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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제 6 강 메시지 아산UBF
권고를 듣는 지혜로운 자
말씀 / 잠언 12, 13장
요절 / 잠언 12:15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오늘 말씀은 듣는 자세와 성실성 그리고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은 문제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들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관심, 그들의 이슈를 가지고 관심어린 대화를 오래 지속해주십니다. 말씀을 전하실 때도 농사짓던 사람들에게는 농사짓는 이야기로 예를 들어 주시고,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장사하는 이야기로 진리를 풀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전지적인 능력이 있으셔서 다 아시면서도 먼저 들어주시고 이해해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들어주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생각의 바탕에 두고 있으며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신자에 대한 무시 판단을 품고 있습니다. MZ세대들이 기성세대에 갖는 거부감은 나이 많은 사람은 어쨌거나 가르치려 한다는 것인데, 기독교인이면서 나이 많은 사람의 특징은 전문성도 없으면서 뭐든 아는 척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말을 하려 하고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처럼 선한 사람은 없다, 나는 옳다고 여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듣는 자세가 정착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실성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좋은 언어생활, 때에 맞는 대화능력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1. 지혜로운 자의 특징(12장)
1절을 보십시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훈계’는 바로잡는 것 혹은 징계를 포함하는 교육적인 조언입니다. ‘지식은 단순하게 아는 것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혜와 통찰력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훈계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 사람의 성숙함을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성숙도가 대단히 낮아서 짐승의 수준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는 다 아시지요? 훈계를 받아야 한다. 훈계받는 사람이 훈계를 들으면 이득이 있다. 다들 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실제 삶에서 훈계를 거부하는 때가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는 훈계가 틀린 말인 것 같으면 거부합니다. 내가 듣기에 훈계가 합리적이고 타당하면 듣지만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 거부합니다.
또한 우리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훈계를 수용합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훈계 듣는 범위가 아주 좁아집니다. 이익에 민감한 사람도 훈계가 자기손해를 강요한다 싶으면 듣기 거부합니다. 가장 훈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자기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훈계를 거부하는 방식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훈계 들을 때, 인상 쓰거나 거부의사를 밝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거부방식은 일단 면전에서 공손하게 예,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해놓고 뒤에 돌아서서 거부감, 반발심을 나타내는 것도 있습니다. 훈계를 거부하는 교묘한 방법 중의 하나는 훈계 할 만한 사람, 훈계를 하는 사람에게 미리 비위를 맞추어 주되 계속 비위를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에 대하여 비판적인 훈계가 나오지 않고 나를 매사에 너그럽게 대하도록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는데도 훈계가 있으면 절대 면전에서는 반발하지 않고 깊이 듣고 자숙하는 표정을 지어보입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서서 거부하는 것입니다.
무슨 방식이 되었든 훈계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자연인 그대로 살고 더 이상 성숙해지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10대 때의 한계가 20대에서도 나타나고 30대, 40대, 50대에서도 여전합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 됩니다. 듣는 것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누구든지 거부하고 싶고 반발하고 싶은 것이 본성 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 듣습니다. ‘이 훈계를 나에게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거부감 반발심을 이겨내고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훈계를 나에게 주시고 나를 복되게 하실 것을 믿는 사람은 훈계의 말이 틀린 말이라 여겨져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틀린 말을 통해서도 나를 복주시고 높이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훈계를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복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주변 사건, 상황도 다 나에게 훈계가 되어 그의 삶은 지혜와 성숙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반면 자기 이름, 자기 자존심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나르시스트는 훈계를 거부합니다. 자기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포장하고 싶어서 거짓된 훈계수용만 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선인’이란 도덕적 법적 개념의 선인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선한 사람’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의지하는 사람, 그리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선인이며 하나님께 은총을 받습니다. ‘악을 꾀하는’ 것은 법적 도덕적 악행을 꾀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때,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때 자기를 드러내려는 뜻을 품은 사람, 하나님의 것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어린 영혼을 동원하거나 세우거나 보여주거나 이용하여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이런 시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문제를 드러내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아무리 포장하여도 하나님께 영광돌리려는 시도가 아닌 것은 결국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과 그 방향은 어떤 시련과 괴로움이 있어도 참고 견뎌냅니다. 고난이 와도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감사하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이때는 이것이 좋다 이래야 한다 하고 또 때가 바뀌면 저것이 좋다 저래야 한다 하며 흔들리고 변하고 요동하는 것은 중심의 문제가 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인 것입니다. 항상 내가 무엇을 추구하나? 중심 체크 하여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남자와 여자나 동일합니다. 지혜로운 남편 역시 부인에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까? 반면 돌아다니며 사고치고 다른 사람 상처주고 욕먹는 남편은 부인까지 함께 속상하게 하고 불행하게 합니다. 학생들을 대하다 보면 경험적으로 볼 때, 과거에 비하여 ‘인격장애’가 늘어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도덕개념이 완전히 없고 악행을 자랑하는 것’도 인격장애 증상의 하나입니다. 누가 지나가며 웃어도 나를 비웃는 것 아니야? 누군가와 조금 갈등이 벌어졌을 때, ‘갈등 대상이 나를 해하려고 한다’. ‘이 사건도 그 사람이 꾸민 일이고 이 상황도 그 사람이 꾸민 것’이라 확증적으로 생각합니다. 인격장애보다 조금 덜 한 것이 나르시즘인데, 절대로 겉으로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에 나르시스트, 인격장애 이런 문제를 가진 사람은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없고 ‘자기’에 몰입되어 있는 것은 본인도 불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상처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청년의 때에 어찌하든지 훈련과 연단을 사랑하여서 다윗과 같이 되고 요셉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집착하다가 망하는 사울왕같은 나르시스트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5절부터 8절까지 보십시오. 의인과 악인을 형사법을 기준으로 제한하지 말고 영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생각이 자기중심인 사람은 말이 자기중심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관계가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이익 중심인 사람은 의도하고 계획하는 것이 이익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소멸’입니다. 관계가 소멸되며 얻고자 한 이익도 다 소멸되어 잃어버립니다.
9절부터 12절까지는 경제활동에 대한 지혜입니다. 9절 말씀은 허세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분수를 지켜가며 윤택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은 긍휼과 사랑이 경제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가축까지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 삶에서 풍성함을 누립니다. (반복하여 인용하지만) 경주 최부자가 주는 교훈은 가난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였더니 부가 더 늘어나더라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은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되고 노는 것 즐거운 것만 추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2절 말씀은 과도하게 이익중심으로 살면 불법에 이르고 의로움과 상식을 벗어나게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13절부터 26절까지는 언어생활에 대한 지혜의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의 ‘악인’, ‘미련한 자’를 ‘자기 중심인 사람’으로 대체하여도 됩니다. 말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말은 그 사람이 마음에 품은 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동기동창을 초등학교 졸업한 지 몇 십년 만에 만났습니다. ‘배스’(큰입배쓰 : 생태계교란 어종)이야기를 계속 끊임없이 하였습니다. ‘배스 낚시’가 재미있고 ‘배스 낚시’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에게 스키타는 이야기 하여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배스 낚시’이야기로 돌아옵니다. 배스에 꽂혀 있는 것은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습니다. 그냥 재미만 좀 없을 뿐입니다. ‘자기 중심’인 사람,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 ‘자기 영광’이 마음 중심에 있어서 하나님도 다른 영혼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본인의 삶에는 열매가 없으며 이 사람이 가는 곳에는 다른 사람들의 상처와 눈물이 남겨집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그 추구한 것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져 어려움을 겪습니다. 일시적으로 말을 하나님 위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마음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아니면 잠시 아름다운 말과 달리 행동은 결국 자기 중심, 자기 영광 추구로 행해집니다. 하나님 중심인 사람은 축복으로 그의 말과 행위의 결과가 돌아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자기중심, 자기영광 중심, 나르시스트, 인격장애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 찬양, 하나님 말씀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는 나, 하나님 말씀을 잘 깨닫는 내가 우월하고 옳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가 영적이고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어떤 해를 끼쳤는지를 전혀, 조금도, 1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씻을 수없이 괴롭고 뼈아프고 참담한 결과가 와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기 보다도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 ‘고생하는 나를 좀 봐달라’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와 동정을 구걸합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람들이 부쩍 늘어서 의사들은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그를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 합니다. 관계를 끊을 수 없다면 관계 하지 않는 것을 권합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이런 사람들이 변화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눈치없이 자기 말만 하다가 형들의 미움을 사는 면이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 유다는 상황중심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이 죽고 둘째 아들이 죽으니까 며느리 다말에게 그 다음 아들을 장가보내기를 주저하였습니다. 그는 상황에 따라 약속 지키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태연하게 성매매 하는 사람이었으며, 자기는 성매매 하고 다녔으면서 과부인 며느리가 임신하자 강력하게 처벌하겠다고 나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의 최강은 야곱입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하여 거머쥐고자 기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눈치없이 말하던 요셉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유다도 약속지키는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솔선수범하며 자기가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연단아래 변화되었습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의 야곱도 결국 변화되어 열 두 아들들의 모든 허물과 약점을 감당해주고 그들을 이스라엘 12지파의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는 내면성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자기 중심이고 자기가 옳다 여기는 사람의 특징이 감정통제를 잘 못합니다.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과 ‘악의적인 비방’을 전혀 구분하지 못합니다. 뭐든 ‘나에 대한 반대’로 여기면서 감정악화에 빠집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지지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으면 급격한 분노가 생겨 통제력을 상실합니다.
17절은 진리를 전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악영향을 끼치는 것(속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속임이란 자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옳다’ ‘내가 맞다’고 여기는 사람은 함부로 말합니다. 말의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옳지만 조금 참았다가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옳더라도 더 들어보고 말해야 할 때가 정말 많습니다. 옳은 말이더라도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말하기를 참아주는 일도 많습니다. ‘내가 옳다’ ‘내가 맞다’ ‘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말을 쉽게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방이 살아나는 말을 합니다. 상대방이 듣고 수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을 합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은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거짓은 거짓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살아나게 하는 말, 덕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화목, 기쁨, 즐거움이 있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덕을 세우고자 하고 생명을 살아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자기 중심, 자기 영광을 구하면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거짓과 위선을 일삼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23절부터 2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살리고자 진실하게 노력하고 내적 투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구체적인 열매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은 남을 해롭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속임을 베푸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게으른 것, 쉽게 절망하는 것도 자기 중심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고 이웃을 위하는 사람은 희망의 말, 비전의 말을 하며 열정과 성실을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생활을 하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열매를 주십니다.
28절 말씀은 지금까지의 말씀들을 총괄하여 정리합니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자기 뜻을 이루는 것에 집착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이웃을 아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이웃을 이용하려 하지 말고 행동은 물론이고 말로라도 찍어 누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변 사람을 종 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추구하고 의를 행한 삶을 보십니다.
2. 지혜로운 삶의 결과(13장)
13장 말씀은 지혜의 삶과 그에 따른 결과를 구체적으로 기록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비는 자식에게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오만한 사람,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사람, 훈계 듣기를 거부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해주는 말도 거부합니다. 선생도 제자들 위하여 그러하지만, 우리 목자는 더욱 양들이 나의 유전자를 받은 것도 아니고 교사로서의 직업적 의무도 없는데 양들 위하여 희생합니다. 목자는 특히 생명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특징,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삶의 열매는 목자 무시, 선생 무시, 부모의 훈계를 무시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지키지 않는 사람, 그래서 입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강포를 겪고 멸망이 임합니다. 가까운 사람의 허물, 약점을 다른 곳에 전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을 행하였지만, 도와 준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이곳저곳 그의 약점, 그의 과거를 말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사자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은혜받기는 했지만 자기의 약점을 온 동네에 말하고 다니는 것에 속 상하고 감정적이 되었습니다. 자기 허물을 이야기 하고 다닌 사람을 공격 하였습니다. 결국 은혜 베풀고 도와주고도 그 말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다 못해 직장을 옮겨야 했습니다. 옮긴 직장 곁에 교회가 있어서 이분이 점심 시간에 거기가서 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약점을 또 이곳저곳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교회 목사님에게 전해졌습니다. 화가 난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기도하러 오지 말라’ 쫓아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왜 직장에서 공격받았는지 왜 목사님이 기도하러 오는 것을 금지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말 많이 하는 것을 그치고 더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약점 말하는 것을 중단하고 그가 놓치는 것까지 내가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성실과 진실은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의인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함은 결정적인 위기의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자기 영광 구하느라 슬쩍슬쩍 거짓을 말하고 자기 유익 구하느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살 때 패망이 옵니다. 자기 유익에 빠르고 자기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공동체의 손해와 피해를 초래합니다. 필연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그런 사람에게 협조하지 않고 동조하지 않으며 동지 동료 동역자가 돌아설 수밖에 없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우리나라 진짜 부자의 특징은 절대 부자인 척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합니다. 부자인 척 하는 사람은 사실은 ‘조금 부자’ ‘약간 부자’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학자, 연구자들도 그러합니다. C급 과학자는 실력이 없으니까 겸손하고 A급 과학자는 절대자 앞에서 자기 부족함을 아는 수준에 이르렀기에 겸손합니다. B급 과학자들이 스스로 뭘 안다고 자부하고 오만하다고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재물이 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재물이 살아가는 위험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역할을 합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위험을 모두 제거하거나 영원히 없애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겪을지 모르는 위험을 아예 겪지 않고 살아갑니다. 돈 없는 사람에게 투자사기 사기꾼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한참 친하게 지냈는데 알고보니 돈 빌리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을 알면 부자들은 배신감이 생기거나 마음의 상처 받습니다. 돈 없는 사람은 그런 상처 받을 일이 아예 없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돈 보다 지혜를 구하고 부유함을 자랑하기 보다 겸손의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삶은 빛이 나고 겸손한 사람에게 다툼, 갈등이 없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일확천금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일을 해서 돈을 모으고 정상적인 장사하여 돈 벌 궁리를 하여야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기다림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기쁨은 큽니다. 빨리 돈 벌고 빨리 성공하고 빨리 열매 맺으려 하기보다 차근차근 참고 인내하며 단계를 밟아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빨리 부자가 되는 것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재물을 감당할 수 있어야 재물 가진 것이 복이 됩니다. 성공도 그러하고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런 기다림 그런 고난을 세상에서는 선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성공 자체만 평가하지 과정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을 가르쳐줍니다. 고난의 의미와 고난의 가치를 가르쳐주며 고난을 감당하고 고난의 강을 건널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줍니다. 열매에 집착하고 성공에 집착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건성으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열매맺는 과정의 고난과 인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성경 말씀의 가르침보다 자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증거가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인내와 기다림과 고난의 가치를 알려주고 진정한 성공과 참된 열매맺는 비밀을 담은 성경 말씀을 혼자만 은혜받고 혼자만 알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전하되 계속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지혜의 말씀 성경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망과 멸망에서 구하는 일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결과적인 것도 있지만, 지혜의 말씀대로 살 때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합니다. 자기 영광 자기 유익을 구하며 여러 궁리와 노력을 하지만 그 길에 죄로 인한 괴로움, 자기 욕심이 불러오는 고난이 많습니다. 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기의 지나온 길을 술회할 때 험한 세월을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꾀로 살고 자기의 소유를 얻고자 하는 삶이 험난 했음을 그는 세월이 흐른 후 깨달은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전하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6절은 말로만 가르치지 말고 행함과 실천으로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는 것이 중요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은 그럴 듯 하게 하면서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의 말은 영향력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17절 말씀은 말씀 전할 때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유대율법주의자와 영지주의자들이 양들에게 그릇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성과중심적인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잘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훈련을 잘 받아야 합니다. 혼자 갑자기 영감을 받아서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없습니다. 양들을 위하고자 한다면 자신이 먼저 좋은 메신저가 되고자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양들을 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좋은 인생을 살고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잘 배운 사람이 가능합니다. 우리 모임에서도 위대한 메신저들은 오래 훈련과 연단받은 분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소감쓰기가 있습니다. 매주 소감쓰기를 정성과 열정을 기울여서 감당하는 것은 훈계를 잘 받아들이는 작업입니다. 양식메모 소감쓰기에 진심을 가진 사람들이 보고서도 수준높게 쓰고 기획서, 논문 다 잘씁니다. 근본적으로 상황과 사물을 보는 지혜가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선한 소원을 가질 때, 그런 수고를 기꺼이 감당합니다. 소감쓰기가 싫고 양식메모 하기가 싫다고 그것을 그대로 고집할 때 변화는 없습니다. 성장도 더딥니다. 영향력도 없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 연단과 훈련과 수고를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교제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곁에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사람, 고난 앞에서 원망 하고 환경 탓 하는 사람, 사람을 자기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고생합니다. 이런 점을 안다며 나부터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고난 앞에서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서 영향력 좋은 이웃이 되어야 옳은 것입니다.
21절부터 지혜로운 삶을 살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오고 지혜를 따를 때 어떤 열매가 오는지 더 실제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죄인에게 재앙이 따르고 의인에게 선한 보답이 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참고 예수님을 배우며 믿음의 삶을 살 때 그 영향력이 이웃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집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인격과 삶을 통하여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가 실제로 강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간 사람과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의 족보를 조사하여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자손의 숫자는 강도 집안 후손이 조금 더 많더랍니다. 하지만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감옥에 간 사람과 마약중독자들이 꽤 많이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반면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대로 살았던 사람의 후손 중에서 범죄자는 거의 없고 목회자 교육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연구결과를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영향력이 이렇게 양들과 자녀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착실히 일을 하여 차근차근 부를 쌓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남의 것을 속이거나 힘으로 빼앗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자녀를 귀하게 여길 줄만 알고 올바른 교육을 하지 못하면 자식의 미래를 망칩니다. 자식을 향하여 교육과 징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자식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25절을 보십시오.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누리느니라” 포식하는 것은 위장이 가득차는 것만 나타내지 않습니다. 영적인 충만함, 진정한 만족까지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자기가 유명해 본들 어떠합니까? 공허합니다. 사람들의 칭찬, 사람들의 환호, 사람들의 인정은 새로운 목마름을 불러옵니다. 하나님께 유익을 드리지 않고 자기의 주머니만 채울 때 어떠합니까? 공허합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 오히려 걱정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인색하니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랑과 신뢰 관계를 맺지 못하니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입니다. 조금 문제가 생겨도 불안하고 재앙인가 의심하며 낙심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잘 듣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주의 말씀을 잘 듣고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실하게 일하고 착실하게 부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습니다. 불의한 방법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빨리 큰 돈을 벌고자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말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살리는 말, 덕이 되는 말을 하는 지혜의 사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의 생활과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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