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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191)
일사도무사 평생한유신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 텐데, 몸이 있는 것이 평생 원한이로다)
관촉사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내려오면,
풍계촌風界村이라는 마을에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甄萱의 무덤이 있다.
견훤은 신라의 비장裨將이었는데, 진성왕眞聖王때,
따르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일으킨 풍운아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왕자 금강金剛과 신검神劍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지 4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견훤의 초라한 무덤만이 적막한 산속에 쓸쓸히 남았으니,
인생의 영고성쇠란 본시 이렇게 허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와 익산군益山郡 용화산龍華山에 있는 미륵사彌勒寺와 상원사上院寺 등을 구경하고 옥구沃溝 땅에 들어섰을 때는 가을도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가을에 전라도 일대에는 심한 흉년이 들어,
김삿갓은 어디를 가도 밥을 얻어 먹기가 매우 어려웠다.
때는 추수철 임에도 집집마다 식량이 부족해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가는 집조차 있는 형편이었다.
형편이 이지경이다 보니 김삿갓은 열 집 스무 집 구걸을 다녀 보아도, 하루에 한 끼를 얻어먹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게다가 돈은 한푼도 없고 날은 갈수록 추워 지는데,
몸에 걸치고 있는 옷 조차도 여름옷 그대로였다.
(이거 큰일났구나. 배를 타고 금강을 내려올 때만 해도
배가 터지도록 잘 얻어 먹었는데 이제는 하루 한 끼도 얻어먹기 어려운 형편이니,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좀처럼 비관할 줄 모르는 김삿갓도 이때만은 눈앞이 아득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않던가! 그러나 김삿갓은 날마다 기아飢餓에 허덕이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경치를 찾아다닐 마음의 여유조차 없게 되었다.
이렇듯 아침 저녁을 제대로 얻어먹기가 어렵게 되니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 오는데 몸이 야위어올수록 추위도 혹독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김삿갓은 구걸 생활을 30여 년이나 해왔지만,
이때처럼 혹심한 고초를 겪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어느 날, 김삿갓은 추위를 참고 견디다 못해 어느 집으로 찾아가 사정을 해보았다.
"나는 지나가는 나그네올시다. 감기에 걸려 열이 심하니 하룻밤 잠이나 편히 자고 가게 해 주십시오. 밥은 조금 전에 먹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밥을 먹었다는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추위를 피해 잠을 자고 가기 위해 주인을 안심시키려는 말이었다. 주인은 김삿갓의 행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올해는 흉년이 심해, 우리 식구들은 지금 밥을 굶고 있다오."
"그런 사정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밥 걱정은 마시고 잠만 자고 가게 해 주시면 됩니다."
"에이, 여보시오. 내 집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에게 어떻게 밥을 굶으라고 하겠소.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주인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나서, 김삿갓의 행색이 하도 딱해 보였던지,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굶다시피 하기 때문에 어느 집을 찾아가도 똑같은 사정일게요.
여기서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김진사라는 부자 댁이 있소.
그 집에 가면 돈도 많고 쌀도 많을 테니 그 집을 찾아 가 보시오."하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돈도 많고 쌀도 많은 집>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진사 벼슬을 지낸 사람이라면 말도 통할 것 같았기에
은근한 기대를 갖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고개를 넘기 시작하였다.
별로 험한 고개도 아니건만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몹시 힘에 겨웠다. 이윽고 고개위에서 바라보니 과연 산 밑에는 고래등 같은,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저 집이 바로 김진사 댁인가 보구나. 저만한 부자라면 밥도 배불리 먹여 주고 잠도 따뜻하게 재워주겠지.)
김삿갓은 가슴 울렁거리는 흥분을 느끼며 김 진사 댁을 찾기가 무섭게 제법 힘차게 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대문을 두 세번 연거푸 두드려도 안마당에서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할 뿐 사람은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김삿갓은 밥을 빨리 얻어먹고 싶은 마음에서 대문을 연방 두드려 대었다.
그러자 60 가까운 탕건을 쓴 늙은이가 대문을 살며시 열고 내다보며 매우 냉담한 어조로 물었다.
"누구를 찾소?"
물어 보나마나 그 노인은 김 진사가 분명해 보였다.
"저는 지나가는 과객이옵니다.
하룻밤 신세를 좀 지게 해 주십시오."
상대방이 진사인 만큼,
이쪽도 선비의 체통을 지키려고 제법 의젓하게 부탁했다.
김진사는 사뭇 아니꼬운듯, 시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문득 주머니에서 엽전 두 닢을 꺼내 손에 쥐어 주며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집에서는 사람을 재워 줄 형편이 못 되오.
이것 가지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드시오."
그리고 대뜸 대문을 잠가 버린다. 김삿갓은 손바닥에 놓여진 엽전 두 닢을 물그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까닭 모를 분노와 함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라왔다.
(글줄이나 배웠다는, 소위 진사라는 작자가 선비를 이렇게도 멸시할 수가 있을까?)
배우지 못한 사람이 그랬다면 무식한 탓으로나 돌리겠지만 진사까지 지냈다는 작자가 그처럼 무지막지하게 나오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대문을 걷어 차며 행패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은 아니던가!
(사람이 이런 괄시를 받으면서도 살아야만 하는가?)
김삿갓은 김 진사라는 자가 너무도 원망스러워,
문득 바랑 속에서 붓을 꺼내 대문 한복판에 주먹 같은 글씨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후려갈겼다.
[옥구 김진사沃溝 金進士
옥구에 사는 김진사가
여아 이분전與我二分錢
나에게 엽전 두 푼 주노니
일사 도무사一死都無事
죽으면 이런 멸시는 안 당할 텐데
평생 한유신平生恨有身
몸이 있는 것이 평생 원한이로다.]
이같이 분풀이로 시 한수를 후려갈기고
그 자리를 떠나오기는 했으나,
배는 고프고 해는 저물어 오는데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산 밑으로 어정어정 걸어오다 보니,
조그만 움막이 하나 보였다.
알고 보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상여喪輿를 보관해 두는 <상두막>이었다.
(에라, 잘됐다. 어차피 상여 신세를 져야 할 판이니
상두막에서 자다 죽어 버리면 제격인게다.)
김삿갓은 행상 때 쓰는 포장布帳을 몸에 휘휘 둘러 감고
상여판 위에 번듯이 누워 버렸다.
그리고 워낙 기아로 기진맥진한 판이라
눕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문득 누군가가,
"여보시오, 선비 양반!"하고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게 아닌가!
방랑시인 김삿갓 (192)
전주全州에서
비몽사몽간에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어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는 아까 만났던 김진사가 서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어서 김삿갓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니, 이런 곳에 어떻게 오셨소?"
그러자 김진사는 용서를 비는 어조로,
"조금 전에 선비가 내 집 대문에 써놓은 시를 읽어 보고 찾아왔소이다. 요사이 거지 떼가 하도 많아 나는 귀공도 거지인 줄 알고 쫒아냈던 것이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으니 용서하시오."
김삿갓은 품고있던 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한번 쫒아 버렸으면 그만이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느냐 말요!"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김진사는 가볍게 웃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귀공이 나를 나무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오.
그러나 한 번 실수는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소.
내가 귀공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하니,
노여움을 풀고 어서 내 집으로 가십시다."
김삿갓은 생떼를 쓰는 것도 도리가 아닐 것 같아,
두말없이 김 진사를 따라 나섰다.
그리하여 김 진사 댁에서
오랫만에 저녁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들어 보니, 김 진사의 <특별부탁>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이러이러했다.
김 진사에게는 아홉 살짜리 손자가 하나 있어,
지금까지는 자기 자신이 직접 글을 가르쳐 왔었는데,
할아비가 손자에게 글을 가르쳐 준다는 게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으니, 김삿갓에게 가정 교사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대문간에 아무렇게나 써 갈긴 한 수의 시가
생각지 못한 효과를 낸 셈이었다.
김삿갓은 호구지책으로 글을 팔아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엄동설한만은 무사히 넘겨 놓고 봐야 하겠기에,
"좋소이다.
몇 달 동안 손자아이에게 글을 배워 주도록 하지요.
그러나 봄이 되면 나는 어차피 길을 떠나야 할 사람이니,
그 점은 미리 양해해 주시오."하고 김 진사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날부터는 밥 걱정도 없고,
잠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 구석에서는,
"천하를 주유周遊해야 할 내가 밥 한 그릇에 팔려
초학 훈장으로 썩어나고 있으니, 나도 이제는 말로가 가까워 왔는가 보구나!"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기나긴 겨울이 가고 먼 산에 아지랑이 아물거리는 봄이 돌아오자김삿갓은 몸에 배여 있는 방랑벽이 야금야금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그리하여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한겨울을 꼬박 서당방에 앉아 보내다가 오랫만에 길을 나서니,
30리도 채 못가 다리가 무거워 오기 시작하였다.
따지고 보면 50 고개를 넘어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되는지라, 다리가 약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에는 얼마든지 걸을 수 있었지만 갈빗대 사이에 담이 들었는지 밤이면 옆구리가 결리기 시작하였다.
(생로병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
나에게도 죽을 날이 가까워 왔는가 보구나!)
걷는 것 조차 힘에 겨웠던 김삿갓이 처량한 감회에 잠긴채 고갯길을 넘어가노라니 길 양쪽 산속에는 갖가지 꽃들이 계절을 다투며 활짝 피어 있었다.
문득 그윽한 마음에 사로잡힌 김삿갓, 흥얼 거리며 시를 한 수 읊조렸음직 한데 오늘날에까지 전해오지는 않는다.
다리가 불편했던 김삿갓은 옥구를 떠난지 나흘이 지나서야 전주 고을에 들어섰다.
전주 고을의 진산鎭山은 건지산乾止山이다.
건지산은 듣던 바와 같이 수목이 울창하였다.
게다가 전주에서는 역사적으로 인물도 많이 났거니와
가옥도 고풍스러운 곳이 즐비하였다.
전주는 백제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요처要處인지라, 가는 곳마다 명승고적이 허다하였다.
남문 안에는 경기전을 비롯하여
고덕산高德山에 있는 만경대萬景臺와
모악산母嶽山에 있는 귀신사歸信寺와 보광사普光寺 등 등 고색창연한 사찰만도 여러 군데 있었다.
전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명소는
<덕진호>라는 아름다운 인공 호수다.
전주는 얼른 보기에는 건지산을 비롯하여
고덕산, 모악산, 가련산可連山 등등 높고 낮은 몇 개의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조사해 보면,
건지산과 가련산은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전주 서북방은 산이 아닌 평야로만 되어 있다.
지관地官들은 그 점을 지적하며,
"만약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평야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전주고을의 기맥氣脈이 밖으로 새어나가,
전주 고을은 언젠가는 쇠멸하게 된다"는 풍수설을 오랜 옛날부터 강력히 고집해 왔었다.
이러한 지관들의 주장으로
뒷날 건지산과 가련산 사이에 높은 둑을 쌓아 올리고,
둑 안에 있는 평야에 물을 가둬둠으로서 오늘날의 <덕진호>가 된 것이다.
이렇게 육지에 커다란 인공 호수가 만들어지고 보니,
주변의 풍치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호숫가에 정자를 새로 지어 놓았는데,
그 정자가 바로 오늘날의 풍월정風月亭이다.
덕진호에 풍월정까지 만들어지자,
어떤 이름 모를 풍월객이 풍월정에다
다음과 같은 풍월시를 한 수 써 걸어 놓았다.
[일망심연 영취공一望深淵 映翠空
깊은 늪 바라보니 푸른 하늘이 비치네
고래개착 기인공古來開鑿 幾人功
이 연못을 파는데 품이 얼마나 들었을까
장연수리 롱추월杖烟數里 籠秋月
길게 뻗은 연기 속에 가을 달이 잠기고
어적일성 횡만풍漁笛一聲 橫晩風
어부의 피리 소리에 늦바람 불어온다.]
전주 고을에 덕진호와 풍월정이라는 새로운 볼거리가 생기자,
전국 각지에서 시인 묵객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때 부터는 전주 고을이 더욱 번창하게 되었고
<덕진호에서 용이 하늘에 올랐다>는 풍설도 떠돌게 되었다.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유순柳洵은
덕진호에서 용이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구경을 왔었다.
그리하여 덕진호에 걸려 있는 시의 운자를 따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걸기도 하였다.
[일홍징철 영허공一泓澄澈 映虛空
맑고 깊은 연못 속에 하늘이 비치고
축덕잉수 제물공蓄德仍收 濟物功
덕을 쌓아 세상을 고르게 해 주도다.
시처진용 여불기是處眞龍 如不起
여기가 바로 용이 오른 곳이 아니라면
세간하지 멱뇌풍世間何地 覓雷風
사람들은 어디서 번개를 보았으리오.]
덕진호에서 정말로 용이 올랐는지 어쩐지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전주 고을이 갈수록 번창하는 것은
<덕진호>라는 인공 호수 덕택인 것은 확실하다고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 (193)
처량한 신세의 김삿갓
전주를 돌아 본 김삿갓은 남원南原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춘향成春香과 이몽룡李夢龍의 설화說話가 서려 있는
광한루廣寒樓와 오작교烏鵲橋 등을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위치한 곳인지라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가도가도 인가를 찾아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김삿갓은 밥을 얻어먹어야 하는 신세인지라
인가가 없는 것처럼 딱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몸이 불편해 오는데다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니 길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인가는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뱃속에서 울려오는 쪼르륵 소리를 들어가며 진종일 인가를 찾아 헤맨 일도 있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집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풀뿌리를 캐어 먹기도 하고,
솔잎을 씹어먹어 보기도 해보았으나 그런 일이 며칠씩 이어지니 기진맥진 다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도승들은 흔히들 생식을 한다는데 나는 꼭 밥을 먹어야만 살아 갈것 같으니 죽는 날까지 거지 신세를 면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팔자인가 보구나)하는 생각에 서글픈 심정 마저 들었다.
(내가 이러다가 굶어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가를 찾는데 지쳐 맥없이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하늘은 맑게 개고 무심한 새들은 아름답게 우짖고 있었다.
배가 하도 고파 몸을 가눌 수가 없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할 운명이기에
이왕이면 잠자듯 조용하게 죽었으면 싶었다.
기운이 탈진한 김삿갓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누워
쓸쓸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아저씨!
날이 저물어 오는데 무슨 잠을 이렇게나 자고 있어요?"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김삿갓은 호들갑스럽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제사 알고 보니, 자기를 깨운 사람은
열두세 살쯤 먹어 보이는 나무꾼 소년이었다.
"네가 나를 깨웠냐?"
"날이 저물어 오는데 아저씨는 무슨 잠을 그렇게도 정신없이 자고 있어요."
어둡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러 주는 말이다.
"깨워 줘서 고맙다.
네 덕택에 내가 잠시 죽었다가 살아났구나."
김삿갓은 머슴아이에게 머리를 숙여 보이고 나서,
"이 애야! 내가 지금 배가 고파 죽겠는데 나를 너희 집에 데리고 가서 밥 좀 먹여 줄 수 없겠냐?"하고 물어 보았다.
한평생 문전걸식을 해오던 습성이 무심결에 드러났던 것이다. 김삿갓의 구걸하는 말을 듣고, 소년은 일순간 어리둥절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이내 예사롭지 않게 대답했다.
"배가 고프면 우리 집에 가세요. 우리 집도 밥은 없어요.
그렇지만 감자는 얼마든지 있어요. 감자라도 괜챦겠지요?"
김삿갓은 소년의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굶어죽을 판인데 감자면 어떠냐! 하늘이 나를 살려 주시려고 너를 일부러 보내 주셨나 보구나."
"아저씨는 우스개 말씀도 잘도 하시네요.
내가 뭐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인 줄 아세요?"
김삿갓은 소년의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아느냐?
죽을 사람을 살려 주면 그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보낸 사람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안그래? 허허허."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고마워요. 아무튼 우리 집에 감자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시장하시거든 빨리 가세요."
김삿갓은 염치불구하고 소년을 따라 나섰다.
소년의 집은 고개 넘어 산골짜기에 있는 오막살이였다.
50 가량 되어 보이는 두 내외가 어린 아들과 함께 숯을 구워먹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들 내외는 인정이 어찌나 많은지 아들로부터 자세한 애기를 듣고 나더니,
"쯔쯔쯧! 이틀씩이나 굶으셨다면 배가 얼마나 고프셨겠소. 감자가 입에 맞으실지는 모르지만,
감자라면 얼마든지 많으니까 마음놓고 잡수세요"하고 말하며, 삶은 감자를 한 소쿠리나 갖다 주었다.
김삿갓은 평소에 감자를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라고 이날은 감자맛이 꿀맛처럼 달았다.
주인은 김삿갓이 감자를 탐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마누라. 점잖은 양반한테 통감자만 대접하기가 민망스러우니, 내일 아침에는 감자로 국수도 만들고 전병도 좀 부쳐 드리도록 하오. 그렇게 해드리면 별식삼아 맛나게 자실게 아니오?"
실로 고맙기 그지없는 마음씨였다.
이날 밤 주인 내외와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깊어져 그 집을 떠나고 싶지 않은 생각조차 들었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그 집에서 열흘 동안이나 묵다가,
열하루째 되는 날에야 남원을 향해 떠났다.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은 돈보다도 역시 인정이었던 것이다.
방랑시인 김삿갓 (194)
남원 광한루에서
김삿갓이 남원 고을 광한루廣寒樓에 닿았을 때는,
삼복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모두들 광한루로 모여들었다.
또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여기저기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질탕하게 놀고 있었다.
광한루는 그 옛날 성춘향과 이몽룡이
사랑을 속삭이던 본고장인지라
어디에서나 으레 들려 오는 노래는
사랑 타령이 아니면 십장가十杖歌 뿐이었다.
이렇게 광한루 주변은 한량들의 놀이터가 돼 있어서,
김삿갓은 어디를 가거나 술은 공짜로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서 한 해 여름을
태평 세월로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삿갓은 술을 공짜로 얻어먹는 대신에
술좌석에 흥을 잘 돋워주어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다.
더구나 시를 좋아하는 늙은 선비들은
김삿갓과 한 번 어울려 보고 나서부터는
그를 유난히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삿갓 친구가 오늘은 어디로 갔을까?
그 친구가 있어야 술 맛이 제대로 나는데"하고
김삿갓을 일부러 찾아 나설 정도로 정답게 되어 버렸다.
그 덕택에 김삿갓은 광한루에서 시를 여러 편 읊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편을 소개하면,
[등광한루登廣寒樓(김삿갓)]
[남국풍광 화차루南國風光 畵此樓
남쪽 나라에서도 풍광 좋은 광한루는
용성지하 작교두龍城之下 鵲橋頭
용성 고을 오작교 바로 이웃에 있네.
강공급우 무단과江空急雨 無端過
마른 강에 소나기 퍼붓고 지나가니
야윤여운 불긍수野潤餘雲 不肯收
들에는 물이 흠뻑 뭉개구름 뭉갠다.
천리축혜 고객도千里筑鞋 孤客到
머나먼 천릿길을 외롭게 찾아드니
사시가고 중선유四時笳鼓 衆仙遊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은하일맥 연봉도銀河一脈 連蓬島
은하와 선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미필영구 입해구未必靈區 入海求
구태여 바다의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오.]
김삿갓은 광한루에서 한 해 여름을 보내는 동안
술도 많이 마셨고, 시도 많이 읊었지만 남의 시도 많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특별한 시는,
계화桂花라는 60이 다 된 노기가 들려 준
<사모(思慕)>라는 시였다.
어느 날 김삿갓은
노인들의 시회詩會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동석한 계화라는 노기는
다음과 같은 시를 들려 주었다.
사모(思慕)/계화桂花
직파빙사 독상루織罷氷紗 獨上樓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다락에 오르니
수정염외 계화추水晶簾外 桂花秋
수정발 저편에 계수나무꽃 피어있네
우낭일거 무소식牛郎一去 無消息
정든 님 떠나신 뒤 소식조차 끊어져
오작교변 야수수烏鵲橋邊 夜愁愁
오작교 주변에는 밤마다 수심이오.
김삿갓은 60이 다 된 여인이
그렇게도 애절한 시를 지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시는 남의 것을 자네가 지은 것이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든 님이 떠난 지가 몇 해나 되었지?"
노기는 거짓말이 탄로라도 난 듯 얼굴을 붉히더니,
"임이 떠나신 지는 이미 30년이 넘었다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많이 흘렀기로 그게 무슨 상관이예요. 나에게는 어제 일만 같은걸요."
김삿갓은 그 대답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허어. 30년 전의 작별이 어제 일만 같다구?
헛 참! 남원 여자들은 춘향을 닮았는가?"
"그러게요. 저의 절개는 춘향이 같건만
떠난 님은 이 도령 같지 못해 30년을 눈물로 보내고 있다오."
"여보게! 말 좀 똑똑히 해 보게.
도대체 자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는 님은 어딜 갔기에
30년이 넘도록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
"가기는 어디를 갔겠어요. 한양에 가셨지요."
"허어, 그 옛날 한양에 가신 임(이 도령)은 10년 뒤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을 찾아왔는데,
자네의 임은 30년이 넘도록
여태까지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누가 알아요, 내님도 이 도령처럼 암행어사가 되어
오늘이라도 나를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아요?
그 양반이 떠나가실 때 내게 한 철석鐵石 같던 언약을 나는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걸요."
30년 전의 언약을 60이 다 된 지금까지
철석鐵石같이 믿고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다기보다도 오히려
어리석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래서 김삿갓은 넌즈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보게! 신언은 불미信言不美요,
미언은 불신美言不信이란 말이 있다네.
자네는 옛님의 미언美言을 너무 믿고 있는 게 아닌가?"
김삿갓의 말에 대해, 노기는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면
누구의 말을 믿고 살아야 해요?"
그러자 김삿갓은 농담 비슷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네.
그러나 애인의 말을 믿는 데도 한계는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만약 옛날 애인이 오늘이라도 찾아 온다고 가상해 보세.
그동안 자네는 주름살 투성이의 할머니가 되어 버렸는데,
옛날 애인이 그래도 자네를 옛날처럼 사랑해 줄 것 같은가?"
그 소리에 좌중에는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노기는 웃기는커녕 별안간 울상이 되어 버렸다.
김삿갓은 농담이 지나쳤다 싶어,
너스레를 치려고 말머리를 엉뚱한 데로 돌렸다.
"여보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네. 무슨 일이든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병이 생기는 법이야.
자네는 애인이 한양에 가셨다고 했는데 한양에는 워낙 미인이 많아 지금쯤은 자네를 잊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걸세."
노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분개하는 빛을 보였다.
"그러면 30년 동안이나 일편단심으로 기다려 온 저는 어떻게 하란 말이예요?"
"이 사람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네 마음이 30년이 되도록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닌가?"
"저는 그 양반을 진심으로 사랑했거든요.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마음이 변할 수가 없지 않아요."
"자네가 아무리 그 사람을 좋아했기로, 그 사람이 자네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그럴 리가 없어요. 그 양반은 한양으로 떠나가실 때
저한테 철석鐵石같은 약속을 해 주신걸요."
"무슨 약속을 어떻게 철썩같이 했단 말인가?"
"한양에 올라가거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사 놓고
저를 한양으로 불러 올려 갈 테니, 자기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말씀하신걸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으흠! 자네는 그처럼 허황된 약속을 아직도 믿어 오고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자네가 30년 동안이나 기다려 온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 준다고 약속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었군 그래!
자네가 그런 마음보를 가지고 그 사람을 대해 왔으니,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김삿갓이 마지막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쏘아대니,
노기 계화는 마무 대답도 못 하고 얼굴을 수그린 채 울먹이기만 하였다.
남원 광한루에서 꼬박 한 해 여름을 보낸 김삿갓은
계절이 가을철로 접어들자, 지리산을 넘어 따뜻한 남쪽으로 길을 잡아 또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방랑시인 김삿갓 (195) *김삿갓의 기행.
지리산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걸쳐있는 엄청난 산으로 둘레에는 크고 작은 10여 개의 고을들이 산재해 있다.
남원은 서쪽에 해당하고, 함양(咸陽)은 북쪽 고을이고, 진주(晉州)는 남쪽 고을에 해당한다.
이렇듯 크고 넓은 산을 넘자니 다리가 불편한 김삿갓으로선,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산허리를 걸어 넘어 진주 방향으로 길을 접어들었다.
그 옛날 진시 황제 시절, 중국 사람들은 초(草)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쌍을 동방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삼신산의 하나였던 방장산(方丈山)이 바로 오늘날의 지리산인 것이다.
지리산은 산이 높고 골짜기들도 하도 복잡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속세와 인연을 끊은 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김삿갓이 수많은 골짜기를 건너며 깊은 산속으로 들어오다 보니, 물이 콸콸 흘러 내리는 산골짜기 바위 틈에 난데없는 시체가 하나 걸려 있었다.
어느 산중에서 물을 건너다 빠져죽은 사람의 시체가 물길 따라 한없이 흘러내려오다가 바위 틈에 끼여 버린 모양이었다.
(저런 ! 깊은 산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물에 빠져죽다니. 저럴 수가 있을까.)
김삿갓은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섬뜩해 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죽은 사람은 승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스님이 분명하였다.
(승려들이 죽으면 또는 이라 하는데, 저 스님은 어쩌다가 이처럼 비참하게 익사했을까 ? )
사지를 오그린 채 바위 틈에 쥐새끼처럼 옹색하게 끼여 있는 몰골이 너무도 측은해서 견딜 수 없었다.
(에라, 시주는 못할망정 바위 틈바구니에 끼여 있는 스님의 시체를 건져올려, 평평한 바위 위에 편히 뉘어 주기나 하자.)
그렇게 생각한 김삿갓은 두루마기를 벗어 젖히고 시체 인양 작업을 시작하였다.
물이 줄곧 흘러내리고 있는 바위 틈바구니에 꼭 끼여 있는 시체를 햇볕 따듯한 바위 위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은 본시 죽고 나면 통나무처럼 뻣뻣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건져올린 시체는 오랫동안 물에 채여 있은 탓인지, 별로 뻣뻣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체를 등에 업어 올리기는 싫어, 저고리의 등줄기를 움켜잡고 질질 끌어올리자니 더욱 힘이 들었다.
김삿갓은 시체를 햇볕 잘 드는 바위까지 끌어올려 놓고 나니, 이왕이면 무덤까지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눈을 들어 지세를 살펴보니, 그곳은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 형국이 분명한데다가, 시체가 놓여 있는 바위 부근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우뚝우뚝 솟아 있어서, 그 바위들이 마치 무덤앞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문석인(文石人)과 무석인(武石仁) 처럼 보였다.
김삿갓은 죽은 사람이 승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스님인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어느 절에 사는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체를 물 속에서 건져 올려 놓고 보니, 우연하게도 그곳이 바로 명당 자리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고로 명당 자리는 동남향을 제일로 치는데, 이곳은 좌향(坐向) 부터가 동남향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운명은 자기가 타고난다고 하더니, 이 스님의 유택(幽宅)은 바로 이곳임이 분명한 가 보구나 ! )
김삿갓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옛날부터 인품이 온화하고 행실이 단정한 인물을 이라고 칭찬해 오는데, 시체의 주인공은비록 익사는 했을망정, 평소에 소행이 단정했기 때문에 명당자리에 눕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시체가 누워 있을 자리를 제대로 찾아 주었으니, 이제는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야 할 판국이었다.
옛날 시인들은 서로 헤어질 때에는 대개 송별시를 주고받았다.
그때의 시를 이라고 부른다.
김삿갓은 돌아가신 스님에게 주는 을 이렇게 읊었다.
좌청룡 우백호로 명당 자리 분명한데
(靑龍在左 白虎右 : 청용재좌 백호우)
물의 흐름 동남이니 좌향도 좋을시고
(天地東南 流坐向 : 천지동남 유좌향)
물가에는 거북머리 비석도 서 있어서
(龜頭碧波 入短碣 : 구두벽파 입단갈)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문상을 오는구나.
(雁足靑天 來弔喪 : 안족청천 내조상)
이렇게 송별시 한 수를 읊조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합장배례하며 작별인사를 고했다.
"소생 김삿갓은 고승(高僧)께서 뉘신지는 모르옵니다. 그러나 명당 자리를 택해 정성껏 모셨사오니,
일체의 번뇌를 해탈하시어 기꺼이 왕생극락을 하시옵소서. 상향(尙饗)"
이것은 실로 김삿갓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기행이었던 것이다.
방랑시인 김삿갓 (196)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삿갓이 물에 빠져 죽은 스님을 형식적으로나마 장사까지 지내 주고, 첩첩 산중으로 또다시 걸어가고 있노라니, 이번에는 어디선가 늙은이가 대성 통곡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정한 친구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던 자네가 나를 내버려 둔 채 혼자만 가버렸으니, 이 무슨 기가 막힌 일이란 말인가!"
(응 ? 이게 무슨 소릴까?)
김삿갓은 길을 가다 말고, 귀를 유심히 기울여 보았다.
저편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넋두리는 분명 사람의 소리였다.
김삿갓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가다가,
너무도 뜻밖의 광경에 기절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
높다란 벼랑 아래 풀밭에는 뼈와 가죽뿐인 호호백발 노인이 하나 쓰러져 있었는데, 그와 똑같은 또래의 호호백발 늙은이가 시체를 부등켜안고 슬픈 목소리로 넋두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여보세요, 어르신네!
이게 어찌 된 일이옵니까?"
김삿갓은 가까이 다가가
노인과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호호백발 늙은이는 울음을 그치고
김삿갓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들릴까말까 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미 시체가 되어 버린 정 노인과
정 노인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있는 윤 노인은
지금으로 부터 30여 년 전인 60대에
영생불사하는 신선이 되고자 속세를 떠나 이곳 지리산에 들어와 영지버섯과 나무 열매, 풀뿌리 등, 오직 초식 생활을 해오며, 백 살이 가까운 오늘날까지 잘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정 노인이 영지버섯을 따려고 높은 벼랑에 올라갔다가 그대로 벼랑에서 떨어져 즉사를 했다는 것이다.
노인은 거기까지 말하고,
또다시 시체를 부등켜안고 넋두리를 계속했다.
"아이고, 아이고! 이 무심한 친구야.
어떤 일이 있어도 3백 살까지는 같이 살자고 하던 자네가
백 살도 다 못 살고 죽어 버렸으니, 혼자 남은 나는 어쩌란 말이냐!"
김삿갓은 그런 넋두리를 듣고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 눈앞에서 넋두리를 하고 있는 늙은이는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사람이라고 말할 밖에 없겠지만,
뼈와 가죽만 남은데다가 눈알만 반짝거리는 것이,
사람이라기보다는 귀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앞으로 2백 년을 더 살아갈 예정이라니
도대체 사람의 생명에 대한 욕심은 어디까지 가야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가신 노인께서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옵니까?"
"이 사람이 나보다 세 살이 아래니까 올해 아흔여덟이지.
3백 살까지 살려면 아직도 2백 년이나 남았는데,
이 친구가 비명횡사非命橫死를 했으니,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느냐 말일세."
김삿갓은 들을수록 놀랍기만 하였다.
사람이 백 년을 넘겨 살기가 매우 어려운 일인데
윤 노인 자신은 이미 백 년을 넘겨 살아왔을 뿐 아니라,
아흔여덟 살에 죽은 친구를 비명횡사라 말하니
그래도 말이 되는 것일까?
"아무려나 친구분이 돌아가셨으니까,
매장을 해드려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물론 그래야지.
그러나 내가 기운이 없어 땅을 팔 수가 없네그려.
미안하지만 젊은이가 무덤 좀 파줄 수가 없을까?"
무덤을 팔 기운조차 없는 사람이
2백 살이나 더 살겠다고 하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삿갓은 노인을 대신해
광혈壙穴을 손수 파 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정 노인을 땅속에 묻게 되자,
윤 노인은 김삿갓에게 생각조차 못 했던 청탁을 하고 나왔다.
"여보게, 젊은이! 이 친구하고 나하고는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평생 동지라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동지였지만 우리 두 사람은 저승에서도 동지가 되기로 약속했단 말일세.
단짝 동지의 마지막 길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도 섭섭하니
자네가 혹시 글을 알고 있거든 만장輓章이나 한 틀 써주게나."
김삿갓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좋습니다.
마침 종이와 먹이 제게 있으니 만장을 써드리지요."
그리고 김삿갓은 즉석에서 만시輓詩 한수를 써 갈겼다.
[동지생전 쌍동지同知生前 雙同知
그대와 나는 살아서는 쌍동지였는데
동지사후 독동지同知死後 獨同知
그대가 죽어 나는 외톨 동지가 되었네.
동지착거 차동지同知 捉去 此同知
그대 단짝 동지인 나도 데려가 주게.
지하원작 쌍동지地下願作 雙同知
이제는 저승에서 쌍동지가 되고 싶네.]
윤 노인이 <동지>라는 말을 하도 뇌까려대기에
김삿갓은 짓궂게도 일부러 <동지>라는 말만 가지고 만장을 써 주었다.
그리고 만장 속에는 <영감님도 친구를 따라 빨리 저승으로 가는 것이 좋을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윤 노인이 글을 볼 줄 알았다면
김삿갓을 죽이겠다고 덤벼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윤 노인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자네도 나처럼 오래 살고 싶거든
이 산속에서 신선도를 닦으며 나와 함께 살면 어떻겠는가?"하고 뚱단지 같은 소리를 한다.
김삿갓은 어름어름하다가는
윤 노인에게 붙잡혀 버릴 것만 같아
부랴부랴 걸음을 옮겨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갈 길이 바쁜 사람입니다."
김삿갓은 산길을 걸어 내려오며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해 보았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윤 노인은 생에 대한 애착이 이렇게도 강렬한 것일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본인도 모르게 부모가 만들고 낳아 주셨으니까
사람으로 태어났을 뿐이다.
그렇게 인생의 출발은
본인의 뜻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죽음 역시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일러오지 않던가?
따라서 내 목숨은 틀림없는 나의 것이지만,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이 땅에 나온 것이 아닌 것처럼,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내 맘 대로 오랫동안 살 수 없는 게 사람의 수명이다.
우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은 하루살이와 같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전에 작별한 윤 노인은
3백 살까지 살고 싶어 지리산에 들어와 선도仙道를 닦는다고 하였다.
사람의 명이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닌데
도를 닦는다고 과연 3백 살까지 살 수 있을 것인가?
설령 3백 살까지 산다손 치더라도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3백 년을 산다는 게 무슨 뜻이 있을 것인가?
일찍이 어떤 시인은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고 했다.
풀잎 끝에 달려 있는 아침 이슬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슬픈 운명을 지고 태어났다고 했다.
이렇게 영겁永劫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아침이슬 같은 존재이다.
이런저런 두서 없는 생각에 잠겨 길을 가고 있었으니
김삿갓은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듯 느껴졌다.
김삿갓은 그 순간 분명 시를 한 수 읊조렸음직한데
전해오는 기록이 없으니 아쉬울 뿐이다.
방랑시인 김삿갓 (197)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
(오래 사노라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는 운명)
어느덧 진주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선 촉석루矗石樓부터 찾아 갔다.
진주성 남쪽 벼랑 위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촉석루는
그 아래로는 남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강 건너편 우거진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때 마다 우수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강가에는 하얀 모래밭이 길게 이어져 있어, 자연의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은 왜적과 우리 관군이 운명을 걸고 싸운 가장 치열했던 격전장이었다.
왜적이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 왔었지만
전라 병사 황진黃進과 경상 병사 최경회崔慶會,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등이 전력을 기울여 방어해 오다가,
마침내 세 장사가 모두 장렬히 전사한 곳이 이곳 촉석루이다.
이처럼 촉석루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곳인지라
다락 위에는 시인 묵객들의 현판시가 수없이 걸려 있었다.
김삿갓은 다락 위에 걸려 있는 시들을 모조리 읽어 내려오다 인조 때의 명신이었던 홍만조洪萬朝의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기암천척 기고루寄巖千尺 起高樓
천 척 높은 벼랑 위엔 다락이 솟아 있고
하유장강 인불유下有長江 咽不流
벼랑 아래 긴 강에선 여울이 흐느낀다
금일경과 정전지今日經過 征戰地
지난 일 꿈이련 듯 싸움터는 말이 없어
모운잔설 입변수暮雲殘雪 入邊愁
저무는 구름 쌓인 눈 모두가 시름이네.]
촉석루 위에서 강을 굽어보니,
어느덧 가을이 깊어 공중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저 멀리 성벽 밑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것은 아마도 어느 촌가에서 저녁 짓는 연기리라.
(오늘도 어느새 하루해가 또 저물어 오는구나.
오늘밤은 누구의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하는고?)
김삿갓은 예전에는 아무리 날이 저물어도
잠자리를 걱정해 본 일이 없었다.
어느 집에서나 찬밥 한 술 얻어먹고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해소병이 시작되면서 부터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찬 방에서 자게 되면 기침이 심하게 날 뿐만 아니라,
전신에 이상한 동통이 발동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김삿갓에게 따뜻한 방에 재워 줄 사람이 누가 있을 것인가.
아무려나 어디선가 밥을 얻어먹어야 하겠기에,
다락에서 막 일어서려는데 별안간 누군가가 앞을 막고 나서며 "아니 이거, 삿갓 선생 아니오?
남아하처 불상봉男兒何處 不相逢이라더니, 삿갓 선생을 이런 데서 다시 만날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하고
큰소리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김삿갓도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거, 노형은 우국지사가 아니오?
우리가 평양 연광정에서 만나고 나서 이거 몇 년 만이오?"
우국지사도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연광정에서 만난 것은 벌써 10여 년 전 일이오.
그런데 오늘날, 이번에는 진주 촉석루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세상에 이런 기우奇遇가 어디 있단 말이오!"
10여 년 만의 해후상봉이고 보니,
모두가 놀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김삿갓이 <우국지사>로 부른 사람은
<이북천(李北天)>이라는 본명을 가진 풍객風客이었다.
평양 연광정에서 김삿갓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땅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비분강개한 일이 있었다.
"우리가 임진년에 왜놈들한테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은,
그때의 벼슬아치들이 사색붕당四色朋黨에만 정신이 팔려, 나라를 걱정할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소.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며
임진왜란 때의 유적지를 샅샅이 돌아보고 나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대정치가가 될 생각이오."
그때 이북천의 우국지정이 너무도 출중하였기에
김삿갓은 농담삼아 "오늘부터 노형을 <우국지사>라고 부르는 게 합당하겠소."하고 말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거를 가진 두 사람이 10여 년이 지나서 진주 촉석루에서 다시 만났으니 피차가 기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많이 늙었지만, 우국지사도 백발이 성성해진 걸 보니 그동안 많이 늙으셨구려."
"인정사정 없이 밀어닥치는 세월이야
낸들 어찌 막아낼 수가 있겠소이까."
그리고 나서 우국지사는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한지,
"우리 어디 가서 술을 나누며 쌓였던 회포를 마음껏 풀어 보기로 합시다."하고 김삿갓을 술집으로 잡아끄는 것이었다.
김삿갓도 술을 마다고 할 턱이 없었다.
남강물이 바로 눈앞에 굽어보이는 촉석루 담벼락 밑에
<유천流川>이라는 주막이 하나 있었다.
김삿갓은 우국지사와 함께 주막으로 들어서다가
간판을 보고는 주모를 나무라 주었다.
"이 사람아! 전쟁터에서 군사가 많이 죽은 것을
<유혈성천流血成川>이라고 한다네.
여기는 임진왜란 때에 왜놈들을 많이 죽인 곳이니까,
이왕이면 주막 이름을 <유혈성천>이라고 할 일이지,
왜 그냥 <유천>이라고 했는가?"
그러자 주모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주막 이름을 <유혈성천>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비참하다고 해서 <유천>이라고 했다오."
김삿갓은 술이 거나해져 오자,
문득 옛날 일이 떠올라 우국지사에게 물었다.
"참, 노형은 그 옛날 임진왜란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파사현정의 정치가가 되겠노라> 호언했던 일이 있지 않소?
만약 그때의 장담이 그대로 실현되었다면
지금쯤은 정치가가 되었어야 옳은 일인데 도대체 그 꿈은 어떻게 되셨소?"
우국지사는 뜻밖의 질문에 쓸쓸하게 웃었다.
"허허허, 그것은 젊은 날의 객기에 지나지 않았던 호언장담이었지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시운時運>이란 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단 말입니다."
"차라리 잘 되었소이다.
옛글에 <영웅은 만인의 적 英雄萬人之敵>이라는 말이 있습디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면서 그까짓 영웅은 되어서 무엇 하오?"
"삿갓 선생은 워낙 달관하신 양반이니까 영웅을 우습게 여기시겠지만 나 같은 속물에게 영웅이란 그야말로 대단하게 보이는 인물이라오. 그러나 영웅이 되려면 반드시 시운이 따라야 하는 거예요."
우국지사는 그렇게 탄식하며 술을 한 잔 쭈욱 들이키고 나더니,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 한 편을 읊어 보이는 것이었다.
[지사봉시소 志士逢時少
지사가 때를 만나기 어려움은
가인박명다 佳人薄命多
미인이 박명 하는 것과 같도다
생평무소사 生平無所事
내 평생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두백내하하 頭白奈何何
머리가 백발 되었으니 이를 어찌 하리요.]
김삿갓은 그 시를 들어 보고,
우국지사는 아직도 속세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구나 싶어,
적이 슬픈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미련을 떨쳐 주기 위해 얼른 이렇게 말했다.
"소동파의 시에,
[생전부귀 초두로 生前富貴 草頭露
살아 있을 때의 부귀는 풀잎의 이슬이요.
신후풍류 맥상화 身後風流 陌上花
죽은 뒤에도 풍류는 밭두렁의 꽃과 같다.]라는 말이 있소.
노형이나 나나 우리 이미 백발이 다 되었는데
이제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무엇을 바랄 것이오. 그저 남은 나날을 모든 것의 시시비비를 떠나서 살면 되겠지요."
우국지사는 김삿갓의 말에서 새삼 느낀점이 있었던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삿갓 선생 말씀이 진실로 옳은 말씀이시오."
김삿갓은 술을 마셔 가며, 우국지사에게 물었다.
"내일 아침이면 서로 헤어져야 할 판인데,
노형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
"여기서 남해(南海) 섬들이 멀지 않으니,
그 쪽을 한 번 돌아 볼까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국지사도 나와 마찬가지로
종신 운수객雲水客이 분명하구려.
우리가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나 또 만나게 되려는지"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글쎄올시다.
사람의 일을 누가 알겠소이까?
운수가 좋으면 다시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만날 기회가 또 있으리하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삿갓 선생은 어디로 가실 생각이시오?"하고
이번에는 우국지사가 김삿갓에게 물었다.
김삿갓은 잠시 생각하는 빛을 보이다가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번 겨울만은 따뜻한 지방에서 편히 쉬고 싶지만 그럴 만한 곳이 있어야 말이지요."
우국지사는 그 말을 듣고 나더니 눈을 커다랗게 떠보였다.
"그렇다면 마침 잘 됐소이다.
강진 고을에 안복경安福卿이란 진사 친구가 있소.
내가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드릴 테니
이번 겨울은 그 친구 집에서 편히 쉬도록 하시오."
"고맙소이다.
그렇게 폐를 끼쳐도 괜찮을 사람인지요?"
"그 점은 염려 마시오.
그 친구는 돈도 많지만 풍류를 이해하기 때문에
삿갓 선생이 찾아가시기만 하면 소홀히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삿갓은 몸이 하도 괴로운지라,
우국지사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나저나 내일 아침이면
우국지사와 작별할 것을 생각하니
김삿갓은 우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국지사에게 술을 권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번에 헤어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노형은 어떻게 생각되시오?"
"삿갓 선생은 무슨 말씀을 하시오?
설사 내일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람은 모름지기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날이 밝으면 우리들은 어차피 헤어져야 할 것이오.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지 모르니, 내가 이별의 시를 한 수 읊기로 하겠소."
[우국비가사 憂國非歌士
비분강개 잘하는 우국지사와
상봉촉석루 相逢矗石樓
촉석루 다락에서 다시 만났는데
한연응단첩 寒烟凝短堞
차가운 연기는 담섭에 아롱지고
낙엽하장주 落葉下長洲
가랑잎은 모래밭에 딍굴고 있소.
소지위기권 素志違其卷
우리들은 본래의 뜻은 서로 틀려도
동심기백두 同心己白頭
마음은 하나건만 이미 백발이 되었소.
명조남해거 明朝南海去
그대 내일 아침 남해로 떠나가면
강월오경추 江月五更秋
강산에는 어느덧 가을이 깊어 오리요.]
영원한 이별을 상징하는 구슬픈 시였다.
우국지사도 그 시를 듣고 나자 가슴이 메이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당나라의 시인 고적高適이
친구를 멀리 보내며 읊었다는 시를 서글픈 목소리로 읊어대었다.
[십리황운 백일훈 十里黃雲 白日曛
누런 구름 길게 뻗어 하루해가 저무는데
북풍취안 설분분 北風吹雁 雪紛紛
북풍에 기러기 날고 눈발이 사납구나
막수전로 무지기 莫愁前路 無知己
가는 곳에 친구 없다 걱정하지 마오.
천하수인 불식군 天下誰人 不識君
천하의 그대를 어느 누가 모르리오.]
[보탬 : 당나라 시인 고적高适의
별동대别董大(동대董大와 이별하며)라는 시다.
☆고적(高适, 701~765) : 당나라 초기의 시인(边塞诗人).
호방하고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라
그의 시도 이런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냄.
동시대의 岑参과 더불어“高岑”으로 불리움.
동대董大(695경-765) : 본명은 동정란董庭兰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
"고금왕자古琴王子"라고도 불림.
"대(大)"는 형제 가운데서 맏이라는 뜻.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뜻하는 말인지 모른다.
한 번 만난 사람은
생별生別이든 사별死別이든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다.
김삿갓은 오늘날까지 무수한 이별 속에서 살아왔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국지사와의 이별처럼
절실한 비애를 느껴 보기는 처음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198)
십오야, 내자지, 용도질, 개고알
(十五夜, 乃自知, 用刀疾, 皆告謁)
<유천>이라는 주막에서 우국지사와 작별한 김삿갓은
겨울을 무사히 넘기려고 강진에 있는 안복경이라는 사람을 찾아 가기로 결심하였다.
진주에서 강진 고을까지는 몇백 리가 되는지
김삿갓은 정확한 거리를 모르지만,
마음 놓고 겨울을 보내려면
아무리 멀더라도 따뜻한 곳을 찾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병이 워낙 심상치 않은데다가
우국지사를 만나 밤샘을 해가며 폭음을 한 탓인지
몸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게다가 날씨조차 갑자기 추워져서 사지가 오그라들 지경이었다. (이거 큰일났구나. 몸이 이래 가지고야 하루에 10리 인들 걷겠나?)
김삿갓은 날이 갈수록 몸이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절간으로 찾아 들어가 10여 일씩 몸조리를 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는 서당방에서 4~5일씩 쉬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강진 고을을 향해 조금씩 거리를 줄여나갔다. 이 해도 저물어 가는 섣달 중순께의 일이다.
김삿갓은 이날도 저녁을 얻어 먹으려고 어느 기와집을 찾아가니 마침 그날이 제삿날이어서 많은 친척들이 음식을 차리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 집은 돈도 많은데다가 제사를 지내는 법도가 엄격한지,
밤이 이슥해 오자 예복을 제대로 갖춰 입은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까지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옳다 됐다. 제사를 지낸 뒤에는 으례 음복을 나눠 먹을 테니, 그 때에 나도 맛나는 음식을 푸짐하게 얻어먹을 수가 있겠구나!)
김삿갓은 자기 나름대로 잔뜩 기대를 가지고,
행랑방에 혼자 누워 제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복을 얻어먹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슨 기대에 어긋나는 처사인가.
주인집 일가 친척들은 제사가 끝나자 안방과 사랑방에서 저희끼리만 음복을 나눠 먹을 뿐, 김삿갓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김삿갓이 있는 행랑채에는 개다리 소반에
떡 한그릇, 김치와 숙주나물 한 접시만 덜렁 들여놔 주는 게 아닌가?
(이게 웬일이야, 빌어먹을 놈들! 조상의 제사를 지냈으면 음복만은 손님에게도 똑같이 나눠 줘야 옳을 일인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차별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심보를 가지고 어떻게 조상의 음덕을 바란단 말인가?)
김삿갓은 홧김에 욕이 절로 나왔다.
그리하여 즉석에서 글자를 읽으면 욕설이 되는 시 한 수를 읊어대었다.
[연연납월 십오야 年年臘月 十五夜
해마다 섣달 보름 날 밤은
군가제사 내자지 君家祭祀 乃自知
그대 집 제삿날임을 잘 알고 있노라.
제전등물 용도질 第奠登物 用刀疾
젯상에 올린 것은 칼을 잘 쓴 음식이요,
헌관집사 개고알 獻官執事 皆告謁
헌관과 집사들은 모두 업드려 아뢰는구먼.]
김삿갓이 병든 몸을 이끌고 고생끝에
강진에 닿은 것은 그해도 저물어 가는 섣달 그믐께였다.
안복경 진사는 우국지사의 소개장을 자세히 읽어 보고
김삿갓을 크게 반기면서
"그러잖아도 어젯밤 꿈자리가 좋길래,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삿갓 선생처럼 고명하신 어른이 찾아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척 피로하신 모양이니 어서 들어가십시다."하고
큰 사랑으로 모셔 들였다.
그리고 초면 인사를 정중히 나누고 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삿갓 선생을 직접 만나 뵙기는 오늘이 처음이나 일찍이 선생의 선성先聲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북천李北天 공의 소개 편지에는 선생은 몸이 몹시 불편하시다고 하셨으니, 이번 겨울은 저희 집에서 편히 쉬도록 하십시오.
강진이라는 곳은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는 따뜻한 곳입니다."
김삿갓은 안 진사의 특별한 배려가 고맙기 그지 없었다.
아닌게아니라 강진 고을은 뒤에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바라보여서 병자가 몸을 수양하는데는 안성맞춤의 휴양지였다.
김삿갓은 안 진사와 날마다 글 토론도 하고 산책도 같이 다니는 동안 그의 인품을 속속들이 알수 있게 되었다.
그는 돈이 많아도 교사驕奢하지 않았고,
지식이 풍부 하면서도 겸손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비록 농사꾼이더라도 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기도 하였고,
훈장이 나들이를 갔을 때는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이렇듯, 안 진사는 안심입명安心立命 사상이 몸에 배어 있는 처사형 군자였던 것이다.
김삿갓이 거처하는 안 진사 댁 별당은
언제나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뜰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었다.
연못가에는 대나무도 있고 수초도 무성했지만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의 하나였다.
어느 날 안 진사는 김삿갓에게,
"선생! 오늘은 날씨가 따뜻하니 금곡사金谷寺 구경이나 한 번 다녀오십시다."하는 것이었다.
금곡사는 안 진사의 집에서 5 리쯤 떨어진 보은산寶恩山 산속에 있는 낡은 절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김삿갓은 오랜만에 안 진사와 함께 나들이를 나섰다.
금곡사 입구에는 개울물을 사이에 두고, 30척이 넘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두 개의 바위가 공중 높이 솟아 있었다.
그 거대한 두 개의 바위는 마치 두 마리의 싸움닭이 금방이라도 싸울 듯이 서로가 날개죽지를 추스리고 마주 노려보는 형상이었다.
"이 두 개의 바위는 금방 싸울 것만 같은 형상이구려."
김삿갓이 바위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자, 안 진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 지방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두개의 바위를 <쟁계암爭鷄岩>이라고 불러 오고 있답니다.
금곡사가 번창하지 못하는 것은 이 바위들이 절 입구에서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삿갓 선생은 오늘 금곡사에 놀러 오신 기념으로,
이 바위들이 이제부터는 싸움을 아니하도록 화해를 좀 붙여 주시지요."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그렇다면 내가 화해를 주선하는 시를 한 수 지어 볼까요?"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쌍암병기 의분쟁 雙岩竝起 疑紛爭
두 바위가 마주 서서 싸우는 것 같지만
일수중유 해분심 一水中流 解忿心
중간에 물이 흘러 서로 분한 마음을 풀어 주네.]
실로 김삿갓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기발한 착상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 (199)
귀천歸天
보은산은 남향이어서 산속이 유난히 따뜻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산속에서는 어느새 진달래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진달래 꽃 봉오리가 터진 것을 발견하자
오랫동안 몸 속에 잠재해 있던 방랑벽이
별안간 가슴이 설레도록 용솟음쳐 올라왔다.
(아아, 나도 모르게 어느새 대지에는 봄이 왔구나.
나도 이제는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할 때가 왔구나!)
김삿갓은 무의식중에 그런 충동이 느껴져 진달래꽃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안 진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봄이 왔으니, 나도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하겠소이다."
그리고 즉석에서 다음과 같은 작별시를 한 수 써 보였다.
[원객유유 임병신 遠客悠悠 任病身
먼 나그네 오랫동안 병을 빙자하여
군가몽은 차봉춘 君家蒙恩 且逢春
댁에 폐를 끼치며 봄을 맞았소
춘래각자 동서거 春來各自 東西去
봄이 와서 동서로 뿔뿔이 헤어지면
차지간화 시별인 此地看花 是別人
이곳 꽃 구경은 다른 사람과 할 것이오.]
김삿갓은 길 떠날 결심을
한 수의 시로써 안 진사에게 알려 준 것이었다.
안 진사는 김삿갓의 시를 들여다 보고 크게 놀랐다.
"선생이 여기를 떠나시다니, 무슨 말씀이시오?
건강이 쾌유하시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지금 길을 떠나시면 안 되시옵니다."하며
안 진사는 기를 쓰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한번 결심한 것인데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냥 눌러 있을 김삿갓은 아니었다.
"나는 워낙 방랑 생활을 끝없이 계속하다가 언젠가는 길에서 죽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타고난 운명대로 살아가려는 나를 굳이 붙잡지 말아 주세요."
김삿갓의 결심이 이렇다 보니, 안 진사는 더 이상 김삿갓을 붙잡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길을 떠나신다면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하고 물었다.
김삿갓은 너털 웃음을 웃어 보이며,
"내가 언제는 갈 곳을 미리 정해 놓고 돌아다니는 사람이었던가요? 봄을 따라 북상하면서,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와 용천사龍泉寺도 구경하고 싶고, 마음이 내키면 화순和順 동복同福에 있는 적벽강赤壁江에도 한번 들러 볼 생각입니다."
안 진사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침 잘되셨습니다. <동복>에는 신석우申錫愚라는 막역한 친구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편지를 써드릴 테니
동복에 가시거든 그 친구를 꼭 찾아 주십시오.
그 친구라면
선생에게 모든 편의를 정성껏 보아 드릴 것입니다."
이리하여 김삿갓은 신석우라는 사람에게 전해 줄 소개 편지 한 장만 받아 가지고, 기어코 강진 고을을 떠나고야 말았다.
김삿갓은 몸으로 봄을 느끼자 고집스럽게 방랑의 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먼 길을 걷기에는 몸이 너무도 쇠약해 있었다.
그러기에 강진에서 용천사를 거쳐 보림사까지 2백 리도 채 못되는 거리를 보름 만에야 가까스로 닿았다.
김삿갓이 진작부터 보고 싶었던 가지산 속의 명찰, 보림사를 구경하고 풀밭에 누워 피로를 풀며 자기 자신의 신세를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궁달재천 등가역구 窮達在天 登豈易求
잘 살고 못사는 것은 천명, 맘대로 안 되는 것
종오소호 임유유 從吾所好 任悠悠
나는 내 멋대로 자유롭게 살아왔노라
가향북망 운천리 家鄕北望 雲千里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리길 아득한데
신세남유 해일구 身勢南遊 海一漚
남쪽에 헤매는 신세 물거품과 같구나.
소거수성 배작추 掃去愁城 盃作箒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쓸어 내고
조래시구 월위구 釣來詩句 月爲鉤
달을 낚시로 삼아 시를 낚아 오면서
보림간진 용천우 寶林看盡 龍泉又
보림사 용천사를 두루 구경하고 나니
물외한적 공비구 物外閑跡 共比丘
내 마음 욕심없이 스님과 다름없네.]
그로부터 10여 일이 지나 화순 동복으로 신석우를 찾아갔을 때에는 김삿갓은 몸을 가누기가 어려울 만큼 극히 쇠약해 있었다.
50 고개를 바라보는 시골 선비 신석우는 안 진사의 소개 편지를 받아 보고, 김삿갓을 무척이나 측은히 여기며 말했다.
"선생께서 강진 고을에 와 계시다는 소식은 풍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에까지 왕림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행히 저희 집에는 조용한 초당이 있으니, 건강을 회복하실 때까지 푹 쉬시기 바랍니다."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주인 양반께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동복에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나오는 적벽강赤壁江과 같은 강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강은 이곳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적벽강은 여기서 불과 5 리 안쪽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선생이 적벽강을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조만간 따뜻한 날을 택해 제가 직접 모시고 가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적벽강을 꼭 한번 보고 싶어요. 그러나 나 혼자서 구경하고 싶지 누구하고 함께 보고 싶지는 않아요.
매우 외람된 부탁이지만, 내일 아침에 저에게 배를 한 척 빌려 주실 수 없으실까요?"
선비 신석우는 김삿갓의 무리한 부탁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불편하신 몸으로 배를 어떻게 혼자 타시옵니까?
적벽강은 내일 기어이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제가 직접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김삿갓은 고개를 힘차게 내저었다.
"좋은 경치를 내 마음대로 즐기려면 옆에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옛날 시에,
[화소성미청 花笑聲未聽
꽃은 웃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제루난간 鳥啼淚難看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렵다.]이라는 시가 있지요.
이처럼 홀로 자연과 동화된 시인은 꽃의 웃음과 새의 울음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 합니다. 부디 그러한 느낌을 즐길 수 있도록 나에게 배 한 척만 알선해 주세요."
김삿갓이 이렇게도 고집을 부리니,
신석우로서는 더 이상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날은 적벽강 나루터에서
김삿갓 혼자만 배를 타게 해주었다.
배는 조그만 놀잇배였다.
물 위에 둥둥 떠도는 배는 노를 젓지 않아도
흐름을 따라 조금씩 적벽강 아래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김삿갓은 솔솔 불어오는 강바람에 상쾌감을 느끼며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그윽히 바라보며,
여기가 바로 선경이 아닌가 싶었다.
이러한 천장지활天長地闊한 대자연 속에
일엽편주를 띄워 놓고 삼라만상을 허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제 부터는 밥을 빌어먹으려고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고,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헤매고 돌아다닐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아아, 여기가 바로 나의 안식처였구나! )
김삿갓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배 위에 편히 누워 저 멀리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넓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한가롭게 떠돌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 떠도는 구름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 어디선가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옛 시 한수를 연상하였다.
[운산조조 하처귀 雲山造造 何處歸
구름은 넓고 넓은 데를 어디로 가는고
단문공제 채난성 但聞空際 綵鸞聲
하늘가 아득히 난새소리 들려 오네.]
하얀 구름을 그윽히 바라보고 있자니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 왔다.
이제는 눈을 뜨고 있기조차 힘에 겨울 만큼
기진맥진했던 것이다.
눈을 감으니 난새 소리가 한결 분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음의 눈에는
하얀 구름이 더욱 선명하게 나타나 보였다.
(아아, 나의 목숨은 저 하늘가에 떠 있는 한 조각 구름과 같은 것, 저 구름이 사라질 때면 나도 이 세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겠지)
점점 몽롱해 오는 의식 속에서 문득 <귀천歸天>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귀천>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이 죽는다는 소리다.
그러나 김삿갓은 <귀천>이라는 말을 떠올린 순간,
마음이 그렇게도 편안할 수가 없었다.
[보탬 : 한많은 세상,
이승을 떠나 하늘로 가는 길이 이리도 편안할 수 있다면
뉘있어 귀천을 두려워 하리!
※이번 편에도 시의 원문(한문) 글자가 두 곳이나
그냥 한글로 씌어 있어서 30분도 넘게 맞는 글자(한자)를 찾아 헤맸다.
이제 마지막편인 200회가 남아 있고
거기에는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라는 제목의 시가 나오지만 그 시는 김삿갓이 죽음을 직감하고 미리 써서 남겼던 글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눈꺼풀 움직일 힘도 없이 죽어가는 이가
옆에서 받아 적는 이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어찌 글로 남겼으랴?
그런데 잠시 미리 훑어보니 거기에도 바로잡거나
한자 원문을 찾아 헤매야 할 곳이 눈에 띈다. 허허~
방랑시인 김삿갓, (200 마지막 편)
승피백운 우화등선乘彼白雲 羽化登仙
돌이켜보면 기구하기 짝이 없었던 50 평생이었다.
그러기에 혼미한 의식 속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김삿갓은 다음과 같은 마지막 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조소수소개유거 鳥巢獸巢皆有居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고아평생독자상 顧我平生獨自傷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왔노라.
망혜죽장로천리 芒鞋竹杖路千里
짚신에 지팡이 끌고 천릿길 떠돌며
수성운심가중방 水性雲心家中方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우인불가원천난 尤人不可怨天難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이 못 되어
세모비회여촌장 歲暮悲懷餘寸腸
해마다 해가 저물면 혼자 슬퍼했노라.
초년유위득락지 初年有謂得樂地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한북지오생장향 漢北知吾生長鄕
한강가 이름 있는 고향에서 자랐노라.
잠영선세부귀문 簪纓先世富貴門
조상은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사람
화류장안 명승생 花柳長安名勝生
장안에서도 이름 높던 가문이었다.
인인래하농장경 隣人來賀弄璋慶
이웃 사람들 생남했다 축하해 주며
조만귀기관개장 早晩歸期冠蓋場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했건만
수모초장명점기 鬚毛稍長命漸奇
수염이 나면서 운명이 점차 기구해져
회겁잔문번해상 灰劫殘門飜海桑
멸문(재가 되도록 잔인한 위협으로)으로
상전이 벽해되듯 뒤집어졌네.
의무친척세정박 依無親戚世情薄
의지할 친척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곡진야양가사황 哭盡爺孃家事荒
부모마저 돌아가셔 집안은 황폐했도다.
종남효종일납이 終南曉鐘一納履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풍토이방심세량 風土異邦心細量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심유이역수구고 心猶異域首丘孤
마음은 고향 그리는 떠돌이 여호같고
세역궁도촉번양 勢亦窮途觸藩羊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시 조차 읊을 기운이 떨어진 김삿갓은 잠시 뜸을 두었다가, 다시 읊기 시작했다.
남주종고과객다 南州從古過客多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전봉부평경기상 轉蓬浮萍經幾霜
부평초 처럼 떠돌아가기 몇몇 해던고
요두행세기본습 搖頭行勢豈本習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오
설구도생유소장 楔口圖生惟所長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광음점향차건실 光陰漸向此巾失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청산하묘망 三角靑山何渺茫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강산걸호관천문 江山乞號慣千門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았으나
풍월행장공일낭 風月行裝空一囊
풍월 읊는 행랑은 언제나 비었도다.
천금지가만석군 千金之家萬石君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 다니며
후박가풍균시상 厚薄家風均試嘗
후하고 박한 가풍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궁매우속안백 身窮每遇俗眼白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 보니
세거편상발발창 歲去偏傷髮髮蒼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귀혜역난저역난 歸兮亦難佇亦難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기구방황중로방 幾口彷徨中路傍
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이던고.
[보탬 :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라는 제목의 시인데
오자 2곳, 한자를 몰라 한글로 쓴 곳 1곳을 바로잡고 또 한자를 찾아서 보완하는데 2시간도 더 걸렸다.
휴우~! 이제 더는 이런 짓 안 해도 된다.후련하다 ]
김삿갓은 여기까지 읇조리다가,
마침내 기운이 진해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응구첩대應口輒對로 시를 읊어댄 것은 그의 타고난 천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읊을 기력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무거운 침묵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배는 가벼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이윽고 눈을 감고 있는 김삿갓의 심안心眼에는 홀연히 한 조각 하얀 구름이 떠올라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누군가가 그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승피백운乘彼白雲 우화등선羽化登仙!
저 하얀 구름을 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하고 읊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려 왔다.
김삿갓은 그 소리가 들려오자, 별안간 몸을 꿈틀하며, "뭐? 승피백운 우화등선? "하고 입속말로 뇌까리다가, 다음 순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을 두루 편답하며 수많은 시를 뿌려 놓은 천재 시인 김삿갓은, 마침내 전라도 동복 적벽강 나룻배 위에서 영구 귀천했으니, 때는 지금으로 부터 159년 전인 1863년 철종14년 3월 29일이요, 향년 56세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사후死後에 전라도 땅에 묻혔다가, 그의 둘째 아들 익균翼均에 의해 고향인 영월땅으로 이장移葬되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기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216번지로 그의 유택幽宅(묘)에 주소를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통상은 매장을 하지만,
중앙아시아의 북방 유목 민족들은 새를 숭배하여 장례를 치룰 때 조장鳥葬, 천장天葬을 한다.
죽은 영혼이 하늘나라로 접근하는 가장 지름길을 새라는 동물로 보았기에, 새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도록 함으로써 영혼이 하늘에 가깝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승피백운 우화등선" 방랑시인 김삿갓의 마지막 남긴 말을 해석하여 보면, 그의 영혼靈魂은 분명히 새가 되어 창공을 마음껏 훨~훨 날아서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200회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