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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성지 - 우뚝솟은 한국 천주교 신앙의 파수꾼 |
절두산 성지의 유래
한강변에 우뚝 솟은 절두산은 원래 누에 머리 또는 용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 또는 용두봉(龍頭峰)으로 불러 왔다. 잠두봉 아래의 양화나루(楊花津)와 더불어 명승을 이루어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고 나룻객들이 그늘을 찾던 한가롭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해져 온다.
또한 이곳은 군사상의 요충지여서 영조 때 한강을 방어하는 진영을 설치했다. 따라서 楊花津(양화진) 하면 버들꽃(楊花)이 피어있는 승경(勝景) 나루터를 말하지만 동시에 楊花鎭(양화진) 하면 군사가 주둔하는 진영이 된다.
이후 개화기에는 양화진은 강화도로 통하는 요충지로 뱃길로 들어오는 외국 세력을 막는 보루였다. 1866년 11월 프랑스 군함이 강화도에 들어와 병인양요가 발생했는데 이에 앞서 9월에 양화진에 먼저 들어왔던 것이다. 대원군은 강화도에서 프랑스 군과 전투를 벌여 이들 쫓아내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는 등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들은 천주교가 침략 세력을 지원한다고 보고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니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의 피로 더러워진 이곳을 서학(西學)의 무리의 피로 씻어내자면서 의도적으로 천주교도들의 처형지를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와 새남터 등으로부터 프랑스 함대가 침입해 왔던 양화진(楊花鎭) 절두산으로 옮김으로써 침입에 대한 보복이자 외세에 대한 배척을 표시했던 것이다. 원래가 군영을 처형지로 한 것은 일반적이었다.
1868년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 1871년 미국 함대의 침입 등은 대원군의 서슬 퍼런 박해에 기름을 퍼붓는 꼴이 되어 살육은 6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병인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되었다. 양화낙조(楊花落照)라는아름다운 승경(勝景)이 절두산(切頭山)이란 피로 얼룩진 이름을 얻게 된 데는 이처럼 가슴 아픈 기억이 서려 있다.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장소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곳은 절두산 꼭대기다. 절두산 꼭대기에서 칼로 신자들의 목을 쳐서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리거나 한 오랏줄에 여러 명의 교우들을 결박하여 산 채로 낭떠러지 밑 강물로 밀어 버려 죽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해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에 순교자 기념탑을 세웠고, 뒤에 다시 그것을 헐고 기념관과 성당을 지었다. 삼천 궁녀가 떨어져 죽은 낙화암이 연상됨 직하다. 하지만 옛날 노인들의 전언을 바탕으로 하여 절두산 꼭대기가 주된 처형장이라는 설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관변자료에는 한결같이 양화진두에서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베어 머리를 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진두(鎭頭)는 진영를 뜻하므로 공식적 사형 집행 장소를 딱히 절두산 꼭대기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아울러 군민을 많이 모아 놓고 목을 베었고 머리를 매달아 대중들을 경계시켰다고 한 만큼 새남터처럼 천주교도들의 처형 장소는 절두산 아래의 모래사장이나 약간의 언덕진 평지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곳에서 처형된 천주교도들의 숫자는 흔히들 8,000명이고도 하고 1만 명이라고도 추산하지만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절두산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 기록이 남아 있는 첫 순교자는 이의송 프란치스코 일가족으로, 병인년 10월 22일 부인 김이쁜 마리아와 아들 이붕익 베드로가 함께 참수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렇듯 절두산 성지에는 현재 이름과 행적을 알 수 있는 순교자 22명과 단지 이름만 알려진 2명 그리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5명을 합해 29명이 전해질 뿐, 이밖에는 아무런 기록조차 전해지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29명 중 박래호 사도요한, 김이쁜 마리아, 이의송 프란치스코, 이붕익 베드로, 김한여 베드로, 김진구 안드레아, 김 큰아기 마리아, 이기주 바오로, 이용래 아우구스티노, 박성운 바오로, 원윤철 세례자요한, 유 마오로, 강 요한 13명은 ‘하느님의 종’(시복의 전단계)으로 올려져 시복을 기다리고 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처형하고 나중 보고한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은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날 아래 머리를 떨구었던 것이다.
성지 개발
1966년 10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그 옛날 수많은 순교자들이 처형되었던 자리에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과 순교 기념관 건립을 착공하여 이듬해 10월 봉헌식을 가졌다. 이로부터 성지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 속의 애처로운 사연들 다시 살아나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이후 절두산 순교 기념관은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절두산 순교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명실상부한 성지 전문 박물관으로 거듭났고, 2004년 개축공사에 이어 2007년에 첨단 시설을 갖춘 수장고를 설치하고, 2008년 8월에는 한국천주교순교자 박물관이란 이름으로 서울시 박물관 제63호로 등록되었다.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자료 4,5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절두산 한국천주교 순교자 박물관은 전시실을 최대한 ‘열린 공간’으로 살려 특별전, 기획전 및 초대전까지 유치할 수 있는 가변적 시설로 설계해 보다 다양한 유물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박물관 아래 야외 전시장에는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을 위시하여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 박순집 일가 16위 순교자 현양비, 남종삼 성인의 흉상과 사적비,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일행이 앉아 쉬었던 오성바위, 교황 요한바오로 2세 흉상 등이 전시되어 순례자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대표하는 성지이나 인근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과 변화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훼손되었다. 그래서 1997년 11월 교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절두산 순교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됐다. 그동안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었으나, 국가 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된 성지는 절두산 순교성지가 처음이다.
여의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터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마포교를 건너 절두산 성지 에 이르니 벌써 시간은 11시 40분. 좀 늦었지만 절두산 성지를 순례하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과 한국천주교순교자 박물관이 있는 성지 언덕에 오르기 전 광장 주변에 절두산 순교성지 기념교육관과 꾸르실료 회관이 있다. 그리고 야외 전시장이 이어진다. 일단 꾸르실료 회관 광장과 야외 전시장을 먼저 보고 성지 언덕에 오르기로 했다.
꾸르실료 교육관
꾸르실료 교육관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육관으로 광장에는 바오로 사도상, 강변의 성모상, 이승훈 상이 있다. ‘꾸르실료’란 복음화를 위한 단기 교육과정이다.
언덕 아래 넓은 광장에는 순교성지 표지석이 있고 성지와 사적지를 알리는 여러 개의 게시판이 서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대형 책모양의 성지 안내문이 있다.
【절두산성지 안내도】
야외전시장의 전시물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2000년 11월, 이춘만 조각가에 의해 제작 설치되었다. 3개의 탑으로 구성되는데, 목에 채우는 형구 ‘칼’ 모양의 주탑과 잘려진 머리가 올려져 ‘절두탑’으로 불리는 우측탑, 일종의 오벨리스크 형식으로 제작되어 수많은 무명 순교자를 조각해 넣은 좌측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주탑 하부에는 16명의 순교자상을 새겼고 뒷면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우측탑 하부의 정면과 측면에는 주탑과 같이 순교의 길을 걸어간 신앙 선조들을 표현했으며, 특히 오른쪽 측면에는 절두산 순교비문이 새겨져 있다. 좌측탑은 병인박해 과정에서 순교한 수많은 치명자들을 위한 ‘무명 순교탑’으로 박해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순교자로 드날리는 영예마저도 하느님께 봉헌하고 무명 순교자로 남은 치명자들을 기억하고자 했다.
▲팔마를 든 예수상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종려) 가지를 든 예수님상이다.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이봉자(레지나) 수녀의 작품이다.
▲절두산 순교기념탑 십자가
1962년 순교자현양 운동의 일환으로 탑을 세웠는데 그 탑이 낙뢰로 훼손되고 남은 일부인 십자가이다.
▲마더 데레사 상
2018년 임송자 작품. 가난한 이들의 벗, 마더 데레사 수녀의 절두산 성지 방문(1985. 01.29)과 그녀의 시성(2016.09.04)을 기념하여 세웠다.
▲노기남 대주교 금경축 기념비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자 제10대 서울교구장을 지낸 노기남(바오로) 주교의 사제 서품 50주년을 기념하는 비로 연자 맷돌로 만들었다. 아랫단에 이러한 내용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흉상 - 1984년 방한 시성식 집전을 기념하여 세웠다.
▲세상에 빛으로 오심 - 철사로 제작된 공예물로 투명 인간처럼 오셔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루르드 성모상
프랑스 루르드에 있는 마사비엘의 동굴에서 발현(1858)하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본 따 조성되었다.1979년 9월 26일 복자 축일미사가 끝난 뒤에 교황대사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에 의하여 축성 봉헌되었다.
▲ 현대 조각으로 제작한 성모상, 성모자상 (최종태 작)
▲오성(五聖) 바위
1866년 병인박해 때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 주교, 오메르트 신부, 위앵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다섯 성인이 서울에서 사형장인 갈매못으로 끌려가던 중 앉아 쉬었던 바위다.
▲김대건 신부 좌상 ▲ 척화비 ▲ 야외제대
척화비는 1871년 흥선 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기 위하여 전국에 세운 비석.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고 화해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했다,
▲십자가의 길 15처
십자가의 길을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에 따라 聖路善功(성로선공)이라 부르고 당시의 표기법으로 부기(附記)한 것이 특징이다. 기존 14처에 부활 1처를 추가하여 15처로 했다. 뎨일쳐는 비라도 예수를 죽을 죄인으로 뎡ᄒᆞᆷ이라(제1처는 빌라도가 예수를 죽을 죄인으로 정함이라) 이런 식의 15처가 세워져 있다.
▲십자가 돌기둥 ▲ 요셉과 아기 예수상
십자가 돌기둥은 192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이순석(바오로)교수가 강화도 부근 바다 속에서 채석한 자연석에 직접 새겼다. 가로로 주는 찬미를 받으소서, 세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십자가 형으로 새겼다.
▲성 김대건 신부 동상
1972년 정부 주도로 출범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민족의 귀감이 되는 인물 15인을 선정하고 동상 건립을 추진하여 세워졌다.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공로를 인정받은 김대건 신부는 종교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동상 건립 대상 인물로 선정되었다.
비석원(碑石園) -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건립 당시의 십자가가 땅바닥에 누워 있고 주위에는 여러 기의 비석들이 둘러져 있다.
▲ 성 남종삼 순교사적비와 남종삼 세례자요한 상
남종삼(1817-1866)은 백부 남상교의 양자로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영향 아래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과거에 급제해 정3품 승지에까지 이르렀다. 지속되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인 성직자를 통해 막아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병인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참수형을 받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현감 남상교 거사비(去思碑)
남상교(1783-1866)는 남종삼 성인의 양가 부친으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진사에 급제하여, 현풍 현감, 충청 목사를 역임하고 퇴관 후에는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병인박해시 체포되었으나 고령자임으로 사형은 면했으나 옥중 순교하였다. ‘거사비’란 ‘떠난 뒤에 덕을 사모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청덕비, 송덕비, 영세불망비라고도 부른다.
이 비는 현풍현감으로 지낼 당시 그의 청렴하고 고결한 덕행을 기려 세운 비석으로 1974년에 절두산으로 이전 되었다.
▲해운당 대사 의징의 비
1960년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 천진암 주어사에서 남종삼 성인의 후손인 남상철(프란치스코)에 의해 발견되었다. 海雲堂大師義澄之碑(해운당대사의징지비)라 새겨져 있다. 의징이 누구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숭정(崇禎)으로 나타난 연호로 보아 새워진 연대는 1698년이다.
▲은언군과 송씨부인(마리아) 묘비
은언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이며 훗날 철종의 조부이다. 송 마리아는 왕실 첫 순교자로 은언군의 부인이다. 강완숙 골롬바에 의해 입교하여 신유박해 때 며느리 신 마리아와 함께 사약을 받고 순교했다. 이 사건은 강화도에서 귀양 중이던 은언군에게 영향을 주어 그를 죽게 하였다. 이 묘비는 사면된 뒤 철종 2년(1851)에 세웠다. 원래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18번지에 있었는데 파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후에 서울 은평구에 있는 한 사찰에서 발견되어 한동안 보관되다가 그후 절두산 성지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박순집 베드로의 묘와 묘비, 그리고 박순집 일가 16인 공적비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의 시신을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 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구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 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聖業)을 이어 부친을 위시한 순교가족 16명은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 비는 1979년 9월26일에 세웠다.
야외 전시장 관람을 마치고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성당과 한국천주교 순교자 박물관이 있는 언덕 위로 올랐다. 오르는 길 입구 좌우에는 조각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과 낡은 옛날 문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은 서울대 미술대 최종태 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절두산 성지의 첫 순교자 가족인 이의송 프란치스코와 부인 김이쁜 마리아, 그리고 아들 이붕익 베드로를 형상화했다고 한다.
계단길을 다 오르니 넓은 마당이 나타난다. 강 쪽에는 게시판이 있고 그 앞에 손이 묶인 순교자상이 있다. 그 너머로 넓은 한강 유역이 펼쳐지고 맞은편에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한국천주교 순교자박물관이 그 앞에 바로 붙어 있다.
성당 내부는 극히 단순하다. 창문 하나 없는 벽면에는 크기가 다른 십자가의 길 14처가 석고상처럼 벽에 붙어 있을 뿐 다른 장치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주벽에 모셔져야 할 십자가가 제대 위 공중에 끈으로 매달린 것이 특이하다. 강론대도 죄수의 목을 잠그는 형구 칼 모양이다. 제대 오른쪽에는 성모상이 서 있다.
오늘 일정 중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가야하는 곳이 있다. 성당 지하에 있는 성인 유해실이다.
유해실 내려가는 계단 안내
성인 유해실
성인 유해실에는 27위의 성인과 1위의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사각형 동판에 순교자의 명호가 새겨져 있는데 제대를 중심으로 제대 뒤에 곡면으로 둘러져 있다. 전체 34개 중 6개는 내용이 없는 빈 것들이다.
절두산 성지 유해실에 모셔진 순교자 28위
다음은 성인 몇 분의 동판 내용들이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
1966년 10월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지은 순교기념관이 2001년 절두산 순교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2008년 첨단시설을 갖추어 업그레이드 되어 지금의 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으로 거듭 태어났다.
전시실은 지상 1, 2층, 그리고 지하 1층인데 그 전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층 -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Ⅰ조선에 말씀이 깃들이다. Ⅱ 조선대목구 설정-보편교회의 일원이 되다 Ⅲ 격변하는 국제사회 속 조선의 천주교회 Ⅳ 개항 이후, 새로운 시대 한국천주교회의 소명 2층 - 절두산 성지 Ⅰ절두산 순교성지의 시작 Ⅱ 순교성인을 만나는 공간이 되다 Ⅲ 그리스도의 신비가 바로 이 자리에 Ⅳ 개항 이후, 새로운 시대 한국천주교회의 소명 Ⅴ 기억의 유산 백년의 여정을 위하여 지하 1층 - 특별 전시 |
1, 2층을 관람했는데 실제 2층에는 절두산 성지의 역사를 패널로 벽면에 전시했을 뿐이고 유물 전시는 1충뿐이다. 그리고 사진 촬영을 금하여 제대로 체계 없이 몇 장만 소개할 뿐이라 아쉬움을 느낀다.
▲황사영 백서 필사본
초기 교회의 지도자 한 사람인 황사영(알렉시오)가 한국의 천주교 탄압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작성한 서한이다. 그러나 전달되지 못하고 적발되어 탄압이 더욱 심했다. 비단에 썼다고 하여 백서(帛書)라고 하는데 여기 전시된 것은 종이에 베껴 쓴 것이다.
▲김범우의 집 명례방공동체 모임
명례방 공동체는 한성부 남부 명례방(明禮坊)에 위치한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신앙공동체이다.(1784-1785). 1784년 초 청나라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이벽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 천주교 신앙을 널리 보급하려는 의도에서 설립했다.
▲ 성 조신철 까롤로 상
조신철은 1796년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출생했다. 5세 때 모친을 잃었고 머슴살이 등 험한 일을 했다. 23세 때부터 북경 사신의 마부로 다니다가 천주교도 유진길, 정하상 등과 만나 입교하였다. 모방, 샤스탕, 앵베르 등 외국 선교사 영입과 보호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39년 8명의 순교자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했다. 1984년 시성되었다.
▲유진길 등이 교황에게 보낸 서한
1835년 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진길, 조신철, 김 프란치스코가 연명으로 조선 신자들의 감사 인사를 교황청에 올렸다.
▲최인길 마티아, 주문모 신부로 가장하다
1785년 을사추조 사건시 주문모 신부가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숨어 있을 때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신부로 가장하여 주문모 신부를 도피시키고 자신은 잡혀서 순교하였다.
▲강완숙 골롬바, 왕실 은언궁에 전교하다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철종의 조부)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에 귀양을 가고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는 양제궁에 유폐되었는데, 강완숙 골롬바가 송씨와 신씨에게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주문모 신부를 통해 영세를 시켰다. 나중 박해시에 송마리아와 신마리아는 잡혀서 사사(賜死)되고 이로 인해 은언군도 죽게 된다. 그림의 화제(畵題)에 은언군이 정조의 서자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은언궁이라는 용어도 잘못인데 굳이 쓰려면 양제궁이라고 해야 한다.
▲회장 직분
르장드르 신부가 서울교구 회장들을 위해 작성한 지침서이다. 회장의 직분과 활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칠성사와 예식서 등 활동에 필요한 내용을 정리하였다. 사제가 부족한 시대에는 교우회장이 사제를 대신하여 교리와 각종 성사 절차를 숙지하고 교우들을 지도해야 했다.
▲베르뇌 장 주교의 평양 회장 임명장
▲하느님의 종 이 에메렌시아 사발묘지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등을 기록하여 무덤에 넣는 글. 기해박해 시 순교한 이 에메렌시아는 수리산에서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3일 동안 170대의 장형을 맞고 38세로 순교하였다.
▲정하상 바오로 가족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는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가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천주교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이들은 진사사건 이후 시작된 천주교 배척과 탄압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 일가에서 3명의 성인과 2명의 복자, 1명의 하느님의 종이 탄생하였다.
절두산 - 듣기만 해도 끔찍한 순교의 현장을 짧은 시간이나마 순례했다. 절두산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서소문 밖, 새남터, 당고개 등 순교성지들이 이제는 도시의 소음에 묻히고 아파트 그늘에 가려 그 옛날의 아픔도 함께 가려진 듯하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목소리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과 같이 고요함 속에서도 우리에게 굵고 강한 울림으로 우리들의 나약한 신심에 다가온다.(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