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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제자훈련원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의향기
기독교 윤리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오늘 공부는 기독교 윤리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전폭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윤리 문제는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몇 가지 명제를 외우고 그것대로 실천한다고 해서 윤리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 삶은 그런 명제로 규정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거기에 연루되어 있어요. 그런 상황이 바로 윤리적 지평입니다. 오늘은 ‘지평’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거로부터 강의를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윤리적 지평
지평이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호리존트(Horizont)의 번역입니다. 영어도 비슷하게 발음합니다. 직역하면 차원이라는 뜻이죠. 호리존트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말로 바꾸기가 쉽지 않아요. ‘세계’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것 같네요. 어떤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음악에도 세계가 있고 미술에도 세계가 있고요. 영화에도 세계가 있고 시에도 세계가 있고, 다 세계가 있습니다. 바둑에도 세계가 있는 것 아세요? 조폭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을 겁니다. ‘어떤 것’이 있는 거예요. 이것은 굳어져 있는 게 아니라 늘 움직입니다. 왜 제가 이 단어를 썼는가 하면,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딱 고정된 게 아니라 움직이는 어떤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좀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윤리나 도덕은 다 비슷해서 하지마라, 혹은 하라는 식의 규범들을 말하는 게 아니냐고 말이죠. 물론 그런 윤리도 없는 건 아닙니다. 주로 규범윤리라고 하는데요. 이것을 한두 마디로 딱 끊어서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어쨌든 규범윤리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을 규칙이나 규범에 맞게 끌어가면 된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이 규범윤리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되었어요. 구약성서의 율법은 일종의 규범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규범윤리는 현재에 와서는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 입장은 윤리가 고정된 어떤 원칙이 아니라 어떤 세계라는 겁니다. 그래서 호리존트 말을 붙였어요. 윤리는 기독교 신앙과 맞물려 돌아가는 겁니다. 신앙은 접어놓고라도, 윤리의 차원에서 볼 때 정말 윤리적인 사람은 규칙에 딱딱 맞춰서 컴퓨터처럼 행동하는 게 아니라 윤리적인 어떤 세계로 들어가는 거죠. 그걸 상황윤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규범이 주로 텍스트(text)에 중심을 둔다면, 상황(context)은 텍스트와 대조되는 것으로 어떤 상황에 바람직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삶의 자세에 중심을 둔다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이야기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겁니다. 저의 입장은 규범윤리나 상황윤리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령론적인 윤리라고 할 수 있어요. 훨씬 더 역동적인 방향을 의미합니다.
혹시 강의를 듣는 사람들 중에 신학생들이 있다면 용어들을 빨리 익혀서 이해를 했으면 합니다. 용어도 다 세계가 있거든요. 성령, 하나님, 칭의, 종말 같은 용어에도 다 세계가 있고, 다 연관되는 문제예요. 딱 고정된 게 아니라 호리존트, 지평인 거죠. 계속 움직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마 세상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겁니다. 이 세계가 얼마나 변화무쌍하고 새롭고 신비로운지를, 그리고 우리가 어떤 원칙으로도 이런 걸 다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에요. 이거는 공부를 많이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알 수 있는 문제거든요. 학문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을 좀 더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삶에 다 들어 있어요. 그 안으로 한발 한발 들어가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학위를 딴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 세계를 조금 맛본다는 것인데,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신학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아도 신학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니까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는지는 계시니 종말이니 하는 전문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맛볼 수 있는 겁니다. 그걸 느낄 수 있어요. 다만 축자영감설에 매여 있거나 교리문답을 달달 외우는 것에 만족한다면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열리지가 않아요. 성령론적 윤리를 언급하면서 제가 신학생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어서 한 겁니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인간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명을 이끌어가는 성령과 교제함으로써, 즉 성령의 말 걸음에 대해서 우리가 마땅한 대답을 할 줄 아는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행동이 그 생명과 진리의 영인 성령 쪽으로 나가는 능력을 확보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요즘 촛불집회가 많이 열리고 있는데요. 거기에 나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는 딱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판단해야 해요. 나가는 사람이 윤리적이거나 나가지 않는 사람이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반대로 나가지 않는 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간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그럼 좋고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 멋대로 하라는 건가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 상황에 따라서 그런 문제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거죠. 그게 성령론적 윤리입니다.
인간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
우리는 보통 신앙이 좋으면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 사람은 신앙은 좋은데 행동이 개차반’이라는 말도 합니다. 이런 말들은 신앙과 윤리가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가 전제하는 거예요. 우리는 과연 정말 그런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면에서 모범적으로 살아서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을 전제로 하는 이야기인데, 이것을 조금 더 진솔하게 이야기해보자는 겁니다. 신앙이 좋으면 정말 윤리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 되나요? 저는 별로 그런 거 같지 않더라고요.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게 없다는 사실을 저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괜찮은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모두들 그렇게 하고는 싶은데,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게 우리의 딜레마죠. 분명히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하는데 다르게 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르게 살 가능성도 별로 많지 않다는 겁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봐도 기독교 국가가 비기독교 국가보다 더 윤리적이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어요. 미국 같은 나라들은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이 강합니다. 기독교 국가는 아니더라도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합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공화당 출신의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미국의 보수주의, 온건한 복음주의 쪽의 기독교가 중추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미국이 윤리적인 국가냐고 묻는다면 여기에는 자신이 없죠. 쇠고기 파동도 마찬가지예요. 어쨌든 미국도 자기들의 이윤만을 극대화하기에 바쁩니다. 우리보다 약한 인도나 방글라데시나 베트남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대하는 태도를 본다면, 미국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자국 이기주의에 대해 우리가 손가락질할 만한 입장은 되지 못해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잘못했으니까 미국의 잘못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죠. 어쨌든 기독교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과 기독교 윤리는 상당히 연관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별로 그렇지 못하다고 하는 이 딜레마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이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가 윤리를 말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입니다. 어떤 행위가 혹은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냐는 거예요. 만약에 가치에 대한 판단이 없다면 윤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윤리가 가능하지 않죠. 그들은 그저 자연 속에 던져진 존재들로서 자연에 충실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배고프면 무조건 잡아먹어야 해요. 무조건요. 사자는 옆에 있는 노루나 토끼를 잡아먹어야 하는 거죠. 노루가 지금 임신 중이라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냥 자연의 요구에 충실한 겁니다. 반면 그들은 배가 부르면 옆에 토끼가 지나가도 잡아먹질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좀 달라요. 자기 행위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해요. 어떤 게 더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판단을 하는데, 그런 판단을 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혼자 있다면, 무인도에 있거나 사막의 성자들처럼 혼자 명상만 하고 싶어 한다면 윤리는 필요하지 않겠죠. 인간만이 인간관계에서 어떤 행위가 가치가 있는지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윤리가 개입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고 했죠? 결국 윤리는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어떤 행위의 가치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는가 하는 거예요. 이게 어렵죠. 현대 사회는 옛날에 비해서 복잡하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판단도 달라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윤리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가치론적 판단이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도, 우리는 윤리 문제를 몇 개의 규범을 던져주고서 군대처럼 따르라고 하는 상황이거든요. 일반적으로는 그냥 시대가 요구하는 기준들을 따라서 행동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요구하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요. 요구들이 사람마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타당하고 모두가 인정할 만한 행위를 찾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고요. 가장 보편적인 윤리라고 한다면 사랑, 평화, 정의 같은 개념들을 기초로 해서 구체적인 행위들이 나오겠죠. 그런데 이런 것들도 계속해서 서로 충돌합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 군인들의 용감무쌍한 활약상들이 있었잖아요? 미국의 요구를 받은 우리 국군은 그 당시에는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생각으로 베트남에 갔겠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그게 끔찍한 사건이었거든요. 같은 사건을 놓고서 서로가 충돌하는 거죠. 뭐가 윤리적이냐 하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 윤리를 말할 때 몇 가지 기준들을 세워봤어요. 성서가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몇 가지 기준들입니다.
존재와 행위
첫째는 존재와 행위의 관계에요. 제가 앞에서 ‘존재’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했는데요. 그래도 아직까지 그 개념이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좀 더 많이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행위는 아주 정확하죠. 겉으로 드러난 행위 그 자체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이죠. 존재는 그것의 바탕입니다. 성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존재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 나오는 대로 나무이고 행위는 그 열매입니다.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했어요. 이게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는 열매를 봐야 한다는 거예요. 나무와 열매, 이 두 개는 분명히 다른 겁니다. 다르긴 하지만 깊숙이 연결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존재가 새로워져야 거기에서 나오는 열매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너무 진부한 이야기죠.
잘 아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의 한 비유를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바리새인들은 굉장히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신앙도 좋고 행동도 아주 좋았죠. 이 행동에는 종교적인 행동, 사회적인 행동이 다 포함됩니다. 당시에는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이 구분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가장 윤리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사사건건 충돌을 합니다. 물론 복음서는 그걸 조금 과장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이 탐탁지 않게 보였을 가능성은 아주 높아요. 이 바리새인들은 누가복음 18장 11-12절에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가장 모범적이고 경건한 사람들이었죠. 반대로 세리는 전혀 그렇지 못한 죄인이었어요. 그런데 오히려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이건 참 어려운 문제예요. 바리새인들이 있고, 죄인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서 기도 내용에 나온 것처럼 그럴듯하게 살았어요. 이 죄인들은 정말 나쁘게 살았고요. 파렴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죄인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얘기했을까요? 답은 여러분이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세운 업적에 마음을 두었던 겁니다. 반면 이 죄인들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만 마음을 기울였던 거죠. 은총에 의한 의, 혹은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존재와 행위라는 제목으로 설명한다면, 바리새인들은 행위에 치우친 사람들이고, 죄인들은 존재에 기울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겉으로 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아요. 일반적인 교회 생활에서도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더 인정해줘요. 교회에도 잘 나가고, 헌금도 잘 드리고, 말도 세련되게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니까요. 여러 면에서 모범적인 사람들이니까 인정을 할 수밖에 없죠. 반면에 시원찮은 사람들, 세속적이거나 문제가 있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지향한다는 것을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걸 잘 놓쳐요. 이것은 하나님만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판단할 수 없어요. 개차반이고 하나님의 은총도 의지하지 않을 것 같은 완전히 망가진 사람도 있는데, 꼭 그렇게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거죠.
서울역을 지나다 보면 노숙자들을 보게 됩니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서 자는데요. 요즘은 그나마 날씨가 좀 따뜻해서 잠자리가 나은 것 같아요. 추울 때는 지하도 같은 곳에서 스티로폼이나 두꺼운 종이를 깔아놓고 자죠. 폐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알코올 중독자나 폐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은총 지향적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반면에 찬송가와 성경을 끼고 교회에 나와 예배도 잘 드리고 헌금도 잘 하면서, 내가 이렇게 변화되어 새로운 사람이 되었음에 감사하며 실질적으로 모범적인 행동을 많이 하는 우리 같은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일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저를 향해서도 하는 말이에요. 제가 나름대로 이룬 것이 있거든요. 좋은 책을 쓰거나 설교비평을 해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했다는 것 등이 남아 있어요. 나를 나타내는 것에 기울어지는 거죠.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태, 자기가 이룬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있을 때 사람은 다른 것을 기대하게 되거든요. 그 ‘다른 게’ 하나님의 은총이지요. 그게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닌가는 여기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존재 지향적이어야 하고 여기에서 마땅한 열매가 나와야 해요. 바리새인 같은 열매 말고요. 그런데 그 열매를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그걸 누가 판단하겠어요? 그건 우리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합니다. 우리는 자기 세뇌가 가능한 존재들이어서 고상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밑바닥에 교만한 자기 의가 자리하고 있거든요. 그게 가능해요. 그걸 우리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할 정도예요. 난 이만하면 됐다, 참 겸손하다, 마음을 비웠다는 식으로 생각해요. 죄인처럼 주님 앞에서는 오직 은총만 기대한다고 말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도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겁니다. 그게 어려워요.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의 용서를 빌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신학적 근거에 비춰 보는 반성(reflection)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런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순식간에 바리새인적인 소유 의식에 빠져버릴 겁니다. 이런 것은 인격이 좋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이 단락의 결론을 내렸으면 좋겠네요.
우리 존재의 변화는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존재가 새로워진다는 거예요. 이것을 믿음과 행위의 문제로 설명한다면, 믿음은 행위를 규정하고 행위는 믿음을 평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는 믿음이 우선하고 인식론적으로는 행위가 앞선다고 할 수 있어요. 믿음이 우선인가 행위가 우선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둘이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은 우리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올바르게 믿으면 당연히 그 근거에서 그 뿌리에서 그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기 마련입니다. 그 열매를 자꾸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모양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나올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이고요. 행위는 우리의 믿음, 우리의 존재, 우리의 나무됨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존재와 행위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 두 차원, 존재와 인식이 극단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만 외치면서 의지를 비난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직 실천만 강조하다가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에서 일종의 영적 에너지 부족증이 나타나고요. 민주화나 노동 현장에만 뛰어다니거나 사회봉사에만 치중하다가 그 일이 조금 해결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감각을 잃는 것과 비슷합니다. 민중신학에서 그런 걸 볼 수 있는데요. 기독교가 사회봉사나 민주화 운동도 가열하게 펼쳐 나가야 하겠지만 시민단체들과는 구별돼야 하거든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인 믿음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지를 잘 살펴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눈에 띄게 딱 떨어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윤리를 지평이라고 말한 겁니다. 누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인 믿음의 관계에 들어가 있는지, 무엇이 거기에서 나오는 참된 열매인지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힘들고 자기 자신도 판단하기 힘든, 성령만이 판단할 문제예요. 그런 면에서 우리는 늘 주님의 용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게 정말 중요한 문제인데, 그냥 기도 시간에 맞추어 기도 잘하고 큐티를 잘한다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려니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난 주일에 제가 말한 대로, 하나님 경험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이 분명하게 된 사람이라면, 그런 부분이 심화된 사람이라면 삶에서 자연스럽게 열매가 나올 거예요. 여기에 더 설명해야 할 문제가 있긴 한데, 불립문자라고, 말로는 더 이상 표현이 안 되네요. 더 미묘한 것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표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강의를 귀담아 들었다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달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과 사회
기독교 윤리가 몇 가지 규범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성령론적 차원에서 역동적이고 변화되는 세계의 문제라는 차원에서 그것을 존재와 행위로 이야기했고요. 이번에는 개인과 사회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라인홀드 니버라는 미국의 유명한 윤리학자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도덕적 인격을 가질 수 있지만, 사회 구조 속에서는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때가 많다는 거예요. 인간의 행위, 인간의 죄, 인간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인이 변화되면 사회가 변화되겠지 하는 식의 낭만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관점입니다. 이 사람의 신학 성향을 기독교 현실주의라고 하는데요. 윤리학자입니다. 그의 입장을 현실주의적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이 죄의 현실을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개인 하나하나를 인격적이고 신앙적인 사람으로 만든다고 해서 사회가 변화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옥한흠 목사님이 사랑의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30년 동안 제자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가 뭘까요? 강남 지역이 변화되었나요? 사랑의교회를 통해서 한국 사회가 변화되었을까요? 변화된 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사랑의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다른 교회 사람들이나 혹은 일반 사회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걸 계량기에 달아놓고 잴 수는 없으니까 뭐라 말할 수는 없는데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본다면 전혀 차이가 없다고 봐야 옳을 겁니다. 옥한흠 목사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문제는 개인에 대한 것은 강조하는데 사회적 관점이 약하다는 거예요. 그래도 복음주의권에 있는 원로급 목사님들 중에서는 그나마 사회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인식하는 분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면 다 개인윤리로 떨어지고 있거든요. 니버에 따르면 개인의 변화와 함께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개인과 사회는 결코 변화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것은 교회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개신교에 많은 문제에 있다고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성하고 새로운 사명감으로 열심히 잘하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순진한 생각입니다. 한국교회가 구조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한 개인이 그것을 뚫고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해요. 먹고 사는 문제가 턱에 걸려 있는데 언제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바로 들어가서 다른 걸 가르칠 수 있겠어요? 그런 설교를 할 수 있겠어요?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한국교회가 교회 구조 뿐 아니라 조금 더 나아가 이 사회 전체 구조를 바꾸어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는 너무 부족하죠.
인간의 윤리를 말할 때 개인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 시대정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강의 준비하다가 이명박이라고 하는 메모를 적어두었는데요.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정신이 뭐냐는 거죠. 그분이 살아왔던 시대가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하던 때였어요. 그때 입신양명하고 고속출세하며 산 사람이죠. 입지전적으로 출세한 분입니다. 그분이 살아왔던 삶과 역사가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거기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데, 잠깐 생각이 나서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시대 자체가 부도덕하면 개인도 부도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거죠. 이런 문제가 한두 마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그 시대정신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몇 가지만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로 로마시대에 로마 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다 전쟁에서 가져온 노획물로 먹고 살았거든요. 그렇다면 그 시대에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로마 시에 살던 사람들은 개인적으로는 인격적일지 모르지만 시대적으로는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죠.
두 번째로 북아메리카를 무력으로 접수한 청교도들인데요. 아메리카에 가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땅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데려다가 노예를 삼았고요. 그것을 근거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할 정도로 힘을 키웠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청교도들이었다고 해도 북아메리카를 정복하던 그 시대는 정치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잘 믿고 청교도로서 성실한 사람들이었는지 모르지만 시대 자체가 악한데 그중 한두 사람을 윤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큰 틀에서 보면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는 우리나라의 분단체제예요. 지금 남한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의 상당수가 남북분단 때문에 일어납니다.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으로 서울대 교수였다가 은퇴하신 백낙청 교수가 분단체제의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현실을 분석했는데요. 그분은 지금 우리가 분단 이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정의하더군요. 우리가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세계에서 가장 앞선 대학 진학률을 보일 뿐 아니라, 개개인들이 상당히 계몽된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나라만큼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이 활동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게 아마 분단체제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2-3백 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이 시대를 돌아본다면 이 시대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서 도덕성을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북쪽에서는 숙청이 일어났고 우리 남쪽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이념적인 문제로 죽이고 쫓아내고 했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분단체제에서 벌어진 부도덕한 행위들이거든요.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는 그 시대 안에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다 공범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도 총체적인 부도덕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유와 소비가 오늘 우리의 삶을 확인해주는 가장 크고 유일한 근거가 되어 버렸죠. 우리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삽니다. 모든 삶들을 거기에 집중시키고 있어요. 이런 시대정신과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될 우리의 후손들은 이 시대를 살았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아마도 전체적인 시대정신의 부패로 인해서 모두 부도덕했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요?
여기서 제가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기독교 윤리가 초등학생들에게 몇 시에 일어나서 어떻게 하라는 몇 가지의 규칙을 가르쳐서 모범생을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가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작업이라는 거였습니다. 존재와 행위의 문제도 그렇고, 개인과 사회의 문제에서도 그래요. 이게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한두 가지 규범들을 내세워서 이렇게 하면 도덕적이고 저렇게 하면 부도덕하다고 말하는 것은 윤리학이 아니라 훈계입니다. 때로는 훈계도 필요해요. 그러나 훈계만 받던 사람들은 윤리학적으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는 윤리학이 없어요. 사실은 있다고 해도 규범윤리만 차고 넘치죠. 뭐는 하고 뭐는 하지 말라는 방식에 신자들이 주눅 들어 있어요. 아주 적나라한 예로 술 담배 문제가 있죠.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윤리 문제가 아니에요. 이런 것은 단순히 사는 방식의 훈련입니다. 잔소리를 듣고 훈련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도덕주의적 설교의 문제
그래서 제가 설교비평에서 여러 가지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도덕적 설교의 문제를 짚은 겁니다. 도덕적 설교가 거의 잔소리였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그랬어요. 신자들은 그게 설교인줄 아는 거죠. 장경동 목사님은 이혼 문제를 다루면서 ‘참고 살아’ 하고 외치더군요. 이혼해야 될 경우에는 이혼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윽박지르듯이 뭐는 하지 말고 뭐는 하라는 식으로 계속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어린 자녀들도 잔소리 듣고 자라면 나중에 정서적으로 어떻게 되는지 알죠? 한국교회 신자들이 그런 방식으로 살고 있습니다. 잔소리를 들으니까 다른 사람들을 볼 때도 그렇게 보는 거예요. 그것은 윤리가 아닙니다. 윤리는 어떤 구체적인 사안들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들에 직면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거예요. 앞서 말한 것처럼 윤리라는 것이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상당히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존재와 행위의 문제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을 습득하게 되면 겉으로 드러난 멋진 행동만을 보면서 무조건 잘했다고 말하지는 않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어떤 판단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되죠.
제가 비판하고 있는 도덕주의적인 설교는 규범적인 설교입니다. 규범적인 설교를 하지 말라는 제 주장에 대해서, 성서에 그런 규범이 있지 않느냐고 반론들을 합니다. 그런 반론들은 일종의 성서 실증주의 윤리입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것들을 실증적인 가르침으로 받아서 전하는 거예요. 성서 실증주의죠. 물론 성서 안에 그런 윤리적인 가르침들이 구체적으로 나열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도 있고, 산상수훈에 보면 고귀한 가르침들도 있어요. 또 로마서 뒷부분에도 보면 윤리적인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서에도 있고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여러분이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성서의 그러한 진술들이 바로 그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해석해야합니다. 결국 성서해석이 관건입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에 나와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있잖아요. 그 열매들은 기독교적인 덕이 아니라 그 당시 로마 헬라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덕이었어요. 그걸 바울이 그냥 도입했던 것뿐인데요. 성서에는 그런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그냥 기독교 윤리로 받아들여서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게 나쁜 건 아니겠죠. 그러나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무조건 좋은 게 아닙니다. 좀 역설적인 이야기 같은데요. 교회에 가서 나쁠 게 있냐고, 교회 가면 좋은 거 하라고 가르치니까 교회에 가면 좋다고들 말하죠.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좋은 걸 말하는 게 아니죠.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시민종교가 아닙니다. 그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건전한 시민을 양육하는 걸 목표로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시대정신을 거스르는 거죠. 십자가가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고 시대의 말썽꾸러기가 되라는 뜻이 아니고요. 그 시대가 늘 옳은 것은 아니잖아요. 지금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영어 몰입 교육부터 시작해서 중고등 학생들이 늦은 밤 시간까지 수업을 하고 학원에 다니는데, 이런 삶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모습을 파괴하는 거잖아요. 이런 시대정신에 우리가 어떻게 항거할 수 있는가 하는 거죠. 자녀들이 학원에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해서 명문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축하 예배를 드리기도 하던데요. 그런 기독교 신앙은 그 당시 스캔들이었던 예수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먼 일종의 시민종교가 돼버린 거죠. 그러니까 성서에 나와 있다고 무조건 가르칠 게 아니라 왜 그것이 그 당시에 가치 있는 삶의 근거였는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오늘날에는 어떤 삶이 가치가 있는지를 알 수 있죠. 2-3천 년 전에 있었던 성서 윤리를 그대로 공식처럼 우리에게 가져다가 적용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가 아닙니다. 성서가 우리의 윤리적 전범은 될 수 없어요. 왜 그런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강의를 정리해야겠습니다. 성서에 있는 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다 대입시킬 수는 없다고 했어요. 우리는 왜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그런 윤리 규범들을 가치 있게 생각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배워야 해요. 오늘날의 문제는 오늘날의 시대적 정신에서, 혹은 우리의 세계 이해 안에서 우리가 결정해야 되는 겁니다. 윤리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두 주에 걸쳐 공부하게 되니까 이 문제는 다음 주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성(sexuality) 문제를 다룰 때 동성애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이야기할게요. 2천 년 전에는 이것을 죄로, 정확하게 말해 조의 결과들로 이야기했는데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는 게 윤리학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동성애에 대한 문제를 우리의 생명 이해, 오늘의 삶의 이해로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런 게 없으니까 성서에서 그것을 죄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순수해서 좋기는 한데 순수하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지혜로워야죠. 옳은 것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성서에 있다고 해서 실제로 다 적용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성서에 많이 있으니까요. 물론 맞는 이야기도 많고요. 그러나 우리는 성서 안에 있는 것들이 정말 그 당시 우리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중요한 규범들이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에요. 중요하기도 하고 잘못하면 다 놓치기도 합니다.
오늘 강의 첫 부분에서 설명한 ‘지평’이란 단어를 꼭 외워 두세요. 지평은 세계라는 겁니다. 오늘 강의를 들은 것 중에 이 개념만 이해해도 이 시간이 아깝지 않죠. 성서가 그런 윤리적 규범들을 말하게 된 데는 어떤 세계가 있는 거예요. 그 규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요. 그걸 통해서 생명을 이해했던 거죠. 생명을 지키는 어떤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게 참 놀라워요. 그 당시에는 그런 방식을 통해서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오늘날에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허락한 생명을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오해하지 마세요. 성서의 윤리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질문을 해야겠네요. 기독교 신자들의 윤리를 규정하는 유일한 전범이 성서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윤리적 근거를 찾아야 하는 걸까요? 윤리적 규범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규범에 이르는 길은 있어요. 바로 해석하는 능력이죠. 현재 처해 있는 정황에 대한 해석 말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그 길을 발견하는 거예요. 예수님도 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 길을 알게 되면 오늘 우리가 당면해 있는 많은 삶의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는,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나요?
오늘 저의 강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윤리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게 아니에요. 윤리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겁니다. 이런 것을 고민하지 않으면 기독교적인 신비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미 다 아는 뻔한 답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아는 척한다면 그건 아직 뭘 모르는 사람이죠. 기독교 윤리라고 해서 성서대로만, 뜨거운 신앙체험으로만 살면 되는 게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밝혔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는 하나님 나라와 직결됩니다. 우리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실행되어야 합니다. 삶은 뭐예요? 생명의 문제예요. 삶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윤리의 근거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죠. 성서는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는 ‘예’입니다. 성서가 하나님 나라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죠. 성서는 이미 이천 년 전에 쓰인 문서지만,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와 판단은 이 종말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성격을 갖고 있습니까? 이거 알면 신학자예요. 뭐예요? 잠정성입니다. 우리의 윤리가 잠정적이라는 거죠. 우리의 행동은 늘 이 안에 머물러 있어요. 윤리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에서 우리가 최선의 것을 찾되 결정된 것은 없다는 거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에 근거해서 오늘 이 현실의 삶에 우리가 참여하는 겁니다. 그 종말에서 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이 오늘 우리의 삶에 병행되도록 우리가 영성의 깊이로 들어가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