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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1사무 7장-12장
1사무 7,1 주님의 궤
“그러자 키르얏 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주님의 궤를 모시고 올라갔다. 그들은 주님의 궤를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기고, 그의 아들 엘아자르를 성별하여 그 궤를 돌보게 하였다”(1). '필리스티아에서 돌아온 주님의 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성막이 있는 실로(Shiloh)로 옮겨가지 아니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아펙 전투(4,9-11) 결과, 필리스티아인에 의해 당시 실로까지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궤는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모셨다. 여기서 '아비나답'(Abinadab)은 레위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이 성읍이 레위인에게 할당된 성읍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봐야 할 까닭은 다옴과 같다. 판관 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자신들의 성읍을 이탈하여 다른 지역에서 생활한 경우가 흔했으며(판관 17,12), 후일 아비나답의 후손들이 주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공식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2사무 6,3). 아비나답의 집은 주님의 궤를 보관하기에 적당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그의 집이 키르얏 여아림의 교외 고지에 위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엘아자르'(Eleazzr)은 '하느님은 도우시는 자'란 뜻으로, 이 사람은 아론의 아들로서 아론의 뒤를 이어 차기 대제사장이 된 엘아자르(Eleazzr, 탈출 6,23;민수 20,25-28)과는 동명 이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소유자는 위의 두 사람이외에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비나답의 아들 엘아자르가 레위 지파의 후예임을 은연중 시사한다. 엘아자르를 ‘성별한다’는 말은 제사장을 임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탈출 28,3.41).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엘아자르가 혈통상 제사장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당시의 특별한 상황은 제사장적 직분을 감당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따라서 그가 비록 제사장 가문의 후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레위 지파였으므로 그곳 주민들은 그를 제사장으로 세운 듯하다. 한편 성경은 엘아자르가 어떤 권위에 의해, 또한 어떤 방식에 따라 제사장으로 구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제사장적 신분으로 거룩히 구별된 엘아자르가 구체적으로 주님의 궤를 어떻게 지켰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아펙 전투로 말미암은 실로 파괴 이후 공식적인 제사는 일단 중지된 듯하다. 따라서 엘아자르의 주된 임무는 제사 행위 보다도 주님의 궤를 안전하고도 정결하게 잘 보관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궤가 키르얏 여아람에 자리 잡은 지 20년이 지났다.
1사무 7,2-17 사무엘이 판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림
이제 이스라엘 지파들의 중심은 실로의 계약 궤에서 사무엘이라는 인물에게로 넘어갔다. 사무엘은 필리스티아인과 싸우기 위해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은다. 사무엘 자신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으나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그 결과 백성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사무엘은 과거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탈출 17,6-13 참조),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가져오는 강력한 기도의 사람이다.
또한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파를 한데 불러 모으고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힘을 불러넣어 주는 기도의 사람이자 하느님의 법을 집행하는 드보라와 같은 판관이다. 15-16절에 의하면 사무엘은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의 분쟁을 하느님의 법에 따라 해결해 주는 ‘순회 판관’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지도자였지만 임금은 아니었다. 임금은 주님 그분이셨다. 다른 임금들이 그러하듯 전쟁을 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셨으며(10절 이하), 법을 부여하시는 분도 주님이셨다. 주님는, 임금이 아닌 판관 사무엘을 통해 임금으로서 활동하셨다.
2-4절은 신명기계 역사가의 자료이다. 2절은 판관기에서 익히 보았던 신명기계 역사가의 전형적인 역사의 순환 구조(죄-징벌-타원-구원) 중 ‘징벌-탄원’에 해당된다. 여기서의 ‘이십 년’이라는 기간도 역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징벌’(압제) 받은 기간, 즉 신학적 시간을 의미한다.
3-4절 역시 신명기계 역사가가 자주 쓰는 말마디인 ‘주님께 돌아오다.’ ‘낯선 신들’ ‘아스타롯’ ‘마음을 주님께만 두다.’ ‘~의 손에서 빼내 주다.’ 등이 눈에 띈다. 특히 3절의 ‘주님만을 섬기라.’는 요구는 신명기계 역사가의 핵심 사상이다. 계약 궤를 빼앗긴 사건의 원인이 앞의 ‘계약 궤 이야기’에서는 엘리와 그의 집안의 죄 때문으로 보였다. 하지만 3절을 보면 필리스티아인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근본적인 원인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때문이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집안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오려거든, 여러분 가운데에서 낯선 신들과 아스타롯을 치워 버리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만 두고 그분만을 섬기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빼내어 주실 것이오”(3).
4절에서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타롯을 치우고 주님만을 섬김으로써 구원, 즉 전쟁에서의 승리가 가능해진다. 바알과 아스타롯은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이스라엘의 죄(우상 숭배)를 가리키는 흔한 표현이다. 바알은 가나안의 폭풍 신으로 비를 보내는 풍요의 신이었고, 아스타롯은 바알과 밀접한 여신은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알과 아스타롯을 치워 버리고 주님만을 섬겼다”(4).
5절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미츠파로 모였다고 하는데, 미츠파는 과거에 제의를 위한 집회가 열렸던 장소이다(판관 20,1.3; 21,1.5.8). 미츠파라는 말마디의 뜻은 전망대이다. 여기서의 미츠파는 구원 행위의 장소(11-12절)이자 사무엘이 순회 판관의 역할을 했던 성읍 가운데 하나이다. 미츠파는 또한 임금을 제비 뽑는 장소로 나온다(10,17). “그러고 나서 사무엘이 말하였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미츠파로 모이게 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를 드리겠소”(5).
6절의 “사람들은 미츠파로 모여 와서 물을 길어다가 주님 앞에 부었다.”라는 표현은 여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물을 붓고 단식을 하는 것은 슬픔과 회개를 표시하는 것 같다. 이어서 나오는 죄의 고백은 구원을 위한 필수 과정이다. 신명기계 역사가에 의하면, 그래야만 주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7-12절에서는 주님의 전쟁이 소개되는데, 앞의 죄 고백은 주님의 전쟁 가운데 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다. 필리스티아인이 그들을 치러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자 이스라엘은 두려워하는데, 이는 주님의 전쟁을 기록한 문맥에서 자주 발견되는 표현이다(탈출 14,10 참조).
8절에서는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쉬지 말고 하느님께 부르짖어 달라고 청한다. 주님께 부르짖는다는 표현은 주님의 전쟁과 신명기계 역사가의 기사에서 자주 등장한다(판관 3,9.15; 6,6-7; 10,10; 1사무 12,8.10). 부르짖음은 야훼 하느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그 요청에 판관기에서는 개인적인 인물이 구원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주님 그분이 구원자가 되신다. 사무엘은 판관기에 나오는 영웅적인 판관이 아니라 주님의 전쟁에서의 예언자적 중개자로 나온다. 이 전쟁에서 싸우시고 승리하시는 분은 야훼 하느님이시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무엘에게,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도록, 주 우리 하느님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8).
“사무엘이 젖먹이 어린양 한 마리를 끌어다가 주님께 온전한 번제물로 바치면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주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주셨다”(9). 9절에 의하면 사무엘이 백성을 위해 부르짖는다. 참고로 판관기에서는 보통 백성이 주님께 부르짖는다. 이로써 이스라엘을 위한 중개자로서 사무엘의 역할이 강조된다. 사무엘의 이 부르짖음에 주님께서 눈에 뜨지 않지만 응답해 주신다.
“사무엘이 아직 번제물을 바치고 있을 때, 필리스티아인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다가왔다. 그날 주님께서 필리스티아인들 위에 큰 소리로 천둥을 울리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자,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패배하였다”(10). 10절을 보면, 사무엘이 번제물을 바치고 있을 때 필리스티아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께서는 천둥을 울리신다. 천둥은 주님의 전쟁에서 무기로 자주 등장한다(2,10; 2사무 22,14). 주님의 전쟁에서 야훼 하느님께서는 전쟁 무기로 번개, 우박, 어둠, 별들, 질병 등 자연현상을 이용하시는데, 여기서도 천둥 때문에 필리스티아인들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모든 싸움은 야훼 하느님께서 수행하시고 이스라엘은 다만 잔당을 소탕할 뿐이다(11절). 주님의 전쟁 기사는 이스라엘이 도망치는 적들을 쳐부수거나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었다는 진술로 끝맺는 경우가 많다(탈출 14,38; 판관 4,16).
“사무엘은 돌을 하나 가져다가 미츠파와 센 사이에 세우고, ‘주님께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며, 그 돌의 이름을 에벤 에제르라 하였다”(12). 12절의 “에벤 에제르”는 ‘도움의 돌’이라는 뜻으로, 4장 1절과 5장 1절에 언급된 곳과는 다른 장소일 것이다. 이 기사는 신학적 원인론을 제공한다. 야곱이 베텔에서 있었던 하느님 체험을 기념하기 위해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을 세웠듯이(창세 28,18.22), 사무엘은 이곳에 주님의 구원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돌을 세운 것이다. ‘기념 기둥’이라는 표현은 빠지고 그냥 ‘돌을 세웠다.’고 한 것은 ‘기념 기둥 세우기’를 반대하는 신명기 사가의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신명 16,22).
12절의 ‘에벤 에제르’는 그 표현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으로 원래의 기사는 이 문장으로 마쳤을 것이다. 미츠파 근처의 에벤 에제르에서 주님께서 위대한 승리를 거두신 사건은 아펙 근처의 다른 에벤 에제르에서 계약 궤를 빼앗기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과 드러나지 않게 대조를 이룬다.
13-14절 역시 ‘필리스티아인들이 꺾이다.’ ‘야훼(주님)의 손이 필리스티아인들을 억누르다.’ ‘아모리족’ 등의 표현들로 미루어 신명기계 역사가의 문체이다. 여기서는 필리스티아인 문제를 사무엘 시대에 완전히 해결했다고 하는데, 사실 필리스티아인들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다윗 시대의 일이다(2사무 5,17-25). 그래서 이 기사는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도록 중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예언자로서의 사무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무엘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는 해마다 베텔과 길갈과 미츠파를 돌며,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판관으로 일하였다”(15-16). 15-17절에서 위대한 판관이자 예언자이고 사제인 사무엘의 통치 아래서 만사가 질서정연하고도 원활하게 잘 돌아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필리스티아인마저 저지된 상태였다. 따라서 신명기계 역사가는 임금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렸다고 하나, 그의 순회 판관으로서의 역할은 가나안 중부 지역의 비교적 좁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전 이스라엘의 판관이었다고 기록한 것은 후대의 확장된 해석이라 하겠다.
17절에서 사무엘이 고향 라마에 제단을 쌓았다는 기록은 고대의 전승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 제단을 쌓는 것을 불법으로 여기는 신명기계 역사가가 이를 추가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계약 궤가 아직 예루살렘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사무엘의 이러한 행위는 그다지 무리한 행동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로써 신명기계 역사가는 사무엘 시대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왕정이 불필요했다는 이야기를 왕정 시작 전에 배치해 놓았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주님께서 사무엘 살아생전에 이스라엘에게 필리스티아인으로부터 완전한 승리를 주셨다고 본 것이다. 그는 사무엘의 역할이 비록 군사적 영웅과는 달랐을지라도 다른 판관들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본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사무엘 시대처럼 끊임없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충실했다면 기원전 722/721년과 587년에 있었던 북왕국과 남왕국의 패배는 피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1사무 8,1-22 백성이 임금을 요구하다
지도자로서 사무엘의 삶은 다해 가는데, 사무엘이 판관으로 임명한 그의 아들들은 판관으로서 바른 길을 걷지 않았다. “사무엘은 나이가 많아지자 자기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판관으로 내세웠다. 맏아들의 이름은 요엘이고, 둘째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였다. 이들은 브에르 세바에서 판관으로 일하였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그의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잇속에만 치우쳐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그르치게 내렸다”(1-3).
그런데 이스라엘의 적들, 특히 필리스티아인들은 점점 기반을 구축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을 자기네 지배 아래 종속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원로들 중 현실론자들이 사무엘에게 임금을 요구한다.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5절)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고유한 신앙에 기반을 둔 사무엘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이 신앙이야말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고, 다른 민족들과 구별지어 주며 그들만의 독특한 고유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되 대신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이 어떻게 할지 미리 경고해 두라고 지시하신다.
사무엘은, 임금은 사치를 위해 세금을 거둘 것이요, ‘여러분마저 그의 종이 될 것’이라는 임금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을 경고한다. 이 백성은 한때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어야 하건만 이제 그들은 또다시 종이 되려고 아우성치며 임금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는 처지이기에 임금을 바라는 원로들의 요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며 합리적이다. 다른 민족들, 특히 필리스티아인들은 임금과 같이 당당한 지도자를 두었고 그로 인해 안정된 세금 제도를 제정하여 언제든지 자신들을 방어할 태세를 갖춘 잘 훈련된 상비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무엘과 판관들 아래서의 체제는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그 결과 원로들은 그런 체제로는 자신들을 지키기에 미흡하고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로들은 또한 모든 지파를 한데 모아 막강한 군대를 형성할 수 있는 안정된 임금을 세울 경우 지파들이 큰 힘을 갖게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러한 군대라면 필리스티아를 비롯하여 자기들에게 대적해 오는 그 어떤 민족이라도 능히 쳐부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일단 전쟁에서 이기고 나면 임금은 나라 전체에 정의가 실현되도록 보살피게 될 것이다. 원호들은 이런 이유들을 내세워 임금을 요구했을 테고, 왕정을 배척하기 이전에 우선 시행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8장에도 ‘(주님를) 배척하다(7절), (주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8절),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다, 야훼(주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18절).’ 등 신명기계 역사가의 특징이 담긴 표현들이 많다.
1-3절의 본문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판관으로 임명된 것이 사무엘을 대신하는 역할인지 아니면 사무엘이 가기 힘든 먼 곳에 그들을 파견하여 사무엘의 짐을 덜어주려는 것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또한 왜 두 아들을 동시에 브에르 세바의 판관으로 임명했는지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사무엘의 맏아들 ‘요엘’의 이름은 ‘주님은 하느님이다.’라는 뜻이고, 둘째 아들 ‘아비야’의 이름은 ‘주님은 나의 아버지.’라는 말로 매우 경건한 뜻을 지녔으나 그들의 행동은 엘리의 아들들처럼 죄로 가득하다(1사무 2,12-17 참조).
4-5절에서 사무엘을 찾아간 이스라엘 원로들은 사무엘의 아들들보다 더 의로운 판관이 아니라 다른 모든 민족들과 같은 임금을 세워 달라고 청한다. 신명기에 있는 임금에 관한 법 역시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들과 같은 임금이 언급된다(신명 17,14).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7). 6-9절에서 마음이 언짢아진 사무엘은 주님께 기도하면서 이스라엘을 중개하는 대신 불평을 털어놓은 것 같다. 주님께서는 백성이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왕권을 배척한 것이라며 사무엘에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 주라고 하신다. 판관기 8장 22-23절의 기드온도 임금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주님의 왕권에 대한 배척으로 이해했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스라엘 백성이 임금을 원하는 것을 주님을 배척하는 것으로 본다(1사무 10,19; 12,12). 그런데 백성이 주님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임금을 승인한 합리적인 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런 짓을 저질러 왔는데, 그 모든 짓을 너한테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8). 8절에서는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은 주님을 저버렸다고 한다. 이로써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죄는 사무엘 시대의 백성뿐만 아니라 이집트 탈출에서부터 당시인 바빌론 유배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고발한 것이다. 그 죄란 신명기계 역사가가 자주 사용하는 말인 ‘주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11-17절에 제시된 ‘임금의 권한’은 신명기계 역사가가 편집하기 이전부터 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왕정 제도의 남용을 오랫동안 체험하고 왕정주의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임금이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관심이 전혀 없고 백성들의 재산을 임금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할 것이며, 그런 임금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선택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경고한다. 그런데 사무엘이 경고한 왕권 내용은 사실 사울 임금때로 볼 수는 없다. 사울의 왕국은 매우 소박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경고는 사울보다는 다윗 혹은 솔로몬 임금 시대의 왕권에 더 적절해 보인다.
“”사무엘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오”(11). 11절에는 솔로몬의 병거대가 암시되고, 14절에는 나봇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가 되는 토지 수탈에 대한 비판이 암시되고 있다. “그는 여러분의 가장 좋은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밭을 빼앗아 자기 신하들에게 주고, 여러분의 곡식과 포도밭에서도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 내시들과 신하들에게 줄 것이오”(14-15). 그러나 다른 한편 여기에 묘사된 임금의 폭정은 시리아 설형 문자(우가리트 말)로 된 문헌을 통하여 기원전 2천 년대부터 잘 알려진 사실들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 추론대로라면 이 대목에서 사무엘은 이 제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다. 이 왕정은 이제까지의 종교 전통들과도 맞지 않고 자신의 소유권을 자유롭게 지켜 오던 사회 풍습에도 맞이 않는다. 이런 풍습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외부의 침략을 더 효과적으로 막아 내려고 왕정을 받아들이고 임금에게 자기 소유권을 넘겨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제야 여러분은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18). 18절에서 신명기계 역사가는 왕권에 대해 세속적 평가에서 신학적 평가로 옮겨 간다. 즉, 이스라엘이 임금에게 압제를 받게 될 때, 이스라엘은 판관 시대처럼 주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청할 테지만, 그 임금은 주님이 선택한 게 아니라 그들이 선택했기 때문에, 주님은 응답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이다.
19-22절에서는 이러한 경고에도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거듭 임금을 요구한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스라엘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주 고발한다(2열왕 17,14등).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어라.’ 하고 이르셨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마다 자기 성읍으로 돌아가시오.’ 하고 일렀다”(22). 22절에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거만한 반응을 주님께 다시 전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어 그들에게 임금을 세워 주라고 하신다.
본문은 임금을 요구하는 것을 추악한 우상 숭배에 비교하면서 그 요구를 지종일관 주님께 대한 거부로 본다. 이러한 주님에 대한 거부는, 사무엘이 언짢은 마음을 백성에게 드러낸 후에도, 그리고 주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경고를 주신 후에도 계속된다.
그럼에도 주님의 놀라운 관용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자비를 보여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자비는 일찍이 가나안 정복 때 보여 주셨고, 판관 시대에도 반복된 구원 행위로 보여 주셨다. 왕정은 전혀 자격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주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이 왕정은 백성의 죄스러운 요구에 따른 해로운 결과를 막을 어떤 수단이 필요하다. 신명기계 역사가는 이러한 신학적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을 12장에 제시한다.
1사무 9,1-27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다
9장 1절-10장 27절의 본문은 사울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경위에 관한 상이한 몇 가지 전승을 보여 준다.
1) 나귀를 찾아 나섰다가 왕관을 받은 소년 - 아버지 키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려 사울이 종을 데리고 암 나귀를 찾아 나섰다가 사무엘을 만나 기름부음을 받고 임금으로 지명되었다(1사무 9,1-10,16).
2) 사무엘이 백성들을 미츠파로 모두 모이게 하여 제비를 뽑은 결과 사울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뽑아 놓고 보니 사울은 다른 모든 백성보다 키가 어깨 위만큼 컸다(1사무 10,17-24).
3) 사울이 암몬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물리친 공로를 인정받아 길갈에서 임금으로 추대되었다(1사무 11장). 이 이야기에는 판관 시대의 카리스마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1사무 11,6).
여기서 2)는 사울에게 찬사를 보내지만 임금을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스러운가를 보여준다. 제비뽑기로 뽑혔다는 것은 우연에 따른 선택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키스의 아들 사울의 소개는 조상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시작되고 그의 잘생긴 용모가 강조된다(1-2). “벤야민 지파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키스였다.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고 츠로르의 손자이며, 브코랏의 증손이고 아피아의 현손이었다. 그는 벤야민 사람으로서 힘센 용사였다. 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은 사울인데 잘생긴 젊은이였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그처럼 잘생긴 사람은 없었고, 키도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은 더 컸다”(1-2).
벤야민 지파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던 12지파 중의 하나로서(민수 1,37), 이 지파의 선조인 벤야민은 야곱의 막내 아들이다(창세 35,16-18). 한편 이 벤야민 지파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유다 지파와 에프라임 지파 사이의 땅을 분배받았다(여호 18,11). 그러나 이 지파는 불명예스럽게도 판관 시대 말기에 레위인의 첩을 범함으로 말미암아 죽게 한 사건으로(판관 19,22-30),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의 징계를 받아 그 지파의 상당수 남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판관 20,29-44). 그때 벤야민 지파의 살아 남은 장정의 수는 불과 600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판관 20,47). 그러므로 이후 벤야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숫적으로 가장 미약한 지파가 되었는데, 바로 이 지파 중에서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나왔다는 사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즉 이스라엘 초대 왕이 수행하여야 할 선결 과제는 무엇보다도 각 지파 간의 결속과 단결을 공고히 하는 일이었는데, 바로 그 일을 이스라엘의 막내 지파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머지 각 지파간의 불필요한 상호 견제, 시기, 경쟁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울의 아버지 키스는 벤야민 지파가 레위인의 첩을 범 사건으로 말미암아 다른 지파들로부터 징벌을 당할 때, 그 징벌을 피하여 '림몬 바위'로 도망하였던 600 명의 벤야민 사람 중의 한 사람이거나, 혹은 그의 후손이었을 것이다(판관 20,47).
'사울'(Saul)이라는 이름은 '구하여 얻은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이는 의미심장하다. 즉 '사울'은 이미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자신이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질 이스라엘의 왕임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이 잘생긴 젊은이라는 것은 그의 미적(美的)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울의 풍채가 뛰어남을 말해준다. 키는 사람의 외모를 판단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사울의 장대한 신체는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자신들을 다스려 줄 왕을 요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는 이야기를 통해 사울과 종은 암나귀를 찾아 헤매다가 사울을 종에게 돌가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종은 하느님 사람이 있으니 그를 만나도록 한다. “그러자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성읍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한 분 살고 계십니다. 그분은 존경받는 분이신데,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들어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거기에 한번 가 보십시다. 혹시 그분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실지도 모릅니다”(6).
여기서 '이 성읍'은 춥족의 라마타임(1,1), 곧 라마(1,19)를 가리킨다.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무엘이 그의 판관직과 제사장직을 수행 하던 근거지였다(7,17). 한편 '하느님의 사람' 은 하느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직무를 담당하던 '예언자'에 대한 일반적 명칭이다.
종은 사무엘의 예언자되심을 온전히 믿었다. 물론 종이 하느님의 예언자를 판관으로 생각하면서 점(占)을 치는 사람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 생활에 관한 제반 문제들까지도 사무엘에게 문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이란 사울과 종이 길을 잃어버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암나귀를 찾을 수 있는 방법과 장소를 알고 싶어한 것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고찰할 사실은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를 사환이 먼저 꺼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당시 사울이 사무엘의 존재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런것 같지는 않다. 일개 종이 알고 있었던 지식을 유력한 집안의 아들인 사울이 전혀 몰랐을 리 없다. 다만 나귀를 정신없이 찾는 중 라마성 근처에 이르자, 사울의 종이 먼저 그 사실을 깨닫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이어지는 7절에서 사울이 하느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의 풍습까지 알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확실하다.
일반적으로 중근동 지방에서는 존경하는 어른을 방문할 때 그의 신분에 걸맞는 예물을 지참해 가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이러한 관습은 성경에서 선견자에게 무엇을 물으러 가는 경우와 관련하여 많이 나타난다(1열왕 14,3; 2열왕 4 ,42). 사울은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갈 빵도 예물도 없기에 망설였지만 종이 은 사분의 일 세켈을 내놓는다. 은 한 세켈의 사분 일이란 주조(鑄造)된 은화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헬레니즘 시대까지는 은화 및 동전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은 한 세겔은 약 11.5g에 해당되며, 따라서 사분 일(1/4) 세겔은 약2.9g이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하느님께 문의하러 가는 사람은 “선견자에게 가 보자!”고 하였다. 오늘날의 예언자를 옛날에는 선견자라고 하였던 것이다”(9).
당시 우림과 툼밈으로 하느님의 뜻을 묻던 계시 수납의 방식이(탈출 28,30)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결국 이것은 그 당시 제사장의 권위가 현저히 떨어졌고, 그 역할도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선견자란(로에)는 '보다'(see)라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 곧 '보는 자'(seer)라는 의미이다. 이 명칭은 '예언자'(나비)라는 명칭이 아직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사용된 명칭으로서, 주로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계시를 '보는' 측면에 강조점을 둔 고대적 명칭이다.
사울은 종의 충고를 듣고 선견자인 사무엘을 만나가 라마 성읍으로 간다. 초기의 사울은 종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만큼 진지하고 겸손했다. 그리고 이러한 겸손의 자세는 왕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 사울의 겸손의 모습은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주관적으로 행동한 망령된 제사 사건(13,8-14) 이후 점차 퇴색되고, 오히려 교만한 자로 바뀌어 갔다.
라마 성읍에서 물을 길러 나온 차녀들을 만나 선견자가 어디에 있는 알고 사무엘과의 만난다. 그들은 성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비탈길을 더 올라갔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라마'는 두개의 고지대로 형성된 마을인데, '바마'(산당)는 그 중 하나의 고지대 위에 위치했음이 분명하고, 그리고 성읍은 아마도 두고지 중간 쯤에 위치했을 것으로 본다.
“그들은 성읍으로 올라갔다. 성읍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마침 사무엘이 산당으로 올라가려고 나오다가 그들과 마주쳤다”(14). 사무엘과 사울의 이 만남은 하느님의 적극적인 섭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이어 나오는 15, 16절에서 밝히 설명되고 있다. “사울이 오기 하루 전에 주님께서는 사무엘의 귀를 열어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일 이맘때에 벤야민 땅에서 온 사람을 너에게 보낼 터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라. 그가 내 백성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해 낼 것이다. 나는 내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15-16).
사울의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일(3절)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3절). 즉 하느님께서는 때를 맞춰 사울의 아버지가 그에게는 귀중한 암나귀를 잃게 하였고, 그에 따라 그 아들 사울로 하여금 암나귀를 찾아 나서도록 하게 하심으로써, 결국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도록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것이다.
기름부음의 의식(儀式)은 왕이나 제사장 혹은 예언자 등을 거룩히 구별하여 임직할 때 행하는 상징적 의식이다(탈출 29,7; 1열왕 1,39;19,16). 고대 중근동의 풍습에 따르면, 기름 부음의 행위는 무엇을 거룩히 구별할 때 베푸는 상징적 행위였다. 즉 이같은 의식을 통하여 고대 중근동 사람들은 사람이나 물건을 세속적인 용도로부터 구별하려고 했었다. 한편, 고대 아마르나 서신(Amarna Letters)은 기원전 14세기에 시리아나 가나안 지역 등지에서 왕이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기름 부음 의식이 그 주변 국가들의 그것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의 기름 부음 의식은 특별히 하느님의 거룩성이 반영되고, 하느님의 영이 개입되는 독특성을 지닌다.
하느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직접적 목적이다. 사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의 압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사무엘의 미츠파 전투 대승리 이후(7,7-11) 필리스티아로부터 잃어버린 입지(立地)를 많이 회복하기는 하였지만(7,1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필리스티아의 계속되는 위협과 압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그로 인해 백성들은 하느님께 부르짖었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벤야민 지파의 사울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군사적 목적을 수행토록 하셨던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그러한 목적을 수행할 인물이 벤야민 지파 출신이라는 점은 적절하다. 첫째 그 지파의 혈통적 성격상 호전적(好戰的)이었고, 둘째 그 지파의 지리적 위치상 필리스티아와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물 길러 나오는 소녀들의 안내대로 사울이 성읍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막 들어서자, 때마침 제물 축사를 위해 성읍에서 산당으로 가고자 성물을 나오는 사무엘을 만났던 것이다. 처음에 사울과 종은 사무엘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사울이 사무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사무엘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어떤 치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 선견자요, 앞장서서 신당으로 올라가시오”(19)라는 말은 사무엘이 사울을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존중히 여기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두 분은 오늘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내일 아침에 가시오”(19)라는 말은 사무엘이 사울과 함께 온 종까지도 한 식탁에 앉게 한 것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사무엘이 그 종의 주인되는 사울을 가볍게 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때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도 다 알려 주겠소”(19) 여기서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일'은 단순히 암나귀를 찾아야 하는 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예언자로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보다 중요한 일을 알려주겠다는 뜻으로, 구체적으로는 필리스티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 하는 일, 또는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에 관한 일 등을 예언자의 자격으로서 사울과 대화를 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울로 하여금 그 자신이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하느님에 의해 지명되었음을 깨닫게 해줄 말한 내용에 관한 것임이 분명하다.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 자신이 사울이 찾는 선견자임을 밝히고, 신당으로 그들을 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이 묻기도 전에 먼저 암나귀에 관한 언급을 한 뒤 그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자신이 신뢰할 만한 하느님의 선견자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같은 언급은, 사울이 하느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졌음을(16절) 알려야 했던 사무엘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다. 그리고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의 모든 기대가 사울에게 걸려 있다고 말한다. 이에 “사울이 대답하였다. ‘그렇지만 저는 이스라엘의 지파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고 저의 가문은 벤야민 지파의 씨족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보잘것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21).
이는 사울의 왕권(王權)을 암시하는 예언자 사무엘의 말(20절)에 사울이 겸손히 대답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련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 초기 사울은 겸손, 성실, 효성의 덕(德)을 지닌 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의 이러한 인간적인 덕도 주님을 향한 선실한 신앙에 뿌리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르고 백성들의 인기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사라져 결국 교만한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경우는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야고 4,6)는 진리를 입증한 경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울의 겸손한 발언 저의에는 실제로 이스라엘 12지파 간의 세력 분포에 관한 현실적 이해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벤야민 지파는 역사적으로 숫적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 더욱이 사울의 이같은 말 속에는 판관기 20장에서 발생했던 내전의 상흔이 아직까지 벤야민 지파에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무엘은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사울과 함께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성읍 끝가지 내려가다가 둘 만 함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이 성읍 끝까지 내려갔을 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종더러 우리보다 앞서 가라고 이르시오. 종이 앞서 가고 나면, 당신은 잠시 서 계시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겠소”(27).
1사무 10,1-27 사무엘이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다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계시를 통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처음에 사무엘은 이를 은밀하게 진행한다. “사무엘은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을 맞춘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그분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1). 그리하여 사울이 첫 임금으로 ‘기름부음 받은 이’ 또는 구약 성경의 ‘메시아’가 된다. 이 기름부음은 영구적이며 사울이 나중에 하느님에게서 배척당한 후에도 유지된다(24,7 참조). 이 모든 것은 사실 ‘사울의 마음을 바꾸어 주신’(10,9) 하느님의 일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새로운 왕권(10,16)을 둘러싼 비밀을 듣게 된다.
사무엘은 은밀하고 갑작스럽게 사울에게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다고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사물엘은 사울의 개인적 영적체험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암나귀를 찾는 다는 말과, 타보르 참나무에서 베텔로 가는 세 사람을 만나다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빵 두 덩이를 받는다는 말, 기브아 엘로힘에서 예언자들이 황홀경에 빠져 예언할 것을 목격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주님의 영이 당신에게 들이닥쳐, 당신도 그들과 함께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면서 딴사람으로 바뀔 것이오”(6).
구약 시대에 '주님의 영' 곧 하느님의 영(창세 1,2)이 임하는 일은 하느님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지도자에게 때와 필요를 따라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이것은 곧 하느님께서 그 지도자를 택하고 인정하셨다는 확증일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일을 통하여 그 지도자에게 맡긴 일을 잘 수행토록 특별한 은사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구약 시대의 성령의 임재는 때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임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때로 떠나가기도 했기 때문에(16,14), 그 본질상 오순절 이후 임하는 성령, 곧 구원의 문제와 관계된 신약 시대와는 다른 것이다.
“당신도 그들과 함께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면서 딴사람으로 바뀔 것이오”라는 말에서 사울이 한 '예언'도 예언자의 무리가 한 것과 동일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사울 역시 예언자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그 마음이 감동되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이때 사울에게 있어 이 예언은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음을 확증해 주는 외적 증표의 하나요, 아울러 그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 부음 받았음을 확증해 주는 내적 증표가 되었다.
“사울을 전부터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언자들과 함께 황홀경에 빠져 예언하는 것을 보고, ‘키스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지?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인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11). 본절에서는 주님의 영을 받은 사울의 행동이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할 정도로 매우 낯선 것이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들은 사울 가문의 위치(9,1) 때문에 사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사울의 고향 기브아의 사람들, 또는 하느님께 경배하기 위해 '주님 산', 곧 주님의 제단이 있는 '기브아'를 찾아온 기브아 근처의 주민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무슨 일'은 사울이 전혀 새 사람이 되어 예언자들의 무리 중에서 예언한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결국 이전의 사울의 모습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놀랄만큼, 변한 사울의 행동이 전혀 낯설게 느껴졌음을 암시해 준다.
‘사울도 예언자들 가운데 하나인가’라는 말에서 당시, 사람들은 사울이 예언자들과 함께 예언자 학교에서 훈련받지 않았던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그가 그같은 훈련을 받기에 적당한 자질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인하여 그들은 지금 사울의 낯선 행동에 대하여 이같이 놀란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울은 이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상황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경배드리기 위하여 주님의 제단이 있는 기브아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사울은 삼촌을 만나 암나귀르 찾기 위해 사무엘에게 갔고 암나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만 하였다. 사울은 사무엘이 왕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사울이 임금으로 선출되는 과정은 은밀하게 진행된다. 사울이 기름부음 받은 것도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사울이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것도 예언자의 접신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사울의 왕위 등극을 비밀스럽게 다루는 이유는 전략상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무엘이 백성을 미츠파로 불러 주님 앞에 모아 놓고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나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다. 내가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그리고 너희를 억누르던 모든 나라의 손에서 너희를 빼내었다.’ 그런데도 오늘 여러분은, 온갖 재앙과 재난에서 여러분을 구해 주신 여러분의 하느님을 배척하면서, ‘안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임금을 세워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소. 그러니 이제 지파와 씨족별로 주님 앞에 나와 서시오”(17-19).
'미츠파'는 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이기 좋은 지리적 이점이 있으며(7,5), 이스라엘을 오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게 했었던 기념비적 장소(7,6)라는 점들 때문에, 사무엘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집합할 곳으로 다시 선택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백성'은 실제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각 지파의 대표자들일 것이다.
‘주님 앞에 모아 놓고’라는 말에서 구약 성경에서 '주님 앞에'란 표현은 종종 주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주님의 궤나 성막 또는 대제사장의 우림이나 툼밈 앞에 모이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선출을 위해 제비 뽑으려고 모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마도 '우림과 툼밈'을 대제사장이 가지고 모인 듯하다. 아울러 이것은, 사무엘의 백성 소집이 신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18절은 주 하느님께서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위대한 구원의 은총을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같은 언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왕들로부터 구원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또한 그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행동이 지극히 어리석고 경솔한 것이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을 배척하면서... 임금을 세워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소”라는 말에서 사무엘은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곧 하느님께 대한 반역 행위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히고 있다(8,7). 아울러 사무엘은 여기서 왕을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므로, 장차 그 왕으로 인해서 당할 고통도 그들 스스로가 친히 담당해야 될 것을 암시적으로 경고하고 있다(8,9-18).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자 벤야민 지파가 뽑혔다. 다시 벤야민 지파를 씨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자 마트리 씨족이 뽑혔고, 이어 키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20-21). 20절에는 어느 지파, 그리고 그 지파의 어떤 가족, 또한 그 가족의 어떤 인물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여기와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는 인물을 선택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제비뽑기가 성경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여호 18,6,8). 성경에 언급된 이같은 제비 뽑기 행위는 그 결과가 전적으로 신적인 섭리에 따라 나타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잠언 16,33).
마트리의 씨족이라는 말에서 '마트리'(Matri)는 '주님의 비'란 뜻의 이름으로, 사울 가문의 족장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 사람의 이름은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이어서 키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다. 제비는 마트리의 씨족 중 다시 키스의 집으로 떨어졌고, 마침내 키스의 집안 중 사울에게 떨어짐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나타났다(9,16). 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비뽑기가 신적인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당시 하느님께서는 종종 그러한 방법으로 활동하였으므로(민수26,55), 여기서 사울이 제비에 뽑힌 것은 하느님의 뜻이자, 또한 사울왕국의 정통성이 확보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주님께, ‘그 사람이 여기에 와 있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기 짐짝 사이에 숨어 있다”(22).
사울은 사무엘의 기름 부음(1절)과 여러가지 징조들(2-6)을 통해 이미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느님께 선택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이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에서 혹 일어날지도 모를 여러 가지 사건들을 두려워 했거나, 아니면 그의 소심하고 부끄러워하는 성격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겸손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이미 사울이 하느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택 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9,15-17), 제비의 방식에 의해서 그가 뽑히자 사무엘은 사울이 하느님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백성에게 왕정의 권한을 설명하고, 그것을 책에 적어 주님 앞에 두었다. 그런 뒤에 온 백성을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다”(25).
여기 '왕정의 권한'이란 곧 신정 국가의 왕이 지켜야 될 기본적 의무 조항들을 가리킨다(신명 17,14-20). 즉 이방 국가들의 왕의 제도(8,11-17)가 백성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왕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한 것이라면, 여기의 '나라의 제도'는 오히려 왕이 하느님의 주권 앞에서 겸허하고 백성들을 하느님의 율법으로 잘 다스리는 신정(神政) 국가 하에서의 '왕권의 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책에 적어 주님 앞에 두었다’라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종주권(宗主權) 계약시에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즉 그 당시 중근동에서는 왕이 봉신(封臣)과 계약을 맺으면서, 그 봉신이 왕 자신에 대하여 이행해야 할 의무를 책에 기록하여 봉신이 섬기는 신의 신당(神堂)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봉신은 책에 기록된대로 왕에게 충성을 다바쳐야만 했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무엘의 이 같은 행위는 사울로 하여금 하느님께 대한 의무를 바로 이행케 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어졌음이 분명하다. 이 같은 점에서 사울은, 그가 비록 이방국가와 같은 왕이 되기를 바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8,5.20) 세워졌지만, 그러나 그는 이방의 왕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 전혀 달라야 했다. 즉 사울은 절대 권력자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나라와 백성을 통치해야만 했다.
‘주님 앞에 두었다’라는 말은 실로의 성소 안에나 혹은 주님의 궤 앞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당시 실로의 성소는 이미 파괴되었고(4,10), 주님의 궤는 여전히 키르얏 여아림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7,1.2).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주님의 권위 아래 엄숙히 보관된 사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사울도 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용사들도 그와 함께 갔다”(26).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울의 통치권 행사가 잠정적으로 보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그때 자신의 고향 기브아를 수도로 삼아 백성들을 다스리려고 했던 것이다(11,4). 물론 당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나름대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또한 왕을 위한 궁전이나 신하 또는 행정기구 등이 아직 미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사울이 자신의 고향으로 간 후 얼마간 지도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용사들도 그와 함께 갔다’라는 말에서 이들은 사울이 하느님에 의해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되었음을 분명히 깨달은 자들이다. 곧 당시 사울을 자신들의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호위한 용감한 자들을 가리킨다. 용사들은 평생 사울과 더불어 전쟁을 치르면서 군대의 기초가 될 용사들이다.
그러나 사울에 대해 부정적 측면을 보았던 몇몇 불량한 사람들은 사울을 왕으로 모시는 것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몇몇 불량한 자들은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 하면서, 사울을 업신여기고 그에게 예물도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7). 불량한 자들이란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새로이 선택된 왕을 거역하며, 또한 나라의 평화를 깨뜨린 자들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 특히 강성했던 유다 지파나 에프라임 지파에 속한 자들일지도 모른다(민수 1,27,33). 즉 이들은 분명 가장 작은 벤야민 지파에서 자신들의 왕이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매우 탐탁치 않게 여긴 듯하다. 그들은 사울이 작은 지파의 출신이어서 강력한 지파의 후원을 받지 못할 것으로 보고 ‘이 친구가 어떻게 우리를 구할 수 있으랴?’ 반문을 한 듯하다. 물론 그들은 이같은 외적 사유 외에 사울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선택되었음을 믿지 않았던 중요한 내적 사유에 따라 사울을 반대하였음이 분명하다. 불량한 자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선택된 사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은 사울을 왕으로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골적인 표현이며,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곧 사울에 대한 멸시 행위이자 심각한 도전 행위임이 분명하다.
1사무 11,1-15 사울이 암몬족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르다
이제 사울은 백성에게 신앙과 전통 속에서 인정받을 만한 조건들을 채웠다. 이 본문은 사울이 어떻게 탁월한 위치로 올라서게 되었는지 잘 설명한다. 사울은 기드온과 매우 흡사하게 지파들을 불러 모아 적과 싸운다. 협력하지 않은 지파들을 응징하겠다고 위협하는 것 역시 기드온과 흡사하다. 사울은 판관처럼 참괸 지도자요, 위대한 전사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다.
백성은 드디어 사울을 인정하고 기드온에게 했듯이(판관 8,22) 그에게 임금이 되어 달라고 청한다. 여기까지는 판관들과 같은 전통적인 형태이다. 즉, 어떤 한 인물이 지도자요 용감한 전사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과정이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야베스 길앗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야베스 사람들이 모두 나하스에게 말하였다.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소”(1). 1절의 암몬 임금 나하스는, 사무엘기 하권 10장 2절에 의하면 후에 다윗에게 자애를 베풀고, 사무엘기 하권 17장 25절에 의하면 아비가일의 부모로 나온다. 이런 구절들은 나하스가 다윗과 친분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희 오른쪽 눈을 모두 후벼 내어 온 이스라엘에 대한 모욕으로 내놓는다는 조건 아래 너희와 계약을 맺겠다.” 하고 대꾸하였다”(2). 2절에서 나하스는 야베스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빼야만 그들과 조약을 맺겠다고 한다. 눈멀게 하는 이야기로는 필리스티아인들이 삼손의 두 눈을 파 버린 이야기와 바빌론 사람들이 치드키야 임금의 눈을 멀게 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의 핵심은 육체적인 의미를 넘어 눈을 멀게 함으로써 인간의 온전성을 훼손하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야베스 사람들의 치욕은 온 이스라엘의 치욕이므로 사울은 전쟁을 선택한다.
2절에서 나하스가 항복 제의를 매몰차게 거절한 이유와 이스라엘 전역에 사람을 보내어 ‘구원자’를 구하도록 허용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나하스이 거만함이나 절대적인 군사적 우월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야베스 원로들은 암몬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줄 구원자를 찾았다. 지파 동맹 시절에 판관들이 행했던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자로서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구원자로 행동했던 분은 야훼 하느님 혹은 그분이 임명하신 영웅(판관)이다. 전령들은 곧바로 사울에게 파견되지 않고 구원자를 찾기 위해 이스라엘 전 지역으로 흩어진 것 같다. 그래서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 가서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자 백성들이 목놓아 운다. 이 본문의 해설자는 10장 17-26절에서 사울이 이미 임금으로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사울은 평소대로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야베스 길앗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야베스 사람들은 후에 사울이 필리스티아인과의 전쟁에서 죽자 그의 시체를 빼내어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 준 것으로 보답한다(1사무 31,1-13; 2사무 2,4-7).
“이 소식을 듣는 순간 하느님의 영이 사울에게 들이닥치니, 그의 분노가 무섭게 타올랐다”(6). 6절에서 사울이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마치 부족 동맹 시절의 판관(구원자)차럼 하느님의 영이 사울에게 들이 닥친다. 이로 인해 사울은 주님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된다. 무섭게 타오른 사울의 분노는 그가 주님의 영에 사로잡혔다는 표징이다.
“사울은 겨릿소 한 쌍을 끌어다가 여러 토막을 내고, 그것을 전령들 편에 이스라엘의 온 영토로 보내면서,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따라나서지 않는 자의 소는 이 꼴이 될 것이다.’ 하고 전하게 하였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백성을 사로잡자 그들은 하나같이 따라나섰다”(7). 7절에서 사울의 첫 번째 행동은 겨릿소 한 쌍을 끌어다 여러 토막으로 잘라 무장 소집의 요구로 이스라엘 전역에 보내는 것인데, 이 전쟁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을 토막 난 황소로 협박하는 것이다. 이런 저주 형태는 능욕당한 소실의 몸을 열두 조각내어 이스라엘 전역으로 보낸 레위인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판관 19,29-30). 여기에 나오는 “사무엘”은 아마도 후대에 첨가한 내용일 것이다.
8절에서 사울이 집결지 베젝에서 사열하여 보도한 군대의 숫자는 지나치게 크고 또 시대착오적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별은 사울이 죽은 후 왕정 체제가 분열된 상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9절에서 사울은 야베스 길앗에 전령을 보내 임박한 구원을 전해 준다. 약속된 구원의 시간은 ‘내일 햇볕이 뜨거워질 때’이다. 기쁨에 찬 야베스 사람들은 10절에서 암몬 사람들에게 항복하겠다고 거짓 전갈을 보낸다.
11절에서 공격은 다음 날 시작되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 식에 따르면 같은 날 일몰 후를 말한다. 그들은 뜨거워질 때가지 암몬군을 무찔렀는데, 그 대량 살상이 너무나 완벽해서 두 명 단위의 암몬 사람 그룹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백성이 사무엘에게 말하였다. ‘사울 따위가 우리 임금이 될 수 있겠느냐?’ 하던 자들이 누굽니까? 그런 자들을 죽여 버리겠으니 우리에게 내주십시오.’ 그러나 사울은 ‘오늘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구원을 이루어 주신 날입니다. 이런 날 아무도 죽임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하였다”(12-13).
12-13절에서 전투 이후 백성들은 사울의 구원 능력을 의심함으로써 주님을 비방했음이 암시된 몇몇 불량한 자들을 중벌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면한다. 사울은 그날 승리의 원천이 주님임을 인정하고 자신은 어떠한 공훈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로써 사울은 미래의 임금으로서 종교적, 법적 분야의 책무를 행사한다.
전투가 완료되고 사울에 대한 모략이 해결되자, 14절에서 사무엘은 백성을 길갈에 있는 옛 성소로 모이게 했다. 이곳은 사무엘이 순례 판관을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편집자는 여기서 사무엘이 단순히 왕권의 갱신만을 제안하게 한다. 15절에서 사울의 왕권에 대한 실제적인 선포는 모든 백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후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친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자, 길갈로 가서 왕정을 새롭게 다집시다.’ 하고 말하자, 온 백성은 길갈로 가 주님 앞에서 사울을 임금으로 세우고, 주님께 친교 제물을 바쳤다. 거기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14-15). 길갈 성소에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합당한 의식들과 기쁨의 환호로 사울을 임금으로 선포했다.
이 이야기에 나타난 사울은 말 그대로 최고의 임금이었다. 압제 받던 사람들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수치에서 건지도록 부르심 받은 주님의 대행자였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지도 않았으며 백성의 재산을 착취하거나 백성을 종으로 삼지도 않았다. 이는 아마도 사울의 경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사울은 다소 변화된 상황과 형식 속에서 판관시대의 부족 동맹 체제를 발전시킨 초대 임금이었다.
1사무 12,1-25 사무엘의 고별사
“여기 내가 있으니 나를 고발할 일이 있거든, 주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 앞에서 하시오.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거나 누구의 나귀를 빼앗은 일이 있소? 내가 누구를 학대하거나 억압한 일이 있소? 누구에게 뇌물을 받고 눈감아 준 일이 있소?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여러분에게 갚아 주겠소”(3). 3절에서 사무엘은 백성에게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지도력에 어떤 결함이 있었는지, 그 어떤 사악한 범죄라도 저질렀는지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다. 백성은 사무엘이 완전무결하다고 선언했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말하였다.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고, 여러분의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님께서 증인이시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은 그대로 서 있으시오. 내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조상들에게 베푸신 의로운 업적을 모두 들어, 주님 앞에서 여러분과 시비를 가려야겠소”(6-7). 6-7절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반복된 구원 행위와 비교해서 그 백성의 행위를 심사한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언급은 모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 다음에 하느님께서 필요한 때에 일으켜 세우시어 당신 백성을 이끌게 하고 수호하게 하신 위대한 판관들의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8-12절에서 사무엘은 ‘죄-징벌-탄원-구원’이라는 역사적 순환을 되풀이해 말함으로써, 최근에 나하스로 인한 비상사태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는 대신 한 임금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했다. 지상 임금의 선택은 사무엘의 관점에서 볼 때 주님의 왕권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암몬 자손들의 임금 나하스가 치러 오는 것을 보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임금이신데도 나에게, ‘안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임금이 우리를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소”(12). 12절은 동일한 사건을 11장과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11장에서는 암몬족에 의한 위기 앞에 주님께서는 사울을 당신의 영으로 가득 찬 지도자로 세우심으로써 대책을 마련하신다. 그리고 성공적인 전투 뒤에 백성은 사울을 임금으로 선포하며 기쁨에 차 환호한다. 그런데 이 장에서 백성들은 암몬족에 의한 위기 앞에서 회개하여 하느님께 부르짖어야 하는데, 그 대신 임금을 요구하는 죄악을 행한다. 11장과 12장은 동일한 인물이 쓰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럼에도 13-15절에서는 그들이 선택한 임금은 주님의 선물이었으며, 사무엘은 그것이 축복이 될 수도 있는 조건들을 제시한다. 13절은 백성의 결정과 하느님의 결정 사이의 관계를 말해 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자, 여러분이 요구하여 뽑은 임금이 여기 있소.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임금을 세워 주셨소”(13). 임금을 두기로 하고 사울을 선택한 백성의 결정은 하느님께 확인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행위로 제시되기도 한다. 하느님 백성이 많은 논증과 토론 끝에 도달한 결정이 하느님의 결정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 백성의 결정을 당신 자신의 결정으로 삼으셨다고는 하지만 왕권이 성공적으로 운용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따른다. 이 본무에서는 두 가지 조건이 언급된다. 임금과 온 백성이 주님의 음성을 따르고 그분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14-15절)과 임금과 백성들을 위해 청원하고 중개할 예언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16-19절)이 그것이다.
“사무엘이 주님께 간청하자, 그날로 주님께서 천둥과 비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주님과 사무엘을 매우 경외하게 되었다”(18). 16-19절에서 사무엘은 밀 수확기 동안에 비를 내려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다. 이 징조는 백성이 임금을 요구했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게 하며 사무엘에게 중개 역할을 해 달라고 청하게 한다. 밀 수확기에 비가 내리는 것을 농작물에 치명타를 입힐 뿐 아니라, 3~6월 사이의 폭풍우는 팔레스타인에게 거의 볼 수도 없는 현상이다. 주님께서 응답하신 이 증언의 목적은 백성들이 임금을 요구했던 자신들의 큰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무엘이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이 모든 악을 저질렀지만,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따르지 않고 돌아서는 일 없이,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시오. ”(20). 20-25절의 결론적 권고에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향해 돌아서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 또한 사무엘 자신도 변함없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지도할 것을 약속했다. 백성들과 그들 임금의 완전한 파멸은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여전히 악행을 일삼는다면,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금도 모두 쫓겨날 것이오”(25). ‘여전히 악을 일삼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하느님 앞에 결정적인 범죄를 했음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아마도 여기서 사무엘이 염두에 두고 있는 백성들의 범죄 내용는, 그들이 이방 민족들과 같은 세상 왕을 요구함으로써(8,5.19.20) 그동안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신 하느님의 왕권(王權)을 무시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19절). 나아가 그 악(惡)은 20-24절을 고려할 때, 왕을 구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패역한 마음 자세로서 주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헛된 우상들을 좇는 그러한 악을 가리킬 것이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임금도 모두 쫓겨날 것이오’ 사무엘의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처럼 임금이 그들을 이방의 모든 압제와 공격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비록 이스라엘이 왕정 제도하에서 강력한 왕과 중앙 정부를 갖추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하느님의 통치하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흥망 성쇠 여부는 오직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달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 왕을 중심으로 주님을 신실히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명 깨달아야만 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왕의 운명은 진정 이스라엘의 참 왕이 되시고, 또한 만왕의 왕 되시는 주님께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왕정을 수락하셨지만 그분의 수락이 무조건적 축복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변함없는 조건이며, 이 순종이 유지되도록 임금은 율법을 준수해야 하고, 자신과 그의 백성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을 허용해야 하며, 그들을 위해서 간청하고 중개해 줄 예언자들의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 사무엘기 상권 12장은 이스라엘 최후의 판관인 사무엘의 고별사로, 신명기계 역사가는 여기서 판관 시대의 기록을 끝맺는다.