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설거사는 신라 진덕여왕(제 28대) 때의 이름 높은 고승이었다. 이웃 김제 만경에서 태어났다 하며 속명은 진광세(陳光世)라 했는데, 어려서 출가하여 이 곳 변산의 월명암에서 영조(靈照), 영희(靈熙)와 함께 수도를 하였다 한다. 하루는 영조, 영희와 상의하여 더 크고 깊은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도를 닦기로 하고 길을 떠나 가는데 고향인 만경(萬頃) 못 미쳐 두능이라는 데를 지나다 날이 저물어 구씨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구씨(具氏) 집에는 묘화(妙花)라는 벙어리 딸이 하나 있었는데 원래 부처님 곁에 피어 있는 연꽃 한송이를 꺾은 죄로 벙어리가 되어 이승으로 추방된 절세의 미인이었다. 그런데 이 벙어리 묘화가 하룻밤 묵어 가는 세 수도승 가운데 부설을 보더니 첫눈에 반하여 깊은 연정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세 사람이 떠나려 하자 갑자기 벙어리의 말문이 열리며 염치를 무릅쓰고 부설에게 결혼하여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수도의 길을 떠나는 부설이 들어 줄 리가 없었다. 「그대의 마음은 고맙긴 하나 나는 오대산으로 수도의 길을 떠나는 사람이오. 어찌 한 여인의 작은 소망을 위하여 장부의 큰 뜻을 꺾으려 하오」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랬더니 묘화가 하는 말이 「그대의 큰 뜻을 어찌 꺾으려 하겠습니까? 그대는 불도를 깊이 닦아 수많은 중생을 구제하려 한다면서 어찌 소녀의 소박한 소망 하나 들어주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내가 죽게 되면 장차 큰 뜻을 편다 하여 무슨 뜻이 있겠나이까?」 하면서 죽기로써 매달리면서 앞길을 막는 것이었다. 뒷 날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에 앞서 우선 눈앞에 있는 이 불쌍한 소녀부터
구제하라는 묘화의 끈질긴 요구에 감동한 부설은 자기의 뜻을 굽혀 묘화와 결혼하기로 하였으며 두 친구 영조와 영희는 오대산으로 떠났다. 부설은 묘화와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면서 아내와 더불어 쉬지 않고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가 사는 마을의 하늘엔 언제나 하얀 눈이 떠돌아 다녔다 하여 사람들은 두능리 마을을 부설촌(浮雪村)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부설거사의 법명도 여기에서 땄다고 한다.
이렇게 아들 딸 낳고 끊임없는 수도생활에 힘쓰며 살아가는데 하루는 오대산으로 공부하러 갔던 영조, 영희 두 친구가 찾아 왔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설을 보고 두 친구가 하는 말이 「우리는 오대산에 들어가 공부를 훌륭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네만 그대는 여자에게 빠져 낙오자가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아깝고 가엾은 일이네」 하고 비웃음 반, 위로 반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 묘화부인이 옆에서 듣다가 하는 말이 「그렇다면 내 남편과 당신들이 그동안 누가 더 깊은 공부를 하였는지 한 번 시험해 보기로 합시다」 하여 서로가 합의가 되었다. 그리하여 병 세 개에다 물을 가득 담아 벽에 걸어놓고 그들에게 방망이로 병을 처보라 하니 병이 깨어지면서 병속의 물이 방바닥에 쏟아졌다.
이어서 부설이 방망이로 남은 병을 치니 병만 깨어져 방바닥에 떨어지고 병모양을 한 물은 그대로 벽의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영조와 영희는 자신들의 공부가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고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묘화 내외는 그 길로 두 남매를 데리고 지난날 공부하였던 변산의 월명암 근처에다 부설암을 낙조대 밑에다는 묘화부인을 위하여 묘적암(妙寂庵)을 세웠으며, 그의 아들 등운(登雲)을 위하여는 월명암 뒤에 등운사를 세우고 딸 월명각씨(月明角氏)를 위하여는 지금의 월명암(月明庵)자리에 월명암을 지어 일가족 네 사람이 각기 한 암자씩을 차지하고 수도에 힘써 불도를 깨우쳐 널리 펴니 이때부터 변산에서 불교가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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