라들에 의해 붙들려온 알음알이는 태어날 곳에서 잘 머문다.
마치 대신들에 의해 안내되어온 왕자가 왕좌에 앉듯이.
[죽음의] 알음알이는 태어남의 표상을 상상하면서 재생연결에 여러 상태를 가진 정신·물질에서 자리 잡은 여섯 감각장소는 자라서 성장하고 원숙해진다. 마치 좋은 땅에 자리 잡은 숲 속 덤불처럼.
감각장소들이 부딪혀 감각접촉이 생긴다. 마치 부시막대를 함께 비벼 불이 일어나듯이.
감각접촉을 닿은 자에게 느낌이 일어난다. 불에 닿은 자가 데듯이.
느끼는 자에게 갈애가 증장한다. 소금물을 마신 자가 목말라 하듯이.
갈망하는 자는 존재에 대해 열망한다. 목마른 자가 물을 열망하듯이.
이것이 그의 취착이다. 취착에 의해서 존재를 취착한다. 미끼에 대한 탐욕으로 낚시 바늘을 취착하는 물고기처럼.
존재가 있을 때 태어남이 있다. 마치 씨앗이 있을 때 새순이 트는 것처럼.
태어난 자에게 늙음과 죽음은 필연적이다. 마치 성장한 나무가 넘어지는 것처럼.
그러므로 이와 같이 비유를 통해서 존재와 바퀴를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04. [(5) 심오함을 통해서]:
세존께서
“아난다여, 이 연기법은 심오하고, 또 심오하게 나타난다(D.ii.55)” (§11)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① 뜻(attha, 결과)으로써
② 법(dhamma, 원인)으로써
③ 가르침(desana)으로써
④ 통찰(paṭivedha)로써,
그 심오한 상태에 대하여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심오함의 분류를 통해서도 이 존재의 바퀴를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05.
[① 뜻의 심오함]:
이 가운데서 태어남이 없이는 늙음·죽음도 없다. 태어남이 없이 다른 것으로부터 이 늙음·죽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늙음·죽음은 태어남으로부터 온다.
이와 같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일어나는 그것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기고 일어나는 그 뜻(attha, 결과)이 심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생기고 일어나는 그 뜻이 심오하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바퀴는 뜻이 심오하다.
이것이 듯의 심오함이다.
원인과 결과를 듯(attha)이라 한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원인의 결과에 대한 지혜가 뜻에 대한 무애해(義無碍解)이다.(Vbh.293)”
306.
[② 법의 심오함]:
무명이 갖가지 상카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어떤 경우에 조건이 되는가에 대해 알기 어렵기 때문에 무명이 상카라들에게 조건이 되는 뜻이 심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상카라들이 알음알이에게 ··· 태어남이 늙음·죽음에게 조건이 되는 뜻이 심오하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바퀴는 그 법(dhamma, 원인)이 심오하다.
이것이 법의 심오함이다.
원인을 법(dhamma)이라 한다.
이처럼 말씀하셨다.
“원인에 대한 지혜가 법에 대한 무애해(法無碍解)이다.(Vbh.293)”
307.
[③ 가르침의 심오함]:
각각의 원인에 따라 가지가지로 생기게 하기 때문에 가르침이 심오하다.
일체지의 지혜(一切知智, sabba-ññuta-ñāṇa)가 아닌 다른 지혜로는 자리잡지 못한다.
어떤 경에서는 순서대로(順觀),
어떤 곳에서는 역순으로(逆觀),
어떤 곳에서는 순서와 역순 [둘 다]로,
어떤 곳에서는 중간부터 시작하여 순서대로 혹은 역순으로,
어떤 고에서는 세 가지 연결과 네 가지 포함을 가진 것으로,
어떤 곳에서는 두 가지 연결과 세 가지 포함을 가진 것으로,
어떤 곳에서는 한 가지 연결과 두 가지 포함을 가진 것으로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바퀴는 가르침이 심오하다.
이것이 가르침의 심오함이다.
308.
[④ 통찰의 심오함]:
무명 등의 고유성질을 통찰함으로써 무명 등을 각자 자기의 특징에 따라 바르게 통찰한다. 그런 무명의 고유성질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심오하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바퀴는 통찰이 심오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무명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진리를 통찰하지 못한다는 그 뜻이 심오하다.
상카라들이 형성하고, 노력하고, 탐욕이 있고, 탐욕이 없다는 그 뜻이 심오하다.
알음알이가 공한 상태이고, 관심이 없고, 옮겨감이 없이 재생연결에 나타난다는 그 뜻이 심오하다.
정신·물질이 함께 일어남과 분리할 수 있음과 분리할 수 없음과 대상으로 기울고 무너진다는 뜻이 심오하다.
여섯 감각장소의 다스리고, 세간이고, 문이고, 밭이고, 대상을 가지는 뜻이 심오하다.
감각접촉의 닿음, 충돌, 함께 모임, 동시발생의 뜻이 심오하다.
느낌의 대상에 대한 맛을 경험함, 즐겁거나 괴롭거나 중립인 상태, 생명이 없음, 느껴진 것의 뜻이 심오하다.
갈애의 즐기고, 집착하고, 흐르고, 덩굴이고, 강이고, 갈애의 바다이고,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뜻이 심오하다.
취착의 가짐, 잡음, 고집함, 집착, 건너뛰기 어렵다는 뜻이 심오하다.
존재의 노력하고, 형성하고, 모태와 태어날 곳과 거주와 거처에 던져버리는 뜻이 심오하다.
태어남의 태어남, , 태에 들어감, 태에서 나옴, 생겨남, 나타남의 뜻이 심오하다. 늙음·죽음의 파괴되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변화하는 뜻이 심오하다.
이것이 여기서 통찰의 심오함이다.
309.
[(6) 방법(naya)의 분류를 통해서]:
여기서
① 단일화(ekatta)의 방법
② 다양화(nānatta)의 방법
③ 무관심(abyāpāra)의 방법
④ 정해진 법(evaṁdhammatā)의 방법이 있다.
이 네 가지가 뜻을 다루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방법의 분류에 따라서 이 존재의 바퀴를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
310.
[① 단일화의 방법]:
마치 씨앗이 새순 등을 통해서 나무의 상태에 이르듯이
‘무명을 조건으로 상카라들이 있다. 상카라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있다’라고,
이와 같이 상속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일러 단일화의 방법이라 한다.
이것을 바르게 보는 자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통해 상속의 끊어지지 않음을 알기 대문에 단견을 버린다.
그릇되게 보는 자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일어나는 상속의 끊어지지 않음을 하나라고 보고 상견을 취착한다.
311.
[② 다양화의 방법]:
무명 등 각각의 특징을 구분하는 것이 다양화의 방법이다.
이것을 바르게 보는 자는 각각이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상견을 버린다.
그릇되게 보는 자는 하나의 상속 중에 있는 것을 다른 상속이라고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단견을 취착한다.
312.
[③ 무관심의 방법]:
무명이 ‘나에 의해서 상카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라거나
상카라들이 ‘나에 의해서 알음알이가 일어나야만 한다’라는,
그러한 관심이 없는 것이 무관심의 방법이다.
이것을 바르게 보는 자는 만드는 자가 없음을 깨닫기 때문에 자아라는 견해를 버린다.
그들이 비록 관심이 없더라도 무명 등이 원인의 성질을 가지는 것은 각자 고유성질의 정해진 법칙에 따라 성취된 것인데,
그릇되게 보는 자는 이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업을] 지음이 없다는 견해(akiriya-diṭṭhi)를 취착한다.
313.
[④ 정해진 법의 방법]:
마치 우유 등으로부터 커드 등이 생기듯이 무명 등의 원인으로부터 상카라들 등이 생기지 다른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정해진 법의 방법이다.
이것을 바르게 보는 자는 조건에 맞게 결과가 있음을 보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는 견해(ahetuka-diṭṭhi), 無因論)와 [업을] 지음이 없다는 견해를 버린다.
그릇되게 보는 자는 조건에 맞게 결과가 일어남을 보지 않고 어떤 것도 어떤 곳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는 견해(無因論)와 운명론(niyata-vāda)을 취착한다.
이와 같이 이 존재의 바퀴를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알아야 한다.(§299)
① 진리의 근원에 따라
② 역할에 따라
③ 차단함에 따라
④ 비유를 통해서
⑤ 심오함을 통해서
⑥ 방법의 분류를 통해서
314. 참으로 이 존재의 바퀴는 너무나 깊어서 발판을 얻을 수 없고, 갖가지 미로가 있어 통과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수승한 삼매의 돌 위에서 예리하게 갈은 지혜의 칼로 이것을 끊어버리지 않고서는 벼락처럼 항상 파괴하는 이 윤회의 두려움을 꿈에서라도 건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다.
“아난다여, 이 연기법은 심오하고, 또 심오하게 나타난다. 인류가 이 법을 알지 못하고 깨달지 못하기 때문에 실타래에 뒤엉키고 실 매듭에 얽히며, 문자 풀과 빱바자 풀처럼 서로 뒤엉켜 처참한 곳, 비참한 곳, 지옥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D14/ii.55)”
그러므로 나와 남의 이로움과 행복을 위해서 도닦으면서 나머지 일은 제쳐두고,
현자는 갖가지 심오한 조건(paccaya)의 형태에 대해
발판을 얻도록 이처럼 마음챙겨 수행해야 한다.
어진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지은 청정도론의
통찰지수행의 표제에서
통찰지의 토양에 관한 해설이라 불리는
제17장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