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12월14일 화요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십자가의 요한은 1542년 스페인의 아빌라 근교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시자, 어려서부터 가난을 체험한 그는19세에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26세 때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그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에 헌신하였고, 반대자들 때문에 엄청난 시련과 역경을 겪었다. 그는 1577년 9개월간의 수도원 다락방 감금 상태에서 ‘어둔 밤’을 체험하였고, 1591년 12월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수많은 영성 저술을 남겼으며,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1993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를 스페인어권의 모든 시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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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마태오 21,28-32)
“Amen, I say to you,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are entering the Kingdom of God before you. When John came to you in the way of righteousness, you did not believe him; but tax collectors and prostitutes did.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는 주변의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을 놓고 각축전을 벌여 앗시리아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때에 활동했다. 그는 주님과 맺은 계약을 위반한 예루살렘의 지도 계급 전체에게 벌이 내리리라는 불행 선언을 한다. 그러나 가난하고 가련한 남은 백성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되리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이 비유로 주님께서는 생각을 바꾸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삶에 안주하는 자들을 준엄하게 질책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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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흔히들 사람의 마음은 이중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마음, 형식과 내용 가운데 각각 형식을 중시하거나 내용을 중시하는 마음입니다. 신유학(新儒學)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이’(理)와 ‘기’(氣)가 합해 있는 것〔理氣合一〕으로 이해합니다. ‘이’는 변하지 않는 천리(天理), 본성이고, ‘기’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기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질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죄를 짓기도 하고, 선을 행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욕망, 곧 ‘인욕’(人欲)이지요. 아마 그래서 마음은 두 가지 성질이 복합되어 있다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두 아들의 비유’로 사람의 이중적 면모를 여지없이 보여 주십니다. 이중적인 인간의 마음은 주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줄곧 문제가 되어 온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바른 인생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상반되는 두 마음을 하나로 합하되, 선한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이행했지만,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따라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세간에서 손가락질 받는 세리와 창녀들도 마음을 바꾸어 바른 인생길로 나아가는데, 어찌하여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대림 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되돌아보고, 헝클어진 이중적 마음을 주님 뜻에 맞추어 하나로 모아 새롭게 태어날 것을 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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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는 마태오 복음에만 나옵니다.
맏아들은 일하기 싫다고 했지만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 역시 ‘율법 생활’이 싫었지만, 마음을 바꿉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포도밭에 가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가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말만 앞세웠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에 충실했지만, 마음과 행동은 ‘형식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신앙인은 많습니다. ‘잘 살고 있다는’ 사람 중에도 많습니다. “예.” 하고 대답은 하지만, 실천에는 소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를 실제로 ‘일하러 간’ 맏아들에 비유하십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들을 율법에서 제외시키고, 상종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현격한 차이입니다. 주님께서는 ‘현실’을 보시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과거’만 보고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처럼 삶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변화를 시도해야 은총이 함께합니다. 맏아들은 싫다고 했지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러기에 순종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변화의 삶을 시작해야 할지 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과 함께’ 답을 주십니다.
마음을 바꾸는 일
- 강희재 신부-
신앙생활이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닐까 ? ‘마음 바꾸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인가 ?’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하여 평생 살아온 삶의 패턴까지도 바꾸는 것은 결정적 목적과 희망을 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홍보매체나 성공한 사람의 강의나 행복 수업을 통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구원을 위한 지름길,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수없이 듣고 익혀 왔다. 그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열심히 요약정리를 하면서 무릎을 치고 한순간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그때와 그 자리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지금까지 변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촛불집회 · 용산참사 · 김수환 추기경 서거 등 대한민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목격하고 또 그 자리에 함께했음에도 사람들은 마치 일회적 이벤트를 성황리에 마친 듯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치열한 생존경쟁 대열 속에 자리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다시 자신들의 당론을 위해 서로를 헐뜯고, 빈민들은 월세와 전셋값 상승에 떠밀려 전기와 수도와 가스가 끊긴 곳에서 떨고 있으며, 촛불시위와 용산참사 희생자 유가족의 고군분투는 더욱 세상 한구석으로 밀려나고 있다.
‘사랑과 고마움’ 의 정신을 끝까지 일러주신 추기경님의 말씀은 시대의 징표요 교회와 가정의 비전으로 성령께서 주신 것이지만, 교회와 신자들 가정은 아직 그 징표를 내적 원리로 품지 못하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minds)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 는 말씀은 시대의 징표를 보고도 마음을 바꾸지 못하여 의로운 길과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는 이 사회와 교회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의 말씀으로 들려온다.
신학교에 입학할 때 꼭 면접시험을 봅니다. 학교 교수 신부님들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서 이 학생이 신부가 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지를 평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신부님께서는 꼭 이런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답변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낮은 점수를 준다고 합니다.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잘 지내고 있는가?”
신부가 되려고 하는 학생들이니 “하느님과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맞을 것 같지요. 그러나 그 신부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인간과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 결코 하느님의 사랑이나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교수 신부님의 질문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은 과연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는 지를 반성해 봅니다. 혹시 몇몇 사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멀리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또한 내가 편한 사람만 상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결국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과는 달리, 내 입맛에만 맞는 사랑을 선택하고 있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하느님께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선택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그 밖의 종교 지도자들이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도 자기들이 이렇게 옳게 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할 것이라고 자부했지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우습게보고 때로는 무시했습니다.
세리, 창녀들. 그들은 특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지요. 완전히 죄로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세리와 창녀들이 자기들보다 죄 많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의 말에도 고개를 숙여 받아들였고, 그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또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람들을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주님의 뜻과 반대될 때, 나의 구원은 더욱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는 것은 자신의 양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는 일이다.(발타자르 그라시안)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그곳에서
-양승국 신부-
신앙인으로서 ‘참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위대한 신학자나 대영성가를 방문하지 않아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대충 파악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향하며 …. 그래서 우리는 대림 시기 계획도 잘 세웁니다. 새롭게 출발해야겠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계획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계획, 간절한 염원, 수많은 생각보다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의 결단과 그에 따른 행동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 생각을 바꾸고, 지금 이 순간 죄에서 돌아서고, 지금 이 순간 화해하고, 지금 이 순간 용서하고,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그런 구체적인 결실들이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디 먼 다른 하늘 아래 있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구체적인 일상 안에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들의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는 건설되어갑니다. 지극한 정성이 담긴 구체적인 손길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점점 확장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진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 자신의 철저한 무능을 절절히 체험한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느님을 향해 돌아서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께서는 또 다른 우리와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말씀 자리"
-김찬선신부-
들음과 듣지 않음.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들으면서 대림절에 왜 이 비유말씀을 듣는 것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들으면서 들음과 듣지 않음을 생각해봤습니다.
건성으로 들음. 어린 아이가 게임에 몰두하면 부모가 무엇을 시킬 때 ‘예, 예’ 해도 사실은 소리만 전달된 것이고 내용은 전달되지 않습니다.
형식적으로 들음. 비슷한 것이지만 말을 막거나 끊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경우 형식적으로 대충 듣고 빨리 끊내 주기만을 바라며 듣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알아들음. 여러 가지 말을 해도 자기 좋은 말만 뽑아 듣거나 말의 진의를 자기 좋게 해석하여 듣습니다.
이기기 위해서 들음. 논쟁을 하는 경우, 듣기는 듣되 그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듣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 이기기 위해 듣습니다.
이런 것들은 듣기는 하지만 사실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주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심대한 문제가 있어서 어렵게 그것을 꼬집어 충고할 때 그 말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생각지 않고, 다시 말해서 지적대로 자기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보려하지 않고 오히려 충고를 하는 사람을 무시해버리고 심지어는 매도해버리는 것입니다. ‘잘 못 알고 하는 소리야!’하고 한 마디로 무시하거나 ‘미친놈이 하는 소리야!’하고 아예 상대를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이렇게 듣지 않을 때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은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여관에는 주님 계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어있던 구유가 주님 계실 자리가 되었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이 오실 때에도 자리가 필요합니다. 이름 하여 “말씀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서
-전삼용신부-
저는 성소를 좀 늦게 깨달은 편입니다. 대학 다니다가 군대 다녀와서 복학해서 그리고 성소를 느끼고 신학교로 편입시험을 봐서 들어갔습니다. 사실 그 이전엔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결혼해야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사람들이 물으면 사제가 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수녀님이 계속 사제가 되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그러겠다고 했더니 굉장히 기뻐하시고 특별히 챙겨주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당 다니는 아주머니들에게도 앞으로 뭐가 될 거냐고 물으면 신부가 된다고 대답했고 그러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먹을 것이나 용돈을 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새로 만난 담임선생님은 예쁜 여자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수업시간마다 성경 이야기를 해 주셨고 우리는 매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분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앞으로의 희망을 쓰라고 할 때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신부님 혹은 목사님!”
아마 그 때부터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특별히 저를 남으라고 하더니 따로 신앙에 대해 상담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왕이면 목사님이 되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제건 목사건 상관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돈 많이 벌고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 밭에 나가 일을 하라고 하는 아버지의 말에 말은 나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은 작은 아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때는 성소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할 때가 아니었고 그래서 아무렇게나 사람들 눈치 보며 꾸며 댈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25세가 되어 성소에 대한 진정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1년 심하게 고민하고 주님께 ‘항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 년 동안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끊임없이 “하기 싫어요.”라고 말하는 저항의 때였습니다. 신학교 들어가겠다는 친구에게도 “난 절대 신부 안 될 거야.”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제가 결혼해서 아이들 많이 나아서 신부 몇 명, 수녀 몇 명 바치면 그게 하느님께 더 이익 아닌가요?” 하면서 부르고 계심엔 확신하였지만 결혼하고 살고 싶은 마음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나의 뜻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진정 주님의 뜻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에야 거부도 진지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거부를 넘어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후회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처음엔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중엔 밭에 나가 일을 한 맏아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아들은 처음엔 안 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나간 맏아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그들은 작은 아들입니다. 속으로는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지만 겉으로는 가장 잘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 진지하게 섰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러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유익하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한 젊은 사제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후회되는 건 사제가 되기를 원치 않으면서도 ‘No!’를 하지 못한 거야.”
그 신부는 사제가 된 것을 후회하면서도 그래서 힘들어하면서도 옷을 벗지도 못합니다. 정말 그렇게 힘든 삶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으면서도 어찌어찌 하다 보니 사제가 되어 버렸고 또 사제가 되어서는 후회는 하지만 옷을 벗지는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본인이 원하지 않는 성소를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알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결국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판단에 더 신경을 썼기 때문에 나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거짓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가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처음엔 주님을 따른다고 말했고 종교와 백성의 지도자가 된 그들이지만 실제로는 처음에 ‘싫어요!’ 했던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속이며 억지로 무엇을 하지 맙시다. 그런 사람이 일을 하면서도 불평도 많이 합니다. 하기 싫으면 하기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아는 사람이고 자신을 알기에 한 번 ‘Yes!’ 하면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니오.’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모든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기 싫을 때 하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하겠다고 한다면 그 말은 정말 믿을만한 말입니다.
정호승씨가 기자 생활을 하실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 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은 성격이 완고하여 누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정호승씨는 좋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자 순순히 포즈를 잡아주셨습니다. 하도 많이 찍으니, “왜 이리 사진을 많이 찍나?”고 물으셨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을 많이 찍어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스님은, “그러면 천 번 찍어라.”라고 하시며 원하는 포즈는 다 해 주셨다고 합니다.
성철 스님은 하기 싫으면 죽어도 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허락을 하면 기꺼이 하는 스타일이셨습니다. 그래서 한다고 해 놓고 안하는 소인배가 아니라 한다고 하면 죽어도 하는 크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정말로 진실 되지 않으면 그 거짓 속에 결국은 자신이 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매우 긴 고통입니다. 종교의 선택이든, 성소의 선택이든, 결혼이든, 선택하기 전에 모든 것에 있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판단한 것에는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신앙인으로서 ‘참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위대한 신학자나 대영성가를 방문하지 않아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를 대충 파악하고 있습니다.
매순간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매 순간 악에서 돌아서서 선을 향하며...
그래서 이런 대림 시기 계획도 잘 세웁니다. 새 출발해야겠다,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계획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대림시기, 거창한 계획, 간절한 염원, 수많은 생각보다는 오늘 지금 이순간의 결단과 그에 따른 행동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이 순간 생각을 바꾸고, 지금 이 순간 죄에서 돌아서고, 지금 이 순간 화해하고, 지금 이 순간 용서하고,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하느님 나라는 어디 먼 다른 하늘 아래 있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구체적인 일상 안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매일 매일, 우리들의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는 건설되어갑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손길을 통해 이웃들의 극심한 고통이 조금씩 완화되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점점 확장되어갑니다.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한 질책을 받고 있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그들 역시 나름대로는 충실한 신앙인이자 열심한 하느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확연한 오류가 드러난 그릇된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지던 신앙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은 말로만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선포하는 설교는 정말 그럴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전혀 따라주지 못했습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의 신앙은 율법이라는 작은 틀 안에 모든 것을 가둬놓은 잘못된 신앙이었습니다. 자기 자신, 이웃, 기쁨, 자유, 행복, 하느님마저 율법이라는 답답한 틀에 모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다.
하느님 안에 산다고 자부했지만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하느님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하느님을 가장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불행을 보고 즐겨하시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괴롭히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의 유일한 바람은 인간의 행복입니다. 하느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인간의 구원입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 그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도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 하느님은 나의 행복만을 바라신다는 사실, 그 하느님의 사랑만이 나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름대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었던 두 의사가 점심을 먹고 나서 병원 앞 벤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남자가 안짱다리에 두 팔을 비비 틀고 고개를 기묘하게 꼬면서 걸어오는데 얼굴이 땀에 온통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먼저 첫 번째 의사가 이렇게 진단을 내립니다.
“안됐어. 뇌성마비환자로군.”
이 말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두 번째 의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무슨 말인가? 저 사람이 어떻게 뇌성마비환자야? 그렇게 진단하는 자네가 무슨 최고의 의사인가? 저 사람은 분명히 편두통성 간질이야.”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점점 언성이 커져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두 사람 앞에 멈춘 그 남자가 이렇게 더듬더듬 묻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 화장실이 어디죠?”
안짱다리에 두 팔을 비비 틀고 고개를 기묘하게 꼬면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서 뇌성마비환자라고 또 편두통성 간질이라고 진단을 했지요. 하지만 그 행동은 사실 화장실이 급해서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판단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내가 확실하다고 하는 것조차도 사실이 아닐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사실로 인정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즉, 지금의 내 모습에서 변화되어 주님 뜻에 철저히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두 명의 아들이 나오지요. 먼저 맏아들은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싫다고 대답했었지만 급히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예’하고 대답만 할 뿐 일하러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버지의 뜻에 맞는 아들인가가 바로 예수님의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누가 올바른 아들 같아요? 당연히 맏아들이겠지요?
맏아들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싫다면서 아버지의 뜻과 반대했지만, 곧바로 마음을 바꾸어 순종하는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작은 아들은 처음에는 가겠다고 말을 잘 듣는 아들의 모습을 취했지만, 말만 할 뿐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올바른 아들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끝까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게 철저하게 변화되어야 올바른 주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철저하게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되려는 맏아들일까요? 아니면 말만 할 뿐 변화되지 않는 작은 아들의 모습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논쟁이나 반박을 하면서 상대를 이긴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승리이다. 상대의 호의는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데일 카네기)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랑의 기억
-방교원 신부-
오늘 복음에는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부했던 큰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었기에 마음을 바꾸어 포도밭으로 일을 하러 갔을까요? 그것은 루카 복음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탕자의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작은아들은 자신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고 비로소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리라.’ 이처럼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했을 것이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어 포도원으로 가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를 변화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나무가 자라듯 성장하게 될 것이고, 내외적인 고통을 체험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사고의 틀이 변화되고 확장되면서 성숙의 길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조건 없는 사랑과 이에 대한 기억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기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기억하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이 기억으로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새롭게 오시는 그분을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천적 무신론 -김찬선신부-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신론이란 신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지만 실천적 무신론이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이란 그의 실천에 있어서 하느님은 안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느님 때문에 안 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느님 때문에 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안 하고는 하느님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은 행동할 때만이 아닙니다. 나의 삶 안에, 나의 인생 안에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계시지만 나의 삶 안에는 아니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저기 별에 계시거나 그렇게 멀지는 않아도 저기 부산에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기에 나와 상관없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지만 계시든 안 계시든 상관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지만 나는 그 사랑을 필요로 하지도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좋은 분일 것이라 믿지만 나는 세상의 좋은 것들보다 하느님의 좋으심을 체험한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지만 내 힘으로 안 될 때 하느님의 힘으로 될 거라 믿지도 않고 한 번도 그분의 힘에 의탁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에서 전능하신 분으로 혼자 계시고 나는 나의 세계에서 하느님 개의치 않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은 비록 아버지의 명을 거부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늦게라도 실천을 합니다. 작은 아들은 선선히 하겠다고 했지만 실천하지 않습니다. 작은 아들은 애초부터 아버지의 명을 건성으로 들은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발톱의 때만큼도 중요시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도 아예 없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고민, 고민하다가 아주 어렵게 부탁을 했는데 상대는 아주 쉽게 ‘알았어, 알았어!’ 하더니 나중에 보니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 고민, 고민하다가 아주 어렵게 충고를 했는데 상대는 금방 ‘충고해주어서 고맙다’고 하더니 나중에 보니 전혀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 아닌 행동을 하는 경우. 이 경우 차라리 불쾌해하거나 반박을 한 경우보다 더 나쁩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이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나를 성찰해봅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지만 듣는 것으로 그치고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말씀의 응답을 하고 있음을. 하느님은 계시지만 주님으로 계시는 것이 아닌 삶을 살고 있음을.
자신을 알아라
- 김영수-
초등학교 시절 줄줄이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우리의 처지를 안다는 것, 나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운동선수는 기록을 갱신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 상태를 파악하여 부족한 근력·순발력·정신력·판단력을 과학적으로 개선한다. 수험생은 부족한 과목에 좀 더 시간을 배정해야 성적을 올릴 수 있다.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생활에서도 자신이 모자라는 분야에 대한 충분한 개인적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적절한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매일 신세타령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두 아들의 비유에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침이 된다. 주일미사 때 듣는 복음과 강론을 통해 과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복음적 삶이 되는지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서로 사랑하여라. 용서하여라. 온유하여라. 겸손하여라.” 등 좋은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과연 이를 실천하고 있는가? 미사 시간에는 그래야지 하면서 반성하고 다짐하지만 성당 문을 나오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오늘 말씀에 또 다른 아들과 같이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와 같은 일이 반복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 실천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신다. 우리도 성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복음을 그대로 살아가는 용기를 배워 실천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마음속에 의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세상 속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세상이 보는 눈이 무서워 망설이기 때문에 의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복음 생활이 우리가 구원받는 길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겠다.
하느님의 나라
-장재봉신부-
우리는 하느님나라를 굉장한 곳으로 상상합니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일러주신 하느님 나라는
약간 실망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세리와 창녀가 먼저 차지하는
그곳은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들의 나라라고 밝혀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사야예언자를 통해서 하느님께 꾸중을 듣고
예수님께 지적을 당했던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느님을 알았고
성경을 공부했던 부류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범주를 벗어난 하느님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의 전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는 자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까닭일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공부로 지식을 쌓는 일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낫다고 말합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기만 할까요?
알지도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모르면서 제대로 실천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믿음도 사랑의 실천도
결코 주먹구구로 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알되 제대로 깨닫고
받아들이되 그분을 향한 믿음으로 설 때에
그분의 뜻을 살펴 행하는 지혜를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 능통한다면
더 굳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일러주신 지혜는
의로운 길을 배워
생각을 바꾸고
끝까지 믿음으로 일관하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작은 아들은 결코
큰 불의를 저지른 죄인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사기 칠 생각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떤 급한 사정이 생겨서 포도밭에 갈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정을 일절 살펴주지 않으시니
너무합니다.
아무리 하느님나라는
작은 아들처럼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해도
좀 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보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가끔
하느님의 뜻에 입을 내밀고
더 가끔 하느님의 뜻에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못 이겨서
할 수 없어서
한 발 옮겨보고
다시 물러서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두 발 떼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우리를
이해하시고
품으시고
‘실천하는 믿음’이라 평하시는 주님이라 싶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작은 아들의 허세를 놓치지 않고 헤아리시는 주님의 정의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되
철저히 사랑하라는 분부로 새깁니다.
대림은
그분의 쏟아 붓는 사랑이
스스로를 포기하고
우리를 택하시는 모습에 소스라쳐 놀라는 때입니다.
우리 영혼이
그분의 마음에
고와진다면
그분께서는 더 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아멘
-유해욱신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 묘지에 묻힌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 이런 비문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울 때, 즉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그 역시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켰다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변화란,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배타적인 자세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아집과 교만을 버려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맏아들은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만 했지, 실제 행동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아들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요?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림 시기는 내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대로 나를 변화시켜 나가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새벽을 열며
요즘 제가 어떤 걱정꺼리를 하나 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도 아닌 미사 강론 때문에 생긴 걱정이랍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이런 걱정을 한다고 하면, “설마요~~”하면서 믿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저는 이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 강론을 쓰고 있고, 더군다나 직접 강론 할 때에는 원고를 보면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벌벌 떨면서 강론을 하는 것도 아니지요. 맞습니다. 강론 자체로는 절대로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묵상한 것을 나누면 되니까요. 하지만 돌아오는 토요일에 있을 강론은 정말로 걱정이 됩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을까요?
이번 토요일에는 저와 제일 친한 동창 신부인 단도리 신부의 동생이 결혼하는 날이랍니다. 그리고 이 혼배의 강론을 부탁받았지요. 이 혼배미사는 보통 미사와는 많이 다르지요. 더군다나 저는 결혼 생활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직접 해보지도 않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도, 그리고 신랑 신부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참 어색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대충 강론을 준비해서도 안 되겠지요. 단도리 신부를 평생 안 볼 것이면 몰라도…….
아무튼 이 혼배미사 강론으로 인해서 거의 한달 가까이 고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어떤 식으로 진행해볼까 등등……. 하지만 걱정만 되지 특별한 생각이 떠올려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 이렇게 걱정만 해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맘 잡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단 10분 만에 혼배 미사 강론을 다 쓸 수 있었습니다. 썩 잘 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욕먹지 않을 정도는 쓴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딱 10분 만에 고민이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인데요. 거의 한 달을 이 문제로 끙끙 앓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하고 있는 모든 걱정꺼리가 이렇지는 않을까요? 하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딱 10분 만 투자하면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을, 온갖 걱정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실천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일하러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은 둘째 아들보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뉘우치고서 일하러 가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씀해주시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느 아들의 모습을 취할 때가 많은가요? 혹시 둘째 아들이 바로 나의 모습인 경우가 많지 않았습니까?
둘째 아들처럼 말만 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 앞선 저처럼 걱정만 한다고 해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렇게 말만 하는 시간에 또 걱정하는 그 시간에, 딱 10분만이라도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노력할 때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걱정이 사라질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자신이 걱정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합시다. 딱 10분만이라도…….
빠다킹 신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강영구 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그대에게
진흙투성이라고 깔보면 안 됩니다. 더러워 보이지만 진흙 속에는 영롱한 빛을 간직한 진주가 있습니다. 진흙은 진주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진흙은 진주를 뒤덮을 수는 있어도 영롱함을 흐리게 할 수 없습니다. 금가고 깨진 질그릇이라고 깔보면 안 됩니다. 흠집투성이지만 그 속에 아름답고 귀한 보석이 들어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이유는 그들 가슴 속에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편견(偏見)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그들 가슴 속의 보물까지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겉으로 아름답고 화려해도 그 속에 썩은 오물이 가득하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쓰레기통에 지나지 않습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오물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쓰레기통이 행복할까요, 흠집투성이지만 찬란한 보석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 행복할까요? 하늘나라(天國)는 하느님께서 담아주시는 보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릇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보고 보물을 담아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찌그러지고 깨졌더라도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에 보물을 담아주십니다.
보물 담는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인격적 변화
-박동진 신부 -
인격적인 대우, 인간적인 만남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집창촌에서 화재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곧바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집창촌은 폐쇄되었으며, 성매매 근절을 위한 시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채 6개월을 가지 못하고 대책위원회는 흐지부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후, 다시금 가까이 있는 다른 집창촌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책위원회가 다시 꾸려졌고, 그곳에서 성매매를 하던 이들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경찰청과 시청 앞에는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어김없이 대책위원회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어쩌면 대책위원회의 노력이 결실을 얻은 것인지, 대대적인 성매매 근절법이 있었고, 그들을 구제하겠다고 경찰을 앞세운 상담원들이 집창촌 주위를 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러한 조치에 대해 반기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거기에 가장 중요한 인격적인 대우, 인간적인 만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창시자인 프랭크 더프에 의해 집창촌이던 벤트리 거리가 전혀 새로운 거리가 된 것이나, 그들을 죄인 취급하지 않고 언제나 다시 돌아오면 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막달레나의 집’은 그래서 다릅니다. 루치아 성녀가 매음굴에 던져졌을 때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인격적인 대우, 인간적인 만남 안에서 ‘거룩함’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임숙희-
◆오늘 포도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 관계’라는 성경의 영원한 주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여라.”(28절) 그분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포도밭에 일하러 가라고 요구하신다. 올 여름 독일 뮌스터에서 방학을 보낼 때였다. 며칠 동안 계속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던 어느날, 나는 마리아 광장에 있는 성당에 들어갔다. 잠겨 있으리라 생각했던 성당 문이 스르르 열렸다. 어두컴컴한 성당 안에서 누군가가 파이프 오르간을 치고 있었다. 그 어둠과 침묵에 서서히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성당 뒤편 구석진 곳에 있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와 그 앞에 놓인 촛불들을 발견하였다. 그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두 팔이 절단되고,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머리 위에는 초라함과는 어울리지 않은 커다란 왕관이 씌워져 있어 왕이신 분의 가난함과 무력함을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내고 있었다. 안내지에 따르면 그 십자가는 1944년 9월 30일, 연합군의 폭격으로 두 팔이 날아갔고, 폭탄 파편이 심장을 통과하여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십자가 가로대에는 ‘나는 너희의 손 외에는 다른 손이 없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예민한 신앙 감각을 가진 어떤 사람이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현실 앞에서, 인간의 전쟁으로 심장이 뚫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신학적 성찰을 적어둔 것이었다. 나는 오늘의 말씀,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여라”를 읽으면서 마치 직관처럼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떠올랐다. 실상 그 십자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십자가 중에 가장 충격적인 십자가였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예수님의 모습은 나를 매료시켰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나는 네 손이 필요하다. 네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애원하시는데, 인간인 내가 어떻게 그분의 손이 되어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오늘은 다른 일 때문에 당신의 포도원에는 갈 수 없다고 버틸 수 있겠는가?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양승국신부-
<깨트려버려야 할 향유단지>
여러 명의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이라면 다 느끼실 것입니다. 자식들, 하나같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또 하나같이 다 다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특징이나 성향, 기질이나 장단점들이 있지요.
어떤 자녀는 그렇게 효자일 수 없습니다.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모릅니다. 부모가 하라는 대로 다 합니다. 공부도 잘 합니다. 동네 사람들 칭찬이 자자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녀는 엄청 부모 속을 썩입니다. 어찌 그리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안 드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내 배에서 저런 애가 나왔을까?’하는 의구심이 절로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도 엄연히 자식이지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달래기도 합니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줘보기도 합니다. 그래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합니다. 모든 노력이 안 먹혀들어갈 때면 ‘극약처방’도 써봅니다.
마음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겠지만 부모들은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에 이런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당장 짐 싸들고 나가거라!” “너는 오늘부터 내 자식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끝까지 말 안 듣는 자식들 때문에 엄청 속이 상하십니다. 아무리 차근차근 설명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목숨과 관련된 일이어서 간곡하게 당부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자식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면전에서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잘 도 대답하지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죽어도 그릇된 생활을 고치지 않고 옛 악습을 반복하는 자식들의 모습에 강력한 경고를 던지십니다.
앞에서는 갖은 감언이설로, 그럴듯한 말들로, 실속이 하나도 없는 말들로, 전혀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들로 말잔치를 벌이지만 행동이 조금도 따라주지 않는 자식들의 완고함 앞에 발을 동동 구르십니다.
가슴을 치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땅까지 쳐가면서 회개를 결심하지만, 그 결심이 단 하루도 지속되지 않는 자식들 앞에서 고민이 크십니다.
이런 사연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연한 의지입니다. 과감한 결단입니다.
수백, 수천가지의 좋은 계획보다는 단 한가지의 확실한 실천입니다.
회개의 결실로 주님을 위해 시가 수백 만 원이나 나가는 향유단지를 과감히 깨트려버리는 한 죄 많은 여인의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회개의 표시로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의 반을 ‘뚝’ 떼어 주님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헌하는 세관장 자캐오가 보였던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오늘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나를 부자연스럽게 속박하고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가 깨트려버려야 할 향유단지는 무엇입니까?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세리와 창녀들 -경규봉신부-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 하나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라고 명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떠한 계획이 있든지 간에 오늘 당장 일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 면전에서 싫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사실 맏아들에게는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으며, 아버지의 명령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명령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먼저 해야 하므로 싫다고 거절하는 것은 어쨌든 커다란 잘못이며 죄이다. 그런데 맏아들은 이내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곧바로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똑같은 말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는 아버지가 명령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겠습니다. 아버지!”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틀림없이 가겠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가지 않았다.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마음은 거짓과 위선으로 차 있었으며, 뉘우치는 마음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두 아들 모두 다 잘못했고 죄를 지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무례를 범하였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은 거짓과 위선의 죄를 범했다. 맏아들은 나름대로 정직하지만 고집이 세고, 둘째 아들은 예의는 바르지만 부정직하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볼 때 두 아들 모두가 불효자이며 잘못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맏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상징하고, 맏아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아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그 맹세를 이행하지 않으며, 율법과 의를 강조하면서도 세례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과 그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하느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다.
세리와 창녀는 죄인의 대명사요 사회의 쓰레기라고 여겨졌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천민 계층으로 완전히 소외받는 자들이며 죄인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지던 부류였다. 세리라는 낱말이 강도라는 낱말과 동의어로도 사용되었고, 그들은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되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사제들과 원로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 그 까닭이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의로운 길을 가르쳤을 때 세리와 창녀들은 이를 믿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그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보다도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굳게 믿고 회개했는가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먼저 회개한 사람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며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의 대속을 굳게 믿는 사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 자신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사람, 그가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하고 회개하고 주님께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자.
-김상호 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하는 두 아들이 상반된 태도를 들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행동으로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그 반대로 작은 아들은 입으로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랐지만 행동으로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라는 비유에서 참으로 아버지의 말을 들은 사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가르침을 알게 됩니다.
오늘의 이 복음을 저는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려 볼까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착하다는 기준을 이 순종의 덕을 가지고 평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자식을 학교에 보내면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고 당부합니다. 저녁퇴근 시간에는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었느냐고 묻고 자식들이 그러하다 대답하면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로는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쳐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순명의 요구는 때로는 달콤한 것도 있지만 대개는 노력을 해야지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순명을 해 나가는 과정은 힘들지만 순명의 결과는 달콤한 것입니다. 순명의 과정도 달콤하고 순명의 결과도 달콤하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순명의 과정은 쓰고 그 열매는 달고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불순종이 나타납니다. 순종의 길이 평탄하지 않는 가시밭길이기에 그 길을 가려고 하지 않을 때는 불순종이 되고 불순종의 결과는 파멸 밖에 없습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어린이가 자라서 어떻게 될 지는 뻔히 보이는 일입니다. 불순종이 나타나는 또 다른 이유는 순종의 열매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권위가 무서워서, 처벌이 두려워서 순종하는 체 할 수는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고 소극적으로 적당히 처신할 수도 있습니다. 체벌과 불호령과 호통을 피해 나갈 만큼만 행동하지 적극적으로 순종의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다. 순종은 마음을 다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지 입으로만 하는 것은 참된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순명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기의 할 도리를 한 것뿐이지 그 이상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신자가 신자로서 자기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고 자식이 자식으로서 자기의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순명이기에 순명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과분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순종의 열매는 황홀한 보상이 아니라 그저 기쁨뿐입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가 순종의 결과일 뿐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을 직접 뵈옵는 그날 하느님께서 수고했다며 우리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순종의 결과일 뿐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이렇게 순종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순종은 자기를 위하고 또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에 자신의 힘든 노력을 요구하는 어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서 실천하는 것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순종이 인간됨의 길이고 또 인간의 도리라 말씀드렸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 바로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도록 합시다.
-이인옥-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거부하는 의사를 분명히 했으나
나중에 곰곰 생각하고 자기 결정을 바꾸었다.
또 다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순히 따르겠다고
대답만 하고는 아버지 뜻대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 두 아들의 최종적 평가는 물론 맏아들 쪽의 판정승으로 끝난다.
이 비유의 요점은
먼저 응답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른 실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낙타는 사람을 배신하는 짐승이라서,
수천리를 걷고도 지친 내색을 않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꺾고 숨을 놓아버리지.
하지만 말은 서서히 지치는 동물이야. 앞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지 그리고 언제쯤 죽을지 가늠할 수 있다네"
'연금술사'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평생 부모의 신뢰를 어긋나게 한적이 없는 자식이 있는가하면 평생 부모의 애를 태우며 불안하게 하는 자식이 있다. 어느 날, 가슴에 못을 박는 자식은 대개 예상치도 못한 녀석들이다.
우리들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럴 수 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해주지 않는가?
항상 투덜대며 반항하면서도 어떻든 목적지를 향해 가는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한치의 의심도 없이 곧장 한길만 파다가도 시련에 부딪치면 홱 돌아서버리는 신앙인도 있다.
전자는 말과 같고 후자는 낙타와 같다. 전자는 맏아들 같고 후자는 둘째아들 같다.
전자는 세리와 창녀 같고, 후자는 수석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과 같다.
주님이 걸으신 길을 따르면서 어찌 인간이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진실성을 보일 수 있겠는가? 어찌 투덜대는 일 없이, 의심하는 일 없이, 갈팡질팡 하는 일 없이 낙타처럼 죽을 때까지 올곧게, 줄기차게, 신실하게 신앙할 수 있겠는가?
마지못해 하는 것보다 성큼성큼 나서는 것이 좋겠지만. 주저하며 행하는 것보다 덥석덥석 임하는 것이 좋겠지만.
중요한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말씀따라 실천하며 사는 것. 그분의 믿음에 끝내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분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않는 일이다.
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하느님께 받은 권한을 올바로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라고 묻는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오늘은 어제 말씀에 이어서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그 결과를 알려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세리와 창녀들은 믿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았을까?’에 대해 부족한 설명이지만, 어제 저의 체험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한적한 숲 속 길에 하얗게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걷고 싶은 마음에 제2횡단도로 어리목을 향했습니다.
유명한 도깨비 도로를 지나자, 눈이 내렸을 때, 차량을 통제하는 임시 검문소에서 경찰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위에 도로가 얼어버려 올라가지 못합니다.’ 라는 말씀에, 저는 ‘저 위에만 갔다가 금방 올 겁니다.’ 라고 말하며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오히려, 저 뒤를 따라오다가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듣고, 방향을 돌리고 돌아가는 차들을 보며... 그리고 길가 옆에 차를 세워놓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쯔쯔... 겁은 많아가지고..’ 라며 거만한 모습을 비웃었습니다.
검문소를 지나, 일방통행으로 들어서니, 눈발이 거세지고 도로가 많이 얼어 있었습니다.
‘이왕에 온 거, 그래도 천왕사까지는 가야한다.’며 욕심을 냈습니다.
그런데, 일방통행에 접어들어 한 300M쯤 가다보니, 차가 빌빌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심 걱정하는 순간, 차가 멈춰버렸습니다.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헛바퀴만 돌았습니다.
금방이라도 뒷걸음칠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바로 뒤따라오는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앞으로는 가지 못하고 뒤로 가야하는 상황이 내심, 걱정도 되고 참 막막했습니다.
차가 오래 되어 힘이 없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어느 정도 속력을 내어주기에, 별 걱정 없이 빙판길을 올랐는데,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쩔 수 없이, 바싹 긴장하며 후진으로 왔던 일방통행 길을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보면, 저처럼 경찰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고 올라오는 차들이 있어서 옆으로 비켜서야 하기에 이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여서 커브길이 참 많았습니다.
한 두 세 번 차가 빙글빙글 돌며 구덩이에 빠질 것 같은 위험함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 머릿속으로 경찰관 아저씨가 떠올랐습니다.
분명, 내 의지대로 이곳에 와서, 이런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습니다만, ‘안 됩니다. 가지 못합니다. 돌아가십시오.’ 라고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그 경찰관 아저씨가 못내 야속하기만 했습니다.
순순히 차를 돌려 되돌아간, 그 힘 좋은 고급 승용차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내려왔습니다만, 다음부터는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생각해 봅니다.
제가 경찰관 아저씨의 말씀을 무시한 것은, 어쩌면, 운전에 대한 자신감 때문입니다.
운전을 좀 잘한다는 교만한 마음과 도로 상태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뭐 이정도 얼어붙은 것, 쯤이야!’ 라는 안일함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함과 안일함이 어제와 같은 위험한 상황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어제, 제가 얼마나 운전을 못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가 요한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은 이유 역시, 자신들에게 있는 교만함과 안일함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교만함, 적어도 이름모를 촌뜨기 요한보다 더 많이 배은 사제요, 원로라는 교만함이 요한의 말을 듣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런 교만함은 우리 삶에서도 종종 체험됩니다.
성당에 더 오래 다녔다는 교만함... 하느님에 대해 남보다 더 많이 배워 알고 있다는 교만함...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기도를 드린다는 교만함...
자신에게 좋은 말이나, 필요한 충고를 하는 사람보다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믿었고, 더 많이 생각했고, 더 많은 체험이 있다는 교만함이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버려 예수님에 대해 올바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참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참되게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 위해 우리도 귀와 눈을 막고 있는 교만함과 안일함을 조금씩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늘 복음의 큰 아들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매번 둘째아들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그리고 경찰관 아저씨의 말씀을 잘 들읍시다.^^
폭탄선언: 죄인들이 먼저 하늘나라에 든다.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내세운 예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은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예수님의 반문(反問)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의 반문에 그들은 겉으로는 ‘모르겠다.’고 대답하였으나, 그 속내는 요한도 예수도 믿지 않고 있었다. 오늘 복음은 이 불신(不信)을 더욱 명확히 하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고, 이 비유를 통하여 불신이 가져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백성의 지도자들보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자체는 알아듣기 쉽게 짜여져 있으나, 비유의 적용에 다소 모순점이 보인다.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비유의 적용에서 각각 누구를 의미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통상 큰아들이 상속권을 가진 자로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이를 대변하는 백성의 지도자급 사람들에 해당되고, 작은아들은 이들로부터 죄인으로 취급받고 더러는 실제로 죄인이었던 세리와 창녀들에 해당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따르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은 싫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 하고, 작은아들은 가겠다고 말해놓고 나중에 가지 않았다고 하니,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바로 큰아들이다. 따라서 비유를 적용하는 과정을 보면, 큰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에, 작은아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만큼은 비유를 결과에 적용시키지 않는 편이 아예 낫겠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 복음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한국어 성서가 어떤 사본을 따라 번역되었는가 하는데 달려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번역은 시나이사본을 따랐기 때문이고, 바티칸사본에는 비유가 반대로 전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원본(原本)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서는 모두 사본(寫本)을 번역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사본으로는 1947년 2월 베두인의 한 소년에 의해 발견된 사해-두루마리(사해사본)로서 기원전 2세기경의 것이다. 그 외에도 신․구약 사본들은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하고 오래된 것으로는 기원후 400년경에 필사된 바티칸사본, 시나이사본, 알렉산드리아사본, 에프라임사본 등이 있다. 사본에 대한 번역본도 수없이 많으나 제일 오래된 것은 기원전 25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70인역성서>이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기원후 400년경 라틴어로 번역되어 정경(正經)으로 인정된 예로니모 성인의 <불가타역>, 1532년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역>, 1611년 영국 제임스 1세의 명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 <흠정역>(欽定譯, King James Version) 등이 있다.
우리의 번역본이 어떤 사본을 따랐든, 비유의 의미는 확실하다. 중요한 것은 일하겠다는 말이나 다짐보다 실제로 일하였다는 행동이다. 직업상의 죄인으로 통하는 세리들과 윤리도덕상의 죄인으로 통하는 창녀들이 실제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관리한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예수님의 발언은 가히 종교적인 폭탄선언에 가깝다. 겉으로 보기에 나름대로 질서 있는 당시의 종교적 가치관을 흔들어 뒤집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 말하지만 세례자 요한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세례자 요한 자체의 인격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올바른 길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이 곧 메시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죄인들이 하느님나라에 들어 갈 리는 없다. 그들은 단지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하느님나라를 수용하였고, 그가 초대한 ‘회개의 세례’에 응답하여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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