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강민수는 평소처럼 새벽 조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건 공원 한켠, 운동기구 앞에서였다.
두 아이가 철봉에 매달려 놀고 있었다.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다섯 살 남짓한 남자아이. 누나가 철봉을 잡으려 하자 남동생이 밑에서 손을 잡아주며 밀어 올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도 깔깔 웃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였다.
민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쳤다.
평범한 아침 풍경.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강 형사, 경제과에서 연락 왔습니다. 금융감독원 쪽에서 협조 요청이 들어왔다고요."
민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강력계 형사였다. 경제 사건은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무슨 사건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IMF에서 어제 발표한 보고서와 관련이 있다고만 하더군요. 국장님이 형사님을 지목하셨습니다."
민수는 컴퓨터를 켰다. 메인 화면에 뉴스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IMF, 한국 외환보유액 구성 경고… '달러 자산 과다, 위험 수위'"**
그는 기사를 빠르게 훑었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달러에 과도하게 쏠려 있어 환율 급변 시 위험하다는 내용. 전문가들의 우려 섞인 코멘트. 그리고 금융당국의 "문제없다"는 공식 입장.
평범한 경제 뉴스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장이 그를 지목했다는 건, 뭔가 다른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금융감독원 회의실에서 민수를 맞이한 건 40대 중반의 냉철한 인상을 가진 여성이었다.
"최유진 과장입니다. 외환시장 감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강민수 형사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 불려온 건지..."
최유진은 서류 뭉치를 민수 앞에 내밀었다.
"사흘 전부터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외환시장에서 특정 패턴의 거래가 반복되고 있어요. 소액이지만, 너무나 규칙적이고 의도적입니다."
"그게 범죄와 무슨 상관이?"
"거래 패턴을 분석했더니... 암호처럼 보입니다. 누군가 시장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어요."
민수는 서류를 펼쳤다. 거래 시간, 금액, 통화 종류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그는 수학에는 약했지만, 패턴을 읽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이거... 반복되는 숫자가 있네요."
"맞습니다. 7, 32, 18. 이 세 숫자가 계속 등장합니다. 거래 시간, 금액 단위, 반복 주기에서요."
민수는 순간 멈칫했다.
7시 32분.
오늘 아침 공원에서 그 아이들을 본 시각.
우연일까?
"그리고 어제, IMF 보고서가 발표된 직후 거래량이 급증했습니다. 마치 신호를 기다린 것처럼요."
최유진이 또 다른 자료를 꺼냈다.
"더 기묘한 건 이겁니다. 거래 주체들을 추적했더니, 모두 유령 회사예요. 페이퍼 컴퍼니. 실제 존재하지 않는 기업들이 외환시장에서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배후에 있다는 건가요?"
"그걸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유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 거래 패턴이 단순한 시세 조작이 아니라, 뭔가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의심이 듭니다."
민수는 사무실로 돌아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7, 32, 18.
그는 이 숫자들을 반복해서 썼다. 날짜? 시간? 좌표?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후배 형사 이준혁이었다.
"형사님, CCTV 분석 결과 나왔습니다. 오늘 아침 공원에서 목격한 아이들 말씀하셨잖아요."
"아, 그건 그냥 참고로 얘기한 건데..."
"그게 이상합니다. 그 시각, 그 장소에 아이들이 찍힌 게 없어요."
민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
"공원 입구, 운동기구 주변, 모든 각도를 확인했는데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형사님 혼자 멈춰 서서 운동기구를 바라보는 장면만 찍혀 있어요."
민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본 건 환상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준혁아, 그 시각에 공원 주변에 수상한 인물은 없었나?"
"한 명 있었습니다. 중년 남성인데,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뭔가 작업하고 있더군요. 얼굴은 모자로 가려져 있었고..."
"그 남자 추적 가능해?"
"이미 하고 있습니다. 차량 번호를 확인했는데, 렌터카예요. 대여자 명의는... 최근 사망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민수는 다시 최유진을 찾아갔다.
"과장님, 혹시 IMF 보고서 발표 전에 내부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이론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한 달 전, 금융감독원 내부 서버가 해킹당한 적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피해가 없었다고 결론났지만, 만약 그때 IMF 보고서 초안이 유출됐다면..."
민수는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미리 정보를 알고, 시장을 조작할 준비를 한 거군요. 그리고 IMF 경고가 발표되는 순간을 신호로 삼았다."
"목적이 뭘까요?"
"환율 급변을 유도하는 겁니다. 한쪽으로 쏠린 외환보유액 구조를 이용해서, 달러 가치가 급등하거나 급락하는 순간 막대한 차익을 챙기려는 거죠."
최유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시세 조작이 아니라..."
"경제 테러입니다."
민수는 다시 그 공원으로 향했다. 해질 무렵, 운동기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철봉 앞에 섰다. 7시 32분, 그 시각 그 자리.
문득 그는 철봉의 높이를 측정했다. 2.18미터.
2.18.
218.
그리고 1월 18일.
01-18.
민수는 전화기를 꺼내 최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다음 거래가 언제 일어날지 알아냈습니다."
"언제죠?"
"2월 18일 오전 7시 32분. 그리고 거래 금액은 정확히 218억 원 단위가 될 겁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이들이 알려줬습니다."
2월 18일 새벽, 민수와 금융감독원 팀은 거래를 모니터링했다.
정확히 7시 32분.
218억 원 규모의 달러 매도 주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국이 즉각 개입했고, 거래는 차단됐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페이퍼 컴퍼니들의 실소유주가 검거됐다.
그 중심에는,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파산한 전직 펀드매니저가 있었다.
민수는 다시 그 공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이들이 있었다. 누나와 남동생, 철봉에 매달리려 애쓰며 웃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균형.
한쪽으로 기울면 무너진다. 아이들도, 경제도, 세상도.
그리고 그 균형을 지키는 건, 결국 사람의 몫이었다.
민수는 작게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겨울 공원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