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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생을 열어 주신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
이욱태
40년 전의 일이다.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나를 엄습하여 감싸던 시절이 있었다. 유치환의 시를 좋아하면서부터였다고 기억된다. 고교 시절 글쓰기를 좋아하던 나에게 유치환의 사색은 나를 성찰해 보는 큰 감흥이었고 스스로 심연의 무엇을 얻었다는 엉뚱함에 도취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니체가 좋아 빠져들기도 했다. 실존주의(實存主義)가 무엇인지 명확히 몰랐지만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을 탐구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나름대로 기쁨을 만끽하던 철부지 시절이었다. 그런 철없는 기개는 기존의 철학적, 종교적 도그마를 깨뜨리고 싶다는 망상으로 이어지기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심한 병 앓이는 자연스레 불교학과의 문을 두드리게 하였다. 이는 할머니의 영향이 실로 컸으리라.
5살쯤으로 기억한다. 취학 전에 조부님 댁에서 잠시 자랄 때였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시자마자 또 저녁에 잠자리에 드시기 전에 항상 머리맡에 놓아 둔 바구니를 가져다가 그 속에 담긴 연 열매로 꿴 천 염주의 염주 알을 굴리시며 관세음보살을 염하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그 유품만은 내가 고이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가끔씩 할머니 무릎에 누워 염불을 듣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불교학과 입학은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을 안겨다주었다고 자부한다. 아니 불교학과의 입학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허무로 점철되지 않았을까 하고 반문을 해 본 적도 많았다. 1학년 1학기 고익진 교수님의 종교학 강의는 나를 전율케 하였다. 고교시절 그토록 갈구하고 방황하던 물음에 대한 출구를 알려주는 시그널로 여겨졌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부처님을 절대 귀의처로 신행하도록 인도해 주신 고익진 스승님의 문하에서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고귀한 인연은 내 인생 최대의 선물이었다. 이는 전생의 인연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 믿고 있다. 일승보살회에서 문사수(聞思修)하던 법연(法緣)은 ‘법상(法相)의 체계성 이해와 수행’이라는 안목을 열어주었고 언제 어디서나 불방일로 절차탁마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 주었다. 신근(信根)·정진근(精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을 갖게 하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 힘은 자연스레 군승법사를 제대하면서 받은 퇴직금 전액을 털어 도반 최봉수 법사와 ‘불교원전번역연구소’를 설립하도록 이끌었다. 스승님의 뜻을 받들어 초기불교와 초기대승불교 원전 번역과 해설서를 통해 불법의 정수를 전해보자는 서원이었다.
불교학과 학창시절에 대학생불교연합회 소속 신촌 육불회 지도법사, 정각사 불교학생회·청년회 지도법사, 불교학과 학회장, 학도호국단 종교부장으로 성실하게 전법 활동을 하고, 군승법사 봉직, 제대 후 고향 부산에서 해동중학교 교법사로 재직하면서 부산불교교육대학, 로터스불교대학 설립을 통해 대중을 위한 교육 불사를 여래사(如來使)로 여기고 쉼 없이 정진할 수 있는 힘도 거기서 비롯되었다. 또한 동명대학교, 해양대학교 겸임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는 일, 부산 경남에 소재한 불교대학, 사찰법회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전법을 하는 일, BBS 부산불교방송 운영위원, 재단법인 부산광역시 불교신도회 상임이사, 사단법인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 사무총장,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부산본부 기획이사, 대한불교조계종 전국교법사단 단장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스승님의 덕화로 깨우친 보살심 덕분이었다.
대학 학창시절을 회고해 보면, 1980년 1학년에 입학을 하여 동대신문 학보사 기자로 입사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군사정권에 의해 휴교령이 선포되어 기자활동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로인해 한 때 잠시 가졌던 기자의 꿈을 접었다.
그 무렵 류동호 도반과 함께 삼선교에 위치한 정각사 불교학생회·청년회를 창립하고 법회를 지도하는데 열중하였다. 나중에 강의 중 후배가 동참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사찰은 불교학과 선배이시기도 한 광우스님께서 주지로 주석하고 계셨고, 마침 승가학과 동 학년인 정현스님, 정목스님이 광우스님의 상좌로 있었기에 친근감이 더 했으리라.
정각사는 김동화 박사님의 덕화가 매우 컸다. 그리하여 불교의 가르침을 펼치는 일을 매우 중요시 했다. 기도법회가 있을 때도 꼭 법문을 통해 대중을 일깨웠고, 불교학과 교수를 비롯한 선지식을 초청해 설법의 장을 자주 만들었다. 또 당시 사회적 경제적 여건으로 출판물의 제작과 배포는 그리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우스님의 원력으로 매월 ‘신행불교’를 제작하여 전국으로 배포하였다. 나도 ‘신행불교’ 편집에 한 몫 거들었다. 광우스님의 동국대와 불교학과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여 어려운 사찰 재정임에도 연간 계획을 세워 장학금을 기탁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학 졸업 시까지 3년 동안 정각사 불교학생회, 청년회 법회 지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보도 만들고, 여의도 제등행렬 참가용 상징물을 제작하고, 고찰을 찾아 수련회도 다니며 철야정진을 비롯한 여러 신행활동을 하면서 깨달음의 생활화를 실천해 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3학년이 되었을 때, 대학생불교연합회 소속 신촌 육불회에서 연락이 왔다. 서강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연세대, 홍익대, 명지대 불교학생회로 구성된 연합단체였다. 서강대학교 선배를 중심으로 신촌에 소재한 만덕사에서 매주 불교스터디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임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 인연으로 2년 동안 신촌 육불회 회원들과 함께 열심히 불교공부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함께 수련회도 갖고 불교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며 탐구하던 시절이었다. 정순식, 이정우 등 그 당시 순수하고 진지하게 깨달음을 추구했던 선재동자들의 모임이었다.
불교학과 학회장, 학도호국단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불교서적 전시회, 불교문화제, 초청강연회, 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 지원 사업 등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은 동국대학교 불교학생회 후배인 불교미술학과 양기훈을 비롯한 몇몇이 초대형 백상을 제작하여 여의도 제등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퇴계로에서부터 여의도광장까지 도로변을 따라 밀고 가던 일이다.
1985년 8월 강원도 철원에 군승법사로 첫 부임을 하였다. 민통선 안에 낡고 허름한 조그만 법당과 요사채가 있는 도피안사였다. 하지만 법당에 봉안된 부처님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상호가 훌륭한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입기위해 기도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잦았다.
하지만 비좁은 법당으로 인해 일요법회는 절 마당에서 진행해야 했다. 날씨가 맑고 화창한 날은 정말 운치가 있고 풍광이 좋았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추운 날씨에는 법회 진행이 불가능하였다. 전임 정홍찬 법사님은 포교환경을 개선하고자 동송읍(구 철원읍)에 군법당 신축을 계획하고 추진하다가 인수인계를 하고 떠나게 되었다. 정홍찬 법사님의 원력에 힘을 보태어 노력한 결과 1986년 드디어 청원사 낙성식을 하게 되었다. 넓고 쾌적한 도량에 신축된 현대식 법당은 군인장병 및 군인가족, 일반 불자들의 신행을 고취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청원사 낙성불사는 전적으로 도피안사 부처님의 가피력 덕분이었다. 도피안사에 기도하러 온 불자들의 신심과 제2땅굴 및 전방견학을 하면서 도피안사를 참배하여 만등불사에 동참한 불자들의 신심이 더해진 결과다. 전방견학을 온 분들을 땅굴과 전방지역 안내를 위해 많게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 어떤 때는 하루에 두 번씩 방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흘린 땀의 열매는 보람이라고 하듯이 평생을 간직할 소중한 경험이었다.
1991년 3월 2일 해동중학교에 부임하면서 느낀 첫 인상은 포교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4월부터 학부모불자모임 ‘해동관음회’를 결성하여 매주 1회 불공 및 법회를 2012년 명예퇴직 시까지 20여 년 간 지속했다. 그 힘으로 부임하던 해인 1991년 10월 교정 현관 중앙에 석조 해수관음상을 조성하여 봉안할 수 있었고, 2009년에는 법당 이전 불사를 했다.
‘해동관음회’의 활발한 활동은 해동중학교 청소년 불자 육성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매년 여름 방학마다 실시하는 사찰 수련대회에 3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동참하였고, 3학년 졸업시기에 범어사에서 주지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실시하는 수계법회에는 졸업생의 70% 정도가 동참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파라미타청소년 활동에 참여하는 학생 수가 어느 학교보다 많았고 활발하였다. 이는 해동중학교 교직원 전원이 수계를 받고 자발적으로 조석예불에 참여하며, 매월 개최하는 교직원법회, 각종 불공법회와 학생 교화활동에 앞장서서 헌신하는 보이지 않는 신심과 열정이 큰 몫을 했다.
해동중학교를 명예퇴직하면서 평생을 포교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해 준 고마움에 후학을 위한 조그만 성의로 장학금 1백만원을 기부하였다. 풍문에 의하면 이 일을 계기로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장학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부산에는 부산불교중학생연합회, 부산불교고등학생연합회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 단체의 기획 및 실무 책임을 맡아 신입생환영대회, 6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연합 캠프, 1,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체육대회, 사찰수련과 농촌체험을 동시에 하는 흙사랑 캠프, 수계법회, 불교문화탐방 및 수련회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매주 토요일에는 퇴근 후 부산전자공고, 부산남여상 학생들 100여 명으로 구성된 감로사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로 법회지도를 했다. 불교학과 선배이시기도한 주지 혜총스님께서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셔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1996년 청소년포교 단체인 파라미타청소년연합회가 설립되었다. 그리하여 부산불교중학생연합회와 부산불교고등학생연합회는 보유하고 있던 기금 약 8천만원과 단체를 통합하여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로 새로 탄생하였다.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청소년 포교의 주춧돌 역할을 해 줄 협회장을 섭외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벽파스님의 도움을 받아 수차례 찾아가 간청을 드려 김석조 종로학원 이사장을 초대협회장으로 모셨다. 김석조 초대협회장의 뒤를 이어 부인 백명숙 여사가 10년 동안 협회장 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들 부부의 신심과 정진심은 재가불자들의 귀감이 되고, 보살행은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두 분이 협회장을 많아 온 20년의 세월 동안 매년 1천만원의 보시금을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에 기부해 왔고, 지도교사들을 격려하는 정성은 정말 대단하다.
나아가 김석조 초대협회장이 부산광역시 시의회 의장으로 봉직하던 때 시비 5천만원을 확보해 주어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가 전국에서 최초로 ‘대한민국청소년합창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 행사는 매년 시행되어 2015년도까지 8회를 개최하였고, 그 규모는 매년 확대되어가고 있다.
당시 설동근 교육감에게 역사가 일천한 단체이지만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를 부산시 교육청 지정 7개 청소년단체에 선정해 주도록 간곡히 요청하여 교육청 지원금, 지도자 포상, 교사직무연수 지정단체를 비롯한 여러 사업을 시행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 가입 학교를 종립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 사립학교로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그 중에서도 파라미타청소년단체 지도교사 확보를 목적으로 실시한 교사 직무연수 프로그램은 호응도가 매우 좋았다. 요가직무연수, 문화재직무연수(고건축, 불화) 등 일반교사들이 관심은 있으나 일과 중에 참여하기 어려운 분야를 방학을 통해 고품격의 직무연수를 실시함으로써 개인의 만족도를 높이고 이를 계기로 파라미타청소년단체의 결성과 활동에 참여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그 결과 기대이상으로 일반학교의 부산파라미타청소년단체 가입이 늘었고, 교사들의 참여도 늘어, 지금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나아가 파라미타청소년 지도교사들의 사기앙양과 견문을 넓히고자 매년 부산파라미타 지도교사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인화 단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1991년 부산불교교육대학의 설립은 부산지역 포교의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1년에 기초교리반, 포교사양성반, 경전반을 합쳐 약 300명 정도의 졸업생을 15년 동안 배출했으니 그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지역사회의 리더들 중에는 명예졸업생도 있었는데 류진수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장, 김기재 행정자치부 장관, 설동근 교육감 등이 있었고 지역 유력인사들의 명예졸업생 신청자도 많았다.
조계종단에서 매년 실시하는 포교사고시에 10년 연속 전국 최다 합격생을 배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정관스님이 범어사주지로 계실 때 전국포교사단 부산지역단을 창단하는데 주역을 맡아 오늘날 포교사단 형성에 기여했다. 엄격한 학사관리, 우수한 강사진, 최고의 강의를 슬로건으로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였다. 사찰순례행사 때는 관광버스 20여 대가 동시에 움직일 정도로 왕성한 단체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내원정사불교대학, 고심정사불교대학, 여래사불교대학, 밀양불교대학, 삼광사 금강불교대학, 울산 정광사 가족법회 등 여러 불교대학에서 불법 홍포를 위해 동분서주 하였다. 2007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신도전문교육기관 로터스불교대학을 설립하여 현재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8회 졸업생을 배출하여 새로운 불자 조직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로터스불교대학은 인재 양성을 통해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 조직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는 몰라도 2010년 11월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2회 포교대상 원력상을 수상하였다. 2013년 9월 12일에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불교대학 필수 교육연수 전문강사로 위촉받아, 부산지역 10여 개 조계종 신도전문교육기관인 불교대학 재학생 통합교육을 매년 시키고 있다.
1995년에 부산불교등학생불교연합회 주관으로 매년 시행하는 ‘불교교리문답대회’를 돕고자 그 교재인 동국역경원 <불교성전>을 고등학생들이 알기 쉽도록 풀이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불교성전 해설서>를 불심홍법원의 도움을 받아 발간한 적이 있었다. 그 책을 방송에서 소개하겠다고 부산불교방송 진영조 PD가 연락이 와서 BBS 부산불교방송 포교프로그램인 ‘반야의 샘’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방송이후로 진영조 PD가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여 이후 ‘반야의 샘’, ‘참 좋은 인연입니다’를 비롯해 신년을 비롯한 여러 특집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동한 바가 있다. 방송을 진행하면서 새로운 포교분야에 대해 알게 된 소중한 경험의 시간이었고, 학창시절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잠시 꾸었던 언론인의 길을 뒤늦게 맛보게 되었다는 점에서 소회가 남달랐다.
불교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계기로 부산불교방송과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99년 부산불교방송국 류진수 초대사장을 몰아내고 다른 사람을 추대하려는 음모가 좌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류진수 사장은 부산불교방송 설립 재정의 절반이상을 기부한 사업가로 선친 때부터 범어사 대 화주였으며, 부산·경남 인도공화국 명예총영사,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장, 라이온스 부산지구 총재로 부산에서는 유력인사였다. 그런데 파이낸스 사업을 하는 사람을 사장으로 교체하려고 모의하였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그런데 부산불교방송 사장 교체 음모가 좌절된 다음 날, 파이낸스 업체 부도 소식이 언론에 대서특필대고 그 대표는 영어의 몸이 되었다. 불보살님의 가피로 부산불교방송이 세간에 지탄받는 일을 피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사건의 진상규명과 정상화를 위해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를 필두로 33개 신행단체 연대가 결성되었고, 내가 그 사무총장 일을 맡게 되었다. 다행히도 모든 일이 정상화되었다. 그 해에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에서 제정한 홍법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2001년 류진수 회장이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장에 재취임하면서 사무총장 직책을 맡게 되었다. 2002년에는 부산불교방송 운영위원, 부산·경남 인도공화국 명예부영사 직책을 함께 맡아 부산불교교육대학 운영과 더불어 가장 바쁜 시기였다고 기억된다. 류진수 회장의 돈독한 불심에 감흥을 받은 하도명화 보살이 부산광역시 불교신도회에 창선동 소재 시가 30억원 상당의 건물을 희사한다고 부산불교신도회 정기총회에서 공언을 하였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개인 재산의 희사는 접고 하도명화 보살이 이사장으로 있던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을 부산불교신도회에 기증하였다. 그 후에 정금강행 보살이 해운대, 전남 영광소재 부동산을 기증하기도 했다.
류진수 회장과 그 집안의 불교외호를 위한 공덕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1970년대에 임진왜란 시 일본군이 범어사 기운의 쇠퇴를 목적으로 대웅전 옆에 세운 7층탑을 범어사 일주문 옆(현재 범어사 박물관 앞)으로 이전하는 불사에 큰 역할을 했고, 평생수도원인 휴휴정사 공사에 열정을 바쳐서 공사가 잘 마무리되도록 기여했다. 해인사 방장실 불상 봉안, 운수사 불상 봉안 및 불사, 안적사 불상 봉안 및 진입로 공사, 금강암 진입로 조성 불사, 조계암 불상봉안, 다솔사 불사, 지리산 대원사 불사, 칠불암 다리 불사, 법륜사 불상 봉안, 원효정사 불상 봉안, 법계정사 불상 봉안 등 각종 불사에 수희동참하여 희사하였다.
범어사 신도회장 재임시절에는 범어사 대웅전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국고보조금을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던 것을 대웅전을 문화재로 등록시켜 창건 이래 처음으로 5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받도록 했다. 이 이후 범어사는 국고 보조 및 시비 보조를 받을 수 있게 되어 범어사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고, 범어사 홍보 다큐멘터리를 부산MBC에 제작 의뢰하여 1시간 동안 방영케 함으로써 영남 3대 사찰 범어사의 위상 강화는 물론 불교 홍포에 기여했다.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장 재임 시에는 6억원의 사비를 기부하여 조직의 기틀을 갖추었으며, 개인택시불자회를 비롯한 직능단체 결성, 대한불교청년회부산지구, 부산파라미타청소년협회 등 계층 포교 활성화에도 기여했다. 부산불교신도회장 퇴임 후에도 중앙승가대학발전기금, 동국대학교 병원 건립기금, 범어사 발전기금, 대원사 불사, 법계정사 불상 봉안 등 5억여원을 희사하였다.
1994년 부산불교방송 설립 준비 당시 20억원을 모금하는 과정에 10억여원의 방송 설립기금을 희사하여 부산불교방송이 1995년 2월 1일 개국하는데 초석이 되었다. 이후 12년 동안 초대 사장을 역임하면서 2001년 12월 6일 3KW에서 5KW로 출력 증강을 하여 가청권 확대와 광고 수입을 증대하였으며, 방송 장비 디지털화와 부산불교방송 법당을 조성하였다.
사장 퇴임 시 경상 이익 7억 원을 포함 총 자산 13억5천만 원을 확보해 경상남도 중추도시인 창원을 비롯한 진해, 마산까지 가청권을 넓히는 창원중계소 개국의 터전을 마련하였고, 향후 진주, 사천, 하동, 산청, 합천, 거창에 이르는 경상남도 전역으로 가청권을 확대할 교두보를 확보하여 한국불교의 중흥지로 불리는 부산과 경남불교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부산광역시불교신도회는 강석진 동명그룹회장, 이윤근 부산시·경상남도 교육감, 류진수 대흥알엔티 회장, 공병수 거사림 회장으로 이어온 부산 재가불자의 산실이다. 공병수 회장은 동아대학교 법조인들의 대부 역할을 하여 수많은 불자 법조인 및 고위 공직자들을 양성하였다. 지금도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로스쿨 학생회를 조직하여 지도법사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숫자가 100명이 넘는다. 공병수 회장이 부산불교신도회장으로 취임 후, 로터스불교대학 개설, 도심포교릴레이법회, 전진대법회, 이웃나누기, 법계정사 다라니 기도회, 사찰문화탐방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오고 있다. 공병수 회장이 주도하고 있는 거사림은 매주 2회 전국 대덕스님을 초청하여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법회를 지속하고 있는 신행단체이다.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준 불은에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군승법사, 교법사로서의 봉직은 물론, 부산불교방송 개국 초기에 ‘반야의 샘’, ‘좋은 인연입니다’ 등 포교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행운도 누렸고, 대학에서 불교학을 강의하는 인연도 맺게 해 주었다. 이 모두 불은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원고를 집필하다보니 내 인생의 파노라마를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오던 인생의 뒤안길을 보게 해 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부산은 부산역 뒤편 북항 재개발사업이 한창이다. 구도심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 국제크루즈선 터미널이 개소되었고, 불교부산방송을 비롯한 부산일보, MBC 방송 등 주요 언론사의 이전이 추진 중이며, 신문화 관광타운이 조성되고 있다. 불교부산방송국의 부지는 약 1800여 평 규모이다. 부지 매입비만 200억 정도이고, 건축물 시공 시에는 훨씬 많은 재정이 필요한 대작불사이다. 그곳에 불교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담아내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다.
부산 도심의 한복판에 불교의 랜드마크가 될 프로그램과 건축물을 담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3D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전 세계 불교박물관, 불교문화제작실, 세트장, 공연장, 전시장, 세미나실, 교육관, 병원 등 다양한 구상을 하고 있다. 불교부산방송운영위원의 일원으로써 현대한국불교를 대변할 만한 대작불사(大作佛事)가 되도록 매진하면서 불보살님의 가피를 염원한다.
이욱태 1984년 졸업.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로서 고심정사불교대학, 내원정사불교대학, 밀양불교대학, 여래사불교대학, 로터스불교대학 등에서 불교를 가르쳐왔다. 불교부산방송 <FM89.9 좋은 인연입니다> 프로 등을 진행했다. 저서로는 서두를 땐 서두더라도 느릴 땐 얼마든지 느려도 좋다, 문틈으로 바람 들어오듯 마음 틈으로 욕심 들어온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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