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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 788-1021
제11장 과학들의 비판 / La critique des sciences 927
우리가 연구했던 시대의 초반부에, 많은 사상가들은 독립된 기원들로부터 나온 실증과학들이 스펜서(Spencer, 1820-1903)와 텐(Taine, 1828-1893)이 부여했던 형이상학적 의미와 범위를 갖지 않는다고 인정했다. 1870년경부터[프랑스-프러시아 전쟁시기] 라슐리에(J. Lachelier, 1832-1918)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의거하여서, 자연법칙들의 탐구는 원인성의 원리만큼이나 목적성의 원리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했다. 부트루(E. Boutroux 1845-1921)는 자신의 자연법칙의 우연성에 대하여(Conti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속에서, 과학적 인식의 내적 분석을 통하여 결정론(le déterminisme)을 알아채게 했으며, 이 결정론이 상위 실재성의 형식으로 이행함에 따라서, 즉 물질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의식으로 이행함에 따라서, 조금씩 조금씩 이완 되어감을 알아보게 했다.
이 당시 [사람들은] 과학들의 비판 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은 틀림없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몇해 동안에 특정적인 표현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은 두가지 구별된 특징을 갖는다. 첫째로, 그것은 기술적 질서(l'ordre technique)이다. 기하학의 원리들에 관한 탐구들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한 순수하게 기술적인 탐구에서 유래한다. 이 운동의 선두에는 처음에 푸앙카레(Poincaré 1854-1912), 나중에는 칸토어(Cantor 1845-1918), 화이트헤드(Whitehead 1861-1947), 러셀(Russell, 1872-1970) 등의 수학자들이 있고, 또한 뒤앙( Duhem, 1861-1916)과 같은 물리학자도 있다. 둘째로, 이 운동은 아부 실증적 본성을 띤다. 왜냐하면, 이 운동은 과학적 원리들은 원리 자체나 절대자 속에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모순과 충분이유율 같은 매우 일반적인 원리들을 검토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인식 속에서 이 원리들이 갖는 효과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역할 속에서 그것들을 탐구한다. 사람들은 원리들이 일부분을 이루는 그 문맥 속에서만 원리들을 검토할 수 있을 뿐이라고 판단한다. 완전한 과학의 연역적 이상(l'idéal)은 경험주의 덕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해진 이상 때문에 사라진다.
1절 앙리 뿌앙까레, 뒤앙, 밀로 / Henri Poincaré, P. Duhem, G. Milhaud 928
푸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는 미분 방정식을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발명하였고, 천체 역학에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으며, 철학자로서는 과학자로서 실행한 과학적 작업의 조건들을 탐구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보면 뿌앙까레가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과학 속에서 실험적 진리라는 것, 정의 되어야 하는 것, 이론으로 정립되는 것으로 구별해야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별들이 뉴턴의 법칙을 따른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진리가 사실로 나타남을 말하는 이 명제 속에서 다른 두 가지 명제를 혼동한다. 즉 이 둘 중의 하나는 정의로서, 그 귀결은 변질하지 않고 검증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써, 말하자면 중력은 뉴턴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그 적용에서]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로서, 중력이란 별들에 작용하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이다. 뿌앙까레의 비판은 대부분에서 이 출발점으로부터 실행되고 있다. 수학적 공간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부여한 성질들, 즉 동질성, 등방성(isotropie)(等方性; 방향에 따라 물리적 성질이 달라지지 않는 것), 3차원 등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들이다. 그런데 기계적인 힘의 성질들, 즉 작용과 반작용의 동등성은 단순한 정의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정의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것은 단순한 협약(les simples conventions)들이며, 이 협약들은 이론적으로 아주 자유롭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우리는 가장 편한(commodes) 협약들만 선택한다. 말하자면 현상들을 가장 단순한 구축으로 정돈하게 하는 협약들만 선택한다. 뿌앙까레는 마하(Mach 1838-1916)의 원리를, 사유 또는 단순의 아낌 원리를 인정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험적인 자료는 이 협약과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한 사실(fait)의 기계적 설명은 전적으로 협약적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심지어 한 사실은 가능한 한 무한한 기계적 설명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우리의 자유가 멈춘 그곳에 극한(la limite 경계)로 남는다.
그러므로 뽀앙까레는 과학자의 창발력의 몫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의 협약주의는 과학자가 실재성에 도달한다는 확신(la conviction)에 상처를 주었다. 왜냐하면 이 협약주의(le conventionalisme)는 상대적 영역과 비례적 영역들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협약주의와 전혀 다른 물리학자로는 물리리적 이론, 그 대상과 그 구조(La Théorie physique. Son objet, sa structure, 1906)을 쓴 삐에르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이 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때로는 물리학적 이론으로 법칙들의 실재적 설명을 만들고자 할 것이고, 데카르트의 역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재성 자체에 도달 했다고 허풍 떨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실재에 대해 이론을 형이상학적 어떤 개념과 연대하게 할 것이고, 그 이론을 절대자에 관한 토론에서 생겨나게 할 것이다. 때로는 이론 속에서 실험적 인식들로부터 요약되어 분류된 단순 표상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런데 이 표상이 실재성에 전혀 침투[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학의 이론 연구 입문(Introduction à l'étude des théories de la Mécanique, 1895을 쓴 부아스(Henri Bouasse 1866-1953)는 물리학적 본질만큼이나 방정식들도 이론을 이끌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같은 방정식들에 이르는 이론들 중에서 아무것도[본질도 방정식도 그 어느 것도] 선택하도록 허용하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을 덧붙여야 한다(그리고 뒤앙은 1894년에 과학적 문제들(Revue des Questions scientifiques이란 과학잡지에 실린 논문들 속에서, 생각들을 펼쳤는데, 이 생각들을 약간 나중에 밀로(G. Milhaud)와 르화(E. Le Roy)가 다시 하게 된다): 물리적 실험은 이미 자기 속에 이론적 해석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이론적 해석은 무매개적 자료(les donnees immediate, 직관)에 첨가되어 있다. 물리학자는 가스가 어떤 용적을 차지하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은주(水銀柱, 기압계)가 어느 선[눈금]까지 오르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한다.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추상적이고 가설적인 개념들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만이 이것으로부터 저것으로[용적에서 눈금까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뒤앙은 세계의 체계: 플라톤에서 코레르니쿠스까지 우주론의 역사(Le Système du Monde. Histoire des Doctrines cosmologiques de Platon à Copernic(5 vol, 1913-1917)이란 저술에서, 천문학에서 일어나는 물리학 이론의 이중 개념작용의 역사를 추적했다. 하나는 실재적인 것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개념으로서, 과학을 사실들과 점점 멀어지는 관례로 고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새로운 경험들에 저항없이 굴복하는 것이다.
밀로(Gaston Milhaud 1858-1918)는 철학자이며 과학사가가 되기 이전에 수학을 가르쳤다. 그는 유별나게 분명한 방식으로 어떻게 텐(Taine) 또는 스펜서(Spencer)의 세계에 대한 개념작업이 과학에서 형이상학으로 부당하게 변형되어 도출되었는지를 증명한다. “자유의 사실과 모순적인 것처럼 근대과학의 법칙들이 함축할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것은 실재로는 법칙들 속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오리려 선천적 견해(une opinion a priori) 속에 포함되어 있고, 이 견해에 따르면 아무 것도 결정론을 회피하지 못한다. ... 과학의 진보는 결정론의 형식에 아무변화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마치 결정론은 초기 사상가가 그렇게 생각했던 대로 있으면서, 그 사상가는 사람들이 상상했던 가장 단순한 두 현상을 양의 관계로 연결하려고 했던 생각했었다.”: 논리적 확신의 조건들과 한계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conditions et les limites de la certitude logique, 1894(143쪽)에서 썼다. 과학은 베이컨(Bacon 1561-1626)과 꽁뜨(Comte, 1798-1857)가 믿었던 대로 외적 관계의 단순한 수동적 등록(le enregistrement)이기는커녕 정신의 작품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과학은 자기 창조 자체 안에서 어떤 우연(une certaine contingence)을 포함하고 있다. 밀로의 다른 작품으로는 합리적인 것(Le rationnel : études complémentaires à l'"Essai sur la certitude logique" 1898, 실증주의와 정신의 진보: 오귀스트 꽁뜨에 관한 비판적 연구(Le positivisme et le progrès de l'esprit: Etudes critiques sur Auguste Comte, 1902 등이 있다.
빌브와(J. Wilbois, s.d.)는 1899-1901년에 형이상학지(Revue de métaphysique)에 여러 논문들을 썼는데, 그는 위와 똑 같은 정신적 경향으로, 밀(Mill, 1806-1873)의 유명한 방법에 대한 비판을 제시했다. 그 방법의 적용은 겉보기에는 사실들(les faits)의 단순한 등록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된 사실들은, 예를 들어 르 베리에르(Le Verrier, 1811-1877)의 [1846년] 발견에서 천왕성의 위치처럼, 이론과 계산들의 결과물이며, 이것은 방법들과는 완전히 독립적이다. (44WLF)
2절 과학들의 비판과 비판주의 La critique des sciences et le criticisme 930
만일 과학이 정신의 작품이라면[사실의 표현이 아니고], 사람들은 칸트의 방법을 다시 취하고 확장사면서 그 방법을 인도하는 정신의 필연성 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제알 수 있다. 정신의 작업을 [리용대학 교수였던] 안껭(Arthur Hannequin 1856-1905)이 아톰의 가설에 관한 비판적 시론(Essai critique sur l'hypothèse des atomes, 1908에서 시도했다. 소급분석(l'analyse régressive)의 마지막 항에서, 물리학은 그 운동 속에 사물들의 최종이유를 찾기에 이른다. 그러나 운동 그 자체는 완전히 비지성적(inintelligible) 요소이자, 연속적 요소이다. 이 요소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가정한다. 따라서 역학(la mécanique)은 순수한 지성적 과학이 아니다. 어떤 과학이 있다면, 그 과학은 운동의 과학에서 완전한 지성에 도달하는 과학이며, 그 과학은 오성을 요구하며, 신중한 수 또는 양의 과학이다. 그런데 운동의 과학에서는 완전한 지성성에 도달할 수단만이 있으며, 그것은 수들의 과학을 운동의 과학에 침투(관통)하게 하는 수단이다. 즉 원자론이 행하는 방식이다. 안껭(Hannequin)은 이런 것의 필연성 역학에서 화학에서 제시했다. 특히 화학에서 그는 실험의 조잡한 결과물로서 간주 할 수 없었을 테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연역하려고 시도했던 법칙들은, 즉 게이뤼삭(Gay-Lussac)의 법칙과 뒬롱-프티(Dulong-Petit)의 법칙은 근사치 법칙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한 정신적 경향에서 다르봉(A. Darbon, s.d.)은 역학적 설명과 유명론(L'explication mécanique et le nominalisme 1910)를 썼다. 사람들은 데카르트의 방식에 따라, 기계론이 사물의 실재성자체를 표현한다고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 그 결과로 그 속에서 순수 허구(un pure fiction) 보고서 마하(Mach 1838-1916) 또는 뒤앙(Duhem, 1861-1916)의 유명론 속에 빠져야 하는가? 개연성(확률)의 연구와 귀납의 다양한 형태의 연구는 “정신이 자신의 고유한 심층(깊이)에서 경험을 밝혀주는 관념들을 능력이라”고 믿게 한다. 중요한 것은 완전히 만들어진 관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루어지고 있는 관념들 즉 더 잘 알려짐에 따라서 사실들(만들어진 것들)을 보다 더 잘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확하게 되어 가는 관념들이다. [베르그송의 실재성 개념과 동일한 것인데, 1910년 논문이라면 베르그송의 영향이라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PM의 둘째 서문에서 철학은 정확성(précision)이라고 한 것은 점점 정확해간다는 것을 말한다] 다르봉은, 한 관념과 모든 사실들의 집합과의 일치가 우리 지성의 형식을 허용하는 증명을, 즉 가장 견 견고한 증명을 자신에게 준다고 추정한다.
안켕(Hannequin)이 말하는, 과학적 이론들의 주제에 맞는 정신적 필연성[이 있듯이], 그리고 바이힝거(Hans Vaihinger 1852-1933)가 처럼의 철학(Die Philosophie des Als Ob, 1911, 1922년 8판: La philosophie du « Comme si »에서 말하는 생명적 필연성도 있다. 적어도 바이힝거의 학설은 몇몇 주제들을 분명하게 가치화한 것이다. 이 주제들이란 그 주제들 내용(puissance) 안에서 주장되었는데, [한편으로] 그 당시에 마치 니체와 베르그송에서 지적 기능들을 지닌 생물학적 운명의 주제처럼 주장되었다. 여기서 이 니체와 베르그송의 지적 기능들은 다윈주의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 주제들은 뽀앙까레의 협약주의의 주제처럼 주장되었다. 자기 안에서 자기 목적과 자기 가치를 지닌 이론적 사상과 같은 것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문제 거리였다. 그 학설은 둘 사이에 아주 분명한 다른 두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주제는 사유의 역할이 실재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환경에(au millieu) 적응하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이 사유는 도구이며, 이 도구는 예견(la prévision)이라는 것 덕분에 우리를 실재의 한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제가 자기 주제 자체에도, 또한 사유가 실재성을 대표한다는 주제에도, 전혀 대립[반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베르그송은 지성적 범주가 생물학적 기원이라 할지라도 실재성 자체에 도달한다는 것을 제시했다.[지성은 직관의 도움으로 도달가능하지 지성자체는 도달하지 못한다고 베르그송은 말한다.] 이때에, 이 범주들이 무기력한[타성적] 물질의 인식에 다다를 뿐이고, 이 범주들이 생명에 응용되기를 원하지만 이르지 못한다. 반대로 바이힝거의 견해는 사유의 주제에다가 생물학적 기능(fonction)을 분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하는 것이다. 이 생물학적 기능이 둘째 주제이다. 이 생물학적 기능이 허구들(가상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서, 이 허구라는 것들이 적응을 허락하지만 실재성을 어떤 방식으로도 표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성만이 감각들의 집적물이고, 성질들을 부여받은 사물과 인과성은 허구들일 뿐이다. 이 허구들이 있는 그대로 인정되지 않을 때, 이들의 내적 모순 속에서 바이힝거는 이것들의 허구적 성격의 증거를 찾는다. 물리학과 수학의 근본적 개념들은 모순적이다. [모순이라는 것은] [더이상 쪼개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피를 지닌 원자, [무한히 자르게 되면 거의 없어지는] 제로(0)처럼 제거되는(éliminer)[무화되는] 무한소가 그러하다. 이들은 허구들이며, 왜냐하면 정합하지 못한 용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에서처럼 공인된 허구들로서, 부정의 양인 무리수(irrationnelle) 또는 허수(imaginaire)가 있다. 정치 경제학은 경제인(homo oeconomicus)라는 허구와 더불어 작업사고한다. 그 경제인은 오직 자기 이익에만 민감하다. 꽁디약이 말하는 [인간 표본의] 지위, 피히테가 말하는 폐쇄된 상업국가 등은 여전히 허구개념들이다. 이 허구의 개념은 가설(l'hypothèse)의 개념과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가정의 개념은 그 자체로 또는 그 귀결로서 통제할 수 있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허구 개념은 사실과도 대치될 필요도 없으며, [허구 개념의 요구에는 ]그러한 요구에는 어떤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남는 것은, 우리의 적응이 허구이라 할지라도 라는 가정에서가 아니라 이 적응이 허구이기 때문에, 그 허구가 실재적인 것에 적응에서 성공하는 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바이힝거의 생각이 덜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마도 문제가 되는 것은 불환지폐(le papier-monnaie 은행권)의 용도와 유사한 유통(une opération)이다. 이 지폐는 무거운 상품의 지위(la place)를 유지하면서 교환을 훨씬 호의롭게 한다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경험은 마치(comme si) 사물들로 구성된 것처럼, 물질은 마치 원자들로 구성된 것처럼, 곡선은 마치 무한히 작은 직선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는, 나는 경험 안으로 스스로 향하게 하는 데 훨씬 더 쉽게 한다. [그런데] 철이라는 재료로 된 실재성을 어째거나 유연하게 할 수 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 실재성에 굴복해야 한다.
바이힝거는 사람들이 이 학설과 실용주의를 혼동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당연한 자격으로, 실용주의는 진리의 학설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사물들을 변형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이힝거는 사물들을 유연하게 하는데 불가능함을 꿈꾼 것이 아라, 오히려 허구들의 발명을 통해서 사유의 굴곡성(flexibilité) 증가하게 하기를 꿈꾼 것이다. 제임스(W. James)는 결국에는 진실하고 체험되는 종교를[신비가로서 신비적 체험의 종교를] 원했는데 비해, 바이힝거는 “평민”(plébéien)으로서 종교적 신화의 진리를 찾고자 한 것이다. 바이힝거는 그의 스승 랑게(Friedrich-Albert Lange 1828-1875)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거부하지 않듯이 팔레스트리나(Palestrina)의 미사곡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그의 학설에는 실증적 관념론, 관념적(이상적) 비합리주의라는 이름이 붙는다.
3절 과학들의 비판과 근대과학발전 La critique des sciences et le développement scientifique moderne 932
1910년 경에 시작되는 시대는 앞선 시대에 비해 많은 관점에서 다르다. 우리의 세기의 초에 철학의 일반적 경향은 무매개로(à l'immédiat) 회귀이다. 즉 지성이 창조했던 다소 부서지기 쉬운 구축물들의 그 안에서 무매개로 회귀이다. 뿌앙까레(Poincaré)의 협약주의는, 베르그송의 직관주의와, 제임스의 실용주의와 하나가 되어, 지성이 진실한 실재성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을 훼손한다는 것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물리학의 이론들이 20년 이상이나 감당했던 깊은 혁명들에서, 생명존재의 진화에 관한 새로운 관점에서, 심리학의 변형에서, 법률학적 이론들의 변형에서 등등 도처에서 똑 같은 생각들이 표출되었다. 그 같은 생각들을 구별해내고 또 정의하기란 매우 어려우나, 그래도 이 생각들은 우리 지적인 문화를 똑 같은 의미로 간직하고 가는 것 같다. [과학의 발달로 하나의 동일성원리 속에 지식체계를 통합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비엔나서클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영미철학은 하나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길로 가려할 것이다.] 철학은 오랫동안 불연속과 연속, 종의 안정성과 변형[진화], 내성법과 객관적 관찰, 권리와 사실(droit et fait) 등의 대립들 위에서 겪어왔는데, 일반적인 방식으로 보면 사람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지적문명이 옛 대립들을 포기했다는데 주목하였다는 것이다. 이 쌍들 중의 각 첫째 항들은 인간 지성의 관점이고, 지성이 실재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들이다. [과학(지성)의 방법은 불연속성이며 권리이다.] 둘째 항들에서 사람들은 환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항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불연속은 아마도 실재적인 것의 깊은 특성이고, 연속성은 피상적 인식을 위하여 사물들이 취하는 측면이다. 라이프니츠의 격언은 현대물리학에 의해 전도되었다. 즉 자연은 도약에(par bonds)에 의해 진행한다. 사물의 깊에 불연속을 놓는다는 것, 그것은 경험의 대상들에 정신적 틀들[범주들 또는 코드]을 놓는 것과 거리가 멀고, 칸트의 비판주의적 관념론을 거부하는 것이다. 칸트는 다소 잠재적인 방식으로 19세기의 거의 모든 사상에 영향을 미쳤다. 겨우 몇 년 전에, 불연속적 실재성이 정신의 구축물이라는 것을 첨언하지 않고서도, 물리학자와 생물학자가 다루는 불연속적 실재성에 대해 사물들에 부여했던 형상들과 같은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곧 바로 물질과 에너지에 대한 알갱이 이론(la théorie granulaire)이 굉장한 성공을 거둔 이래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로, 원자론은 정신의 본성에 의해 부여된 사물에 관한 관점이 되었고, 심지어는 편리한 단순 허구(une simple fiction)로 되었다.
비판적 문제가 이렇게 진술될 수 있었다. 즉 [그 진술이란] 문제들의 각 순서에서, 정신의 필연적 관점을 사물들 위에 규정한다는 것(déterminer). 반대로 문제의 각 순서에서 정신의 관점을, 그리고 일반적으로 관점일 뿐인 모든 것을 제거한다(éliminer)는 중요하지 않는가? 물리학에서 상대성의 이론은 관념들 운동의 예시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 이론의 문제는 모든 특별한 관점을 어떤 한 관찰자에게 추상하게 하면서 물리적 법칙을 표현하는(exprimer)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반적 계보들 속에서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이론은 실재론적 인식론의 의미로 가는 것 같다. 사람들은 칸트 이래로, 물리학자가 사건들을 펼친다고 여기는 동질적이고 단일형식의 시간과 또한 물리학자가 사건을 자리하게 하는 유클리드 공간은 현상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열중하는 정신이 만드는 작업의 표시이라고, 싫증일 날 정도로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우주의 표상은 우리로부터 온 것[인식 형식]과 사물로부터 온 것[현상들의 일부]의 혼합물이다. 이 표상은 관찰자의 관점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마치 우주의 사건들이 특별한 관점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있는 그대로 즉자적으로 서술될 수 있는 것처럼,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러한 것이 아인슈타인의 제기한 물음이었다. 그의 이론은 그리스 기하학자들이 가까운 것과 먼 것으로서 간주했던 것을 일반화 했다. 그리스인들에 의해 발명된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 도형의 속성[성질]들은 관찰자로부터 멀고 가깝다는 도형의 우발적 사실들과 완전하게 독립적이었다. 그런데 베르그송이 지속과 동시성(Durée et simultanéité 1922)의 241쪽에서 말했던 것처럼, “중력을 관성에 환원하는 것은 바로 완전히 만들어진 [즉 이미 완성된] 개념들을 제거하는 것인데, 이 개념들이란 물리학자와 그의 대상 사이에서 또 정신과 (사물을 구성하는) 관계들 사이에서 개입되면서, 물리학이 기하학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 특성과 독립적인 방식으로 사건의 과정(le cours)을 표현한다. 이 특성이란 우리 시간의 어떤 순간에 우리에게 속하는 우리 지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과학의 이론가들은 결정론을 실제자체의 특성인 것처럼 또 허구 또는 합의된 것처럼 생각하는데 습관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 편한 합의는 [이용에는] 성공적이지만, 실재의 깊이[심층]를 표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은 물리적 세계의 본성(The Nature of the Physical World 1928: fr. La Nature du monde physique 1929)(불어판 293쪽)에서 “양자들(quanta)의 이론의 출현으로, 물리학은 이제 더 이상 결정론의 함축하는 법칙의 틀에 매여 있지 않다는 귀결에 이르렀다. 최근에 이론 물리학이 정식화 되자마자, 결정론은 무너졌다. 사람들은, 결정론이 옛 지위[명성]를 다시 얻을 수 있을지 자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소위 말해서 과학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한 필연성의 문제이다. 그 필연에로 철학이 되돌아오게 했던 것이다. 과학의 비판은 여기서 몇 몇 틀들을 보았는데, 실은 단지 몇 틀만 보았을 뿐이다. 과학의 효과적 발전은 거기서 몇가지 예방조치만을 보았고, 관찰자는 그 예방조치를 정당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물들을 대체로 파악하기를 그치게 되었고, 관찰은 중간 결과들에 머물게 되었다. (45NKD)
4절 인식론과 실증주의 Epistémologie et Positivisme 935
실증주의의 중심 관념은 과학들의 자료들 밖에서 철학에 속하는 모든 내용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 관념을 아벨 레(Abel Rey, 1873-1940)에서 다시 발견한다. 아벨 레는 철학을 실증과학의 번성과 동일시한다. 과학진보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벨 레의 위상은 오스트발트(Friedrich Wilhelm Ostwald, 1853-1932)와 뒤앙(Pierre Duhem, 1861-1916)의 에너지주의(l'énergétisme)에 반대하여 기계주의를 옹호하는 위치에 서 있다. 그의 작품 현대물리학자들에게서 물리학 이론(La théorie de la physique chez les physiciens contemporains, 1907), 인식 조건들의 관점에서 기계론과 에너지론(Le mécanisme et l'énergétisme au point de vue des conditions de la connaissance, 1908) 등에서 잘 나타나있으며, 그 내용들로서는 기계론이 전통적 특성들인 지성성과 명석성, 새로운 경험을 암시하는 경향, 그만큼이나 많은 점에서 기계론의 우월성 등이다. 현대 물리학자들에게서 물리학 이론 제2판(1923)에서 그리고 최근의 작품들에서 아벨 레는 1900년대 이래로 과학의 진화자체를 따르면서, 자기 사유의 실재론적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쓰기를 “아무것도 우리에게 원자를 형이상학적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원자를 다발로서 생각하도록 강요한다. 즉 원자가 실험적으로 물리-화학적 자료들의 관계로서 된 정합적인 다발이라 생각한다.”
베르(Henri Berr, 1863-1954)는 우선 역사에서 종합(La Synthèse en histoire. Essai critique et théorique, 1911)을 쓴 이론가이다. 이 책의 이론을 위하여 역사 종합(Revue de Synthèse historique (1900)를 창간했었다. 그는 이제 보다 방대한 작업 속에서 수식구 없는 종합을 시도한다. 그 종합으로서 [만일 종합이 이루어진다면] 모든 과학자들의 효과적인 협력에 의해 과학적 인식들의 종합이 실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꽁트(A. Comte, 1798-1857)도 이 종합 위에 철학을 기초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유태계 이탈리아 철학자인 리그나오(Eugenio Rignano 1870–1930)에서도 유사한 종합의 정신을 발견한다. 리그나오는 1906년에 국제적 잡지인 과학(Scientia)을 창간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인식론(l'épistémologie)과 아주 다르다. 인식론은 과학적 인식 조건들의 분석이며, 따라서 정신의 일반적 철학을 재조합하게 될 것이다.
[폴란드 출신 프랑스 철학자] 에밀 메이에르손(Emile Meyerson 1859-1933)은 동일성과 실재성(Identité et réalité, 1908, 1912 재판), 과학에서 설명에 대하여(De l'explication dans les sciences, 1921), 상대주의의 연역(La Déduction relativiste, 1925), 사유의 진전(Du cheminement de la pensée, 1931)(3권)들 쓰면서 인식론을 펼쳤다. 그 인식론은 실증론을 반박하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실증주의에서 무엇보다도 합법주의를 보았다. 말하자면 과학의 철학학설을 보았다. 그 학설은 과학적 인식을 연관들의 진술에다가 법률 적용하듯 한다. 거기에는 꽁트(A. Comte),, 마하(Ernst Mach 1838-1916)뿐만 아니라 에너지주의자들의 관점이 있다.이들의 관점은 사물의 구조에 관한 모든 이론들과는 대립되고, 세기 초에서 시작된 과학들의 비판의 운동에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메이에르슨이 생각하기를, 과학적 인식이 사실상으로 현존하는 대로라고 할지라고, 그 인식은 과학들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현상들의 설명을 부여하려고 또 실재적인 원인들에 도달하려고 이론들을 구축한다. 한 결과의 원인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극한에 이르러서는 이 둘을 동일시한다는 것이고, 결과는 원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물리학 전체는 관성의 법칙과 [운동, 질량] 보존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 이 법칙들은 이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단일자와 등질자를 [보존하기] 위하여 다수자와 이질자를 제거한다. 그래서 물리학은 시간을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들의 계열의 과정에서 방향을 함축하는 시간의 불가역성은 [물리적 법칙들의] 동일성에 대립된다. [시간의 불가역성은 비결정적인데 비하여, 기하적이고 논리적인 동일율의 가역성은 결정적이고 종말론적이다.] 물리학은 성질들을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고 물질의 통일성에 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통일성은 극단의 이론들에서는 동질적 공간[순수공간 즉 추상공간]과 동일시 된다. 이 동일화의 절차는 과학에 고유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상식과 동일한 절차이다. 이러한 것을 메이에르슨은 그의 마지막 작업, 사유의 진전(Du cheminement de la pensée, 1931)(3권)에서 연구했다. 또 이 작품에서 자발적 사유가 과학적 사유에 접근하고 있다. 다른 한편 상대주의의 연역(La Déduction relativiste, 1925)의 목표는 다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최근 상대성이론이 이 동일한 경향에 복종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상대성 이론이 진실로 연역체계 전체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은 저항들(des résistances)에 부딪힌다. 그 하나는 까르노가 진술한 원리인데, 한 에너지에서 다른 에너지로 변형은 자의적(arbitraire) 방향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합리적인 것들(des irratonnels)[무리수 초월수]이 있는데, 즉 운동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감각적 성질,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원거리에서 총격과 작용 등이 있다. [더구나], 과학에서 비합리적인 것인 모든 것을 규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목적성도 있다.
이 저항들 자체는 몇몇 형이상학적 문제들의 지위를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실재적인 것(le réel)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모든 것이 해소되는 동일성의 측면인가 또는 차이의 측면인가? 또는 베르그송에서처럼 두 종류의 실재적인 것, 즉 공간과 물질과 같은 동질적이고 부피적인 실재물(le réel d'étendu, homogène)과 질적인 실재물이 있는가? [베르그송의 두 실재물이란 스피노자의 두 개의 속성과 닮았으며, 이 두 실재물이란 모두스비벤디의 두 측면이며, 인간의 두 열망의 표시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베르그송의 학설은 메이에르슨의 인식론을 자기 견해들의 한 측면으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또한 베르그송은 다양한 것을 등질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점에서 물리적 사유의 자연적 진행을 보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인식론자(épistémologiste)인 메이에르슨은 이런 질문들을 다루기를 금지했다. [운동 질량] 보존 법칙들과 실재적인 것과 최소한 부분적 일치가 일종의 실재론의 관념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래도 진리라는 것이다. 이런 실재론은 편리성, 허구, 협약 등의 주제와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이 실재론은 베르그송의 실재론이다. 베르그송에게서 잘못된 해석들은(des interprétations) 실용주의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에 따르면, 정신이 [운동, 질량] 보존의 법칙들 속에서 도달하는 것은 물질적 실재성의 절대적 특성들이기 때문이다. (45NKDE)
# 참고문헌 Bibliogragphie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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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 푸앙카레(Jules-Henri Poincaré, 1854-1912) 프랑스의 수학자․이론천문학자․과학철학자. 우주진화론, 상대성이론, 그리고 위상수학에 영향을 미쳤고 일반대중에게 과학을 해석해주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1858 밀로(Gaston Milhaud, 1858-1918), Essai sur les conditions et les limites de la certitude logique, 1894.
1859 메이에르손(Emile Meyerson, 1859-1933), 폴란드 출신 프랑스 철학자. 그는 독일에서 화학을 공부했으며, 1882년(23살)부터 프랑스에 정착하였다. 1890년(31살)부터 과학들의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일성과 실재성(Identité et réalité, 1908),
1861 뒤앙(Pierre Duhem, 1861-1916),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인식론자. Le Système du Monde. 1913; nouv. éd. 1959.
1875 솔로빈(Maurice Solovine 1875-1958) 루마니아 출신 수학자 철학자. 그는 1922년 파리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는 아인슈타인 작품 불어 번역자이다. [루마니아는 불어문화권이다.]
1879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독일 출신 미국 물리학 이론가 상대성이론을 전개했다. 1921년(41살) 노벨 물리학상을 탔다. 1916년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 이 이론에서 유도되는 하나의 결론으로서 강한 중력장(重力場) 속에서는 빛은 구부러진다는 현상을 예언하였다. 이것이(1919년 에딩턴에 의해)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1891 엘렌 뒤앙(Hélène Duhem, Hélène Pierre-Duhem, 1891-1974) 삐에르 뒤앙의 딸,
1891 메츠(André Metz, 1891-1968), 에콜폴리테크니크 출신, 프랑스 장군(준장), 물리학을 세속화(일반화)하였다.
1904 베이유(Eric Weil, 1904–1977) 독일에서 이민 온 프랑스 철학자. 함부르크와 베를린에서 의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928년에 카시러(Ernst Cassirer)의 지도로 뽐보나찌(Pomponazzi)에 관한 박사학위를 했다. 사회정치철학 관심자인데, deu.Wiki가 fr.Wiki 보다 상세하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에 대한 연구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E. Weil, Albert Einstein, Bibliography of his scientific papers, 1901-1954, Londres 1960.
1906 로윙거(Armand Lowinger, 1906-?), [미국과학자?], The Methodology of Pierre Duhem, New York, 1941.
1909 바네트(Lincoln Kinnear Barnett, 1909-1979) 미국 작가, 라이프(Life)(1883-1936)지 편집장, 아인슈타인 상대성에 관심이 많았다. Einstein et l'univers, trad. J. Nequand, 1962 [네깡(J. Nequand, s.d.)]
1912 무레로스(Georges Mourelos, 1912–1994), 그리스인 교수, L'époistémologie positive et la critique meyersonienne, 1962.
1929 무이쥬(Jan Johann Albinn Mooij, 1929–2019) 네덜란드 대학교수, 시인, 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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