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79. 천수에서 서안으로/ 법문사, 건릉, 곽거병묘
세상을 놀라게 한 법문사 ‘천년 지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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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사의 진신보탑> |
사진설명: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법문사의 진신보탑과 법문사 전경. |
2002년 10월4일. 금요일. 일기는 화창했다. 맥적산석굴과 천수시내를 둘러본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천년고도 서안(西安. 옛 이름은 장안)으로 출발했다. 가슴속으로 무척 설레었다. 실크로드 서쪽 기착지 부하라·사마르칸드·타쉬켄트에 도착한 것이 2002년 9월6일,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클라마칸사막·하서주랑을 거쳐 거의 한달 만에 실크로드 동쪽 기착지인 서안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중국 제일의 고도(古都) 서안은 어떤 곳인가. 서안은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역사유물과 유적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서안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이었던 진나라를 비롯해 1000여년 동안 13왕조의 수도로 명성을 누렸다. 중국 역사를 뒤흔들었던 무수한 영웅들과 소리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의 원한과 탄식과 애욕과 염원과 희망이 묻힌 땅 아닌가. ‘자손들이 영원히 평안하기 바란다’는 뜻을 가진 ‘욕기자손장안(欲其子孫長安)’에서 따온 ‘장안’이 바로 서안의 옛 이름. 그러나 장안이 중국천하를 다스리던 수도로 군림하기까지는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장안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134년. 서주(西周. 기원전 1027년~기원전 770년)가 도읍지를 현재의 서안에 정하고 호경이라 부르면서부터였다. 그 이후 진시황의 통일제국 진나라를 비롯해 한, 5호16국시대의 전조·전진·북주가 차례로 서안에 수도를 정했다. 수나라에 이르러서는 서안이 크게 융성하기 시작했으며, 당대에 장안이라 불리며 번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장안은 성벽의 동서 길이가 9km, 남북 길이는 8km 정도로 큰 규모였다.
당대(唐代)의 여걸 측전무후와 양귀비가 이곳에서 천하의 권력을 구가했으며, ‘세기의 불가사의’로 알려진 진시황릉과 병마용도 여기에 있다. 전한 무제 때 개착된 실크로드를 통해 서방과 교역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는데, 당나라 때 장안은 이미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서안이라는 도시는 전체가 보물인, 어느 유물 하나 옛 왕국의 신화를 품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도시전체가 박물관이다.
아침 8시30분. 서안에 대한 상념과 설레는 마음을 정리하고 출발했다. 천수를 출발한지 4시간. ‘보계’를 지나니 유명한 법문사 푯말이 보이기 시작했고, 관중평야의 넓은 평원이 끝없이 이어졌다. 조금 더 달리니 저 멀리 법문의 높이 솟은 탑이 보였다. 〈법문사의 비밀〉(일빛출판사. 최근엔 ‘부처의 진신사리’란 제목으로 재출간)에서 역사를 접했던 법문사. 차에서 내려 법문사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섬서성 부풍현 법무진에 자리 잡고 있는,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유명한 사찰.
1700년 역사의 고찰…부처님 진신사리 모셔
1700년의 역사를 가진 명찰 법문사. 〈아육왕경〉에 의하면 인도의 아육왕(아쇼카왕)은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 84,000기를 세계 곳곳에 세웠다. 그 가운데 중국에 19개가 있는데, 법문사도 그 중 하나라 한다. 수차례의 파괴와 수리를 거친 법문사엔 본래 목탑이 있었다. 지진의 영향으로 파괴되자 전(塼)으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13층의 보탑(寶塔)을 건립했다. 수 백 년 간 유지돼 오던 법문사 탑은 그러나 1981년 8월24일 서반부가 무너지고 만다. 반쪽만 남은 것이다.
몇 년 뒤인 1987년 마침내 법문사가 발굴되기 시작했다. 〈법문사의 비밀〉에 따르면 유적 발굴 당시 한 인부가 무심코 내지른 삽 끝에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흙을 걷어내자 지하에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널찍한 석판이 나왔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법문사 지하궁전’이 실제로 존재한다 말인가” 발굴 팀의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금, 금, 금벽이야, 휘황찬란한 금벽이야…. 소장님, 드디어 법문사 지하궁을 발견했습니다. 두고 보십쇼, 이 위대한 발견은 진시황릉 못지않게 세상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석판 모서리를 들어내고 틈새로 구덩이 안을 살피던 발굴자들은 놀라움과 감탄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문헌과 전설로만 전해지던 법문사 지하궁전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 황실 사찰이었던 법문사. 법문사는 중국의 불교사찰 가운데 기이한 전설이 가장 많이 전해 내려오는 신비한 사찰이기도 했다. 특히 법문사에는 당나라 황실의 보물이 묻혀있는 ‘지하궁전’이 있었다. 하지만 당의 멸망과 함께 지하궁전 이야기는 전설이 됐다. 그러던 지하궁전이, 천년간 닫혀있던 지하궁의 문이 1986년, 법문사 진신보탑이 무너지면서 열리기 시작했다. 진신보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13층 보탑. 1981년 탑 근처 지반이 함몰되면서 탑의 서쪽 면이 붕괴됐고, 남은 탑의 반쪽도 1986년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안타깝게 여긴 섬서성 정부는 보탑 재건을 위해 탑 근처 지반과 유물을 발굴·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천년 지하궁전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침 국경절 연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인산인해(人山人海)란 말이 어울릴 지경이었다. 밀려서 산문 안으로 들어갔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 앞에 있는 거대한 향로엔 커다란 향이 타고 있고, 향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불교신자가 늘어난다고 하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법문사에서의 모습만으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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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법문사 진신보탑 앞에서 기도하는 중국인. |
몇 개의 전각을 지나 진신보탑에 당도했다. 거대한 탑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3바퀴 돌았다. 옆에 앉아 가만히 탑을 올려 보았다. 정말 큰 탑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염원과 희망이 걸린 탑,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됐던 탑. 다시 한번 합장하고 묵념한 뒤 법문사를 빠져나왔다. 나오면서 살펴보니 법문사 경내는 참으로 정리가 잘 돼 있었다. 짜임새 있는 전각, 끊임없이 이어지는 회랑, 사이사이에 심어진 대나무와 나무들 등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중국의 조경술(造景術)이 이정도로 발전했나 싶었다.
천년보궁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법문사 박물관을 관람한 뒤, 법문사 앞에 즐비한 식당가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차를 타고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무덤인 건릉(乾陵)으로 갔다. 섬서성 성도(省都) 서안 서북쪽 2백km 지점, 건현(乾縣)에 있는 진시황 무덤보다 규모가 더 큰 무덤이 바로 건릉이다. 당 고종과 그의 비 무측천(武則天)이 합장돼 있다. 무덤의 들머리길 좌우에는 수십 구의 문신석상과 무인석상, 그리고 61개나 되는 사신석상(使臣石像)이 세워져 있다.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무덤 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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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건릉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석상. |
자연적인 산을 정상에서 밑으로 파고 들어가 조성한 건릉은 그 위에 오르면 오를수록 엄청난 규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무덤을 도굴하지 못하도록 집 채 만한 바윗덩이로 무덤 표면을 모두 싸 발랐다고 한다. 때문에 건릉은 1천3백 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도굴되지 않았다.
무측천은 용의주도한 ‘파워우먼’이었지만, 백성들에겐 피곤한 지도자였을 뿐이었다. 고종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은 무측천이 쥐고 있었다. 당 고종 이치(李治)는 황자 시절부터 자기 발로는 걷지 못할 만큼 비대했고, 즉위 후에는 간질병 까지 앓아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무측천은 원래 당 태종 이세민의 후궁이었으나, 태종 사망 후 우여곡절을 넘어 그 아들 고종과 결혼해 황후가 됐다. 무측천이 674년 천후(天后. 측천무후)가 돼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내정이 어지러워졌다.
능은 과연 거대했다. 입구에 서있는 문무인 석상, 외국 사절상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술성기비’와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관심을 끌었다. 고종의 부인 측천무후가 찬하고 그의 아들 중종 이현이 직접 쓴 고종찬양비가 바로 술성기비. 높이가 6m나 된다. 술성기비와 대칭되는 동쪽에도 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무자비다. 측천무후가 죽으면 다음 황제가 자기의 찬양문을 써주기를 바라고 세웠지만, 찬양문은 끝내 쓰여 지지 않았다. 당나라를 어지럽힌 그녀에게 비문을 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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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곽거병의 무덤. |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곽거병 무덤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 무제 왕후인 위황후의 여동생 위소아의 아들이 바로 곽거병이다. 흉노 정벌에 공이 큰 위청장군의 조카인 그는 18세에 무제의 측근이 되고,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곽거병의 노력에 힘입어, 동으로 금성(난주)에서 서로는 염택(타클라마칸 사막 내에 있는 놉로르 호수)에 이르기까지, 흉노의 자취가 사라졌다. 한 무제는 황하 서쪽에 처음으로 하서4군이라는 직할군을 두게 됐다. 그것이 무위(양주)·장액(감주)·주천(숙주)·돈황(사주)으로, 이 지명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의 감숙성이라는 이름도 감주의 ‘감’, 숙주의 ‘숙’을 따 지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곽거병 덕분에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곽거병 무덤 앞에는 지금도 ‘흉노를 밟고 있는 말’(馬踏匈奴)을 조각한 상(像)이 서 있다. ‘말에 밟힌 흉노상’이 결코 좋게 보이지 않았다. 곽거병 무덤 위에 있는 누각에서 관중평야를 내려다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역사와 영웅, 영웅의 이면에 덮인 평범한 사람들 등. 무엇보다 불교가 중국 역사 속에 어떻게 뿌리내렸는지….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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