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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7> 서장 (書狀)
증시랑에 대한 답서(5) “만약 고요한 곳을 옳다고 여기고 시끄러운 곳을 그르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세간상(世間相)을 부수고 실상(實相)을 구하는 것이며 생멸(生滅)을 떠나 적멸(寂滅)을 구하는 것입니다.”
보통 선을 공부한다고 하면 고요한 곳에서 말없이 앉아 잡념을 내지 않고 정신을 호흡에 집중하거나 화두에 집중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병에 응하여 약을 사용하는 임시적인 방편을 마치 선 공부의 필수과정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선이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의 부족함도 숨김도 없이 드러나 작용하고 있는 자성(自性)을 깨닫는 것이다. 즉 선은 견성(見性)하여 자신의 본래면목을 아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은 “흐름을 따라 성(性)을 알아차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고 하였고, 유마거사는 “비유하면 높은 등성이에는 연꽃이 나지 않고 낮고 습한 진흙에 연꽃이 난다”고 하였으며, 붓다는 “진여는 자성을 지키고 있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 일체 만법을 성취한다”고 하고, 또 “인연을 따라 감응하며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으면서도 늘 깨달음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임제(臨濟) 스님이 법상에 올라 첫마디에 “말을 하면 바로 어긋나버리며 발붙일 곳이 따로 없다”고 말한 것이 이 까닭이다. 그러므로 선의 공부란 특정한 과정을 거쳐 특수한 기능을 연마하거나 어떤 숨어 있는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다. 마조(馬祖) 스님이 “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다”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요사이 몇몇 단체에서 일정 기간 동안 특정한 프로그램을 거치면 견성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발심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진리의 감로수를 눈 앞에 가져다 주어도 그것을 마시지 못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아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때로 마음을 직지(直指)하여 견성의 계기를 만들어 주는 스승의 존재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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