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판이 몰락한 까닭
붕괴의 한 예로 규모는 작았지만 건물이 빽빽이 들어섰던 도시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현재 온두라스 서부에 위치함 '코판(copan)'이란 유적으로,
고고학자 데이비드 웹스터(David Webster)가 두 권의 책에서 상세히 다룬 도시이기도 하다.
코판에서 최적의 땅은 강을 따라서 형성되고 비옥한 충적토로 덮여 농사짓기에 적하한 다섯 구역의 평지이며,
전체 면적은 10평방마일에 불과하다.
다섯 구역 중 가장 큰 곳이 '코판 구역'으로 면적은 5평방마일이다.
코판 부근의 땅은 대부분 가파른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고, 언덕의 거의 절반에서 경사가 16도를 넘는다.
미국 고속도로에서 가장 가파은 경사의 2배나 되는 셈이다.
골짜기의 토양에 비해서 언덕의 토양은 비옥한 편이 아니다.
요컨대 산성도가 높고 인의 함유량은 낮다.
요즘에도 골자기의 밭에서 생산되는 옥수수의 양이 언덕의 밭에서 생산되는 양보다 2~3배나 많다.
게다가 언덕의 경사지는 급속히 침식되고 있어 10년 내에 생산성이 4분의 3가량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집터의 수로 짐작해보면 코판밸리의 인구는 5세기부터 가파르게 증가해서
750~900년경에 약 2만 7,000명까지 도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마야의 기록에 따르면 티칼과 테오티우라칸의 귀족들과 관계된 사람들이
426년에 이곳에 도착하면서 포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650년부터 750년 사이에 왕들을 찬양하는 기념물들이 대대적으로 건설되었다.
700년 이후에는 귀족들이 경쟁적으로 그들의 궁전을 짓기 시작해서, 800년쯤에는 약 20곳에 궁전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약 25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방들을 갖춘 50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왕과 왕궁이 농부들에게 부담을 주었듯이, 귀족들과 그들의 궁전들도 농부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코판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큰 건물이 세워진 때는 800년경이었고,
왕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그림문자가 남겨진 미완성의 제단에는
822년에 해당되는 장기계산역법의 해가 새겨져 있다.
코판밸리의 주거지는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고고학적 탐사 결과에 따르면 그 지역들에 정착한 시기가 약간씩 다르다.
가장 먼저 정착해서 농사를 시작한 곳은 골짜기의 저지대인 코판 구역이었고,
역시 골짜기의 저지대인 나머지 네 구역에 차례로 정착했다.
그동안 인구가 증가했지만 아직 언덕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한 까닭에 휴경기를 단축하고 이모작과 약간의 관개시설로
저지대에서의 농작물을 증산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650년경부터 사람들은 언덕으로진출하기 시작햇다.
하지만 언덕 비탈은 한 세기 가량만 경작된 듯하다.
코판에서 언덕에 거주한 사람들은 총인구의 41퍼센트를 정점으로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모든 사람이 다시 골짜기에 모여 살았다.
언덕에 살던 사람들이 다시 골짜기로 내려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골짜기에 세워진 건물들의 기초를 조사해보면 골짜기가 8세기에 퇴적물로 덮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언덕 비탈이 침식되면서 토양의 양분이 골짜기로 흘러내려갔다는 뜻이다.
또한 산성화되어 척박해진 언덕의 토양까지 골짜기로 흘러내려가 비옥한 골짜기를 뒤덮고,
골짜기의 생산성 마저 떨어지는 결과가 초래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골짜기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은 요즘의 마야인들도 똑같이 겪고 있다.
언덕 비탈이 침식되는이유는 자명하다.
과거에 언덕을 뒤덮고 토양을 지켜주던 숲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화분(花粉) 분석으로 연대를 측정한 바에 따르면,
언덕 윗부분을 뒤덮고 았던 소나무숲이 완전히 개간되었다.
대부분의 소나무가 땔나무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건축용이나 소석고(燒石膏)를 만드는 데 쓰였다.
고전기 이전의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마야인들은 건물에 석고를 무척 두텁게 바르고 있다.
따라서 석고 생산이 삼림 파괴의 주된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삼림 파괴로 언덕이 침식되어 골짜기가 퇴적물로 뒤덮이고 땔나무나 건축용 목재가 부족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숲이 물 순환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즉 삼림 파괴로 강수량이 줄어드렀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초래한 ' 가뭄이 골짜기에 닥쳤을 수 있다.
코판의 고고학적 유적에서 발굴된 수백구의 유골에서
골다공증이나 치아의 긴장선 등과 같은 질병과 영양 부족의 징후를 찾으려는 연구가 있었다.
그 결과에 따르면 코판 주민의 건강상태가 650년부터 850년까지 꾸준히 악화되엇다.
지배계급과 평민 모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평민의 경우가 더 심했다.
코판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언덕까지 올라가 살았다.
그 후 언덕에 개간한 밭을 포기했다는 사실은
언덕에서 생산되던 식량까지 골짜기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10평방마일에 불과한 골짜기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려는 경쟁이
사람들 간에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농부들은 더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 뙈기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요즘의 르완다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민들에게 권력과 재물을 보장 받은 대가로 비와 풍요를 약속했지만 코판의 왕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따라서 실패한 영농을 책임지는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코판의 왕은 822년에 사라졌고 왕궁은 850년경에 불태워졌다.
그러나 그 후에서 사치품이 계속 생산되었다는 사실에서,
왕이 몰락한 후에도 975년경까지 일부 귀족이 호화로운 삶을 그런대로 유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연대 측정이 가능한 흑요석 조각들로 추정해보면
코판의 인구는 왕과 귀족이 줄어든 것보다 더 큰 폭으로 감소되었다.
950년경의 인구는 1만 5,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성기이던 2만 7000명의 54퍼센트인 셈이다.
그 후 인구는 꾸준히 감소되어. 1250년경에는 코판 밸리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 후 나무에서 떨어진 화분이 다시 소생하면서 숲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도
코판밸리에 사람이 없었다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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