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涑洞속동(涑里속리)와 慶州崔氏(경주최씨)에 관한 이야기
牛谷面 涑洞에 대하여 傳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高僧(고승)인
聖智道師(성지도사)가 全國의 명당을 찾아다니던 中,이 마을에 당도하여
이곳을 明堂으로 지목하고 三淸洞(삼청동)이라고 命名(명명) 하였다.
마을 근처에는 성지골(聖智谷)이라는 이름의 골짜기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동네에 물이 적어 아쉽다고 생각하여 涑
(물맑을 속,빨래할 속,행굴 속)字를 쓴 涑洞으로 동명(洞名)이 바뀌었다.
동네의 모양은 四方이 山으로 둘러쌓여서 돈주머니나 항아리 모양이다. 마을
은 약 70-80m 거리를 두고 신당골이라는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구분되어
모두 20餘家口가 살고 있다. 産業化前에는 50餘 家口가 오순도순 살았었다.
마을입구 돌박이(돌빼기라고 부른다)에는 속동에서 내려오는 개울과 野亭里
뒷산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合水(합수)하고 있다. 먼 옛날부터 돌박이에는 3
尺(척)정도 높이의 立石과 느티나무,연자방아 그리고 성지도사께서 親히 돌
위에 오른손가락을 눌려서 쓴“三淸洞”이란 글자와 도사의 왼손 자국이 큰
바윗돌 위에 선명히 남아 있었는데,1990년대 중반 경지 정리 작업 때 이런
귀중한 유적들이 없어졌고 일부는 토목 공사 때 받침돌로 사용하고, 일부는
근처 땅속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마을 바깥에서 마을이 들여다보이지 않아야 明堂이라고 하여 涑洞
선조들은 마을入口 돌박이로부터 마을 진입로까지 나무를 심었었다. 涑洞의
수호신처럼 여겼던 큰 古木(고목) 스무 그루 정도가 개울을 따라 서 있어서
바깥에서는 동네 안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숲이 울창했었다.
그러나 이 역시 경지 정리 작업으로 因하여 아쉽게도 베어졌다.
또한 개천을 따라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고 그 위에 시멘트 포장까지 되어서
옛 정취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려 過客의 마음은 한없이 서글프기만 하다.
涑洞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서 논농사로 벼를 主로 재배해왔으며 최근에는
특작으로 수박을 재배하여 농가 수입을 크게 향상시키고 있다.
마을에는 高靈 朴씨 小尹公派 齋室인 삼청재(三淸齋)와 慶州 崔씨 東城君派
의 齋室인 백세당(百世堂)이 있다. 百世堂 앞에는 조선 말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걸쳐서 영남지방에서 거유(巨儒)로 추앙받던 경주 崔씨 31世孫
古齋 坤述氏의 추모비와 32世孫으로 慶州女高 校長재직 中 숙환으로 別世한
雲守氏의 頌德碑가 우뚝 서있어 마을과 崔氏 門中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한편 百世堂은 원래 고령邑에서 客舍(객사)로 사용하던 건물을 약 150年 前
에 현 위치로 옮겨와서 崔氏 문중의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데,現在는 管理에
소홀하여 많이 훼손되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조선 말기에는 安東 權씨와 密陽 朴씨가 이 동네에 많이 살았으나, 약 150
년 前 개진면 良田里에서 慶州 崔씨 29世孫인 鳳昊씨가 이주해 4名의 아들
을 두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국회의원,대법관,장관,
해양경찰청장,공립 고등학교장,은행지점장, 교육자, 공무원,경찰간부,언론인
등으로 활동했으며, 또 건설업, 무역업,제조업,유통업 등에 진출해서 중견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다수의 人材를 배출하여 고령군내에서는 名實 共히
名門家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涑洞에서 배출한 주요 인사들은 아래와 같다.
古齊 坤述(1870-1953): 高宗7年(1870년)에 출생하여 少年 시절 경상도
관찰사가 주관한 英才 선발대회에서 嶺南 十三 英才로 선발되었으며,20代
약관에 대구鄕校 內 明倫學校 교장과 향교의 총책임자인 전교(典校)로 취임
하는 보기드문 기록을 남겼다. 30代 초반의 少壯 시절(을사보호조약 체결
직전)중앙조정의 고위직에 해당하는 비서승(秘書丞)에 임명되었으나,內部
大臣 李在克에게 편지를 보내 임명철회를 요구하고 근무하지 않았다.
“좋은 시대라면 벼슬을 않으려 할 이가 있을까”라고 그불응 이유를 밝혔다.
또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거유(巨儒)로서 망국의 한(恨)을 달래는 훌륭한 글을 많이 남겼다.
叟剛 崔坤逴(1879-1963) :牛谷面 涑洞 305번지에서 출생한 고인은 朝鮮朝
承訓郞 貞陵參奉을 지냈고 官醫로 奉職하면서 많은 醫療施惠를 베푸신 先考
崔昌粹의 家訓을 받고 成長하였다. 그래서 學文을 敎養으로만 여기지 않고
實學的 思考로 생활하였다. 매년 지방 文士들과 詩를 齊唱하였으며 전수받은
한의학으로 遠近지역의 貧窮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藥和劑(藥房文)를 지어주
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山野에 있는 약초로 病者를 치료하여 지금도
그 德을 기리는 사람이 많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곡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일체 거절하였다.
또한 平生을 氣槪와 節義로 살았다. 조선 말기 순종시대에는 탁지부(度支部,
현재의 재경기획부에 해당)에서 主事로 근무하던 中 경상도 치안총책으로
임명받고 부임하러 오다가 韓日 합방을 당해 취임하지도 못하였다.
조선총독부가 1910年 이후 斷髮令(상투 자르는 명령)과 신사 참배를 강요할
당시,先生이 이를 거절하므로 일본순사 駐在所長이 직접 상투삭발을 집행
하러 왔었다. 주재소장이 사랑채 마루에 木沈(목침)을 베고 누워있던 故人의
상투를 가위로 몰래 잘라버리자 베고 있던 목침으로 소장을 때려 쫓아버린
사건은 지금도 고향에서 人口에 膾炙(회자)되고 있다.
崔雲守(1926-1986): 崔坤華씨의 獨子.涑洞에서는 최초로 신식교육을 받기
위해 中學校부터 서울에서 遊學하였다. 경성상업학교를 졸업 후 화원 금융
조합서기로 재직 中에 광복을 맞았다. 이후 대구 농대(慶北大 농대의 전신)
에서 修學하고 교육계로 투신하였다. 고령중,고령여중,포항중,김천 지례 중,
김천 개령중,예천중, 달성중, 고령 쌍림중,경주 안강중고, 慶州女子
高等學校 等에서 교사,교감,교장과 장학관(성주교육청 학무과장)을
역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경주여고 校長 재직 中,만 60歲에 숙환으로 別世하였다.
國民褒章과 文敎部長官賞 等을 수상하였다.
崔雲芝(1926-2024): 崔坤逴씨의 次男.大邱高普(경북중고의 전신),만주
건국 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석사), 정치학박사
(건국대학교),명예 경제학박사(美國 워싱톤大), 漢陽大와 建國大에서 강사,
明知大 교수를 역임하였다.
大韓民國 건국초기 慶州女中과 大邱中의 敎師로 勤務後,경찰간부를 거쳐
재무부와 외자청 근무中 李承晩 초대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美國주재
대한민국 購買官으로 근무하였다. 5.16혁명이후 재무부 총무과장,
전매청에서 기획관리실장, 업무국장,관리국장,재무부 세관국장,초대
관세청 次長으로서 관세행정의 기초와 선진화 작업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GATT 등 국제회의에서 한국 대표로서 큰 활약을 하여
지금도 공무원 사회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국제전선(株)사장, 대한지적공사 사장,대한체육회 籠球협회장,同펜싱협회장,
KOC 상임위원,韓日친선협회 중앙회 이사장,韓-이스라엘 친선협회장,
韓-칠레,韓-멕시코,韓-알헨틴 경제사절단 한국대표,세계 의원연맹
한국대표,慶州 崔氏 전국종친회장,국회의원(3선)等을 歷任하였으며
官界,政界,財界 等 各 分野에 걸쳐 그의 足跡(족적)이 크며 특히 6.25전쟁
으로 폐허가 된 韓國經濟再建을 위한 외자도입에 그 功이 實로 至大하였다,
또 憲政會의 監事와 理事를 역임하였다.
大統領表彰,黃條勤政勳章 外 많은 受賞 경력이 있다.
저서로는 「똑바로 보고」,「民主主義와 全體主義」, 「獨裁政治論」,
「轉換期의 목소리」等 다수가 있다.
崔在濩 (1934-2011):名門인 경북사대부중과 경북고등을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 法大에 진학하였다.
대학 3학년 재학 中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7회)하고 육군 법무관(대위)
복무 후 대구지방법원 판사를 지냈다. 이를 시작으로 대구 지법과 대구
고등법원 부장판사,대구지법원장,법원행정처 차장, 부산지법원장,
대구고법원장, 大法官 兼 법원행정처장 그리고 대법원장 權限代行 等
법조계의 주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퇴임 후 영남대학교 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宿患으로 別世하였다.
崔在三 (1936-2018): 능인中高, 성균관대 법학과와 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과 국방대학원 안보과정을
수료하였다. 온양경찰서장,서울중부 경찰서장,충남 도경국장,경남지방
경찰청장,대구지방 경찰청장,경찰청 局長,해양경찰청장 等을 지내면서
청렴하고 강직한 공직자로 有名하였다.
공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꾸준히 연구 활동을 하여 동방대학원 대학교
초빙 교수로 재직 하였다.
저서로는「病은 음식으로 고쳐라」등 다수가 있다.
崔在文 (1940-2016):경북고등,경북대학교 사범대 물리학과를 졸업하였다.
대구와 경북지역의 중·고교에서 교사, 교감,장학사,교장을 역임하였다.
大邱과학고등학교 校長을 끝으로 정년 퇴임하였다.
ROTC 第 1期生 포병 장교(육군 소위)로 최전방을 지켰다.
崔在旭 (1940-2024) : 崔坤述씨의 次孫. 경북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후,4년간 전면 장학생으로 대구대 법학과(영남대 前身)를 졸업하였다.
동아일보 기자 선발고시에서 8名모집에 700餘名이 응시한 결과 수석
합격하였다. 이전에 동아일보 기자시험에 漢江以南에서 합격자가 全無했던
기록을 깨었다.
동아일보 기자, 정치부 차장,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대변인),경향신문
社長, 국회의원(2선)을 지냈으며 1998년에는 5대 환경부장관으로 임명
되었으며 그후 총리실 직속 “국무조정실장(장관 급)”을 역임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미얀마(버마)를 국빈 방문 中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九死一生으로 큰 禍는 면했다.
崔雨鍾(1933-2023):名門 경북고등학교와 東國大 법학과를 졸업 후
국내 대기업의 대리점,기타 유통업,제조업을 영위하면서 浮沈(부침)을
거듭 해오다 1986年11月 富剛金屬工業(株)를 창업 후 社名을
부강특수산업(株), (株)B.K AMSOL(B.K Additive Material Solution)
로 변경하면서 국제적인 기업으로 도약하여 기술력이나 추진력이 他의
추종을 不許 했다.
崔會長은 극비리에 특수금속시장에서 “스텔라이트”를 日本기업이 독점적으로
개발하여 社勢를 확장함을 확인한 후 KIST(한국과학기술원)의 협조를 얻어서
국내 최초로 日本産보다 더 우수하며 더 저렴한 제품을 市場에 내 놓아
업계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회사의 외형만 키우고 실속 없는 회사가 不知其數이지만 작지만 알찬 기업
으로 발전시켜 年 매출액이 150억원 이며, 해외수출액은 500만 Dollar를
넘어서 1000만 Dollar 高地를 탈환하기 위해 全 임직원이 오늘도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참고로 해외 수출선은 日本國, INDIA, MEXICO, RUSSIA等으로 다변화 했다.
회사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비결은 종업원들을 친 자식처럼 대하고 어려운
사원들게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 가서 불만이 있는 사원들의 어려움을 해결
해 줌으로 퇴직율이 年1%도 안되고 노사가 한 몸인 회사로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 崔회장은 生前에 父母님을 정성껏 모셔서
20세기 마지막 孝子라는 별명을 친구들이 作名해 주었다.
兄弟姊妹의 友愛가 돈독하여 화목하니 會社의 發展은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福단지라고 이야기 하곤 했다.
팔순이 지난 연세에도 불구하고 慶州崔氏 東城君派 門中의 회장직을 수행하느라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門中의 단결과 선조들을 공경하는 기풍을 진작 시켰다.
“우리는 할수 있다는 의지, 우리는 하면 된다는 자신감, 우리는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회사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전사원이 한마음이 되었다.
위에 열거한 人士들 外에도 국내외 경제계와 학계에서 활동하는 문중회원들
이 무수히 많다. 예로 부터 고승(高僧)들이 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한결같이
“장차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될 곳”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大邱等地에 사는 外地人이 간혹 속동의 빈집을 매입해 두는 사례가 있다.
涑洞에는 崔氏 外에 朴氏, 權氏, 郭氏, 李氏, 金氏, 許氏와 南氏 등 여러 氏族들
이 한 가족처럼 화목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는 온화한 山勢(산세)와 아름다운
고을의 전경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끝)
2026. 2
글쓴이:
德井 崔 在 寅(02-719-1237,E-MAIL:woonam@italiano.kr)
豊山금속공업(株)에서 貿易部 수입과장과 初代 日本國 東京事務所長역임,
韓日合作 法人 (株)풍산특수금속의 次長,部長을 거쳐 1981年7月27日
漢陽貿易商事라는 OFFER商을 創業한 後,현재 (株)雲岩流通(무역업)과
(株)三助家具(수입 ITALY가구 판매업)의 創業主겸 代表理事로 在職中.
(高靈鄕土史 발간을 위한 자료제출 요청을 받고 작성 하였습니다.
編輯時 便宣를 爲하여 본 원고를 E-MAIL로 받아 보시려면 전화로
요청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