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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안동에 가다
하나. 복학여행을 떠나다
1년동안 칩거했던 아들이 복학했다. 사실 한 학기만 쉬려고 했던 것이 복학 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1년이나 쉬게 되었다. 지난 1년 아들은 아내 가게 일을 도와주면서 영어공부, 일본어 공부, 역사 공부를 했다. 토익시험에도 응시해서 자신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받았고, 한국사능력평가시험은 준비하는 과정에서 개학을 맞았다. 한문공부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획기적인 변화다. 생화학자의 꿈을 접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겠다는 결심도 했다. 학과를 생화학과에서 법대로 바꾼 것도 이와 같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아들은 포항의 한동대학교에 다닌다. 평택에서 포항은 먼 거리다. 거리는 멀었지만 비교적 자주 오갔다. 입학시험을 치를 때도, 입학할 때도, 새학기 복학할 때도, 군대에 입대 할 때도 자동차로 오갔다.
올 1월, 서울 종로답사를 하면서 개학 전에 북악산에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도 아프시고 나도 일에 파묻혀 헤어나오지 못하면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미안함도 덜 겸해서 복학할 때 1박 2일로 여행하자고 제안했다. 아들은 무척 좋아했다. 상의 끝에 안동을 여행하며 한옥체험을 하기로 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안동 임청각의 김선생님에게 전화했다. 김선생님은 임청각이 현재 수리 중이어서 모실 수 없다며 치암고택을 추천했다. 하지만 일정을 잡아보니 시내권과 가까운 치암고택보다 청량산 기슭의 농암종택이 나을 것 같아 이곳으로 숙소를 잡았다.
둘. 다시 안동으로 향하다
출발 며칠 전부터 아들에게 빨리 짐을 꾸리라고 재촉했다. 성격이 느긋해서 닥치고 난 뒤에야 허둥대는 습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의 짐은 비교적 단출했다. 바리바리 짐을 쌌던 신입생 시절과는 판이한 풍경이다. 그만큼 대학생활에 익숙하고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일 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충 하룻 동안 다녀올 곳을 정했다. 오전 9시 50분경 집을 나섰다. 평소 한가했던 평택-제천 간 고속도로는 꽉꽉 막혔다. 그래도 안성을 지나면 좀 나아지겠거니 했지만 충북 음성을 지나도록 변화가 없다. 금왕을 지나서야 비로소 정체가 풀렸다.
첫 여행지는 풍기의 무섬마을이다. 조선후기 10승지지 중 으뜸으로 손꼽혔던 마을이고 강변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이채로운 곳이다. 죽령터널을 지나면 영주시 풍기읍이다. 무섬마을을 답사하고 밥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차량 정체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우선 밥을 먹기로 했다. 풍기는 사과와 인삼, 인견으로 유명하고 밥집으로는 풍기역 앞 청국장집이 괜찮다. 아들과 청국장집으로 들어섰는데 대기자가 열 팀이나 있다. 나는 밥집 앞에서 대기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지만 아들이 꼭 먹고 가자고 해서20분 넘게 기다렸다가 밥을 먹었다.
밖은 꽃샘추위로 영하 2, 3도를 오르내린다. 제법 두껍게 옷을 입었지만 매서운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덜덜 떨린다. 무섬마을은 패스했다. 추운 날 강변은 더욱 춥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과 가게에서 황금사과와 부사를 몇 알 구입한 뒤 안동방향으로 달렸다. 오후 일정은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 답사다. 그런데 안동방면으로 내려가면서 마음이 또 바뀌었다. 날씨도 좋고 환할 때 농암종택의 풍경을 즐긴 뒤 다음 날 도산서원을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농암종택은 안동시 도산면과 봉화군의 경계에 있다. 뒤쪽으로는 청량산의 자태가 뛰어나고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이 휘돌아 흐른다. 35번 지방도를 달리다가 가송리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농암종택은 가송리에서 낙동강 변으로 난 좁고 아름다운 길을 따라 2km쯤 달리면 나온다.
셋. 농암종택에서 유숙하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학가이고 문신이다. 퇴계 이황과 교유했고 호조참판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농암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수많은 글과 시(詩), 시가(詩歌)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농암집』이 있으며 어부가, 효빈가, 농암가를 비롯한 다수의 시가(詩歌)가 있다.
종손의 안내를 받아 농암종택 내실에 여장을 풀었다. 낙동강변에 나가보자는 아들의 권유에 따라 강변으로 나갔다. 농암종택에서 낙동강변까지는 불과 몇 미처 남짓. 강변 맞은편에는 적벽(赤壁)이 우람하게 솟았고 강물을 맑다 못해 시리다. 수천 년 닳았을 조약돌들 하며 드넓은 흰 모래밭, 지저귀는 물새들은 농암의 시(詩)의 원천이 어디인지를 알게 한다. 강변에서 올라와 농암종택 가양주(家釀酒)를 구입할 방법을 수소문했다. 종손은 종택 앞 낮은 언덕배기의 한옥을 가리키며 그리로 가보라고 일러줬다.
농암종택의 가양주(家釀酒)는 ‘일엽편주(一葉片舟)’다. 왜 일엽편주인지는 나도 모른다. 일러준 집안으로 들어서니 술 향기가 코를 찌른다. 양조자는 종부님이다. 내가 아들과 함께 들어서자 종부님은 반기며 아들과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무척 부럽다고 했다. ‘종손이 아이들에게 너무 엄격해서 아들들이 아버지를 어려워만 한다’는 푸념도 곁들였다. 일엽편주(一葉片舟)는 소주, 약주, 탁주로 구분되는데 작은 병 1병에 3만 원을 호가했다. 좀 비싸다고 느꼈지만 종부님과 수다 떨면서 가까워진 마당에 그냥 돌아서기도 뭐해서 약주와 탁주를 각각 1병씩 구입했다.
농암종택에서 3킬로쯤 달리면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다. 관창리는 청량산 입구다. 등산객이나 관광객이 제법 많아서 버스정류장 앞에는 청량산박물관과 캠핑장, 그럴듯한 맛집들이 많다. 우리 가족도 15년 전 이곳에서 밥을 먹었다. 농암종택 종부님은 ‘오시오’ 식당을 추천했다. 15년 전에 우리가 한 끼를 해결했던 그 집이다. 그동안 허름했던 식당은 내부를 리모델링 했고 좌식 대신 식탁을 들여놨으며 메뉴도 몇 가지 늘었다. 우리는 오시오 식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솔잎을 깔고 구워 먹는 고기 대신 종부님이 추천한 수입 소갈비를 먹었다. 숯불에 잘 구워진 소갈비가 입맛을 돋운다.
넷. ‘별 헤는 밤’
어릴 때는 별이 참 많았다. 여름밤 마루에 누워 있노라면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고 카시오페아나 북두칠성, 북극성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던 은하수는 무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서쪽 하늘에서 별똥별이 뚝 떨어지는 신비함도 경험했다. 무수히 많았던 별들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사라졌다. 그 뒤로 황홀한 별들의 향연은 대관령 꼭데기나 지리산 장터목 산장, 사막의 한 가운데서나 몇 번 봤을 뿐 더이상 구경할 수 없었다.
나와 함께 일엽편주를 마시던 아들이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아들에게 밖이 춥더냐고 물었더니 ‘하늘에 별들이 참 많더라’는 동문서답을 했다. ‘별’이라는 단어에 꽂혀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갔다. 정말 하늘에는 어릴적 봤던 새파란 별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아들과 함께 넋 놓고 하늘을 쳐다보며 계명성, 카시오페아, 북두칠성을 찾아 우주를 날았다.
이불 속에 발을 넣고 일엽편주를 두어 잔 마시다가 골아떨어졌다. 미리 이불을 덮어둔 한옥 바닥은 찜질방과 비교할 수 없는 묵직한 온기가 있었다. 코를 골며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개운하다. 3일 동안 괴롭혔던 담 증세도 사라졌고 건초염으로 고통스러웠던 오른손도 상당히 개선되었다. 누구의 치유능력인지는 모르지만 참 신기하고도 감사했다.
다섯. 이육사는 독립투사다
아침에 일어나 다시 강변으로 나갔다. 아침 강변은 저녁 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농암은 집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분강’이라고 불렀다. 이현보를 배향한 서원도 ‘분강서원’이니 농암과 후손들, 후학들이 ‘분강’을 얼마나 귀애했는지 알 수 있다. 아침 강변에서 한참을 놀다가 도산서원으로 출발했다. 농암종택에서 도산서원까지는 불과 20분 거리. 단정하고 깨끗한 마을들과 온계종택을 비롯한 크고 작은 기와집이 차창을 스친다.
도산서원 주차장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편의점을 들랑거리는 관광객은 대부분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의 관심은 ‘안동소주’에 있었다. 대부분 가격을 물어보고는 머리를 흔들며 나갔는데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3만 원, 6만 원짜리 안동소주에 머리를 흔드는 모습이 낮 설다. 나는 딸아이를 위해 안동소주를 한 병 구입했다. 사장님은 아빠가 딸을 위해 술을 사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사장님은 처음에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했다. 컵라면을 먹을 수 있냐고 하자 지나치게 친절한 자세로 설명했는데 그것은 나를 ‘한국말 잘하는 일본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아들은 15년 만에 다시 찾은 도산서원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했다. 평소에는 다녀온 여행지를 기억하지 못해 나에게 구박받았는데 신기하고도 신통해서 무지하게 칭찬해줬다. 도산서원의 역사와 도산서당과 시산대(1792년 정조가 도산별과를 실시했던 곳), 전교당에 대해 설명할 때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생소하면서도 기특했다.
퇴계는 사상적으로 보수적이다. 나는 보수주의를 싫어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는 한국사회에서만 통용되는 ‘수구세력’이다. 퇴계는 수구세력과 결이 다른 찐 보수다. 보수는 진보와 함께 세상을 나는 양 날개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퇴계의 정신은 경상북도지역에 면면히 계승되어 국난을 당했을 때 어느 지역보다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열혈 독립운동가를 만들어냈다.
이육사는 퇴계의 후손이다. 본명은 이원록으로 퇴계종택에서 멀지 않은 원천리가 고향이다. 이육사 문학관은 원천리로 들어가는 입구쯤에 위치했다. 나는 아들에게 이육사는 시인이기 이전에 독립투사였음을 강조했다. 사실 시인으로만 알고 있는 이육사는 의열단원이었다. 밀양 출신의 의열단 지도자 윤세주의 권유로 입단했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출신이기도 하다. 이육사에게는 6형제가 있다. 형제들은 의기(義氣)가 충만했고 문학과 예술적 재능이 출중했으며 우애가 남달랐다. 맏형 이원기를 비롯해 5형제가 독립투쟁에 헌신했고, 1927년 장진홍사건(대구조선은행폭파사건)때는 위아래 4형제가 모두 투옥되었다. 셋째 원일, 넷쩨 원조는 저명한 언론인이며 문학평론가였지만 사회주의자로도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좌익계열에서 활동하다가 박헌영을 따라 월북했는데, 그로 인해 이육사 집안은 분단의 상처와 고통을 심하게 겪어야만 했다. 조봉암의 비서를 지냈던 다섯째 원창이 한국전쟁 때 형님들을 만나러 황해도 해주로 갔다가 폭격 맞아 사망했던 사실, 미술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던 여섯째가 조선미전 입선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일들은 이 집안의 질기도록 슬픈 역사를 더욱 아프게 한다.
여섯. 민족해방운동가 권오설을 찾다
안동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성지다. 퇴계의 후손인 진성 이씨, 김성일의 후손인 의성 김씨(김대략, 김동삼)는 50명을 넘나드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했으며, 석주 이상룡의 고성 이씨도 이에 못지 않은 독립운동 명문가다. 1920, 30년대 사회주의 민족해방운동에는 안동시 풍산읍의 청년들이 앞장섰다.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은 풍산읍 오미리가 고향이며, 인근의 가곡리 가일마을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의 고향이고, 또 풍산읍 상리리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의 고향이다.
권오설(1897~1930)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산하 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계 민족해방운동가다.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이 고향으로 1922년 풍산청년회,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했다. 풍산소작인회는 1924년 풍산장터에서 소작농을 비롯해 자영농, 일부 지주 등 약 1만여 명이 참여한 소작쟁의를 전개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3,500명의 회원, 1926년 12월에는 5,000여 명의 회원이 풍산장터에서 집회 겸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1924년에는 권오설, 이준태 등 풍산소작인회 중심 인물들이 서울로 올라가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 및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책임 비서로 조직 재건에 성공했다. 그러나 1926년 6.10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검거되었고 모진 고문에 시달리다가 출옥 전 옥중 순국했다. 사후 권오설의 시신은 철관에 담겨 고향으로 운구되었다. 왜 철관에 담겼는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다만 시신이 안동역에 도착하자 안동유생 3,000여 명이 기다렸다가 철관을 메고 가일리까지 30여 리를 행진했다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전해온다.
권오설의 묘는 안동답사를 할 때마다 반드시 오고 싶었다. 하지만 2005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묘의 위치를 찾기가 어려웠고, 그 뒤로도 안동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하여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권오설의 묘를 답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들의 동의가 큰 도움이 되었다. 안동 시내를 거쳐 풍산으로 향하는 길은 제법 혼잡했다. 풍산장터를 지나자 드넓은 풍산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평소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에 갈 때만 지났던 길을 권오설이라는 한 인물만 기억하며 찾아간다는 사실이 새로운 설렘으로 다가온다.
권오설의 고향 가일리는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동구나무(회화나무) 세 그루가 마을의 연륜을 상징했고, 너른 풍산들과 가곡저수지는 풍요로움을 보여주었다. ‘권오설 기적비’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마을 안쪽을 뒤졌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허탈한 마음에 마을 입구로 다시 나왔는데 정자 앞 새마을운동 공적비처럼 보이는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서 비문을 살피니 우리가 찾던 ‘기적비’였다. 비(碑)의 앞면에는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 기적비’라 새겼고, 비석 뒤쪽 바닥에는 국가보훈처에서 세운 약력과, 기적비 건립에 협찬한 안동 권씨 문중(文中)의 명단을 새긴 표석이 나란히 설치되었다. ‘권오설 기적비’는 2001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200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니, 비록 사회주의자여서 눈총을 받았지만 문중에서는 나름 선양 노력을 꾸준히 해왔음을 알게 한다.
권오설의 묘는 ‘마을 입구에서 북쪽으로 500여 미터 지점 맨홀공장 뒤쪽에 있다’는 정보만 듣고 찾아 나섰다. 신문에 기고한 사람은 다섯 번을 헤맨 뒤 찾았다는데, 나는 2005년에 세운 안내 표석 덕분에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권오설의 묘는 맨홀공장 뒤 공동묘지에 있었다. 본래의 묘는 부친의 명에 따라 평장을 했는데 2005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받고 2008년 부인 부림 홍씨와 합장하기 위해 철관을 제거하여 재매장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아들과 권오설의 묘 앞에서 묵념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빚진 자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안동 시내로 나가는 길에 풍산장터에 들렀다. 정확하게 말하면 구장터이다. 구장터는 아직도 옛 장마당이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옛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장마당에 내려 잠시 권오설과 이준태, 풍산소작인회를 회상했다.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권오설과 5,000여 동지들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일곱. 내앞마을은 독립운동의 또다른 성지
점심은 안동찜닭으로 정했다. 암동찜닭은 15년 전 아들의 추억의 음식이다. 당시에도 매우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 안동 구시장 찜닭골목으로 들어갔다. 인터넷에는 찜닭골목의 원조임을 주장하는 가게들이 무수히 많다. 하지만 아무리 가짜들이 원조임을 주장해도 소비자의 입맛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아무래도 구시장 찜닭골목의 터주대감은 중앙찜닭과 유진찜닭, 현대찜닭 등이다. 전에는 웨이팅이 많아 유진찜닭에서 먹었던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기필코 중앙찜닭에서 먹으리라 다짐했다. 오후 2시가 넘었는데도 중앙찜닭 앞만 웨이팅이 있다. 10분쯤 지나자 우리 앞에 서 있던 5, 6팀이 금세 입장했다. 당당하게 입장해서 오리지널 찜닭을 시켰다. 닭 1마리 분량인데 당면이 섞이니 양이 엄청나다. 밥 두 공기를 시켜 찜닭과 함께 먹었는데 너무 배가 불러서 일부를 포장했다.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는 안동에서도 동남쪽 양양 경계쯤에 해당된다. 안동시내를 벗어나 임하댐 물줄기를 따라 한참을 달리니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나온다. 독립운동기념관 뒷마을이 川前里, 우리 말로 ‘내앞’이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은 세 번째 방문이다. 아들과 함께 내부를 관람하는데 볼수록 놀랍다. 아들은 권오설의 철관(鐵棺) 앞에서 그래도 좀 안다는 듯 관심을 보였다.
내앞마을에서 퇴계의 제자이며 선조 때의 명신이었던 김성일을 떠올린다. 김성일은 내앞마을의 입향조 김진의 넷째 아들이다. 우리는 김성일을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야욕을 오판해서 잘못된 보고를 했던 인물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김성일은 정치가이기 전에 위대한 학자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자신의 오판을 반성하고 경상도 초유사 및 관찰사로 의병을 규합하고 독려하며 군량미를 확보해서 전황을 역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분열되었던 관군과 의병이 힘을 합쳐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성일의 노력 덕분이다.
김성일의 삶과 정신은 후손들에게 계승되어 김동삼과 김대락에 이르러 독립운동으로 꽃피웠다. 일제강점기 내앞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는 25명이나 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난 사람만 100여 호(戶) 1천여 명에 이른다. 단일마을로는 최대다. 경상북도독립기념관이 내앞마을에 위치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내앞마을을 상징하는 독립운동가는 김동삼과 김대락이다. 임청각의 석주 이상룡도 처남 매부 간이므로 친가와 외가를 모두 합치면 훨씬 많은 인물들이 집계된다.
대한제국시기 김대락과 김동삼은 내앞마을에 협동학교를 세우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김대락의 백하구려는 활동의 거점이었다. 평소 ‘사람, 학문, 재산’을 모두 갖춘 남부러울 것이 없는 집안으로 평가받았지만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집과 전답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한 뒤 일족을 대동하고 서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이들은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서 이석영, 이회영의 경주 이씨 6형제와 함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여덟. 돌아오는 길
오후 5시가 다 되어서 포항으로 출발했다. 티맵에서는 6시 30분쯤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준다. 임하댐을 휘돌아 동청송·양양 I.C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니 금세 영덕이다. 영덕에서 포항 흥해읍까지는 40, 50분 거리다.
아들을 내려주고 다시 평택으로 올라온다. 1년 동안 함께 생활하던 아들을 내려놓고 나니 가슴 한켠이 허전하다. 지난 1년은 우리 가족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느라, 직장생활 하느라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웃고 떠들며 식탁을 함께 나눈 시간은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이제 아들도 취업을 목표로 바쁜 시간을 보낼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들까지 사회에 나가면 다른 분위기, 다른 정서가 우리를 마주하겠지. (202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