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소망. 주관자. 꿈
소 주 제: 꿈의 주관자 하나님
날자 및 분류: 05.05.29 설교 창 조 의 말 씀
성 구: 창40:1-5
저 자: 정 헌정 목사
단지 15분뿐인 인생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한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한 '단지 15분뿐'이란 연극이 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는 이 젊은이는 어려서부터 그 총명함을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20대에 박사 과정을 수료했고, 그의 뛰어난 논문을 보고 심사 위원들은 격찬했으며, 이제 학위를 받을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의 성공을 의심치 않았고, 본인도 자신에 넘쳐 있습니다. 하루하루 분홍빛 미래만이 그에게 다가오는 듯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정밀 검사 결과 폐암 말기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이 나오고 그의 운명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죽음의 선고가 내려집니다.
15분! 그는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째깍째깍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만 갑니다. 5분이 금방 지나가고 남은 시간이 10분으로 줄어듭니다. 이 때 그가 누워 있는 병실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듭니다.
"억만장자인 당신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와 상속 절차를 밟아 주시오."
하지만 죽음을 앞둔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운명의 시간은 8분으로 줄어듭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축전이 도착합니다.
"당신의 학위 논문은 우리 학교 개교이래 가장 훌륭한 논문으로 평가되었으며, 올해의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러나 이 축하 전보도 그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이제 운명의 시간은 마지막 3분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이때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옵니다. 그가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으로부터의 결혼승낙입니다.
세 통의 전보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잠시의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전보도 그 운명의 15분을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15분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세 통의 전보를 손에 쥔 채 숨을 거둡니다. 그러고는 연극이 끝납니다.
새해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데, 벌써 한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우리는 새로운 해를 맞게 됩니다. 날마다 흘러가는 하루 하루가 인생의 종착역으로만 치닫는다면 세 통의 편지도 무의미할 것이며 운명의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보내는 하루 하루를 진실과 소망으로 심는다면 우리의 남은 날들은 세 통의 편지가 주지 못하는 참된 안식과 소망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남산편지(나침반)' 정충영 편집
인생 속에서 오직 소망은 예수님입니다.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꿈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역경과 시련을 통해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17세의 어린 소년의 몸으로 꿈과 비전을 안고 살았던 한 소년이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생면부지의 땅인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본 아들이라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한 몸으로 받았으며 특별한 대우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는 입는 옷부터가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차별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비전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가는 요셉은 핑크빛의 모든 꿈과 비전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지 노예였을 뿐입니다. 요셉은 은20에 팔려 가는 노예였기 때문에 어떤 의지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소년에게 꿈이 어디 있으며 비전의 세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셉으로서는 톱니바퀴가 제 자리에서 돌아가듯 그 자리에서 똑 같은 일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곳에 요셉을 찾아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찾고 찾으며 만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찾아오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셉이 기도했는지 애를 쓰며 악을 썼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변명을 하는 것보다는 요셉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성경이 우리들에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보다는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먼저 찾아오셨다는 말입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눈이 어두워서 분간할 수 없을 때 어린양의 새끼를 잡아 음식을 만들어 장자인 형에서가 받을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야곱은 장자에게 내려지는 축복을 아버지 이삭에게서 가로채가자 형에서는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형에서의 눈을 피해 야곱은 도망하기 바빴습니다. 형에서에게서 멀리 도피 중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아 잠들었을 때 야곱을 만나려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은 야곱에게 꿈을 보여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 가기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야곱이 처음부터 꿈을 품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을 품도록 하셨고 꿈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지만 여기에서 기억하셔야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요 소극적인 사람이며 아버지를 속인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찾아오신 것은 야곱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서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챈 것은 신약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예수님 없으면 소망과 인생의 길도 없다"는 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은 오직 예수만을 고백하는 삶을 살겠다는 그 욕망에 하나님은 꿈과 비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허락된 꿈과 비전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 가셨듯이 요셉에게도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은20에 이스마엘사람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다시 넘겨져 더 이상의 소망은 기대할 수도 없는 요셉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그대였습니다. 요셉에게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그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루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망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요셉에게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잠시 머물러서 만나고 떠나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형들이 요셉에게서 모든 꿈을 완전히 깨어지게 만든 것을 가지고 오히려 소망을 이루어 가는 꿈의 교량으로 삼아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최악의 일들을 최선의 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자신이 가진 것이 다 포기되어졌을 때 하나님은 찾아 오셔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때문에 그 꿈에 맞도록 만들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게 꿈을 꾸게 하셨다면 그 꿈에 맞도록 잘라내시고 다금질하시고 깎아내시고 불에 넣었다 꺼내어 두드려서 하나님의 작품세계가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욥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우리나라의 격언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큰그릇은 서서히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그 꿈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고쳐갔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요셉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가 한 것은 할 수 없이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우니까 그 자리에게 서서 고함만 질렀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에게는 도망갈 곳이 없었습니다. 되돌아 갈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 105: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요셉은 그 발이 움직일 수 없는 묶임의 상태에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몸 즉 그의 영혼이 쇠사슬에 꿰여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모습에서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버틸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성경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인내로 총리가 되었다고 성경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셉이 한 것은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꿈을 이루어 가는 한 대목을 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해 신뢰감을 얻었고 조금 버틸 만하니까 보디발의 부인의 누명으로 다시 새로운 시작인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왕의 죄수들만이 가는 중죄인의 감옥에 내 몰아졌습니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빠진 감옥에서도 찾아오시는 열심을 단행하셨습니다.
(창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요셉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 왔지만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 훈련받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귀한 아들로만 살아갔다면 어떻게 대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요셉은 범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노예로 팔려갈 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완전히 물 건너가는 것 같았으나 보디발의 집에서 신뢰를 얻게 하셨고 보디발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인을 욕보이려고 했다는 요셉을 잊지 않고 술 맡은 관원 장과 떡 맡은 관원 장을 수종을 들게 했습니다. 보디발은 두 관원장이 자신의 지위보다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가 필요했고 그 특별 대우를 자신이 신뢰할 만한 요셉에게 맡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내려갔는데도 요셉에게는 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겹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는 감옥까지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작은 힘이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러한 환경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시 105: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하셔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준비하시고 만드셔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항복할 때까지 두둘겨 패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성도 여러분에게 꿈을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거대합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생각보다 꿈이 크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꿈에 맞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요셉처럼 누명을 쓸 각오도 해야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각오도 필요하고 남에게 눌릴 각오도 있어야 하고 창피를 당할 자세도 되어있어야 하고 숨죽일 만큼의 긴장도 예비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낮아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항복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 가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항복할 때까지 쉬지 않으시고 다금질 하실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빨리 항복하시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이고 믿음의 성도들의 꿈을 이루어 가시는데 많은 시간이 단축될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의 고집은 잘 부려야 70-80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신 고집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하신 것을 책을 통해서 봤습니다. "여러분이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전주를 껴안고 계신다면 하나님은 기중기를 준비해서 전주대까지 뽑아 가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믿음의 성도들의 꿈을 어떻게 이루어 가실까요
一. 만남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창 40:3) 『그들을 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
"만남"이라는 제목을 가진 건전 가요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라는 가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남'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만남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일들입니다. 아무리 별 볼일 없이 만난 만남이라도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들의 인생에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들에 널려있는 풀 한 잎을 만난 것 때문에 전쟁터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네 잎 클로버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행운의 잎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여정을 보면 만남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요셉이 형들에 의해 물이 마른 샘물 속에 빠뜨렸다가 형제 유다의 제안을 받아 은20에 팔려 이스마엘의 상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스마엘 상인들로 인하여 보디발이라는 시위대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보잘것없는 사람이 작은 힘을 낼 수 있는 총무로 그 집의 일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은 힘이지만 가지고 있을 때 보디발의 부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을 유혹하기에 이르렀고 그 부인의 유혹을 뿌리치자 요셉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을 가게 만듭니다. 요셉에게 있던 작은 힘들은 이제 사라지게 되고 감옥에서 죄수로서의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요셉은 감옥에서도 전옥(교정관)의 마음에 들어 감옥의 제반 사무처리를 맡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보디발의 시위대장이 자신의 부인을 욕보이려고 했던 요셉을 자신의 지위보다 높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시중들도록 지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씌운 사람의 남편을 통해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곧 요셉의 갇힌 곳이라"는 말씀을 강조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잡혀 간 곳이 요셉이 있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들과의 만남이 우연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남을 이루어 가셨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리고 보디발이 자신의 부인을 욕보이려고 했던 요셉을 자신의 미래를 밝게 해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시중들게 한 것은 만남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디발을 만남으로 그 부인을 만나게 되었고 부인으로 인하여 억울한 일이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내려 간 것도 꿈의 길을 여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려는 하나의 교량을 만드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보디발로 인하여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기 위한 작품이었습니다. 할렐루야!
따라서 요셉을 만난 사람들은 쓸모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가 요셉의 꿈을 이루어가도록 돕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서의 만남은 귀한 것이고 우리들의 꿈을 이루는데 없어서는 안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성공의 자리에 올라 설 수 있습니다.
어떤 성인이 한 말 중에 "세 사람이 함께 걸으면 그 중의 한 사람은 나의 스승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만남에서도 우리에게 교훈은 있습니다.
풀 한 포기를 만나는 것도, 지나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나의 주위의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도, 나에게 누명을 씌우면 나를 구박하는 사람들도, 나의 꿈의 길을 여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앓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유명한 많은 의원들을 만났지만 괴로움만 더 많이 받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돈만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여인의 병세는 더 중하여 갔습니다. 그 여인에게 이제는 점점 소망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보다 더 병세가 중하여 가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만 만나면 지금까지 12년의 소원이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회당장의 딸을 고치려 가시는 예수님을 많은 군중 속에서 밀치고 밀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되었고 그 여인의 믿음대로 12년 동안의 억눌림과 아픔에서 해결되는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회당장의 딸을 고치시려 급히 가시던 예수님은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을 찾았고 은혜를 입은 여인은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께 고백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 시가 급한 회당장의 딸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으로 가시던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 가시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죽었다고 하면 더 이상의 소망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잔다고 표현하신 것은 잠든 자는 깨우면 된다는 소망을 그들에게 불러 일으켜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소녀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어린 소녀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숨겨져 있습니다. 혈루증으로 12년을 앓은 여인과 12살이 된 어린 소녀과의 연관성입니다.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은 12년 전에 발병되었습니다. 여기에서 12년 전에 발병되었던 혈루증의 여인이 오늘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우연일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의 만남은 12년 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회당장의 딸의 나이가 이제 12살이었습니다. 그 딸이 이 세상에 날 때 이미 준비되어진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반대편에서 오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비로소 반대편에서 산 정상으로 걸어 온 사람과 만남이 있게 되니 알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막 5: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막 5: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지금 우리가 오르는 비전의 산에 반대편에서 오르는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꿈을 가진 사람들은 중단하거나 포기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산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알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쉬임 없이 꾸준하게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만남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가 위대한 영도자로서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도 필요했지만 아론과 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출 1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연약하기 이를 때 없는 여호수아가 강한 갈렙을 만남으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민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 14: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군을 만남으로 자신의 생명과 가족의 생명까지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은 우리의 꿈을 위해, 삶을 위해, 만남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할렐루야!
二. 최선을 다하는 섬김은 꿈의 길목 (창 40:4) 『시위대장이 요셉으로 그들에게 수종하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수 일이라』
시위대장 보디발 부인의 누명으로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탄하며 자기 자신을 포기의 늪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요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 냈습니다. 그러므로 전옥(교정관)에게 사랑을 받아 감옥에서 제반사무처리를 맡게 됩니다. 요셉에게는 어디서나 최선을 다하며 섬기는 모습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로 바쁜 요셉에게 시위대장 보디발은 고급 관리인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시중을 들게 합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을 지명하여 두 관원장을 섬기게 하였지만 요셉은 거부하거나 불평과 불만으로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 주어진 환경과 처지에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요셉이 그들은 섬겼더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으로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한탄하여 포기하는 자세의 삶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삶으로 최선을 다하여 자신의 주인인 시위대장 보디발을 섬겼을 때 그 집의 총무로 관리자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갔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섬김을 감행했을 때 전옥(교정관)에게 사랑을 받아 감옥에서도 제반사무를 처리하는 일을 요셉은 맡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억울하게 감옥으로 보낸 사람의 명령이며 지위가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어서 수종을 드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서 두 관원장을 섬겼습니다. 요셉의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모습이 두 관원장에게 비쳐졌기 때문에 하찮은 감옥의 죄인이며 자신의 수종을 드는 하인인 요셉에게 자신의 비례가 담겨있는 꿈을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삶은 꿈을 이루어 가는 길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 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사사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떡집이라는 베들레헴이 기근이 들어 힘들게 보내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래도 부하게 살던 사람이 모압이라는 땅으로 기근을 피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지고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모압 땅에 가서 남편과 두 아들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 다 잃어버리고 자신과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거지 신세가 된 시어머니는 두 며느리에게 친척과 부모가 살고 있는 모압으로 돌아갈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큰며느리 오르바는 울면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작은 며느리 룻을 완강하게 거절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거지 신세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정성을 다하여 며느리로서 최선을 하여 룻은 섬겼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남의 밭이나 논에서 이삭을 주어 연명했습니다. 롯은 자신의 처한 환경과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여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섬겼더니 룻에게 내려진 기적 같은 일은 다윗의 왕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고 다윗의 증조할머니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길목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룻 2:11-12)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현대를 살고 있는 믿음의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처한 환경과 처지가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만듭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언제 어디서든지 최선을 다하는 삶은 축복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면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할렐루야!
三. 꿈의 길은 하나님께 (창 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꿈은 사람이 꾸고 싶다고 해서 잠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꿈은 인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꿈이 어떤 꿈이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꿈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며 하나님은 우리들의 꿈의 길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그 꿈을 주신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의 만남을 이루어 가시고 꿈에 맞는 사람으로 요셉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여러 가지 사건이나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들입니다. 꿈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타나듯 말입니다. 요셉이 꿈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데 요셉이 할 수 있어서 버티고 나간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것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하루 하루를 넘기다보니 버텨진 것입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미명의 빛깔이 달라지는 새벽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낮은 곳으로 내려가서 더 이상의 내려 갈 수 없을 때 비로소 꿈의 자리에 올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자신의 꿈이 만들어짐을 느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꿈의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으로 꿈의 길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의 길이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애굽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관원장들은 감옥이라는 특수한 곳에 갇혀 있기 때문에 요셉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에 대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꿈의 길이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두 관원장에게 말하기를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쉬운 것 같으나 자신에게 이런 환경이 처하게 되면 체험하지 아니 했다면 쉽사리 잊어버리거나 자신이 없어서 말을 주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확신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고난에 처하면 처할수록 확신에 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에게 주어진 고난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벧전 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이런 모습으로 요셉을 만들어 가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를 보면 더욱 확실하게 꿈의 길이 하나님께 있음을 입증할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판 일에 대하여 두려워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그 반면에 미래의 꿈을 가지고 있는 요셉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완전히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이 이런 고백을 하기까지 13년이라는 긴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흔적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성도 여러분 꿈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찾아다니지 말고 꿈을 주신 하나님께 그 길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 소원합니다.
다니엘의 고백을 들으면 더욱 확실하게 믿음의 성도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단 2:20-21)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꿈을 주신 하나님은 그 꿈의 길이 하나님께 있음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꿈을 주신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또한 만드시며 그 꿈에 맞는 인물로 하나님의 작품이 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시 105:21-22)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그러나 우리들이 여기에서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꿈의 기간은 내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기억하셔서 너무 조급하거나 힘들다고 내 방식을 채택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수한 물을 절대로 이끼가 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말입니다.
* 오늘의 구역공과 *
1, 나의 생명이 15분의 여유밖에 없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2. 하나님은 애굽에 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 요셉이 찾지도 않았는데 오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3. 내게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어 간직 된 꿈이 있습니까?
4. 내가 요셉의 자리에 있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요셉이 간 발자취를 내 것으로 가지겠습니까? 아니면?
5. 나의 꿈을 위해서 타인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합니까? 그들이 나의 꿈의 교량이라고 믿습니까?
6. 나는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7.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의 일과 현대에 살고 있는 며느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8. 왜 꿈의 길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으십니까?
9. 오늘의 본문을 읽고 느낀 점을 한 마디로 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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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망을 누리는 사람과 소망을 갈망하는사람의 차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