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가 한달만에 캐나다에서 귀국길에 고급 양주를 몇 병 들고 귀국했다. 소위 캐너디언 위스키다.
이 위스키의 특징은 보통 호밀(rye)를 기반으로 한 부드럽고 깔끔한 맛이 나며 세계적 브랜드로 유명하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양주엔 다섯 종류의 위스키가 있다. 그 중 탑이 크라운 로얄 위스키인데(Crown Royal) 이것은 1939년에 영국 왕이 캐나다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 생산을 시작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위스키이다. 그 다음으로 풔티 크릭(Forty Creek), 와이저스 (J.P. Wiser's), 커네다언 클럽(Canadian Club)과 롯 넘버 풔티(Lot. No. 40) 가 있다.
전호는 모처럼만에 추석과 긴 연휴 기간에 아들 내외가 사는 캐나다 벤쿠버에서 한달만에 귀국했지만, 그래도 동창회에 갖고 갈 선물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다. 해외 여행 후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엔 초코렛 종류가 제알 무난하긴 했다. 하지만 이번 연말 망년회는 아주 먼 곳에 사는 동창도 올라오리란 예상이 있었다. 뭘 가져갈까 고민하다 그래도 양주가 낫다 싶었다. 아들이 선물로 가져가라고 준 위스키는 와아저스와 롯 넘버 훠티 2병이었다. 둘 중에 호밀 100 프로의 부드럽고 깔금하다 정평이 있다는 '롯 넘버 훠티'를 갖고 나왔다.
연말 동창회라선지 명단에 있는 23명 중에 미국 오레곤주에 사는 종서와 평소 건강이 안 좋아 못 보는 찬구 빼곤 15명 이상이 참석했다. 대전에 태건이와 균희, 천안에 현이에다, 그 멀다는 울산에 사는 건석이까지 올라올 줄이야! 현희 총장은 미쳐 예상치 못한 일이라 놀라기는 했지만, 한편 입이 백팔십도는 째질정도로 벙글거렸다.
사당동 모 일식집은 통채로 <서화58화공> 동창들이 접수한 듯 야단접석이었다.
그 간에 못 보던 얼굴부터 서로 근황을 묻고 답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술잔이 오가다가, 모 회사 대표이사를 하다 지금은 건물주 사장인 재국이가 갑자기 "전호야! 너 귀국 선물 없냐?" 하고 한 마디 툭 던진다 .
"왜 없어 있지. 안 가지고 나오면 네 놈들 눈에 날까봐 챙겨왔지." 그러면서
전호는 백팩에서 신문지에 돌돌말아 가지고 온 술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잽싸게 선형이가 "위스키?" 한다. 이 말에 전호는 빙긋 웃으며
"그래 맞아! 너희들이 뭐 좋아할 줄도 모르고 가격 가성비에 캐나다에서 인기 있는 '롯 남버 훠티' 위스티를 하나 들고 왔지." 하고 받는다.
"와 ~! 좋아! 어서 맛 좀 보자."하며 모두 입과 눈이 째지며 좋아했다 .
그때 였다. 평소 무뚝뚝하지만 철학자 냄새가 많이 나는 종철이가 의외의 제안을 내놓았다.
"이 술은 나눠먹기엔 아까우니 우리 내기 해서 한 사람에게 몰아 안기자." 하지 않는가! 좀 엉뚱하다 싶은 제안이긴 했지만 으외로 모두 흥미 있어 했다.
술은 오래 전 끊어 지금은 안 마신다는 주은이 마저 "좋아! 내기 해보자!" 하며 맞장구 쳐댄다.
"좋아. 나도 찬성! 그럼 무슨 내기?" 술이라면 말 술도 마다않는 성근이가 불쑥 물었다. 철이는 성근이의 동의에 감사하다는 듯 좌중을
둘러보며 "그림 그리기로 내기하지." 하고 마치 포고령 내리듯 한 마디 내던진다.
이때 였다. "그림이라면 철이 네가 따논 당상이잖어 ! 안 돼! 불공평해." 하고 여기저기서 불평이 나왔다.
하지만 딱히 현실적으로 연말 술객들로 북적거리는 일식집에서 뚜렷한 대안의 내기방법은 없어 보여 좌중의 동기들은 묵언으로 철이의 제안에 동의해주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전호의 위스키였다. 두껑을 열기도 전에 전리품을 자신이 챙기리라는 맘으로 저마다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드디어 철이는 그림 '그리기 내기'를 관철하고 식당 써빙하는 종업원에게 메모지 20장과 펜은 있는대로 가져다달라 했다.
그림은 '뱀'으로 하고, 각기 1분 내로 그리기로 정했다.
이모티콘 정도는 그릴만한 메모지 20장과 다섯 개의 펜이 전달되었다.
펜은 돌아가며 쓰면 되었고 각기 솜씨를 부리며 열심히 뱀을 그렸다.
제한 시간을 넘기지 않고 참석자 모두 15 명의 뱀 그림들이 수합되었다.
심판관은 위스키와 이해상관이 없는 전호가 맡았다. 그는 일어서서 동기들이 모두 보일 수 있게 테이블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수합된 그림들을 하나씩 공개하며 누가 장원일 지는 제일 호응이 좋은 그림을 그린 동기에게 위스키를 선물로 안기기로 했다.
뱀 그림들은 저마다 다양했다. 각기 개인의 취향이 드러난 듯 그림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재미를 풍겼다.
이를테면 주식과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번 동진이는 술 좋아하는 스타일로 뱀의 얼굴이 약간 취한듯 한 표정으로 그렸다. 그림 하면,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성근이가 장원일 법한데 과연 붓끝의 섬세함이 펜으로도 그려질까? 하지만 그의 뱀 그림은 몸통 구석구석을 마치 실물을 보는 것처럼 그렸다.
모처럼 대전에서 오랜만에 상경한 태건이도 누가 한국과학기술원 실험실 귀신이 아니랄까봐 비늘이 약간 염산에 데인 모습을 그렸다. 15명에게 다 상 주고 싶을만큼 특색있게 잘들 그렸지만 장원은 한 명뿐이다.
내기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철이였다.
모두가 일제히 "이건 아니잖아!" 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뱀 그림은 다른 동기들이 사실적으로 그리는 동안 혼자서 뱀에 다리를 그려 놓았다. 마치 지네의 다리처럼 그려놓았던 것이었다. 뱀이 다리가 있을까? 뱀이 기어다니는 모습은 보았지만 아무도 뱀이 다리로 걷는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궁금해서 AI에게 물어보았다 .
"뱀에게 다리가 있나요?"
답은 '없음' 이다. 그러면서 처음엔 뱀도 다리가 있었단다.
성경은 에덴동산에선 뱀도 직립으로 걸었으니까, 뱀이 다리가 있었다는 것은 근거가 있는 설이다. 하지만 과학에선 뱀이 진화하여 다리가 없어지고 기어다니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철이는 거기까지 상상한 것까진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창의성이 다른 동기에 비해 뛰어나서 전호의 위스키 전리품은 철이에게 돌아갔다. 내기도 지가 걸고 상품도 지가 차지한 꼴이 된 셈이었지만, 전호의 캐나다산 위스키 선물 덕분에 <58화공 망년회>의 회식은 점점 즐거워졌다.
□추신:후세의 입방아꾼들의 말에 의하자면 뱀에겐 다리가 없다(無蛇足). 열국지의 '사족 얘기'을 생각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